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
#71.
찬영이 벡과 대화하는 동안. 영주의 이야기는 발 빠르게 전선에 퍼져갔다.
돌의 행방에 관련한 소식, 그리고 지하수로 재건 계획.
뜨거운 감자가 된 이 두 가지 얘기가 레인저, 엘프 할 것 없이 화젯거리로 떠올랐다.
그리고 여러 진실이 공식화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아 영주가 책임자들을 다시금 소집했다. 찬영도 이 날을 누구보다 기다렸다. 찬영은 담담한 눈빛으로 자리에 앉았다.
시선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고심 섞인 걱정들이다. 그들도 생각이 복잡할 거다.
이윽고 자리에 필요한 수뇌부가 모두 자리에 앉자 영주가 말문을 열었다.
“이미 공식화했기에 들었겠지만 지하수로의 재건은 결정되었네. 미래를 위한 불가피한 결정이니 따라주었으면 하네.”
모두 침묵했다. 아니, 엘프들의 경우엔 카일을 모두 바라봤다. 하지만 카일 역시 묵묵부답이었다. 영주의 오랜 우방이자 엘프의 헤일로족의 지도자 카일이 그에게 동의했다는 뜻이다. 그러니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작전 수립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영주가 탁자 위에 놓인 지도를 가리켰다.
“곧 전선을 회복할 만한 추가 보급과 지원 병력이 당도할 걸세. 그 후 토벌을 할 테지. 총책임자는.”
영주가 카일을 쳐다봤다.
“그대가 맡아주게.”
“예.”
“좋네. 그리 되면 충원되는 기사단 병력 또한 그대의 지시에 따라 전력을 다해 움직일 걸세. 단……!”
이어서 영주가 지하수로로 통하는 길목 주위를 가리켰다.
“토벌 구획은 여기까지. 지하수로로 통하는 길은 두 사람이 맡을 걸세.”
그때 즈음 도레인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까지 강행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영주가 말했다.
“뉴빌드의 위험 때문에 미래를 위한 투자를 망설일 수 없었다네.”
“그럼 다수의 병력이 함께 들어가는 편이..”
“불가하네. 한때 공사를 멈춘 지하수로는 미로와 같이 길이 얽힌 데다 협소해. 다수의 병력을 투입하면 일이 잘못됐을 때 많은 병력을 잃을 가능성이 높네.”
틀린 말도 아니다. 소수의 정찰대가 먼저 지역을 관찰한 뒤 구획을 점령하는 게 여러모로 득이었으니까. 과감하고 위험했지만 분명 일리 있는 얘기.
도레인도 그제야 질문을 멈췄다.
영주의 대답으로 우려가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어차피 카일도, 영주도 결정을 끝낸 사안이다. 굳이 물어본다고 한들 결정이 뒤집히진 않는다.
어느 정도 대답이 됐다고 생각했던지 영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토벌 시기를 정하지.”
결정하기 무섭게 밀어붙인 영주, 그로 인해 토벌 시기는 모두의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오늘을 제외한 열흘 후로 결정되었다.
* * *
긴 회의가 끝난 뒤, 찬영은 영주에게 독대를 청했다.
토벌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개인 사냥을 청한 것이다.
사실 몬스터 사냥을 통해 보석 제작에 열을 올리려 한 거였지만 어쨌든 명분은 소규모 사냥을 통해 토벌에 도움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영주가 헛웃음을 흘렸다.
“자네 정말 미쳤나?”
“아뇨.”
“오늘이 지나면 단 열흘, 그 열흘 안에 지겹도록 몬스터를 조우할 걸세. 좀 쉬어두게.”
달콤한 제안이다. 하지만 찬영은 고개를 저었다. 몸은 쉬고 싶어도 머리는 안 된다고 한다.
본격적인 지하수로 토벌 직전에 히든 퀘스트 완성을 위한 장비 제작을 마무리 지어둬야 한다. 그리고 보석 장착을 통한 개인 역량도 끌어올려야 했다.
그냥 쉬어 버리기엔 시간이 부족하다.
“크게 무리하진 않겠습니다.”
“그렇다면 그대 뜻대로 하시게.”
말을 내뱉은 영주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라고 할 줄 알았는가?”
찬영이 머쓱한 표정으로 긁적였다. 진짜 그럴 줄 알았다.
영주가 피식 웃었다.
“자네도 생각해 보게, 혼자 몬스터 사냥을 나간다면서 무리를 하지 않겠다는 소리가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
“예, 압니다만.”
어떻게 알았는지 찬영이 해야 할 말을 영주가 대신 했다.
“그래, 필요한 일이겠지. 아니 그런가?”
“예.”
“말려도 소용없겠지? 감히 말이야.”
이쯤 되니 찬영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허락하지 않으시면 조금 곤란해지는데.’
그 때 영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가게. 단, 제이나와 동행하면 보내주지.”
“제이나 경과 말입니까?”
영주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싫은가?”
“아뇨, 다만…….”
돌을 흡수했다는 이야기가 공식화 된 이상. 등을 지켜 줄 아군이 함께 다닌다는 건 환영할 일이다. 그렇지만 그만큼 위험도 따른다.
