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그래, 아무래도 그런 게 틀림없다.
그러지 않고서야 위기를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지금, 기다렸다는 듯 나타날 리 없다.
아슬란을 꺼내 쥔 찬영이 나직이 물었다.
“뉴 빌드인가?”
첫 번째 질문.
그건 확인 차 묻는 질문이었다. 이미 이곳에 뉴 빌드가 있다는 것쯤은 여러 정황을 통해 짐작하고 있다.
“그래, 맞다.”
얼굴 왼쪽에 하얀 가면을 뒤집어쓴 남자가 갈색 로브를 머리 뒤로 넘겼다. 로브를 벗고 드러난 그의 목 언저리에는 주먹만 한 차원의 돌이 마치 몸의 일부처럼 박힌 게 보였다.
“우리가 너희를 이곳까지 이끌었지. 통로를 부수고, 우리가 지은 작은 둑을 터트리고.”
이 말로 인해 더욱 확실해졌다.
‘우리가 지은 둑.’
둑을 하루 이틀 작업해서 지은 건 아닐 거다. 전부터 있었다는 얘기였다.
그것만 봐도 여긴…….
‘뉴 빌드의 거처가 맞군.’
다만 그 거처가 어디 있는 건진 확실하지 않았으니, 아직 모든 걸 알아낸 건 아니었다.
‘혹시 이곳인가?’
지금은 그럴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 질문의 대답을 할 수 있는 건 자신이 아니다.
‘녀석이지.’
그런 건 직접 물어보면 된다.
저벅.
찬영이 걸음을 내딛으며 갈색 로브에게 다가갔다. 매너 좋은 대화는 이정도면 충분했다. 그 순간 갈색 로브 남자의 눈이 붉어졌다.
“어리석은 것들, 누굴 적으로 둔지 모르는구나!”
-그그극!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변 땅이 헤집어졌다. 하나둘씩 기어 나오는 붉은 안광의 몬스터들.
숫자가 굉장히 많아 통로에 가득 찰 지경이다.
하지만 더는 위협적이지 않다. 녀석이 위협적이었던 건 공격 무효화 기술을 가졌던 광대 때문이지, 녀석 때문이 아니다.
그사이 갈색 로브도 어두운 건너편으로 움직였다. 녀석을 쫓아가려면 레드 아이부터 쓸어버려야 한다. 하지만 한 번 상대해 봤기에 두세 번쯤이야 쉽게 상대할 수 있다.
두 사람은 효율적인 움직임과 마나로 단숨에 레드 아이를 박살내며 전진했다.
그들을 막아서는 게 대부분 사라졌을 때쯤 찬영이 붉은 뼈를 툭 차면서 말했다.
“이상하군요.”
제이나가 돌아보며 대답했다.
“네, 충분히.”
그녀의 대답을 듣고 난 후 찬영이 자리에 멈춰 서서 갈색 로브가 사라진 어둠 속을 노려봤다.
그럴 만도 한 게 뉴 빌드의 공격에는 분명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전력을 다했다고 보기엔 힘들다. 지형지물을 이용한 기습을 선택하면서 왜 전력을 다하지 않은 걸까?
‘둑을 터트렸을 때가 가장 좋은 기회 아니었을까?’
그럴 거라 확신했었다.
녀석들이 원하는 상황, 장소를 대입해 봤을 때 방금 전 그 물살은 분명, 좋은 기회였으니까.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내가 생각하는 좋은 기회가 반드시 뉴 빌드가 생각하는 좋은 기회라고 보긴 힘들지.’
생각의 전환을 두자 갈색 로브가 사라진 이유에 접근할 수 있었다. 녀석은 부르고 있는 거다.
‘우리를 말이야.’
이젠 뭘 준비하고 있을지 알 수 없다. 이건 그들이 준비한 격돌이다. 따라가지 않는다면 다시 돌아가야 한다.
‘탐사를 멈출까?’
아니, 그럴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무리하면서까지 이곳에 들어오지 않았을 거다.
“시작하죠.”
녀석들이 간과한 게 하나 있다. 그들을 이렇게 적극적으로 움직이게 만든 건 우리 쪽이라는 걸.
“시작해 볼까요?”
“네.”
이쪽 역시 준비는 진즉에 끝났다.
* * *
툭.
찬영이 걸음을 멈춰 세웠다.
“여기였군.”
기다란 통로를 지나 공동에 도착하자 다른 구획으로 통하는 수십 개의 통로들이 제일 먼저 보였다.
