#87
제이나도 뒤따라 마차에 올라탔다.
“알면 알수록 시스템이란 건 신기한 면이 있네요. 얼핏 마법에도 이런 비슷한 마법이 있다고 듣긴 했는데…….”
“마법이요?”
“네.”
“어떤 거죠?”
“아공간 마법이라는 건데 저 역시 사용해 본 적이 없고 어떻게 사용하는지조차 모릅니다. 고서클 마법사만이 일부 사용한다고 들었어요.”
찬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5서클이란 높은 실력을 가진 그녀조차도 높다는 얘기를 들을 정도라면 적어도 6서클 혹은 그 이상의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마법이라는 건데. 이를 사용하려면 굉장히 높은 수준의 마법 이해도가 필요할 것 같다.
하지만 그래서 더 욕심이 났다. 아직 1서클도 제대로 익혀보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인벤토리 50칸, 마차 50칸, 거기다가 아공간까지. 그렇게만 된다면…….
‘걸어 다니는 수송대가 될 텐데 말이지.’
충분하다 못해 넘칠 거다.
고위 마법사가 될 수만 있다면야.
“딱. 딱. 주인님 완료됐습니다.”
그때 마차 안으로 들어앉는 도타의 등장으로 인해 제이나와의 짧은 대화가 끝났다.
“그럼 타세요.”
마차 밖에서 기다리는 도타를 태웠다.
“예. 딱.”
곧이어 올라타는 도타를 보며 찬영이 물었다.
“코인은 얼마 남았어요?”
“10브론즈 코인 남았습니다.”
생각보다 많이 남았다.
그도 그럴 게 원래 남아 있던 코인 중 일부는 도타가 필요한 보조 아이템을 구입하기 위해 사용해 왔었다.
그리고 르리에로 강제 소환 당했던 방금 전. 오두막을 방문한 떠돌이 상인에게 그간 뉴 빌드와의 전투를 통해 인벤토리에 쌓여 있던 잡템과 최근 얻은 수수께끼 박스에서 나온 장비까지 판매한 뒤였다.
다시금 도타에게 필요한 재료들을 구입하고 마차에 실으라고 이야기 했다.
즉 코인이 0이 됐어도 이해할 법한 상황인 거다.
하지만 코인을 전부 썼음에도 만족스럽다.
이제 이 정도라면…….
“초급 경계 포탑 제작은 몇 개 정도 됩니까?”
“딱, 딱. 2개 제작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습니다.”
“2개나?”
“예.”
찬영은 본래 ‘1개 정도만 되도 좋겠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도타에 의하면 예상보다 1개 더 늘어난 설치가 가능해지니까, 여러모로 수비력이 좀 더 늘어날 거다.
‘물론 글라투가 등장하기 전에 그게 완성된다는 전제가 붙어야 하겠지만.’
이건 자신이 나설 수 없는 도타의 역량의 문제다.
“23시간 안에 설치가 가능합니까?”
이를 걱정한 찬영이 묻자, 도타가 순식간에 계산을 끝내고 대답했다.
“딱. 도착 시간을 제외하고 제 체력을 감안했을 때 1개 포탑 설치는 10시간이면 가능합니다. 단, 2개 포탑 설치 시에는 체력이 전부 소진됐기에 체력 회복 후 설치 시간을 감안하면 총 25시간이 필요합니다.”
“25시간…….”
찬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25시간은 너무 길다.
심지어 25km를 이동하는 시간까지 생각해야 한다.
그런 여러 상황을 감안했을 때 당장 지을 수 있는 포탑은 1개.
“일단 이동하죠.”
그러니 우선은 이동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이는 편이 낫다.
마침 같은 고민을 했던지 제이나가 찬영에게 제안을 하나 했다.
“혹시 마차에 경량화 마법이 가능한가요?”
“글쎄요, 해 본 적이 없지만 우선 시도해 보는 편이 낫겠습니다.”
마차가 가벼워지면 이점이 많다.
마차를 끄는 타우린의 속도가 더욱 빨라질 테고 그 덕에 이동 소요 시간도 감축할 수 있다.
“네, 해 보죠.”
찬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가 주문에 집중해 경량화 마법을 시작했다.
그리고 마나가 흐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눈을 뜨는 그녀.
“됐어요.”
다행히 그녀의 마나가 마차에 스며들은 모양이었다. 여건이 조성됐으니 남은 건 타우린의 속력이다. 이젠 지체할 것 없이 출발해야 했다.
찬영이 도타에게 말했다.
“서두릅시다. 도타.”
이어서 도타가 타우린을 향해 출발해 달라 대화를 걸었다.
덜컹덜컹.
곧이어 속도가 붙기 시작한 마차. 하지만 속도가 점점 늘어날수록 제이나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타우린이 달리는 속도가 예상을 훌쩍 뛰어넘은 거다.
* * *
“오는 동안 무슨 일이라도?”
