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
#62.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겠다고 말한 뒤, 찬영은 기절하기 직전 보았던 창들부터 뒤적였다.
‘제이나에 의하면 유혹의 돌이 사라졌고…….’
자신의 눈앞에 지금의 창이 나타났다.
‘결국 시스템이 말하는 차원의 돌과 뉴빌드가 말하는 유혹의 돌이 이름만 다르지, 같은 물건을 뜻한다는 건데.’
그렇다면…….
-두 번째 차원 다리까지 개방도 : 32%
-차원의 돌을 수집하세요.
‘놈들이 대륙 복원의 키를 일부 쥐고 있단 건가?’
아마 현재로썬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문구 그대로 차원의 돌 수집을 100% 달성해야만 차원 다리가 열린다면 말이다.
물론 그곳을 수복해야 한다는 단서가 붙은 걸로 보아…….
‘오디와 같은 녀석이 차원 다리를 지키고 있겠지.’
찬영은 괜히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오디는 정말 힘든 상대였다.
지금이라면 손쉽게 상대할지도 모르지만 가뜩이나 여러 차례의 싸움으로 지쳐 있던 당시에는…….
정말 죽을 각오로 임했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엔 조금 다를 거다.
‘혼자가 아니야.’
당시엔 여러 상황에 발목 잡히는 게 싫어 혼자 오디와 싸웠지만 아무런 상황적 제약이 없는 지금은 다르다.
만반의 준비를 갖춰 차원 다리로 떠날 수 있을 테고, 또 다른 갓피스인 제이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다.
그녀와 함께 똑같은 차원에 들어갈 수 있을 거라 확신하는 데엔 G.N.의 무리한 선 진입 당시 벌어졌던 상황이 타산지석이 되어주었다.
그로 인해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능해진 것이다. 대륙 복원 이벤트를 할 수 있는 건 시스템과 관련 있는 사람만 가능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 말은…….
‘갓피스에게 그 자격이 주어진다.’
달리 그것 말고 그게 가능한 이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추측이긴 하지만 분명 확실한 근거가 있는 추측이다.
이쯤 되면 확신이라 해도 무방했다.
물론.
‘이 모든 건 문이 열린 후에야 가능한 일이겠지.’
그러니까 차원의 돌부터 찾는 게 급선무였다.
하나 이는 쉽게 해결 될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카슬라를 마지막으로 놈들의 흔적이 사라졌다고 했다.’
놈들은 암중에 모습을 감추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카슬라의 죽음으로 놈들도 놀랐을 터였다.
이전보다 놈들을 찾기가 쉽진 않을 것 같다.
‘시간이 걸릴 일이니 차근차근 준비해야겠어.’
조급해하지 않기로 했다. 카슬라의 얘기만 기억해 봐도 놈들이 원하는 건 세상의 ‘종말’.
그렇다면, 잠자코 숨어 있기만 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 몬스터의 곁에 숨어 있다.
‘언젠가 모습을 드러낼 테고. 그때 꼬리를 잡아야 해.’
그게 대륙 복원 두 번째 단계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니 그때까지 알폰 지방의 모든 던전을 수복하면서 놈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면 된다.
‘몬스터가 토벌될수록 마음이 급해지는 건 놈들일 테니까.’
알폰 지방이 안정될수록 놈들이 자주 나타날 건 자명할 것이다. 찬영은 그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제이나와 영주 둘과 함께 깊은 상의를 해 봐야 할 문제겠지만.
아무튼…….
‘대륙 복원에 새 단서가 등장했다는 건 좋은 일이지.’
‘어떻게 복원을 시작해야 하나? 마냥 몬스터 토벌만으로 될까?’
조금, 막막했던 차였다.
하지만 이번 일로 어떻게 준비해 나갈지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차원의 돌을 쫓음과 동시에 알폰 지방의 완벽한 토벌. 이 두 가지 길을 두고 앞으로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면 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선 충분히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그러니 이 생각은 이쯤 해 두고.’
