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찬영의 목소리를 들은 영주를 필두로 제이나가 뒤를 따랐다.
“대체 제이나 경과 어디로 가야 한다는 겐가?”
찬영과 다시 조우한 영주가 묻자 찬영이 재빨리 대답했다.
“르리에라는 장소입니다.”
그의 대답에 영주가 소환되어 있는 나무문을 가리켰다.
“대륙 복원과 관련 있다는 저 안을 의미하는 모양이군.”
몇 가지 정보를 알고 말하는 영주, 제이나를 통해 들은 게 틀림없다. 찬영이 제이나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이미 들으셨군요?”
제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는 바를 이미 영주에게 얘기했다는 눈짓이다.
마침 영주도 대답해 왔다.
“그래, 들었네. 그럼 이 안에서 또다시?”
오디와의 전투를 말하는 거다.
“그럴 것 같습니다.”
찬영의 대답에 영주가 깊은 한숨을 토해 냈다.
“그래? 그럼, 그새 차원의 돌을 모두 모은 겐가?”
“예.”
찬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주 말대로 알폰 지방에 자리 잡은 뉴 빌드 근거지는 노다지나 다름없었다. 단번에 차원의 돌 수집률 100%를 채우게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 시작된 연계 퀘스트.
찬영이 눈앞에 떠 있는 창을 힐끗 올려다봤다.
‘이런, 얼마 남지도 않았군.’
-23 : 42 : 20
23시간 42분 20초란 시간.
그리고 19초, 18초…… 시간은 점점 흘러가고 있다.
얼마 전 돌발 현상 수배로 나타났었던 글라투의 등장을 의미하는 시간이었다.
대략 23시간 후.
글라투는 반경 25km 바깥에서 등장할 테고 자신의 군대와 함께 보이는 모든 것을 파괴할 것이다.
25km ~ 50km 사이의 르리에 ‘존’을 지키는 디펜스 게임을 하게 된 거다.
결국 이번 차원의 돌 수집과 함께 수복해야 하는 차원 다리가 르리에였다는 얘기였다. 찬영은 설명이 많이 필요해 보이는 두 사람을 보며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차원의 돌 수집 완료 이후 저는 알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 싸워야 할 적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요.”
영주가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투로 말했다.
“갑자기 사라진 이유가 그거였군.”
“예, 그렇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차원의 돌 수집 완료와 함께 시작된 이 타이머. 그 타이머의 시작은 르리에로의 강제 소환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제껏 몸 안에 흡수됐던 차원의 돌이 몸 안에서 하나의 알 형태가 되어 어디론가 날아갔다.
그 후에야 다시 영주의 곁으로 돌아오게 된 거다.
어쨌든 아까 일은 둘째 치고.
이렇게 바쁜 사이 찬영이 다시 돌아온 이유가 하나 있었다.
“영주님, 제이나 경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르리에를 여는 건 자신이어도 그곳을 오갈 수 있는 건 갓피스라는 게 그녀를 통해 증명됐다. 그 말은 분명 강력할 네임드 몬스터인 글라투를 혼자서 상대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
그녀의 도움이 있다면 이길 확률을 높일 수 있다.
단, 그녀는 영주의 사람. 먼저 영주의 허락이 떨어져야 가능한 일이다.
“자네 생각은?”
영주가 제이나를 돌아봤다.
영주의 시선을 마주하며 제이나가 말했다.
“가겠습니다.”
“그러게.”
영주는 말리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말릴 생각도 없었다. 두 사람이 대륙 복원을 위해 힘쓰겠다는 것을 굳이 말려 뭐할까? 그저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모르기에 답답할 뿐이다.
영주가 찬영에게 물었다.
“내가 도울 건 없겠나?”
찬영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마음 같아선 함께 가 달라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그럴 수 없으니 내가 더 안타깝군.”
말을 마친 영주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니 다른 게 필요하다면 말해 보게. 일단 도와줄 수 있는 뭐든…… 돕겠네.”
그의 이야기는 정말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당장 대규모 병력과 싸워야 할 판국이기 때문이다.
“네, 알겠습니다.”
그렇기에 영주에게 여러 가지 전투 물자들을 부탁했다.
현재 영주의 병력이 구비하고 있는 물건에 한해서였다.
물론 방금 전 전투로 인해 대부분 소모되고 남은 전투 물자밖에 없는지라 양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다.
찬영은 영주와 함께 전투 물자를 인벤토리에 빠르게 챙기며 곧, 르리에로 떠날 준비를 완벽히 마쳤다.
