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한동안 찬영은 우두커니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의 태도 때문이 아니다. 실망하며 전해 준 그의 말들이 남긴 정보들. 그게 찬영을 놀라게 만들었다.
‘하나가 아니다?’
토끼 사람은 분명, ‘차원 다리’라고 말했다.
‘그럼 미지의 땅 역시…….’
차원 다리!
거기다 토끼 사람이 말하길, 차원 다리는 여러 개라고 한다.
오디 처치 당시 수복했던 차원 다리가 첫 번째, 그리고 현재 차원의 돌을 통해 찾고 하는 차원 다리가 두 번째. 미지의 땅을 차원 다리라고 했을 때 세 번째.
그럼 현실로 통할 차원 다리는 대체 몇 개나 있는 걸까?
‘얼마나 수복해야 하는 거지?’
생각 끝이 꼬리에 꼬리를 물자 온갖 추측들이 한데 뒤섞여 무척 혼란스러웠다.
이럴 땐 직접 물어보는 게 최고다.
찬영이 문으로 다가가 외쳤다.
“정말 그의 손에서 자유를 찾고 싶었고 이제껏 그 기회를 저라고 알고 사셨다면…….”
찬영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저를 도와주셔야 합니다. 달리 누군가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런 이가 없다면.”
가까이 붙어 있던 문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제가 당신의 유일한 기회입니다.”
찬영은 말을 마쳤다.
하지만 토끼 사람은 다시 제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선택을 해야 했다.
계속 기다릴 것이냐, 아님 또 다른 이웃을 찾을 것이냐.
찬영은 고민했다. 하지만 이 자리를 떠나 다른 이웃을 찾는다는 선택은 그리 내키지 않았다.
다른 이웃의 태도 또한 토끼 사람과 크게 다를 바 없을 테고, 그 후의 상황은 지금과 비슷할 거다.
똑같은 장면만 연출하게 되는 거다.
물론 감언이설로 속여서 뭘 아는 것처럼 당장 그들의 해방을 도울 수 있을 것처럼 포장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거짓말은 성격상 크게 와 닿지 않는다.
결국 완고한 마음을 품고 있는 저 토끼 사람의 마음을 되돌려야 첫 매듭이 제대로 풀린다는 얘기다.
그럼, 결정은 끝났다.
‘기다려 보는 수밖에.’
그도 대놓고 기다리는데 한 번은 나와 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대충 주변에 털썩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마음을 돌려야 하나?’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하나 당장 떠오르는 생각은 없다.
상상했던 구원자의 모습과 자신의 모습이 달라서 실망한 그에게 대체 무슨 말로 보답할까?
할 수 있는 건 하나.
자신과 그의 목적이 같다는 동질감을 심어 주는 것밖에 없지 않을까?
우선 그가 마음을 좀 진정하고 다시 나오길 기다려 보기로 했다. 흥분한 마음가짐으론 어떤 대화도 되지 않을 것 같으니까.
* * *
그때부터 찬영은 잠자코 그의 집 주변을 경계했다.
한데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집을 중심으로 한 주변은 어떤 몬스터의 출몰도 없어 보였다.
25km 지점을 지난 이후 목숨을 도외시하며 덤벼들던 언데드 떼가 마치 전부 사라져 버린 양 고요하다.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
찬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알아내기 힘들다. 미지의 땅에 대해선 알고 있는 정보가 극히 적다.
‘유일하게 기댈 데라곤 역시…….’
찬영의 시선 끝이 토끼 사람이 들어간 문을 향했다.
‘이 사람이 최선인데…….’
그 생각에 부응하기라도 한 걸까?
철컥.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토끼 사람이 나오자마자 물었다.
“아직도 안 간 거요?”
찬영이 일어나며 대답했다.
“이야기가 아직 안 끝났으니까요.”
담담한 어조에 고집이 느껴졌다.
이를 들은 토끼 사람이 인상을 썼다.
“이미 할 말은 다 한 걸로 아는데? 문을 닫은 걸로 대답은 충분하지 않았소?”
“네, 절 미덥지 않게 생각하시는 것 정도야 충분히 알았습니다.”
“그럼 된 것 같은데…… 아니오?”
“예, 아닙니다.”
“말귀가 어두운 건가?”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토끼 사람.
실망한 건지 쉽게 마음을 돌릴 것 같진 않다.
‘그래도 시도는 해 봐야지.’
찬영은 그의 뾰족한 반응에도 불편한 기색 없이 차분히 말을 이어 갔다.
“혹시 시드 대륙에 대해 아십니까? 아니면 지구는?”
“모르오. 그곳도 식민지인가?”
“그건 아닙니다. 다만 차원 다리가 연결되었을 뿐이죠.”
“뭐?”
토끼 사람이 처음으로 흥미를 보였다.
