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
#66.
그래, 그거였다.
타우린은 앞으로도 성장할 테고, 2차 진화 말고 3차 진화 혹은 그 이상의 진화를 거듭할 거다.
‘그러다보면 내게 중요한 전력이 되겠지. 그게 곧 날 성장시키는 또 다른 기반이 될 테고.’
그런 의미에서 어느 누구보다 뒤를 맡길 수 있는 동료가 생긴 셈이었다. 타우린이란 든든한 방패를 얻게 된 것이다.
-음모오…….
마침 타우린이 울었다. 경계하지 말아달라는 듯.
그 순간 멈춰 있던 찬영이 걸음을 옮겨 타우린에게 다가가 녀석의 이마를 쓸었다.
생김새는 훨씬 커지고 위압적이 되었어도 주인을 따르는 건 그대로인 녀석이다.
‘기피할 리가 있나? 오히려 더 기특하지.’
툭툭.
손바닥으로 가볍게 녀석의 이마를 두드려 준 찬영은 남은 3개의 영혼 조각을 새로 획득한 스킬에 투자했다.
‘다음 성장에 영향을 끼치는 건 두 번째 스킬의 Lv. 10 달성이 아닐까?’ 하는 나름 근거 있는 추측이 떠오른 탓이다.
그렇게 성의껏 스킬을 정한 그 후.
찬영은 해야 할 일이 더 없나 둘러봤다.
하지만 딱히 도울 일은 안 보인다.
‘얼추 끝난 건가.’
당장 미지의 땅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한 것 같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 * *
찬영이 머물던 천막.
지잉.
땅 위에 갑자기 전류가 흐르더니, 동시에 끼익 열리며 나타난 나무문 뒤로 찬영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곧 주위를 돌아보는 찬영.
풍경은 처음 떠날 때와 그대로다. 하지만 2차 21회란 글귀가 떠있는 걸 보면 시간이 제법 흐른 것 같다.
몬스터 전투가 끝나고 차원의 돌로 인해 기절했던 게 2차 20회 오후였고, 제이나가 대화를 나눴던 것이 2차 20회 늦은 저녁이다.
새벽 냄새가 나는데다가 2차 21회 차가 되었으니, 미지의 땅을 다녀온 동안 몇 시간이 지난 모양이다. 하지만 몇 시간에 이뤄낸 성과라고 보기엔 믿기지 않는 결과물이다.
타우린을 가치 5,000 수준의 소환수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미지의 땅 5회 채집에 이은 인벤토리 정리까지 완료했다.
그뿐인가?
부차적 보상으로 획득한 실버 1급, 10급 박스를 통해 장비 아이템 2종을 더 추가했고, 그에 더해 미지의 땅 사냥을 통해 획득한 20여종의 아이템과 본래 가지고 있던 60여종의 아이템, 이렇게 총 82종의 아이템을 임의대로 처리하라며 도타에게 전부 맡겨두고 온 것도 성과라면 성과다.
이로 인해 아마 다음 번 오두막 방문 시엔 곡괭이를 구입한 도타를 만나 볼 수 있으리라.
어쨌든 인벤토리에 남은 건 43종의 아이템.
인벤토리를 비우고 나니 나타나지 않았던 아이템이 다시 채워졌다.
인벤토리는 100칸이 넘어가면 칸을 다시 비워둬야 루팅된 아이템이 사용 가능해진다.
비우지 않으면 칸이 비워질 때까지 아이템을 사용할 수 없게 되는 시스템이었다.
그래서 찬영은 절반이 넘는 아이템 수량을 도타에게 넘기며 인벤토리를 효과적으로 정리한 것이었다.
물론, 지금의 선택을 결정할 때 히든 퀘스트 또한 고려하긴 했다. 히든 퀘스트를 위해선 여러 재료들을 제작 도구에 합성 돌리는 게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하나 코인을 버는 것 역시 찬영에겐 중요한 숙제였다. 그러나 이건 사실 우선순위의 문제일 뿐, 딱히 손해 볼 일은 없다.
