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자동보상-77화 (77/248)

#77

그리고 빛이 사라질 때쯤 찬영은 어둠 속을 걷고 있었다.

주위엔 허름한 골목과 주점이 있다.

‘내가 왜 여기 있지?’

하며 의아해한 순간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정신은 찬영이되 몸은 또 다른 의지에 의해 움직이는 중이었다. 이어서 저 멀리 붉은 등을 켠 홍등가에 여자들과 취객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찬영은 그들을 무심히 지나쳤다.

그때, 한 줄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긴 나의 자리가 아니다. 나의 자린 신성한 교단이었어야 했다.

찬영은 바로 알았다, 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이번 소울 카드의 주인공이란 걸.

-나는 뒷골목을 전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빛이었으나 어둠을 택해야 했다.

곧 본격적인 독백이 시작됐다.

-여신의 신탁을 받은 나는 그 즉시 교단에서 지키고 있던 성물聖物을 빼돌렸다.

툭.

동시에 발걸음이 멈췄다.

찬영의 뜻이 아니다.

걷고 있는 이 몸의 본래 주인, 그자의 뜻이다.

낯선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처음엔 신께서 내게 이런 신탁을 내줄 리 없을 거라며 수없는 밤을 고민하고 지새우면서 고뇌하였다. 참오, 또 참오, 계속 정신을 맑게 유지하려 애를 썼다. 하지만 그럴수록 잡념이 나의 머릿속을 가득 메웠고, 부정과 미혹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래, 나는 여신의 뜻을 거절하였을 뿐 아니라 이를 부정한 것이라 보고 있었다. 어리석긴! 내가 무엇을 위해 방패를 들었던가……? 나의 방패가 진정,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

찬영은 공유되는 그의 기억과 더불어 많은 걸 보았다.

신성 왕국이 택한 유일신.

노티스 여신.

지혜와 열쇠를 상징하며, 세계의 평화를 뜻하는 여신은 카드의 주인에게 두 가지 신탁을 내렸다.

첫 번째는 차가운 오딘 제국에서 이름 없는 도둑으로 죽어 가던 그의 어린 시절을 구원해 신관의 성기사가 될 수 있게 인도한 일. 두 번째는 여신을 모시는 성스러운 신관들을 배신하게 한 일.

이는 그의 삶을 송두리째 흔드는 일이었으며,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해냈고 자신만이 아는 곳에 그 성물을 숨겼다.

그때부터 어둠에 숨었다. 신관들은 사나운 들개처럼 그를 쫓았고 그는 단신으로 신성 왕국 신관들의 노여움에게서 도망쳐야 했다. 잡히는 순간 모든 게 끝이기에! 도망, 또 도망쳐야 했다.

-나는 여신을 모시는 신관들이 쌓아 온 세월의 거탑보다 여신의 뜻에 응답하는 삶을 택했다. 후회하지 않는다. 그들의 뜻은 저버렸으되, 신에 대한 뜻은 저버리지 않았다. 신이시여, 맡기신 소임이 끝날 때까지 단 한시도 쉬지 않고 신의 뜻을 다하겠나이다.

마지막 이야기가 끝나기 무섭게 찬영이 서 있던 맞은편 자리에 빛의 불길이 솟아올랐다.

불길은 어떤 정해진 흐름에 따라 원을 그렸다.

그 후 불길 안에서 천천히 빛에 의해 조각되어 가는 형체.

얼굴은 흐릿하나 손에 쥔 건 뚜렷하다.

황금빛 망치, 황금빛 방패.

신의 뜻을 위해 목숨을 던진 성기사의 모습.

그 형체가 마침내 불길 속을 걸어 나오며 찬영과 마주 섰다.

그러면서 이르길.

-나를 찾는가? 신의 뜻을 이어받은 자여.

덩달아 땅이 푹 꺼지고.

‘흡!’

디디고 있던 땅이 와르르 무너져 갔다.

몇 번 느껴본 일이지만 느낄 때마다 썩 기분 좋게 느껴지진 않는다.

그렇게 모든 게 아득해져 가던 찰나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던 그의 이름이 들렸다.

-라인쉐리어. 나의 이름을 기억하라.

그리고…….

찬영이 천막 안에서 눈을 떴다.

연달아 떠있는 창이 보인다. 하지만 곧바로 이를 확인할 정신은 없었다. 그와의 만남만 이뤄졌을 뿐인데 온 기력을 한바탕 쏟은 것 같다.

온몸을 적신 땀이 그걸 증명했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내쉬면서 주위를 돌아볼 여유가 생겼을 때, 찬영은 손바닥으로 목에 흥건한 땀을 가볍게 툭툭 닦아 내며 나타난 창들에 집중했다.

분명 이번 보상에 대한 언급이거나 라인쉐리어에 관련된 얘기일 게 분명하다.

확신하며 창을 봤다. 추측은 정확했다.

-교단의 이단아, 라인쉐리어와의 영혼 교류로 인해 라인쉐리어 영혼의 9.2% 가 당신의 그릇 안에 첫눈을 떴습니다. 그로 인해 라인쉐리어의 차폐遮蔽가 각인되었습니다.