지도에서 본 그대로다. 여긴 대피소이자 다른 구획으로 통하는 중간 길목 역할을 정확히 하고 있었다.
한데 그때였다.
구궁!
땅이 한 번 울리더니 모든 통로의 석문이 빠르게 닫혔다. 그 앞을 뉴 빌드의 조직원들이 하나둘씩 자리 잡았다. 처음 봤던 녀석과 똑같은 갈색 로브를 갖춰 입은 작자들. 이들 중 몇몇은 머리를 덮고 있던 로브를 벗은 뒤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왜지?’
뭘 믿고 있는 걸까?
그건 이곳에 진입할 때부터 든 생각이다. 그들이 뭘 믿고 있든 간에 그건 그들이 우릴 이곳에 끌어들인 것과 같은 이유일 테니까.
그 생각이 끝날 때쯤 제이나가 찬영을 불렀다.
“위를 보세요.”
그녀의 말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이건?’
보고난 뒤 흠칫 했다. 종류석이 가득한 높은 천장에 주문으로 보이는 붉은 글씨가 빼곡히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
‘차원의 돌?’
뉴 빌드가 가진 힘의 원동력으로 보이는 차원의 돌 조각들이 종류석 사이에 박혀 있었다.
한동안 그 글자들을 노려보던 제이나가 한마디로 설명했다.
“마법진이에요. 확실합니다.”
천장에서 시선을 뗀 찬영이 뉴 빌드 조직원들을 노려보았다.
‘이거였나?’
이제 알겠다.
왜 재해나 다름없는 순간에도 녀석들이 나타나지 않았는지. 녀석들은 우리를 1차, 2차적인 체력, 정신적 소모에 이르게 한 뒤, 여기 3차로 준비한 마법진으로 이끈 거다.
“어떤 마법진인 것 같습니까?”
찬영이 물었지만 그 대답은 제이나에게서 들려오지 않았다. 흰 가면의 남자가 대신 말했다.
“굳이 물을 거 없다. 어차피 이곳이 너희 무덤이다.”
찬영이 대답하려 던 찰나.
제이나가 찬영을 앞질러 달렸다.
“너야말로.”
“헤이스트.”
몸을 날쌔게 만든 그녀가 찬영보다 먼저 전투 본능을 날 세웠다.
한순간 많이 빠져나간 마나를 그새 진정시켰는지 약간 창백한 얼굴을 제외하고 그녀의 컨디션은 충분히 괜찮아 보였다.
쏟아 낸 마법만 봐도 그랬다.
“플래시 볼.”
번쩍!
빛의 구체가 그녀가 원하는 타깃에 먼저 번뜩였다.
시야를 장악한 뒤, 빠르게 그에게 접근한 그녀의 양손이 주문을 일으켰다.
지지직!
“라이트닝 애로우.”
지직!
다섯 덩어리의 전류가 그녀의 손에 맺혀 흰 가면의 남자를 노렸다. 그의 코앞까지 접근했기에 적중할 확률이 높은 상황.
하지만 남자 역시 만만치 않았다. 양손을 붉은빛 기류로 두르며 마법에 저항했다.
콰직!
서로 부딪친 두 사람이 마나 충돌에 의한 반탄력으로 각자 반대편으로 튕겨나갔다.
파밧!
찬영이 빠르게 그녀에게 다가가 튕겨 나오는 그녀를 잡아챈 후, 빙글 회전하며 착지했다. 그리고 인벤토리에서 빼어든 찬영의 깃발.
콱!
그 깃발이 땅에 정확히 박히자 강한 마나 파동이 일기 시작했다.
베이콥의 깃발이다. 베이콥 가의 속한 마법공학자와 마법사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아티팩트.
같은 쌍의 제품을 만들면 서로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고 찾아올 수 있다. 마나 파동을 활용한 고급 아티펙트인 것이다.
단!
발동 이후 발동을 방해하는 어떤 파괴도 있어서는 안 된다. 품에 안고서라도 지켜야 한다.
‘우리가.’
깃발을 땅에 박아 넣으며 말했다.
“여기가 무덤 자리는 확실하다만…….”
찬영이 눈을 들어 갈색 로브를 노려보았다.
“누가 무덤에 들어갈지는 두고 봐야지.”
그때 이를 지켜보던 흰 가면이 두 사람을 비웃었다.
마치 물건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양.