‘사실상 위험을 자처하고 있는 거지.’
뉴빌드가 언제 습격할지 모르는 판국에 하려고 떠나는 사냥이다. 시기가 좋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야 한다. 그들이란 변수를 걱정이 되긴 하다. 마냥 조심조심 움직이기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하지만 이건 혼자 출발했을 때의 이야기다. 그녀가 동행한다면..
‘그녀에게 위험을 부담시켜야 돼.’
걱정이 안 될 수가 없다.
“설마…… 그녈 걱정하나?”
“예?”
“걱정이군. 그 표정은.”
영주가 씩 웃었다.
“그건…….”
말문이 막힌 찬영을 보며 영주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제이나는 뛰어난 마법 병단의 단장이네. 전투 경험은 자네보다 훨씬 많지. 나는 자네의 호위를 받을 참한 아가씨를 보내는 게 아니야.”
영주의 말을 듣고 보니 찬영은 새삼 깨달았다. 그녀는 여러모로 뛰어나다. 한동안 잊고 있었다.
제이나 경이 얼마나 뛰어난 실력자인지.
“인정합니다.”
“암, 그래야지. 오히려 제이나 경이 귀찮으면 더 귀찮을 걸세. 보호자 격으로 가는 것 아닌가. 그리고…….”
영주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
“지하수로로 가기 전에 서로의 호흡을 맞춰보게. 같이 싸우는 것이지, 따로 싸우는 게 아니잖나?”
찬영이 대답했다.
“새겨듣겠습니다.”
정말이다. 영주는 연륜 많은 형처럼 가끔 여러 생각할 거리를 던져 준다.
‘같이 싸운다라.’
그가 던져 준 작은 얘기가 찬영에게 또 다른 고민거리가 됐다.
* * *
“출발하도록 하죠.”
들려오는 목소리에 찬영이 잠겨 있던 생각에서 깨어났다.
제이나다. 영주의 하명이 떨어지자마자 찬영의 천막을 찾아온 것이다. 그녀가 영주 못지않은 행동파란 걸 새삼 깨닫는 찬영이었다.
“예.”
대답과 함께 길을 떠났다.
밖은 벌써 어둠으로 가득했다. 물론 전선은 마법에 의해 밝은 빛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전선 밖은 칠흑 같이 어두울 게 분명했다.
제이나가 말했다.
“우리의 동선이 드러나는 마법이나 케어 라이트는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대대적 전투를 치렀어도 아직 몬스터들은 골짜기에 대거 포진하고 있다. 굳이 대규모 전투를 치를 게 아닌 이상 은밀히 기동하는 게 낫다. 그리고 혹시나 습격해 올 뉴빌드를 견제하기 위한 제이나의 선택이었다.
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이 확실히 일리가 있다.
동시에 미니 맵을 켰다.
이 일대는 그동안 쌓아온, 지도 등을 통해 숙련된 레인저만큼 익숙해졌다. 찬영이 자연스레 제이나를 앞질렀다.
“길 안내는 제가 하겠습니다.”
그녀는 자신 있는 찬영을 믿었다.
“그러시죠.”
“그리고…….”
무슨 소리인가 싶어 기다리는 제이나에게 찬영이 말없이 등을 내밀었다.
“이게 뭐죠?”
잠깐 흐르는 정적.
‘업히라고?’
어이가 없어 찬영을 바라보는 제이나. 하지만 찬영은 진지했다.
“빠르게 모시죠.”
이제부터 제법 많은 거리를 가야 한다. 하지만 마법사인 그녀의 신체 능력은 기사 혹은 기공사에 비해 턱 없이 낮다.
기사나 기공사는 몸 안에 담긴 마나가 수련을 통해 점차 커져갈수록 신체 역시 그에 맞게 재배열되어 간다. 즉, 더 견고해지고 강해지며 근력이나 민첩성이 늘어난다.
한데 마법사는 신체를 주문을 위한 통로로만 사용한다. 통로로써 적합해진 신체가 되길 원하지 초인적인 힘을 일으키길 원하지 않는 존재였다.
그러니 찬영의 선택은 하나였다.
‘업고 달린다.’
한동안 찬영의 등을 들여다보던 제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는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실례를 좀…… 하죠.”
어두운데다 등지고 있는 찬영이 그녀의 붉어진 얼굴을 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만약 봤다 해도 별말 안했을 테지만.
타닥.
기어코 제이나를 업은 찬영이 땅을 박찼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빠르게 골짜기를 가로질러 갔다. 찬영에겐 거칠 게 없었다.
심법들을 익힌 후부터 신체 능력들이 전보다 훨씬 상승했다. 어둠 속임에도 훨씬 잘 볼 수 있고 잘 들을 수 있다. 모든 감각이 예민해진 거다. 달리는 중에도 주위를 둘러볼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생겼다.
반면 제이나의 얼굴은 점점 파랗게 질려 갔다. 좌우, 오른쪽, 왼쪽, 방향 가리지 않고 곡예사처럼 달리는 찬영의 등에 업혀 있자니 하늘이 노래지는 기분이었다. 조금이라도 이 기분을 덜어보려 찬영의 어깨에 깊이 얼굴을 파묻었다.