미뤄 뒀던 박스부터 개봉했다. 오랫동안 묵혀 뒀던 골드 6급 박스 한 개와 실버 3급에서 골드 8급까지 나오는 랜덤 박스를 통해 획득한 실버 1급 박스.
그리고 스토리 퀘스트 발생 업적으로 획득한 골드 10급 박스다. 그에 이어 차원 다리를 통한 메인 퀘스트 발생 업적 역시 함께 띄워져 있었다.
보상은 골드 1급 박스.
그렇다면 현재 가진 박스는 네 개.
‘모아 뒀다 박스 강화를 할까? 아니면 지금 개봉할까?’
잠시 고민이 됐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히든 퀘스트의 수행을 위해선 아이템이 필요하다.
골드 1급과 골드 10급 박스에서 그들을 위한 완제품 장비가 튀어나온다면야 더욱 좋고.
그러니…… 개봉.
-실버 1급 박스가 개봉되었습니다.
-골드 6급 박스가 개봉되었습니다.
-골드 10급 박스가 개봉되었습니다.
-골드 1급 박스가 개봉되었습니다.
연달아 띄워지는 창.
늘 느끼는 거지만 박스 개봉 시엔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도 받는 사람처럼 마음이 설렌다.
띵-!
그사이 개봉이 완료됐다.
‘오. 쓸만한 걸.’
골드 6급에선 ‘벨리알의 벨트’라는 허리띠가, 실버 1급에선 ‘마커스의 블레이드.’가 나왔다.
그리고 골드 10급 박스에선 예상치 못한 게 개봉됐다.
-인라의 퍼즐조각 (4)
가치 : ?
설명 : 인라는 퍼즐을 흩트려 놓아 유산을 남겨 뒀다. 퍼즐 전부 획득 시 인라의 유산 위치가 드러난다.
수집하고 있던 아이템 중 또 다른 조각이 튀어나온 것이다.
‘오랜만이네.’
이번 조각은 인라의 오른쪽 발바닥과 발목이었다.
완성형에 한 발짝 더 다가가게 된 것이다.
다만 걸리는 게 좀 있다면…….
‘조각이 몇 개인지 감이 안 잡힌다는 거지만.’
이렇게 하나씩 모으다보면 언젠가 완성형이 되리라 생각한다. 느긋하게 적금하는 기분이다.
‘음…….
뒤이어 골드 1급 박스를 돌아보던 찬영의 눈에 이채를 띠었다.
-골드 1급 박스의 개봉으로 인해 아이템 대신 희박한 확률로 박스 겜블러가 나타났습니다.
-겜블러의 제안에 응하지 않으실 경우, 겜블러는 다음 소환 시까지 다시 소멸하고 박스는 본래 등급대로 개봉합니다.
-단, 제안에 응할 경우, 5가지 카드가 나타납니다.
5가지 카드 중 택일하세요.
-5가지 카드 중엔 기존 박스보다 5급 높은 박스도, 12급 낮은 박스도, 그 중간의 박스도, 꽝 또한 존재합니다.
-겜블러가 묻습니다. 겜블하시겠습니까? (예/아니요)
찬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겜블이라…….’
실로 매혹적인 조건이었다.
찬영은 빠르게 저울질했다.
그냥 가지고 있는 골드 1급 박스를 개봉할 것이냐, 아님 더 큰 이득 혹은 손해를 볼 것이냐…….
하지만 결정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간 개봉한 상자들을 비추어 봤을 때, 골드 1급 정도의 장비는 현재 갖추고 있는 장비와 비교도 되지 않을 수준이었다.
물론 다른 면에서 보면 골드 1급 박스를 개봉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굳이 자신이 아니어도 품질 좋은 골드급 아이템이 목책 전선의 병력을 강화시키는 데 쓰일 테니까. 추가로 히든 퀘스트를 완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나 그 대신 좋은 기회를 얻을 확률 자체를 아예 닫아 버려야 한다. 이미 플래티넘 상자를 통해 염왕권이라는 어마어마한 보상을 획득했다. 다른 플래티넘 박스에선 어떤 것이 나올지 상상조차 안 된다.
