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
#68.
모두가 의아해했다. 부연 설명이 필요해 보이자 찬영이 다시 말했다.
“저를 그들을 낚기 위한 미끼로 쓰세요.”
의중을 밝히자 찬영의 속뜻을 이해한 영주가 고개를 저었다.
“안 돼! 그건 허락 못하네. 너무 위험해.”
단호히 선을 긋는 영주의 염려가 고마운 찬영이었다.
하나…….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제이나 경의 추적 역시 이곳에서 끝났으니까요.”
그래, 그게 사실이다. 뉴 빌드는 사라졌다.
하지만 그들을 꾀어낼 방법은 여기 있다.
찬영이 자기 손을 가리켰다.
“제가 드린 이 이야기를 은밀히 소문내시죠.”
‘차원의 돌이 갓피스의 손 안에 흡수됐다.’
그 소문이 퍼진다면? 한 가지는 확실했다.
돌을 가지고 있던 뉴 빌드는 찬영에 대해 궁금해 할 테고, 끊임없이 접근하려 들 것이다. 암살이든 전면전이든, 어떤 식으로든 말이다. 이를 들은 영주는 강경했다. 주장 위에 강하게 쐐기를 박았다.
“안 된대도!”
이때, 제이나가 찬영에게 힘을 실었다.
“틀린 말도 아니에요. 찾아오게 만드는 것이 그들을 양지에 드러내게 할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예, 그겁니다.”
제이나와 눈을 마주친 후 찬영이 다시 영주를 바라봤다.
그쯤 되자 영주가 카일을 향해 물었다.
“카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일리 있는 이야기로 들립니다. 하지만…….”
말끝을 흐린 카일이 찬영을 쳐다봤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그 물음은 곧…….
‘뉴 빌드의 공적이 될 텐데 괜찮겠느냐?’
이거였다. 찬영도 모를 리 없다.
아니, 누구보다 잘 안다.
이 제안을 건넨 게 자신이니까.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 싸움은 피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종말을 위해 싸울 거라던 카슬라와 대면했을 때 깨달았다.
뉴빌드는 사이비 종교 마냥 자기들만의 세상에 홀려 있는 놈들이다. 그런 그들에게 갓피스는…….
‘눈엣가시지.’
그리고 눈엣가시를 빼기 위해 그들은 전력을 다할 것이다.
전쟁은 모르던 새 이미 시작되었다. 피하거나, 숨거나 혹은 쉬쉬하는 건 이 상황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이제까진 몰랐지만 모든 게 명확해진 지금 스스로의 삶을 지키기 위해 움직일 것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다.
찬영이 영주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그들은 기어코 많은 걸 빼앗으려 들 겁니다.”
반대하던 영주가 ‘크흠’ 하고 고심 섞인 한숨을 쉬며 찬영의 시선과 부딪쳤다.
찬영이 눈으로 말했다.
‘저는 그게, 싫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서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 * *
이후 소집 회의는 어떤 결정도 내려지지 않은 채 끝이 났다. 그동안 각자 의견이 뒤섞이긴 했다.
제이나와 벡은 놈들의 덜미를 잡자며 찬영에게 힘을 실었으며, 반면 카일을 비롯한 도레인과 고베이는 영주의 뜻이 맞다고 봤다.
적이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추고 있는지 모르는 지금, 괜한 희생이 될지 모른다며 불안해했다.
섶을 지고 불로 뛰어드는 자살행위라고 본 것이다.
이리 되면 의견은 삼 대 삼, 영주의 뜻이 굉장히 중요해졌다. 하지만 영주는 끝까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소집을 끝내고 찬영과 독대했다. 영주는 고민의 흔적이 역력한 눈빛으로 찬영을 바라보았다.
“자넨 왜 그리 고집이 센가?”
탐탁지 않은 말투였다.
“죄송합니다.”
찬영의 대답에 영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네와 제이나를 함께 보고 있자면 고집이 똑 닮았네. 갓피스의 소신이 ‘한번 정한 고집은 꺾지 말자’라도 되는 것 같군.”
한 차례 입을 다신 영주가 말했다.
“자신 있나?”
“어떤……?”
“살아남을.”
“살아남으려 택한 결정입니다.”
소집 내내 고민하던 영주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럼 됐네. 더 이상의 첨언은 하지 않음세.”
끝까지 반대하던 영주가 기어코 결정을 내렸다.
“대신 완전히 결정하기 전에 한 가지 보여 줄 게 있네. 본래대로라면 시간을 두고 천천히 진행할 생각이었으나.”
영주가 지도를 펼쳤다.
카일과 내려다보며 얘기를 나눴던 그 지도다.
지도 위에 표시된 구획을 살피는 찬영.
“토벌된 던전들을 가리키는 것 같군요.”
“잘 봤네. 그럼 이곳은?”
영주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 그 장소는 분명…….