한쪽은 히든 퀘스트 달성을 위한 밑거름이 될 테고, 다른 한쪽은 황무지를 개간하는 밑거름이 된다.
둘 모두 성장을 돕는 과정일 뿐이었다.
그러니 찬영 역시 딱히 어느 한쪽에 선택과 집중을 하기 보다는 둘 모두에 힘을 싣기로 결정 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결정하면서 찬영에게 든 생각은 하나였다. 하루라도 빨리 골짜기에 남은 몬스터를 토벌해 아이템 수집에 열을 올려야겠다는 거였다.
도타나 히든 퀘스트나, 아이템이 보급이 필요한 건 둘 모두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러니까…….’
헤일로 골짜기 토벌은 이제 선택이 아닌 필연이다.
마침 눈앞에 떠 있는 로그인 캘린더 2차 20회 보상 받기가 찬영에게 맞다고 대답하는 듯 은은한 빛을 내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 숙제를 해낼 차례였다. 찬영이 캘린더 창을 올려다보며 가볍게 미소를 흘렸다.
미지의 땅에서 여러 번의 전투를 치렀음에도 피로함이 안 느껴진다. 로이크와 프라이의 유산을 이어 받은 당시부터 딱히 뭘 챙겨먹거나 잠을 오래 자지 않아도 몸이 늘 가벼웠기 때문이다. 이는 분명 큰 변화였다.
그래서일까?
새벽인데도 굳이 잠을 택할 필요를 못 느낀다.
그러니…….
‘놀면 뭐할까?’
한 시라도 더 많이 훈련하고 성장에 대해 고민하는 편이 낫다.
-2차 로그인 캘린더 20회 보상 받기가 완료되었습니다.
20회 보상으로……
‘과연, 이번엔 어떤 게 나올까?’
기대를 안 하려야 안 할 수 없는 로그인 캘린더다.
무조건 당첨되는 복권을 그동안 아껴 뒀다 긁는 기분이랄까?
띵.
익숙한 소리가 들리며 새로 나타난 창에 집중하는 찬영에게 고대하던 창이 나타났다.
-20회 차 보상 받기로 인해 아톨의 인형을 획득하였습니다.
-아톨의 인형
-가치 : 940
-설명 : 인형을 찢은 후 혼령의 걸음 사용 -혼령의 걸음 사용 시, 선택한 상대에게 받은 피해를 1분 동안 100% 전이 시킬 수 있다. 1회 사용 직후 즉시 소멸.
숨죽인 채 문구를 읽은 뒤 짧은 감상평을 내렸다.
‘아쉬우면서 좋은 물건이네.’
1회 직후 소멸이라는 게 굉장히 아쉽긴 했지만 분명 쓸 만한 물건이라는 것엔 다른 이의가 없었다. 소모 시 1회 소멸 말곤 단점이 아예 없는 소모성 아이템이라고나 할까?
하나 이런 단점은 다른 소모성 아이템도 가지는 단점이다.
굳이 단점이라고 생각 안한다면?
분명 뛰어난 물건이다.
‘1분이긴 하지만 어떤 공격이든 원하는 상대에게 전이시킬 수 있다면…….’
그건 몬스터라도 상관없을 것이다.
쉽게 말해, 절체절명의 순간 공격 받은 피해를 역으로 상대에게 전이시킬 수 있다면?
상대에겐 생각지도 못한 한 방이 되리라.
물론 당장엔 쓸모없는 물건이긴 하지만 어떤 변수가 찾아올지 모르는 게 세상일이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번 보상 역시도 기대를 저버리진 않은 셈이다.
다만 걱정되는 게 하나 있다면…….
‘이걸 언제쯤 쓰게 될까?’
하지만 글쎄, 아무것도 장담할 수는 없다.
대신 확실한 건 하나다.