직감 상 지금 얘기를 풀어야 할 때 같다. 찬영이 지구와 시드 대륙에 대해 간략이 얘기해 줬다, 처한 상황 역시.
“시드 대륙은 대륙 대부분이 사라져 버린 상태입니다.”
“이런 얘기는 처음 듣는군. 식민지가 있다고는 들었으나 통째로 사라져 버렸다고?”
“예.”
“그리고 그게 브루들의 짓이라고?”
“브루요?”
“그쪽은 알 것 없네. 어쨌든 딱하게 됐군. 하지만 나는, 우리는!”
토끼 사람의 귀가 빳빳하게 세워졌다.
흥분한 모양이었다.
“같은 처지에 속한 자를 기대한 게 아니야. 구원자를 기대한 거지! 그러니까 괜히 브루에게 잡히지 말고 목숨이나 부지하게.”
“그러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왔습니다.”
“뭐?”
“그냥 목숨만 부지하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란 겁니다.”
그러면서 싸워온 지난날을 말해 주었다.
시작. 그리고 지금.
“당신들을 겁먹게 만든 작자를 찾아갈 수 있게 도와줬으면 합니다.”
“만나서 뭘 하려고?”
“이제껏 당신들이 못한 그것.”
찬영이 힘주어 말했다.
“그리고 앞으로 제가 해야 할 일. 그걸 할 겁니다.”
토끼 사람이 한동안 찬영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길 몇 분.
“드시게.”
토끼 사람이 집 안으로 찬영을 들였다.
딱히 설득 된 것 같진 않다. 말 몇 마디로 풀릴 표정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눈빛은 분명…… 안쓰러움.
동정이다, 발버둥 치려는 찬영을 향한.
‘뭐든 상관없겠지.’
일단 집 안으로 들어왔으면 됐다.
그가 조금이라도 대화하길 허락했다면.
이제부터 질문에 대한 대답 정도는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어서 문이 닫히고…….
탁.
찬영이 의자에 자리를 잡고 주변을 둘러봤다.
방금 앉은 황토색 의자, 탁자, 검박한 실내, 이층으로 향하는 나무 계단 등 집 안 풍경은 찬영의 오두막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집 안을 둘러보는 사이 토끼 사람이 문 옆에 등을 기대고 섰다.
“자, 그래서?”
궁금한 게 뭐냐는 물음. 찬영이 기다렸던 바다.
“브루가 뭡니까?”
“계급을 뜻하지. 차원의 지배자들을 통칭 브루. 그들이 수족처럼 부리는 자들이 몬스터. 우리 같은 식민 지배를 받는 일원들을 프롤이라 해. 당신도 프롤이겠지?”
찬영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피식.
비웃은 토끼 사람이 덧붙였다.
“곧 그렇게 될 걸세.”
찬영은 그럴 일 없을 거라며 얘기하고 싶었으나, 더 말 꼬리 잡는 건 겨우 얻은 기회를 져버리는 일이다.
당장 필요한 질문과 얻을 수 있는 대답에 집중해야 한다. 그의 말은 가뿐히 무시하고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우선은 계속 궁금했던 것부터.
“여긴 어째서 몬스터의 침범이 없습니까? 분명 이곳에 오는 내내 싸워왔는데…….”
“내가 그의 노예이기 때문이지. 자기 땅을 무엇 하러 침공하나. 이미 군림해 있는데.”
찬영은 이제야 이해가 갔다.
‘그래서였나?’
“그럼 브루 중 하나가 글라투?”
토끼 사람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다음 질문.
“글라투가 대체 누굽니까?”
“브루 중 하나라는 것 외엔 자세히 모르네. 그저 그가 차원 다리 중 하나인 이곳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만 알지. 그리고 다른 차원 다리가 존재한다는 것까지.”
찬영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토끼 사람은 처음부터 그가 있는 곳은 누구도 모른다고 했다.
결국 글라투의 본질적 질문은 제대로 모르는 모양.
그럼, 질문을 바꿔야겠다.
“그렇다면 당신은…….”
“누구냐고?”
“예.”
“우린 노예. 이름 따윈 잊었지. 그저 언제 죽을지 모르는 희생양이니까.”
슬픈 눈빛을 보인 토끼 사람이 깊은 숨을 토해 낸 뒤.
말을 덧붙였다.
“우린 ‘르리에’라 불리는 이 땅에서 나고 자랐지.”
“여기가 르리에란 곳이었군요.”
“그렇네. 우린 원래 한 때 트레이드 족으로서 살았어. 모든 걸 교환하고 문명의 발전을 교류했지.”
“그런데 어째서?”
“그쪽과 똑같지. 몬스터가 침공했고 어느 날 파괴되고 사라졌다더군. 문명의 남은 마지막 씨앗이 브루의 손에 닿지 않는 곳으로 사라졌다고 했었고…….”