토끼 사람이 마차에서 걸어 나온 찬영 일행을 보며 물었다.
하지만 제이나는 대답은커녕 인사도 못한 채 헛구역질을 해 댔고 찬영의 눈은 출발할 때에 비해 무척 퀭해져 있었다.
“별건 아닙니다.”
찬영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대답과는 달리 안색이 썩 좋지 못했다.
‘이렇게 빠를 줄이야…….’
마차를 끄는 타우린은 삼국지에 나온다는 적토마가 따로 없었다. 출발한 지 20분도 채 되지 않아 토끼 사람의 구획에 도착한 거다.
대신 그로 인한 멀미는 제이나와 자신의 몫이었지만.
‘후우…….’
아직도 속이 울렁거리긴 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남은 시간은 23시간에서 22시간이 넘어가기 직전. 이동 소요시간을 거의 줄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 이제 남은 건 나머지 시간을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가 남았다.
찬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자리를 비운 동안 찾아오셨다고 들었습니다.”
토끼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답을 해 주기 위해 갔었다오.”
“네, 압니다.”
“어딜 다녀오신 것이요? 다행히 아직까지 그가 나타나진 않았지만…….”
“대륙에 다녀왔습니다. 제가 싸우는 곳은 비단 한 장소가 아니니까요.”
이미 그에게 시드 대륙에 대해 설명해 준 적이 있기에 이정도면 설명은 충분했다.
“그렇군.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실 거요? 난 큰 결정을 했소. 정말로.”
하지만 아직도 토끼 사람의 눈에 두려움이 가득했다.
어렵사리 결정은 했지만 그는 프롤로 살아 온 이.
브루에 대한 근원적 두려움을 지우진 못했다.
찬영도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그가 불안해하고 있다는 걸 충분히 느꼈다.
“압니다.”
평생 억압 속에 살다 저항의 의지를 갖기란 분명 쉬운 일이 아니다.
두려움에 길들여져 있던 걸 벗어나야 가능한 것이기에.
그런 면에서 토끼 사람은 분명 놀라운 결정을 했다.
이젠 그의 결정을 도와 함께 싸울 차례다.
“그래서 제가 온 겁니다.”
찬영이 마차를 가리키자.
토끼 사람의 눈빛에 의아함이 실렸다.
“이곳에 방벽을 세울까 합니다.”
“방벽? 그를 막기 위해 벽을 세우겠다는 거요?”
“아뇨, 진짜 벽을 세운다는 건 아닙니다.”
찬영은 현재 상황과 생각해 놓은 바를 그에게 설명해 줬다.
직접 그가 찾아오게 만들겠다는 계획을. 이를 들은 토끼 남자가 경악했다.
“그, 그럼 그가 오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는 거요?”
“예. 이제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22시간 정도 남았군요.”
토끼 남자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렸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로군.”
“제대로 사느냐, 살지 못하느냐의 문제이기도 하죠.”
찬영의 말에 토끼 사람이 쓰게 웃었다.
“그게 가능하긴 할까?”
그러자 찬영이 고개를 저었다.
“괜한 걱정입니다.”
“어째서?”
“시간을 걱정에 쏟는 사이에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으니까요.”
“그 일들이 막연한 희망에 불과할지라도?”
“예.”
단순한 대답이나 그 대답이 나오기 전까지 찬영은 그간 무수히 많은 일들을 겪고 깨달았다.
막연한 희망이 현실이 되는 걸 보고 또 본 것이다.
그리고 이젠 그런 여러 번의 상황을 통해 확신한다.
막연함은 그냥 두려움이 만들어낸 틀일뿐이다.
두려움을 깰 때 틀은 더 넓게 확장한다.
결국 오늘 두려운 것이 내일은 두렵지 않아지고 내일 두려운 게 모레는 별게 아니게 되는 거다.
그렇게 싸워왔고 이제 새로운 싸움을 준비하고 있다.
찬영은 토끼 남자도 그러길 바랐다.
그게 가능할지는 그에게 달린 일이겠지만.
혼자 잠깐의 생각에 잠기자, 토끼 남자가 다시 힘들게 입을 열었다.
“당신 정말 미쳤군.”
대답 대신 긍정의 침묵을 보인 찬영에게 그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젠 나도…….”
그 말이 끝난 뒤 토끼 사람의 눈빛에는 더 이상 두려움만 있는 게 아니었다.
대신 두려움과 결연함이 섞였다.
“우리 트레이드 족은 상대를 신뢰하지 않으면 통성명을 하지 않는다오. 하지만 이젠 더 미룰 수 없겠군. 내 이름은 글로리요.”
“양찬영입니다.”
토끼 사람의 결단으로 인해 두 사람은 이제 이름을 교환하면서 완벽히 뜻을 함께 했다.
진정한 공존共存이 시작된 거다.
띵!
그리고 그 결과가 퀘스트에 영향을 준 건 당연했다.