‘이 아이템을 쓸 날이 온다면 그 날은 분명, 내게 위험한 날이 되겠지.’
그러지 않고서야 이 아이템을 꺼낼 일은 없을 것이다.
찬영은 그 생각을 끝으로 손에 쥔 인형을 인벤토리에 넣어 뒀다.
* * *
그 직후 찬영은 천막을 빠져 나왔다.
여전히 할 게 많았다.
히든 퀘스트 수행은 물론 제이나와 차원의 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해야 했다. 엉덩이 붙이고 앉아 있을 여유가 없다.
쿵쿵.
마침 들려오는 망치 소리들. 소리에 이끌려 고개를 돌리니 밖에선 전선 재건을 위한 공사들이 한창이다.
영주가 가져온 보조 아이템 덕분에 새벽에도 공사가 가능해진 모양.
‘참, 놀랍단 말이야.’
마법공학이란 건 보면 볼수록 과학 만큼 경이롭다.
일례로 지금 공사장을 밝히고 있는 빛만 봐도 그렇다. 케어라이트를 대형 사이즈로 만들어 전선 안을 대낮처럼 밝히고 있지 않나. 물론 그 외 나머지 보조 아이템들도 공사 현장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는 중이고.
‘이대로라면 전선은 금방 회복될 거야.’
그 속에서 바삐 움직이는 레인저와 엘프들.
그들의 눈에는 이제 희망이 깃들어 있다.
달라진 분위기를 찬영이 피부로 확연히 느낀 건 공사 현장을 향해 걸어가면서부터였다.
찬영이 바삐 움직이는 이들을 지나치며 걷기 시작하자, 바쁜 와중에도 그를 발견한 몇몇 레인저들이 반갑게 인사를 건네 왔다.
“반갑습니다, 갓피스!”
“언제까지 틀어 박혀 있을 겁니까! 빨리 좀 도와줘요!”
“혼자 쉬기 있습니까?”
입과 손으로 휘파람까지 불어가면서 찬영을 반기는 그들의 모습은 이제 여유가 넘쳐흘렀다. 예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거기에 더해 찬영을 향한 경계심은 사라지고 이젠 그를 향한 신뢰가 가득했다. 눈인사를 통해 화답하면서 걸어가는 찬영. 처음 헤일로 전선에 방문했던 것과 비교하면 천지 차이가 따로 없다.
이번 전투의 영향이…….
‘헤일로 재건에만 영향을 미친 게 아니구나.’
찬영은 확신했다. 그들의 표정과 눈빛만 봐도 그건 자신할 수 있다.
이제 헤일로의 승전보는 다른 던전 구획을 토벌하러 간 다른 병력들의 사기를 드높일 테고, 절망 끝에 좌절하던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다.
나쁜 소식이 쉬쉬해도 삽시간에 퍼지는 것만큼 좋은 소식 역시 삽시간에 퍼진다.
그러니 전선 분위기가 좋아지는 건 당연한 일, 덩달아 작업 능률이 오르는 건 부차적인 시너지 효과다.
찬영은 잠깐 멈춰 서서 공사 현장을 지켜봤다.
‘이대로라면 금방 끝나겠는데…….’
벌써 망루를 세우기 위한 터 작업이 진행된 것만 봐도 그랬다. 시간이 갈수록 작업 진행 속도는 더 빨라지리라.
현황이 궁금해진 찬영이 히든 퀘스트를 곧바로 확인했다.
-퀘스트 완료 조건
-목책 재건 : 8%를 100% 로 완성하세요.
-망루 재축조 : 0개를 다섯 개 늘리세요.
-생존자 43명-부상자 : 14명을 회복시킨 후 다양한 방법을 택해 성장시키세요. 가치 측정 시 평균 5,000이 되어야 합니다.
-현황 평균 : 3,520
‘목책 재건이 8%나 늘었어.’