찬영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게 갓피스?”
토끼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씨앗이 새로운 문명의 싹을 틔우고 우리 문명을 지킬 ‘갓피스’란 존재를 데려온다는 전설이 남았지.”
찬영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지금 여기 있는 토끼 사람.
이 사람이 어쩌면…….
‘내 능력의 원천을 일궈 냈던 자들의 후예들이란 건가?’
그래, 앞 뒤 맥락을 들어 보니 그 추측이 맞는 것 같다. 물론 그 유산에 대해 어떤 정보조차도 없는 자들이긴 하지만.
“그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놀랍군요.”
“나도 놀랐소. 정말 아는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아서.”
“모른다고 해서 아무것도 못한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할 수 있습니다, 뭐든.”
“자신감이 과하군그래. 그쪽 세상 사람들은 다 그런가?”
부정적인 언사에도 찬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일부 이해됐다.
‘누구라도 그럴 수 있어.’
가진 걸 모두 잃은 마당에, 꼭 쥐고 있던 희망까지 흔들리고 있다. 그의 불안함은 당연했다.
그는 자신을 믿을만한 광경을 보기 전에 믿지 않을 것이다, 어떤 것도.
그러려면 보여 줘야 한다. 뭐든.
찬영은 찾을 수 없는 글라투를 직접 찾아오게 하는 방법이자, 히든 퀘스트를 해결하기 위한 제안을 권했다.
바로.
“저와 거래하시죠.”
“거래를 하자고?”
“예. 수확하신 작물과 제가 수확한 작물을 교환하잔 얘깁니다.”
“어이가 없군. 못 들었소? 우린 글라투에게…….”
“네, 압니다. 수확하신 작물을 내주신다고.”
“그런데?”
“안 내주면 그만입니다.”
“나더러 그냥 죽으라는 얘기로 들리는군. 아니요?”
“글쎄요? 평생 기다려 온 숙원이라면…….”
찬영이 그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목숨을 걸 만한 가치가 있지 않겠습니까?”
목숨을 직접 걸어 봤기에 말할 수 있다.
어차피 선택은 그의 몫, 질문은 할 만큼 했고 대답도 들을 만큼 들었다.
사실 그가 함께 나아가길 원치 않는다면 더 설득할 방법은 없다. 여기서 물러나고 글라투를 찾는 걸 최우선으로 택하는 수밖에.
토끼 사람의 눈동자에 갈등이 생겼다.
“당신,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것 같군.”
“네, 뭐…….”
찬영은 길게 말하지 않고 입을 닫았다.
‘그런 소리야 워낙 많이 들어서 말이죠.’
그 후 찬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엉덩이 붙이고 있어 봐야 당장 대답 나오지 않는다.
하루 이틀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닐 거다.
“생각해 보세요.”
“어디로 가는 거요?”
떠나려는 찬영에게 토끼 사람이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
조금 마음이 급해진 얼굴이었다.
그도 아는 거다, 찬영이 자기의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걸.
찬영이 대답했다.
“제 집으로 갑니다.”
“집?”
“예.”
그러면서 위치를 상세히 알려줬다.
작물을 키우고 있다는 얘기와 함께 언제든 교역이 가능하다고도 알려주었다.
한동안 중얼거리던 토끼 남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계속 말하지만, 난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소. 내게 확실한 보호조차 자신할 수 없지 않소?”
찬영이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답답하군요.”
“뭐요……?”
“앞일을 어떻게 알고 확실한 보호를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바엔 위안이 될 얘기를 하나 해드리죠.”
찬영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당신만 모든 걸 걸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리고 말했다.
“어떤 선택을 하든 스스로에게 후회 없는 결정을 하시길 빕니다. 저는…….”
찬영이 문을 나갔다.
“지금의 자유를 빼앗길 생각이 없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떠나는 찬영의 등 뒤로 토끼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가능할까? 놈은 곧 부하들을 통해 그대가 자기 영역에 왔다는 걸 알게 될 거고 그대의 터전은 금세 짓밟힐 거요.”
찬영이 다시 등을 돌려 토끼 사람을 쳐다봤다.
“놈이 찾아올 거라고 말씀하시는군요.”
“그렇소. 그러니 어서 도망가시오. 가능하다면 멀리. 안쓰러워 해주는 얘기요. 희망이라 믿었던 존재가 짓밟히는 걸 보고 싶진 않으니까.”
토끼 사람 나름대로 찬영을 위해 조언을 건네준 셈이었다.
하지만 찬영의 대답은…….
“잘됐군요.”
예상 못한 대답이었는지 토끼 사람의 표정이 멍해졌다.
“뭐?”
찬영이 가던 길을 다시 옮기면서 덧붙였다.
“바라던 바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