그 후 문 앞에 선 세 사람.
첫걸음은 제이나가 내딛었다.
“가시죠.”
르리에로 가 본 적 있는 그녀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기다리고 있겠네. 부디 조심하게.”
영주가 그녀 뒤를 따라가는 찬영에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찬영이 다시 영주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이건 영주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다. 자신에게 하는 약속이다.
돌아올 거다. 반드시.
* * *
지잉!
곧 바람이 불고 평화로운 오두막에 두 사람이 도착했다. 그러자 들려오는 친숙한 목소리.
“주인님. 딱. 오셨습니까? 딱. 또 오셨군요. 손님.”
찬영은 들려온 목소리로 고개를 돌렸다. 방금 나갔다 다시 돌아온 건데도 무척 예의 바른 소작농.
‘도타.’
한데 확실히 걸어 나오는 폼만 봐도 예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말투나 행동은 똑같으나 외형이 완벽히 달라진 까닭이다.
바로 2차 진화의 위용.
그 덕에 이제 도타는 단순히 얇은 뼈로 이뤄진 스켈레톤의 모습이 아니게 된 거다.
뼈 하나가 전보다 3배 이상 굵어졌고, 머리 위에는 해적 선장이 쓸 법한 형태의 뼈로 만든 모자가 붙어 있다. 거기다 어깨까지 견갑 형태의 두툼한 뼈가 부착된 걸 보고 있자니.
직접 키운 자식처럼 마음이 뿌듯했다.
아마 도타는 더욱 성장할 거다. 찬영은 새삼 그의 성장에 만족해하며 슬쩍 제이나의 눈치를 살폈다.
‘역시나…….’
제이나의 눈엔 호기심이 가득하다.
첫 번째 방문은 놀라기 바빴을 테니 그렇다 치더라도, 두 번째 방문은 놀람보다 호기심이 더욱 클 것이다. 찬영의 생각대로 그녀가 도타에게 가까이 다가서며 이것저것을 묻기 시작했다.
학구열이 넘치는 그녀다.
하지만 계속 시간을 내줄 순 없다.
질문은 나중에. 당장은 해야 할 일이 있다.
“이제 움직일까요?”
“네, 그러죠.”
그녀도 급한 사안이 있다는 걸 알기에 질문을 끊고 찬영의 뒤를 따라나섰다.
찬영이 그녀와 나란히 걸으며 말했다.
“우선 이번 차원 다리 전투는 23시간 후에 진행될 겁니다.”
“그건 어떻게 알죠?”
“음…….”
찬영이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복잡하게 설명할 것 없이 한마디면 족할 것 같다.
“차원의 돌이 일정 흡수 된 이후부터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앞에 타이머가 생겼다는 얘기까지 전해 주자, 제이나의 눈빛에 이채가 흘렀다.
“듣고도 믿기 힘드네요.”
“네, 뭐…… 하지만 대화 나누는 스켈레톤부터 말이 되는 상황은 아니니까요.”
그 대답에 그녀가 픽, 하고 엷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가벼운 미소가 스쳐가자마자 그녀의 얼굴이 다시 본래의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다채로운 표정을 지켜보던 찬영은 진지한 상황과 상관없이 내심 웃음이 터졌다. 하지만 그녀가 왜 웃는지를 캐물을 것 같아 굳이 입 밖으로 웃음을 내진 않았다.
그사이 툴챠를 고쳐 쥔 그녀가 진지해진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좋아요. 그럼 남은 시간 동안 우린 뭘 해야 하죠?”
그녀의 질문은 당연한 거였다.
찬영 또한 그녀가 그 질문을 하길 기다렸다.
“우린 수비를 할 겁니다.”
영주로부터 받은 전투 물자들.
우선 이것들을 필요한 곳에 준비시켜야 한다. 아직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는 제이나의 눈빛에 의문이 돌았다.
그사이 찬영이 그녀에게 잠깐 기다려 달라 말한 뒤 도타를 불렀다.
“도타.”
“네, 딱. 주인님.”
“그가 찾아왔었다고 했었죠?”
“그렇습니다. 딱.”
도타에 의하면.
자리를 비운 동안 트레이드족의 후예인 토끼 사람이 다녀갔단다.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했습니다. 딱.”
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 된 일이다. 그간 그의 심경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자유를 얻고자 하는 그의 욕망이 이번 결정을 끌어냈을 거다.