‘플래티넘 상자가 또 언제 나올지도 모르는데…….’
안정성이란 이유로 대박의 가능성을 아예 닫아 버리고 싶지 않다.
이런 최고의 기회를…….
‘마다할 수 없지.’
아무리 플래티넘 박스 보상을 얻을 수 있는 기회와 골드 1급 박스를 유지했을 때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이득을 저울질 해 봐도 이건 못 먹어도 GO다.
‘받아들이지.’
동시에 나타나는 창.
-손해를 감수하고 1분도 되지 않아 제안을 받아들인 그대의 결단력에 겜블러가 감탄합니다. 결정 제한시간 1분 조건을 달성하여 겜블러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로 인해 골드 1급 박스보다 높은 박스를 획득할 수 있는 확률이 대폭 상승합니다.
고민은 신중하고 깊이. 결정은 빠르게.
우유부단함 없이 단호한 결정을 내린 찬영에게 내려진 추가 보상.
그건 그의 행동이 가져온 또 다른 행운이었다.
‘기대해 볼만하다!’
이 기회로 인해 찬영의 입가가 씰룩였다.
촤라락.
그 다음 나타난 창은 직사각형의 카드판이었다.
살아 있는 손이 창 위에 나타나고 그 손이 카드를 섞기 시작한다.
마치 포커판을 연상시키는 듯한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겜블러가 말합니다. 카드가 섞였습니다. 이제 당신의 선택입니다.
곧 녹색 카드판 위에 나열되는 백색 바탕을 가진 카드들.
그 카드 위엔 푸른 글씨로 1, 2, 3, 4, 5 가 적혀 있었다.
이젠 숫자를 고를 차례가 되었다.
찬영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굉장히 중요한 선택이다. 딱히 상대의 표정이나 행동 등을 보고 패를 맞추는 게임이 아니기에 더욱 어렵다.
그저 섞여 있는 카드들 중 직감만으로 좋은 카드를 뽑아야 하기 때문이다. 찬영은 마른침을 삼키며 가운데 있는 카드를 향해 차분히 손을 뻗었다.
기대감과 설렘, 그런 감정들이 마음속에 휘몰아친다.
스륵.
뒤따라 겜블러의 손이 흐릿해지면서 카드가 놓여 있던 창이 사라졌다.
띵.
마침내 보상 결과가 찬영이 눈앞에 뜬 순간.
-플래티넘 9급 박스가 택일되었습니다. 높은 수준의 보상입니다. 겜블러가 겜블 1회 추가를 선물했습니다.
-제안에 응할 경우, 겜블의 룰이 변형됩니다.
-1에서 5까지의 다섯 장의 숫자 카드 중 두 장의 카드를 보지 않고 랜덤으로 뽑습니다.
-그 다음 겜블러가 예상 총합 숫자를 정합니다.
-만약, 겜블러가 10을 호명했을 경우, 두 장의 카드 총합이 10 이상일 경우에 승리하고 10 이하일 경우엔 겜블러가 승리합니다.
-단, 새로운 겜블에서 패배할 경우, 기존에 획득한 보상은 겜블러에게 회수됩니다.
-승리할 경우엔 기존 보상보다 5급 높은 보상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응하시겠습니까? (예/아니요)
5급 높은 보상이라면, 무려 플래티넘 4급 보상이다.
‘맙소사.’
찬영의 표정에 흥미가 감돌았다.
솔직히 당장 제안에 응하고 싶다.
하나 게임의 룰이 변형되었고 변형된 게임의 룰은…….
‘내 쪽에서 정한 게 아니야.’
물론 처음 카드 뽑기 할 때도 그랬으니 그건 그렇다 쳐도, 지금까진 스스로 좋은 보상을 이뤄 냈다고 말할 수도 있을 정도다.