“크큭, 고작 그걸 믿고 날뛰었나?”
“뭐?”
의외의 반응에 찬영과 제이나가 할 말을 잃었다. 그 한마디가 두 사람을 흔들어 놓은 것이다. 흰 가면이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네가 유혹의 돌을 흡수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너희들이 소문을 흘렸다는 걸 짐작했다. 그래서 영주의 동태를 살폈지. 영주는 베이콥 성으로 귀환한 게 아니더군.”
찬영이 묻자.
“어떻게…… 알았지?”
“영주가 던전에 파견 보낸 병력들을 대놓고 규합하고 있는데, 너희가 그저 우리를 유인하기 위한 미끼라는 것쯤은 뻔한 일 아닌가?”
찬영의 눈빛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이미 파악했다고?’
설마 여기까지 예상했을 줄이야. 그럼 영주 병력까지 계산해서 우릴 끌어들였다는 건가? 그만큼…….
‘세력이 크다고?’
아니, 그럴 리 없다.
그만큼 병력이 크다면 진작 영주성을 습격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을 거다.
‘그럼 분명히 병력의 차이가 있다는 건데.’
왜 그렇게 여유로운 거지? 원래대로라면 깃발을 부수기 위해 덤벼들어도 시원찮을 텐데?
의문이 차고 넘친다.
그때 흰 가면의 목소리가 공동 내부를 울렸다.
“너희를 찾아와 줄 구원 병력은 기대하지 말거라. 그 전에 그분의 멸망에 경배하게 될 테니.”
그 후 그가 두 손을 들어올렸다.
“우리들의 힘의 원천. 멸망을 가져올 주인이여. 우리의 뜻을 이해하소서.”
“이해하소서.”
“이해하소서.”
그들의 합창에 따라 막혀 있는 공동의 모든 벽이 붉게 달아올랐다.
갑작스런 힘의 파동에 제이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건 찬영 역시 마찬가지.
‘이건…….’
이제껏 느껴온 마나와는 다르다.
다른 어떤 힘이 꿈틀거리는 게 느껴진다.
파앙!
동시에 글자들이 일제히 강한 바람을 일으켰다.
그 풍압이 공동 안에 몰아치자 이에 대항하기 위해 중첩된 그래비티 필드를 일으켰다. 휘날리는 바람을 그대로 진공 상태로 눌러버릴 생각이다.
한데…….
‘마나가 움직이지 않는다?’
찬영의 눈에 당혹스러움이 실렸다.
온몸에 휘돌던 강한 응축력의 마나들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젠장!’
하지만 다른 대응책을 찾기엔 이미 늦었다. 밀려든 강한 풍압에 휩쓸린 건 순식간.
“크흡!”
뭐가 어떻게 됐는지도 모른 채 풍압에 같이 휩쓸리게 된 제이나의 팔을 낚아채 몸 안에 잡아끌었다. 그녀보단 오랫동안 육체를 단련한 자신이 바닥에 충돌하는 편이 낫다.
쿠당탕탕!
그로 인해 함께 바닥을 뒹굴게 된 두 사람.
“하아, 하아.”
한참을 구르고 나서야 밀려들던 바람이 사라졌다.
“괜찮……습니까?”
품 안에 있는 제이나에게 물었다.
“덕분에요.”
제이나가 그의 품에서 떨어지며 대답했다.
찬영도 고개를 끄덕인 후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땅에 부딪치며 받은 반탄력 때문에 몸이 무겁긴 했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다.
방금 그건 뭐였을까?
“대체……?”
눈을 부릅뜬 찬영과 함께 다시 공동 안이 고요해지며 붉은 글자들도 빛을 잃었다.
그리고 흰 가면의 웃음소리가 공동을 가득 메웠다.
“마나가 사라진 세계에 온 것을 환영한다.”
이 말의 뜻을 눈치챘는지 제이나의 얼굴이 어느 때보다 딱딱하게 굳어지는 게 보였다.
“디스펠 결계!”
등 뒤에 선 그녀에게 물었다.
“대체 그게 뭡니까?”
그녀가 대답 대신 베이콥의 깃발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공간 안에서는 마나를 활용한 베이콥의 깃발이 무용지물이 됐단 뜻이죠.”
대답과 함께 그녀가 웃고 있는 흰 가면을 노려보았다.
“디스펠이란 건 마법의 차단을 뜻해요. 그는 이 공간을 중심으로 강력한 차단 결계를 구축한 겁니다.”