그리고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 세 번째는 더 쉬울 거야.’
적어도 반경 50km 안의 토끼 사람과 한 번이라도 교류를 나눈 또 다른 이웃이 있다면, 그들 또한 토끼 사람의 선택에 혼란스러워하고 고민하면서 그간 받아 왔던 폭력에 항거하려 들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들이 하나둘 늘어날수록…….
‘내겐 더 많은 아군이 생겨.’
글라투가 노예나 다름없는 프롤들을 하나, 둘 잃어버릴수록 찬영에게는 든든한 아군이 생긴다. 결국 차원의 돌이 아니었더라도 글라투와는 서로의 목적을 위해 부딪칠 수밖에 없었을 거다.
그게 조금 더 빨리 찾아왔을 뿐.
어쨌든.
“그 일은 제가 직접 처리하죠.”
“예, 알겠습니다. 딱.”
“잠깐.”
찬영이 대답과 함께 물러가려는 도타를 불러 세웠다.
“도타.”
“예. 딱.”
“채비해요. 아까 말한 대로 오늘은 채집하지 않습니다.”
찬영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글라투는 내가 찾지 않아도 찾아올 것이다.’
토끼 사람의 말대로라면 자신이 글라투를 찾고 있었던 것처럼 글라투 또한 눈엣가시인 자신을 원한다.
그럼 자신이 어디에 있든지 간에…….
‘날 찾기 전까지 녀석은 계속 움직이겠지.’
그래, 틀림없다.
그렇다면 오히려 그걸 이용해야 한다. 인벤토리에 영주가 건네준 전투 물자들을 가득 실어온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였다.
‘어차피 내 오두막은 시스템의 안배로 보호받고 있어.’
시스템의 말대로라면…….
글라투는 오두막이 레벨 3이 되기 전까지는 25km 안쪽을 노릴 수 없다. 그러나 25km 밖은 다르다. 거기부턴 녀석의 영역이다. 그럼 녀석과 부딪치려면 아군으로 돌아서게 된 토끼 사람을 지킬 겸, 그의 집을 중심으로 수비에 돌입해야 한다. 즉, 준비를 갖춰놓고 글라투를 끌어들이는 거다.
옆에 있는 제이나에게도 지금 계획을 말해 줄 생각이다.
찬영이 제이나를 돌아보며 현 상황에 대해 빠르게 브리핑을 시작했다.
그러자 제이나는 조금 혼란스러운 눈치였다.
한 번에 너무 많은 정보를 들은 데다 르리에 안에 또 다른 존재들이 살고 있다는 건 또 다른 이방인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
분명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금방 찬영의 이야기를 모두 받아들였다.
“다른 대륙의 이방인도 인정한 마당에 또 다른 존재가 있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겠죠.”
그녀가 그 말을 뱉은 후에야 찬영의 브리핑은 더욱 빠르게 진행될 수 있었다. 그리고 브리핑이 끝났을 때쯤 제이나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대규모 공습일 가능성이 크겠군요.”
“네, 확실히요.”
일전에 조우했던 리턴 데드 떼는 물론이고 언데드과 몬스터들이 전부 날뛸 거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글라투가 있으리라.
“가능할까요?”
그녀는 불안해서 묻는 게 아니다.
현실적 전력 비교를 위해서 묻는 거였다.
“글쎄요. 아직 그들의 전력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서 아무것도 장담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대답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도타를 제외한 나머지 전력은 우리뿐이다. 그외 변수로 작용할 사람을 친다면, 트레이드 족의 사람들이 있다.
결국 숫자만으로 비교했을 때 분명 적은 병력인 거다.
그래서일까? 분명 일말의 불안감이 스치긴 했다.
“턱도 없는 저항일 수도 있겠죠.”
그럴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다.
제이나도 동의하는 듯 침묵했다. 그때 찬영이 담담히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가끔은 우리가 변수가 되는 경우도 더러 있으니까요.”
오디와의 싸움이 딱 그랬다.
그동안 힘겹게 훈련하고 쌓아 온 것들이 모이고 모여 오디와의 전투에서 상상 이상의 결과물을 가져왔고 지금의 길까지 이르게 해 줬다.
그러니 힘겨운 일이 될 거란 예상은 해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러니까 잠시 머릿속에 스친 불안감 따윈 접을 거다. 불안해 봐야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가시죠.”
찬영이 먼저 마차로 올라탔다.
르리에에서의 첫 번째 전쟁이 그의 앞에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