최악의 경우의 수까지 감수할 생각으로 배팅한 거였으니까.
하지만 이번엔 아니다.
이번엔 보상 자체가 아예 소멸되거나 아니면 대박 둘 중 하나다. 오로지 보상 욕심 하나만 기대서 배팅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건…….
‘원하지 않아.’
그게 찬영의 대답이었다.
-1회 추가 겜블을 거절한 당신을 겜블러가 흥미롭게 바라봅니다. 욕심을 배제한 당신의 결단을 존중해 하며 행운의 동전을 선물합니다. 행운의 동전 획득 이후 겜블러로부터 다시는 행운의 동전 보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1회 제한)
-행운의 동전
-가치 : 4,000
-설명 : 겜블러가 절제력이 높은 손님에게 주는 한정판 동전.
-고정 등급 박스가 아닌 ‘? 급 ~ ?급’ 랜덤 박스 사용 시 동전을 개봉할 수 있다.
랜덤 박스에 한해, 최고 등급 박스가 나올 확률이 30% 상승한다.
그리고 이어진 겜블러의 화답이었다.
‘날 좋게 본 건가?’
아마도 그런 듯싶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대박 아이템을 선물할 리가?
‘겜블러라서 그런 건가? 보상이 굉장히 후하네.’
그가 내어주고 간 동전은 그야말로 보상계의 혁명이라 해도 무방했다.
후일, 노력 끝에 플래티넘이나 아직 나타나지 않은 그 이상의 윗 단계 상자를 받았다고 생각해 보자.
그때 이걸 쓴다면?
‘높은 확률로 상위 단계 상자에 진입할 수 있겠지.’
무려 30% 상승이라면 충분히 기대하기 충분한 확률.
그야말로 잭팟인 셈이다.
‘잘한 거야. 겜블을 멈춘 건…….’
찬영은 새삼 이번 결정들이 나름대로 어리석지 않았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과유불급이라 했지.
역시 옛 성현들의 고견은 괜히 있는 게 아닌가 보다.
그럼 이제…….
플래티넘 9급 박스를 개봉해 보실까?
* * *
찬영이 플래티넘 박스를 보고 있을 그즈음, 영주는 카일과 독대하고 있었다.
“열흘 안에 마법 병단 2개 소대와 기사단 3대대, 그리고 각성자 13편대가 보급품을 실은 짐마차 열 대를 호위해 이곳에 당도할 것이오.”
카일이 대답했다.
“고맙습니다.”
“아니오. 수 세대를 거쳐온 헤일로 엘프의 우방으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이지. 다만 내 능력이 미력해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해 미안할 따름이외다.”
베이콥 영주는 진심으로 미안해했다. 이제껏 그들의 희생을 몰라 외면한 게 아니다. 다만 이곳보다 다급한 장소들도 많았고 당장 파견 나가 있거나 전선을 유지하고 있는 병력들을 전부 후퇴시키기 힘들었다.
병력 운용은 신중히 해야 한다. 그게 영주성 아니 알폰 지방을 지켜야 할 수호자인 자신의 몫이다.
하나 그런 이유들을 둘째 치더라도. 이런 대규모 공습을 더 신속히 대처하지 못한 건 불찰이라면 불찰이었다.
영주는 그에 대해 사과를 하고 있는 것이다.
카일이라고 왜 이를 모를까?
그가 봐 온 영주는 충분히 어진 덕망의 소유자였다.
“아닙니다. 갓피스의 힘과 지혜가 저희를 지켜 냈으니…….”
그제야 영주의 굳은 표정이 조금은 풀렸다.
그가 웃었다.
“껄껄, 통신구로 내 뭐라 했소. 놀라움을 줄 사람이라 하지 않았소?”
“인정합니다.”
카일의 무표정에 잠깐 미소가 스쳤다가 사라졌다.
동시에 영주가 덧붙였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논의해봅시다. 헤일로 골짜기 토벌과 함께 이뤄질 때, 우리가 자랑했던 지하수로 재건 계획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