교단의 이단아 라인쉐리어

-차폐遮蔽 (가치 : 1,200)

-라인쉐리어와의 영혼 교류로 인해 차폐 가치 측정의 3배까지의 공격을 2회 무효화시킵니다.

-쿨 타임 : 24시간

‘차폐라…….’

이번에 주어진 건 일종의 액티브 스킬.

베아트리체와 같은 버프, 즉 패시브가 아니다.

‘반드시 버프의 형태만 가지고 있는 건 아니라는 얘기겠지.’

이번 경우까지 보면 액티브건, 패시브건 딱히 어떤 정해진 틀 없이 각 인물의 생애에 맞춰 기술이 나오는 게 틀림없다.

하지만 솔직히 딱히 상관은 없다.

이만한 고급 액티브 기술이라면 언제든 환영이다.

말이 3배지, 만약 차폐의 가치가 성장함에 따라 점차 상승한다면? 이 기술의 가치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수준이 될 거다.

그야말로 철벽.

강해지는 적에 맞서 2회의 절대 방어를 구사할 수 있는 방어벽을 가지게 된 거다.

‘제대로 걸렸군.’

온 기력을 다 쏟으며 영혼 교류한 보람이 있었다.

한데…….

‘창이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딱히 더 나올만한 창이 뭐가 있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시선을 다음 창으로 돌렸다.

-베아트리체와 라인쉐리어의 인연 성립이 매칭되었습니다.

‘인연 성립?’

이를 읽은 찬영의 미간이 한 데 모아졌다.

같은 하얀 카드를 뽑은 게 분명 어떤 효과를 보인 게 아닐까 싶다.

아니면 운이 좋았거나.

어쨌든…….

‘계속 읽어 보자고.’

빠르게 남은 창의 문구들을 훑었다.

-인연 성립은 새로 개방된 소울 카드가 기존의 카드와 인연이 있었을 때만 매칭 됩니다. 매칭 된 경우 서로의 소울 카드에 상승효과를 불러옵니다.

그래, 그럴 줄 알았다.

동일한 하얀 카드를 선택한 게 어떤 식으로든 연관점이 생긴 거다. 물론 확신을 더 하려면 다음 번 카드에도 하얀색 카드를 뽑아 봐야 알겠지만.

우선 지금 상황만 놓고 봐선 두 개의 하얀 카드를 뽑은 게 기존의 카드 강화에 도움이 된 게 확실하다.

그 덕에…….

-라인쉐리어와의 인연 성립으로 인해 베아트리체의 영혼이 6% 상승하였습니다.

-베아트리체의 영혼이 10.8%가 되었습니다.

-10% 달성으로 인해……

-알폰의 성녀 베아트리체

-중화中和 (가치 : 2,200)

-베아트리체와의 영혼 교류로 인해 중독 시 자생 해독력이 150% 상승합니다.

자생 해독력이 30%나 증가했다.

단번에 가치 2천 대의 패시브 기술이 된 거다.

한 번의 인연 성립이 가져온 결과치곤 굉장한 일이다. 하지만 다음 창에 비하면 이건 그냥 맛보기에 불과했다.

-베아트리체와의 기존 교류로 인해 라인쉐리어의 영혼이 추가 6% 증가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15.2%가 되었습니다. 10% 달성으로 인해……

-교단의 이단아 라인쉐리어

-차폐遮蔽

-가치 : 2,500

-라인쉐리어와의 영혼 교류로 인해 차폐 가치 측정의 3배까지의 공격을 2회 무효화시킵니다.

-쿨 타임 : 20시간

라인쉐리어의 경우엔 쿨 타임이 4시간이나 줄었다.

‘부차적인 보상이 굉장히 많네.’

이쯤 되니 대체 둘이 무슨 관계였기에 이만한 부차적 보상이 추가로 주는 건지 궁금해진다.

물론 지금 당장 알 길은 없겠지만 언젠가 알게 되지 않을까? 어떤 방식으로 그들의 과거를 알게 될 진 모르지만, 분명히.

‘알게 될 거다.’

그런 예감이 든다.

-최초 인연 성립 업적 보상으로 인해 신성력 가치가 3,000 증가합니다. 그로 인해 신성력 가치 3,000 [F]가 개방되었습니다.

-최초 신성력 개방 업적 보상으로 인해 신성 주문서를 획득하였습니다. 주어진 주문서를 습득하세요.

그 뒤에 이어진 건 업적 보상들.

하지만 말이 부차 보상이지, 메인 보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수준이다.

신성력에, 신성주문서까지..

‘대체 다음엔 뭐가 나올까?’

기대된다.

다음 캘린더가, 다음 소울카드가, 그리고 그로 인해 획득할 또 다른 갓피스의 이야기와 보상들이.

* * *

비로소 D-Day 아침이 밝았다.

뿔피리 소리가 곳곳에서 들렸다.