* * *
그렇게 그 날부터 찬영은 제이나와 함께 골짜기 남쪽을 전전했다. 남쪽은 라비의 서식지, 굳이 이곳을 택한 건 라비의 개체수를 줄이기 위함이었다.
망자가 된 동료를 상대할 필요가 적어질 거라 판단한 탓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갔다.
* * *
“까아악!”
거대한 까마귀인 레이븐 열댓 마리와 라비 떼가 격돌했다.
라비는 열 마리. 그 외 섀도 헌터들은 서른 정도 된다.
그리고 난전이 시작됐다.
“시작하죠.”
진즉 슬롯을 준비해 뒀던 제이나가 수풀 뒤에 숨어 있다 고개를 배꼼 내밀었다.
떠난 지는 7일. 소요된 이동시간은 이틀. 남쪽에 자리 잡고 시작한 노숙은 5일 차가 되었으니 지칠 만도 하건만 두 사람은 쉬지 않고 라비 사냥에 나섰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었다. 수색하다 라비가 보이면 알아서 자기 포지션을 취했다. 처음엔 각자 싸웠다. 찬영은 찬영대로 제이나는 제이나대로.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찬영은 그녀의 전투 방식을 가만히 지켜볼 때가 생겼다. 그녀가 싸우는 방식은 센스의 향연이었다. 찬영은 정말 경탄 했다. 그리고 알았다. 왜 마법 병단 단주란 직함을 가지고 있는지.
그녀는…….
“헤이스트.”
5서클 마법사라 그런지 3서클 마법까지는 딱히 슬롯을 준비하지 않더라도 별 시간도 걸리지 않고 마법을 뚝딱 만들어 냈다.
이어서 제이나가 수풀 사이를 달렸다.
화아악!
두어 마리의 레이븐이 그녀를 발견하고 울기 시작했다.
까악!
라비와 싸우던 세 마리의 레이븐이 그녀를 따라붙었다.
라비 역시 새로 나타난 적을 경계한다.
“죽여라, 인간을 죽여라!”
라비의 뜻에 따라 섀도 헌터 열 마리가 그녀의 뒤를 쫓았다. 그때, 반대편에서 나타난 찬영.
-까악!
또 다른 레이븐과 섀도 헌터가 이번엔 그를 쫓기 시작했다. 그러나 찬영의 눈빛엔 여유가 넘쳤다.
일전에 업적 보상으로 획득한 9급 랜덤 보석의 옵션이 이속 증가 3%였기 때문이다. 스툼에 장착된 그 보석은 이제 이동 계열 이네이트의 효과를 한껏 더 증폭시켰다.
그 덕에 레이븐이건 라비건 할 것 없이 녀석들의 진형이 모두 흐트러졌다.
지금이 바로 두 사람이 노리던 절호의 타이밍.
쫓아오던 녀석들을 따돌린 제이나가 다시 최초 장소에 나타났다. 로브 자락을 펄럭이며 뛰어온 그녀가 쇄도하는 섀도 헌터들을 향해 4서클 슬로우를 시전했다.
솨학!
동시에 이속 감소가 된 섀도 헌터들을 향해 전광석화처럼 나타난 찬영의 스툼이 강한 풍압을 일으켰다.
그리고 쾅!
에어 펀치.
속도가 느려진 섀도 헌터들은 피할 새도 없이 찬영의 에어펀치에 허리가 꺾이거나 목이 꺾여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하지만 끝이 아니다.
스툼에 있는 ‘홈’은 1개가 아니었다. 며칠간의 사냥을 통해 획득한 아이템 루팅으로 인해 찬영은 10급 보석을 15개나 만들 수 있었다.
그중 고르고 골라 택한 건 공격 속도 1.2%.
주먹을 한 번 내지르는 속도가 전에 비해 더 없이 빨라졌다. 말이 1.2%지 엄청난 발전이다.
한계를 뛰어넘는 훈련을 해야 비로소 가능한 일을 겨우 10급 보석 하나로 해결해 버렸으니까.
쐐액!
찬영의 손끝에서 펼쳐진 염왕권이 불을 뿜었다. 염왕권에 깃든 선붕파란 기술이 펼쳐지자, 주변의 돌, 흙, 풀 모든 것이 1m 안에 빨려 들어온다. 나선형의 마찰로 인한 불길.
“키에엑!”
하지만 라비들은 꽤나 질기다.
찬영의 공격 반경을 피해 뒤뚱거리며 도망치려 했다.
“키키키익! 도망치자, 도망치자!”
“키에에엑!”
그러나 녀석들을 쫓지 않았다. 이제부턴 그녀 차례니까.
이어서 찬영의 스툼이 그래비티 필드를 불러왔다.
콰쾅!
내려앉은 중력의 힘에 발목이 묶인 라비들의 앞을 제이나가 막아섰다. 동시에 또 다른 10급 보석을 장착시킨 그녀의 지팡이, 툴챠가 움직였다. 처음 이 마법을 봤을 때 찬영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서 있었다.
그만큼, 위력적인 마법.
콰지직!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