-히든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히든 퀘스트 : 최초 이웃을 찾고 물물 교환하라.
-도타에 의해 물물교환에 관한 힌트를 획득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미지의 땅에 새로운 이웃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탐색을 통해 이웃을 찾으세요.
-퀘스트 완료 조건
-이웃을 1명 이상 찾으세요. (완료)
-이웃과 물물교환 1회 완료하세요. (완료)
-히든 퀘스트 완료 시 획득할 보상 목록
-이웃 발견 시, 오두막 +1 영구적 업그레이드권 획득 (완료)
-물물교환 완료 시, 최초 무역로 개방 (완료)
-수량 50 제한 짐마차 1개 획득 (완료)
-소작농 1명 추가 획득 (완료)
‘이건?’
분명 퀘스트 성공을 의미하는 창이었다.
이유는 단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포탑 설치가 물물교환에도 포함되는 거였던가?’
하긴, 누군가의 신뢰를 얻는 게 보상이라면 이런 결과는 충분히 납득이 가능하다.
‘그러니까 이곳 방어를 위해 가져온 물건들이 그의 구획 안에 자리 잡았고, 그는 그 대신 이 일을 허락하는 신뢰를 보여 주었으니까.’
서로 만족하는 물물교환인 거다. 찬영의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가 스쳤다. 글라투와의 전투를 앞두었지만 이건 분명 좋은 현상이다.
‘음…….’
그런데 그때 퀘스트 달성으로 인해 달라진 점들이 몇 개 눈에 띄었다. 우선 그의 이름이 보였다.
글로리의 이름과 가치 측정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한 거다.
그동안은 가치 측정과 이름 등이 ‘?’ 표시로만 되어 있었는데 퀘스트 달성 이후 가치 측정이 제 역할을 하기 시작한 셈이었다.
-글로리 (광부, 소작농)
-가치 : 3,200 (성장형)
-글라투를 두려워합니다. 글라투 제거 시 글로리가 당신을 존경할 것입니다.
찬영은 이를 통해 그가 말해 주는 것보다 그를 좀 더 깊이 알 수 있었다.
‘3,200이라…….’
이정도면 도타보다 200이나 높은 수치.
하지만 수치는 둘째 치고 가장 눈에 띄는 건 ‘광부’라는 단어.
‘광부?’
뭘 캐는 광부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이번 일에 또 다른 역할을 해 줄 가능성이 높다.
일단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만반의 준비를 갖춰놔야 했기에 뭐든 활용할 수 있는 건 전부 활용해야 한다.
“그럼, 글로리 님…….”
막 그의 능력을 어떻게 활용할지 이야기를 나누려던 찰나.
속이 좀 괜찮아진 제이나가 곁으로 다가왔다.
“이쪽은?”
아까부터 궁금한 듯 보였으나 대화를 나누지 못했던 글로리가 제이나를 보며 눈을 빛냈다.
“저는 제이나라고 합니다.”
“글로리요.”
이윽고 원활히 진행되는 통성명.
찬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렇게 쉽게?’
그의 이름, 즉 신뢰를 얻고자 많은 일을 해야 했기에 더욱 그랬다. 그러자 글로리가 이에 대해 짧게 설명했다.
“그리 놀랄 것 없소. 우린 신뢰한 친구의 동료에게도 같은 신뢰를 보여 주니까.”
“예, 뭐…….”
그렇다면야 오히려 다행이긴 하다.
어쨌든 별다른 어려움 없이 제이나가 또 다른 갓피스라는 것부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눈 글로리가 다시 찬영을 보며 말했다.
“그런데 말이요.”
“예.”
“그 포탑이라는 것을 세우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 거요?”
“하나를 세우는 게 10시간 정도 걸린답니다.”
“그런가……?”
“예, 하지만…….”
찬영이 도타가 가진 어려운 부분에 대해 말하자 가만히 듣고 있던 글로리가 불현 듯 눈을 크게 떴다.
“흐음, 그래? 그럼 시간과 재료가 충분하다면 이곳을 방비할 수 있는 포탑이 더 늘어나는 것이요?”
“예, 분명히.”
“잘됐군. 그럼 이번엔 내가 나설 차례일 것 같소.”
곧 어디론가 걸어가는 글로리.
‘뭘 하려는 걸까?’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찬영은 생각에 잠겼다.
‘그가 질문한 건 ‘내게 필요한 게 무엇이었는지’였어. 난 시간과 재료라고 했고.’
곧 찬영의 눈이 커졌다.
‘틀림없어.’
그래, ‘교역’. 그게 분명하다.
지금 그는 자신의 일족에게 지원을 요청하려는 거다.
필요한 재료, 인력을 도움받고 시간을 줄이기 위해.
‘다른 이웃을 데리고 오겠지!’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는 쉽다. 예상했던 대로 이제 글로리를 통해 저항의 물결이 시작될 거다.
띵!
그때였다.
-히든 퀘스트 발생
그러나 이건 예상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