“헤일로 골짜기군요. 한데 이 표시는?”
찬영이 가리킨 푸른 선이 보른 지구, 베이콥 시, 헤일로 골짜기를 거친다.
영주가 숨겨 뒀던 얘기를 꺼냈다.
“그건 지하수로를 뜻하는 표시일세. 오랜 세월 묵혀 둔 내 숙원이지.”
이쯤 되니 찬영은 영주가 자신에게 이 지도를 보여주는 의도가 궁금해졌다. 그때쯤 영주가 카일과 했던 얘기들을 찬영에게 모두 들려 줬다.
찬영은 정말 놀랐다. 영주가 현명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정말 큰 그림이니까.
“말했듯이 난 이 계획을 헤일로 골짜기의 토벌이 90% 진행됐을 때 시작하려 했네. 지하수로 안의 토벌을 말이지. 그리고 선봉을…….”
영주가 눈을 들어 지도에서 찬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네와 제이나에게 맡기려 했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찬영은 영주의 속뜻을 제대로 깨달았다.
“저를 그토록 말리셨던 이유가 이거였군요.”
“맞네, 돌이 자네에게 흡수된단 얘기가 돈 후부터 자네는 뉴빌드에게 어떤 종류가 될지 모르는 기습에 더 많이 노출 될 걸세.”
“그럼 임무의 위험도가 더 높아지겠죠.”
“그래, 그렇지. 그래서 나는 이 중차대한 일을 두고 묻고 싶네. 이 일을 맡아 줄 텐가?”
그 말은 곧 찬영이 주장한 계획을 잠시 덮어달란 얘기.
“맡겠습니다. 하지만…….”
찬영이 지도를 살피며 말했다.
“제 생각이 바뀌진 않을 것 같습니다.”
“굳이 위험을 자처하겠다는 이유가 뭔가?”
“우리에게 위험해 보인다는 건…….”
찬영이 지도를 손끝으로 소리 나게 톡 치며 말했다.
“저들에겐 외면할 수 없는 확실한 ‘기회’ 아닙니까?”
영주의 눈동자가 잠깐 흔들림을 멈췄다.
“자네의 뜻은 알겠으나 그리 현명한 선택 같진 않군.”
이후 두 사람은 자세한 얘기를 꽤 오랫동안 나눈 직후가 되어서야 지하수로 얘기를 마쳤다.
“알겠네, 자네 말대로 그 돌에 관한 이야기를 공식화하지. 단, 위험 부담은 자네 혼자 안고 가야 할 걸세.”
“예, 알겠습니다. 한데…….”
그즈음 찬영이 말했다.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뭔가?”
“영주님께서 이리도 경계하시는 이유가 혹시 이들의 등장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 아닙니까?”
“그럴 것 같나?”
“예, 그들의 움직임은 얕은 기반 가지고는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래서 여쭤본 겁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배경은 물론 카슬라 덕이었다. 오랫동안 한솥밥을 먹은 동료들조차 까맣게 속인 그녀다. 이런 충성도 높은 조직원을 키우려면 그 뿌리가 얕진 않으리라 짐작한 것이다.
그 생각이 맞았단 걸 영주의 대답을 통해 알았다.
“자네 말이 맞네. 그들은 작은 조직이 아니네. 각지에 퍼져 있었지. 하나 공식적으로 알려지진 않았네.”
“이유가 있습니까?”
“뻔하지. 군중 혼란을 누르기 위한 선택일세.”
“아…….”
찬영은 금세 이해했다.
지구도 그랬다.
서먼 홀이 시작되고 불어온 혼란들. 각 정부 또한 불어나는 혼란을 막으려고 애썼다. 이와 같을 것이다.
영주가 계속 얘기했다.
“백성의 혼란을 우려한 왕국은 입단속에 들어갔었네. 혹한의 오딘 제국과 토르잔 밀림 왕국 또한 마찬가지였겠지만.”
카일을 비롯한 헤일로 협곡의 부대장들조차 뉴 빌드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이유가 이제 드러났다. 영주와 제이나 최소의 사람만 알고 있던 특급 정보였던 것이다.
이를 들은 찬영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아직 복원되지 않은 나라들 또한 쉬쉬했던 모양이네요.”
예상대로 광범위하게 뻗쳐 있는 위험하고 커다란 조직이었다. 몬스터 말고 신경 써야 할 게 하나 더 늘어난 셈.
“그렇네. 하나 그런 만큼 이들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알고 있는 이들 역시 극소수였지…. 그중 하나가.”
한 차례 숨을 가다듬은 영주가 찬영에게 그간 감추고 있던 비밀 한 꺼풀을 들춰냈다.
“그들을 수사하던 건 신성 왕국의 첫 번째 검, 로덴 공작님이 이끄는 ‘브라이트’였네.”
* * *
영주와의 독대가 끝난 뒤 그의 천막을 벗어나는 찬영.