지하 수로 ‘출정식’을 위한 준비 과정인 게 뻔하다. 들려오는 소란 덕분에 찬영도 더는 자기만의 훈련에 시간을 할애하지 못했다. 떠날 시간이 성큼 다가왔기에.

‘최선은 다 했다.’

정말이다.

그동안 할 수 있는 준비는 전부 다했다.

르리에 탐사뿐 아니라 기존에 획득했던 실버 1급 박스 보상을 풀어서 20시간 동안 이동속도 30% 증가 포션을 획득했고, 신성력과 신성력 주문까지 어느 정도 숙지하고 사용할 줄 알게 됐다.

특히나 이번에 습득하게 된 신성력 주문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마법 혹은 이제껏 익혀온 이네이트들과는 아예 궤가 달랐다.

물론 방식은 마법과 흡사하다. 단, 대상이 다르다.

마법이 마나를 빌려 오듯이 사용하는 거라면 신성력은 그 주체가 ‘여신’이다.

사용할 때마다 여신의 숨결이 귀에 불어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제껏 평생 종교에는 단 한 번도 고개를 돌려 본 적이 없었는데, 시드 대륙의 여신과 함께 하게 된 거다.

이 사실을 영주가 알면…….

‘꽤나 놀라시겠지.’

그뿐인가? 아마 노티스 신관들은 모두 기막혀 할 거다.

그런데 이쯤 되니 이런 생각이 든다. 신성력이 존재한다면 신 또한 있는 건데…….

신성력은 쓰게 해주면서, 어째서 이 일은 관망하기만 할까?

‘혹시 나설 수 없는 제약이라도 있는 걸까?’

그렇게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 있을 무렵 제이나가 방문했다.

“아, 오셨어요?”

“예.”

대답과 함께 제이나의 눈빛이 빠르게 찬영을 훑어 내렸다.

뭔가 궁금한 눈치.

“왜요?”

질문을 먼저 선수 쳤다.

제이나도 기다렸던 걸까?

대답이 무척 빨랐다.

“제대로 쉬신 거 맞나요?”

“아…….”

찬영이 대답 대신 콧잔등을 몇 차례 긁었다.

하긴, 땀에 절은 옷부터 시작해서 주위에 흩어진 신성력의 기운은 분명 그녀를 자극하기에 충분했으리라.

“나름대로 쉰 건 맞습니다.”

어쨌든 르리에를 벗어난 하루 정도는 몬스터와 싸우지 않고 훈련만 해댔으니, 쉰 건 쉰 거다.

“영주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실까요?”

찬영이 잠깐 자기 옷을 내려다본 후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겠네요.”

“네.”

그러면서 찬영에게 손수 새 옷을 내미는 그녀.

“음, 이건?”

제이나가 무표정으로 대답했다.

“필요할 것 같아 가져왔어요.”

그녀가 건넨 건 리넨 셔츠와 통자로 된 일자형 바지, 그 위에 덧대듯 입는 목과 쇄골을 덮는 경갑옷이었다.

‘옷이 젖을 건…….’

찬영은 이를 받아들면서도 어안이 벙벙했다.

“……어떻게 알고?”

“개인 훈련을 쉬지 않고 하시더군요, 늘.”

“네, 그거야…… 뭐.”

꽤나 주의 깊게 지켜봐준 모양이다.

찬영이 머쓱하게 웃은 뒤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런 배려는 정말 예상치 못한 탓에 잠깐 머뭇거렸다.

그 시선이 무안했던 걸까? 그녀가 눈꺼풀을 내리면서 말했다.

“필요 없다면…….”

“아뇨.”

찬영이 얼른 고개를 저은 후 그녀에게 옷과 갑옷을 받아들었다.

마침 갈아입을 옷이 필요하던 차다. 물론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그녀의 배려를 그냥 무시할 순 없지 않나? 사냥까지 함께 다녀온 전우인데.

그 덕에 두 손 가득 옷을 받게 된 찬영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딱딱한 대답이지만 그녀에게 적응이 된 찬영은 그녀가 어느 때보다 부드럽게 대해 준다는 걸 잘 안다.

가져와 준 옷만 봐도 그랬다.

그런 중에 그녀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런데 이 기운들은 대체 뭐죠? 마나와는 분명 다르군요.”

그녀가 마침내 물었다. 신경 쓰이는 주변의 기운에 대한 궁금증을 결국 못 참은 모양이었다.

찬영은 잠깐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신중히 입을 열었다. 그녀에게 감출 일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신성력입니다.”

이어진 찬영의 대답.

“무슨……?”

그녀가 대답도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납득이 안 되는 거다. 동시에 제이나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렸다. 경악 혹은 혼란스러움 등의 복잡 미묘한 눈빛이었다.

그런 그녀의 시선 속에 찬영이 다시 숨을 가다듬으며 그녀에게 손바닥 안을 보여 줬다. 이럴 땐 백 마디 말보다 한 번 보여 주는 게 낫다.

“여길 보세요.”

찬영의 손바닥을 향해 그녀의 시선이 쏠린 그때, 신성력으로 인한 미풍이 천막 안에 감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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