생각대로다. 작업 속도는 영주가 데려온 병력 지원을 통해 예상보다 빠른 성과를 내고 있었다.
스륵.
그사이 찬영의 뒤로 커다란 그림자 하나가 다가왔다.
베이콥 영주였다.
“이제야 제대로 인사를 하는군!”
“영주님.”
찬영이 공손히 인사를 건네자 영주가 손사래를 쳤다.
“됐네. 우리 사이에 무슨…….”
씩 웃은 그가 찬영에게 어깨동무를 하면서 말했다.
“이보게, 찬영.”
“예.”
“소감이 어떤가?”
“소감이요?”
영주가 공사 현장을 가리키며 덧붙였다.
“껄껄! 저들을 살린 소감 말일세!”
“아…….”
이후 찬영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잠깐의 정적 후 무겁게 입을 떼는 찬영.
“솔직히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암, 물론이지!”
“안도했고 지금은 기쁩니다. 살아난 사람들을 보면서. 하지만.”
찬영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희생을 더 줄이지 못했다는 생각역시 한 편에 지우진 못하겠습니다. 다른 최선이 있었다면…….”
누구에게도 꺼낼 수 없이 감춰두고 있던 마음 한 가닥. 그게 영주와의 대화를 통해 불쑥 튀어나왔다.
찬영의 마음을 들여다 본 영주가 충고했다.
“중압감에 집중하지 말게. 그리 되면 언젠가 무너져.”
구구절절한 조언도 아닌, 단 한마디지만 영주의 말이 진심으로 와 닿았다.
‘하긴…….’
그의 말처럼 누군가의 죽음은 전쟁 중에 계속 일어난다. 자신은 갓피스이기 이전에 일개 개인이다. 최선은 다해도 손이 닿지 않은 것들은 막을 수 없다.
하지만 할 수 없었던 것에, 무기력했던 것에 집중하면 그 중압감은 언젠가 자신을 집어삼킬 게 틀림없다. 다른 것에 집중해야 한다.
‘그래, 하던 대로 하면 돼.’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들을 말이다.
역시 괜한 걱정과 잡념은 스스로를 갉아 먹는 고민들만 잔뜩 불러올 뿐. 당장 해야 할 일들에 크게 도움 되지 않는 것 같다.
털어내자고 스스로 다짐하는 찬영이었다.
“무슨 말인지 알거라 보네.”
“예, 알 것 같습니다.”
찬영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영주 역시 굳은 표정이 풀렸다.
“다행이군. 그래, 하지만 노파심에 한마디 더 거들자면.”
영주의 푸른 눈이 그윽해졌다.
“그들의 사기를 높인 건 자네의 결정 덕분이었다네. 적어도 오늘은…….”
영주가 씩 웃었다.
“성공적이야. 그렇지 않은가?”
“예, 맞습니다.”
찬영은 영주의 격려 덕분인지, 직면하지 않고 마음 속 깊이 감춰두었던 부담감들이 일거에 씻겨나가는 기분이었다.
이런 걸 보면 연륜과 경험은 돈으로 살 수 없다는 걸 느낀다. 그런 면에서 영주는…….
‘내게 좋은 스승이지.’
그새 영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 그럼 내 거처로 가지. 긴히 할 얘기도 있고.”
찬영은 따라나서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잠시 기다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음? 어째서?”
“좋은 조언 해 주신 대로…… 움직여 봐야죠.”
“어디로?”
영주의 물음에 찬영이 짤막하지만 어느 때보다 명확한 의지를 담아 대답했다.
“당장 해야 할 일이 있는 곳으로 갑니다.”
영주는 순순히 납득했다.
그러면서 오히려 흥미로워했다.
그가 자리를 떠난 찬영의 뒷모습을 보며 영주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번엔 또 무슨 사고를 칠지 궁금하군그래. 단신으로 헤일로 골짜기를 수호한 것도 모자라 다음 계획은 무슨 바람을 일으키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