“차단한 결계를 다시 해체시킬 순 없습니까?”
그녀가 천장을 보며 말했다.
“여길 전부 무너트리면 됩니다.”
말은 쉬웠다.
하지만.
“더 이상 도움이 될 수 없겠군요.”
담담한 대답.
그러나 그녀의 차분한 어조와는 달리 상황은 최악이었다.
제이나도 마법을 사용할 수 없고 찬영 역시 마찬가지다.
가진 바 대부분의 장비가 제대로 힘을 발휘하려면 마나를 활용해야 하니, 당연한 얘기. 마나가 사라진 세계에서 그들의 힘은 더 없이 약해지는 거다.
지금이 그랬다.
하지만 뉴 빌드는 다르다. 그들은 신성력처럼 차원의 돌을 활용한 암흑 마력을 사용한다.
암흑 마력은 마나와는 다르다. 그러니 마나가 사라진 공간 안에서도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
말 그대로 저들에겐 원래 잘 사용하던 무기가 이쪽은 모든 무기가 꺾여버린 거다.
솔직히 말하면 감탄이 다 나올 지경이다. 확실히 알겠다. 그들은 전혀 방심을 하지 않았다. 갓피스를 죽이기 위해 이중, 삼중으로 덫을 쳐놓은 거다.
“젠장……!”
설상가상.
이번엔 적들의 암흑 마법이 두 사람을 향해 쏟아졌다.
* * *
‘이대로 물러날 것 같으냐?’
이를 마주한 찬영의 두 손에도 환한 빛이 맴돌기 시작했다.
신성력의 발현.
일단 시간을 벌기 위해 몸 안에 휘도는 모든 신성력을 알고 있는 유일한 주문에 쏟아 부었다. 이게, 잠깐의 시간을 벌어 줄 테니.
“홀리 웨폰.”
1초당 신성력 150을 소모시키는 신성 마법이다.
당장 놈들의 암흑 마법을 전부 무력화시킬 순 없어도 잠깐 지체하게 만들 순 있다. 순식간에 커다란 방패 형태로 구현된 신성력이 암흑 마법을 막아 냈다.
쾅! 쾅! 쾅!
신성 마법과 암흑 마법이 부딪치는 동안 찬영이 인벤토리에서 다섯 개의 유리병을 꺼내 깨트렸다.
영주에게 챙겨 온 또 다른 아이템.
쨍!
그로 인해 피어오르기 시작한 하얀 구름. 그 구름은 단숨에 공동을 가득 메우며 두 사람과 깃발을 숨겨버렸다.
‘클라우드 섀도’라는 연기탄이었다.
연기 속에 있는 모든 게 감춰진다.
호흡조차도.
그 구름은 단숨에 공동을 가득 메우며 두 사람과 깃발을 숨겨버렸다.
쾅! 쾅! 쾅!
찬영의 신성마법을 뚫고 그 안에 쏟아지는 잔여 암흑 마법들.
승리를 확신한 흰 가면의 입가에 ‘빙긋’ 미소가 서렸다.
‘그래, 어디로 숨을 테지?’
그래봐야 모든 벽은 막혔고, 그들은 벽을 꿰뚫고 지나갈 마나가 없다. 고작 연기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잠시 시야에 보이지 않게 되는 게 최선일 거다.
그사이 밀폐된 공간 안에서의 연기들은 빠르게 뉴 빌드의 일원들까지 감싸 안고 퍼져나갔다.
제대로 앞조차 볼 수 없는 안개 속에서 흰 가면이 조직원들을 독려했다.
“당황할 것 없다! 이미 수중에 떨어진 적들이다. 그분의 권능으로 바람을 밀어내라!”
그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암흑 마법을 펼쳤다.
곧 그들에 의해 일어난 바람이 안개를 밀어내자.
안개에 깃든 하얀 가루들이 뉴 빌드의 옷 구석구석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찬영.
‘음?’
한데 찬영 혼자다. 제이나가 사라진 거다.
대신 안개 속에서 뭔가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확실한 건 사람이 아니라는 것. 더 인간의 것보다 우람한 몸이었다.
-음모오오오!
안개를 뚫고 나온 검은빛 소가 공동이 흔들릴 만큼 크게 울었다. 방금 전의 암흑 마법은 그 소에 의해 무력화된 것이다.
찬영이 그 곁에 서며 말했다.
“진정하라고.”
타우린이 성난 콧김을 뿜었다.
……타우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