“끝나셨나요.”
“아, 제이나 경. 지금껏 기다린 건가요?”
“네.”
“무슨 이유로……?”
제이나가 발을 옆으로 돌려 길을 텄다.
“걸으면서…….”
천천히 이야기하잔 얘기.
찬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란히 발을 맞췄다.
저벅저벅.
곳곳에 세워진 천막들 사이를 지나며 찬영이 말했다.
“브라이트란 첩보 기구의 부단장께서 제이나 경의 삼촌 되신다고 들었습니다.”
“브라이트에 대해 들으셨군요.”
제이나의 눈에 이채를 띠었다.
하지만 놀라진 않았다. 영주가 얘기 할 줄 알았다는 눈치였다.
“예.”
대답한 찬영에게 제이나가 덧붙였다.
“맞습니다. 삼촌과 영주님께서는 막역한 사이셨어요.”
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립겠군요. 그분이.”
“그립죠.”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머리칼을 흩날릴 때 드러나는 그녀의 미모는 굉장히 고혹적이다. 하지만 찬영은 다른 의미에서 그녀에게 매력을 느꼈다.
“제이나 경은 의연하네요, 늘.”
제이나가 대답 대신 찬영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3초 정도의 정적.
찬영의 눈을 바라보던 그녀가 붉은 입술을 열어 말했다.
“네……. 뭐.”
순간 얼버무리는 그녀.
‘왜 이래?’
스스로가 믿기지 않는지 잠깐 얼굴이 붉어진 그녀였다.
뜨겁다, 얼굴이. 하지만 혼자만 느낀 부끄러움은 잠깐이었다. 뒤이어 들려오는 찬영의 말에 괜히 실망했다.
“있는 그대로 얘기한 겁니다. 더도, 덜도 말고.”
그리고 두어 걸음 앞서 걷는 찬영.
별 감정 없는 모습이다. 그녀는 그 덕에 다시 감정을 꾹 눌렀다.
‘사적인 감정은 내 일에 해만 될 뿐이야.’
요즘 들어 스스로의 감정적 흔들림이 잦아진 그녀.
괜한 생각을 떨쳐내고자 화제를 돌렸다.
“제가 아직 용건을 이야기하지 않았군요.”
찬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얘기하다보니.”
돌아서면서 말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저를……?”
“카일 대대장께 들었어요. 직접 장비 제작을 맡겨 달라 하셨다고.”
“예, 그랬었죠.”
“그 일을 좀 도와드릴까 싶었습니다.”
찬영의 눈에 궁금증이 서렸다. 어떻게 돕는다는 걸까?
“부업이 대장장이셨습니까?”
카일이 했던 질문을 그대로 제이나에게 하게 된 찬영.
제이나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럼 어떻게 저를 도우신다는 건지 전혀 감이 안 잡히네요.”
그녀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스친 직후, 이어진 질문.
“인챈트에 대해 아시나요?”
“아뇨.”
“일종의 마법이랍니다. 쉽게 말하면 아무 능력도 없는 롱소드를 아티팩트로 제작하는 작업이라고 보면 되겠네요.”
찬영이 금세 정답을 알아 맞혔다.
“아, 마법을 덧입히는 거군요.”
“네, 쉽게 말하면 그렇죠.”
찬영은 그제야 그녀의 의중을 알게 됐다.
“제 장비에 인챈트 작업을?”
“예, 그래도 괜찮다면.”
“물론입니다.”
싫을 리 있나? 아마 그녀의 인챈트가 중첩된다면 히든 퀘스트 완성이 좀 더 가속도가 붙을 것이다.
쌍수 들고 환영이다.
한데 그건 그렇고, 찬영은 인챈트에 대해 조금 호기심이 돌았다. ‘장비 위에 마법을 덧입힌다.’라…….
‘한 번도 생각 못한 방법인데?’
자세한 얘기를 듣고 싶었다.
“인챈트에 대해 좀 더 복잡한 설명을 들을 수 있을까요?”
“네, 설명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네가 알아들을까? 하며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
“저는 괜찮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부탁드리죠.”
고개를 끄덕인 제이나가 아까보다 더 디테일하게 인챈트에 대해 설명해 줬다.
“장비엔 저마다 어울리는 마법이 있어요. 충돌하지 않는 적합한 마법 주문을 찾아내야 하고 또…….”
한동안 그녀의 설명을 듣던 찬영의 눈에 흥미가 돌았다. 예전 이규복의 스텝을 보았을 때의 그 눈동자. 호기심과 배움을 향한 갈망이 뒤섞인 감정.
“혹시.”
찬영의 목소리에 그녀가 잠깐 설명을 멈추고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인챈트를 배우려면 반드시 마법이 수반되어야 합니까?”
찬영의 질문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물론이죠.”
“그래요?”
잠깐 손끝으로 턱을 쓰다듬은 찬영.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럼…….”
찬영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