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
#58.
쾅! 쾅!
목책 500m 앞.
줄지어 늘어서 있던 대형 트랩들이 연이어 터졌다.
끼익! 끼익!
블루 버드 여덟 마리가 목책 바로 위에서 하늘을 빙글 선회하며 적들을 향해 경계 섞인 울음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 소리 따위 아랑곳 하지 않는 레드 스컬 부대. 몰려온 놈들은 피할 생각도 않고 트랩들을 온몸으로 맞이했다.
기기긱!
온갖 칼날이 숨겨진 구덩이부터, 마정석을 응축해 밟으며 터지게 되어 있는 마나 지뢰까지. 앞 열의 레드 스컬들 중엔 제대로 서 있는 걸 찾기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트랩들로 인해 피어오른 먼지바람 사이로 드러나기 시작한 후열의 레드 스컬들의 숫자는 선봉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지 않았다.
기기긱!
한때 헤일로 골짜기에 서식하던 온갖 맹수들은 전부 레드 스컬이 되어서 압도적 포악함을 보였다.
타타탓! 구구궁!
어마어마한 속도로 달려오는 백여 마리의 맹수형 레드 스컬들. 놈들이 일제히 달려오자 땅이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놈들을 제지할 트랩은 없다. 고베이가 망루 위에서 놈들이 달려오는 걸 보며 명령했다.
“당장 슬롯을 사용하게!”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베이의 옆에 커다란 깃발을 손에 쥔 레인저가 황급히 붉은 깃발을 좌우로 휘저었다.
그러자.
“슬롯 개방!”
“슬롯 개바앙!”
목책 사이사이, 가로 1m 세로 1m의 네모난 창문 뒤에 얼굴을 내민 동료들은 일제히 고베이의 명령을 따랐다.
우웅! 우웅! 우웅!
그러자 목책 뒤에 요동치는 마나흐름.
수십 개 네모난 문이 포문처럼 마법을 쏟아 냈다.
쐐액!
대부분은 헤일로 전선을 대표하는 마법.
윈드 스피어가 주력 마법이었고 나머지는 적의 대열을 흩트리는 종류의 마법들이었다.
쾅!
이를 테면, 바람 누르기, 3서클 마법사 두 명 정도가 함께 사용하는 이 마법은 바람을 구체로 만들어 땅에 떨어트리는 거였다.
쾅! 쾅! 쾅!
그 노력이 전혀 성과가 없던 건 아니었던지, 기세 좋게 달려들던 대부분의 맹수형 레드 스컬이 뼈가 산산조각 난 채 땅에 널브러졌다.
하지만 고베이의 굳은 표정은 여전히 풀릴 생각이 없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망루에선 보였다.
맹수형 레드 스컬이 몰려나왔던 숲 사이로 잿빛 피부를 가진 부대가 하나 둘씩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는 걸.
“케케켈.”
“키키킬. 살아 있는 것들이여. 죽어라. 키키킬.”
몬스터 주제에 인간의 말까지 따라할 줄 아는 지능형 몬스터, 라비. 난쟁이인 놈들은 제 키보다 두 배는 큰 지팡이에 기댄 채 섀도 헌터 부대를 끌고 온 것이다.
그뿐인가? 라비들이 몰고 온 건 섀도 헌터뿐이 아니었다.
몸집이 4m에 이르는 대형 살육 까마귀.
레이븐이란 몬스터를 데려왔다.
-까아악! 까아아악!
하늘 위에 새까맣게 수놓아지기 시작한 검은 까마귀 떼.
놈들은 이미, 목책을 뒤덮기 시작했다.
이를 본 고베이가 두 눈을 부릅떴다.
늘 차분하던 고령 엘프인 고베이조차 이번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인가!’
믿기 힘들다.
이제껏 레드 스컬이 오랫동안 라비와의 영역 싸움에서 버텨온 건 놈들이 이미 죽었다가 해골 형태로 부활했기 때문이다.
한 번 죽었다 레드 스컬로 재탄생한 것이기에 라비의 능력이 소용없었던 것이다.
한데…….
‘놈들이 라비의 말을 듣고 있다?’
이것부터가 이제껏 그들이 알고 있는 헤일로 골짜기의 생리를 반하는 거였다.
‘심지어 레이븐은 죽은 상태도 아닌 듯한데!’
보통 라비에 의해 부활이 되면 몬스터건 사람이건 엘프건 모두 잿빛 피부 혹은 가죽이 된 채 이지를 상실한다.
한데 레이븐은 여전히 검은빛 깃털을 보유한 채 날아오고 있다.
‘규합하지 않던 몬스터들이 일제히 규합이라도 했다는 것인가!’
그래, 그게 아니고서야 이런 상황을 납득할 수 있을 리가…….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젊은 엘프가 물어왔다.
고베이는 대답 대신 자신의 활을 잡았다.
절망적인 상황.
이런 순간엔 그저 할 수 있는 걸 다 할 뿐.
“전면전을 준비하게. 우린 죽어서도 헤일로 협곡을 지킬 테니. 아니 그런가?”
마음의 짐을 덜어주려는 듯 젊은 엘프가 웃어 보였다.
“헤일로를 위해!”
* * *
쾅!
시작은 생존한 소수의 레드 스컬들과 목책의 충돌이었다.
기기긱!
맹수형 레드 스컬이 목책을 부수기 위해 제 몸을 부숴가면서 목책에 계속 부딪쳐 갔다.
그러자 ‘까악!’ 소리를 내며, 여러 마리 레이븐이 휘몰아치듯 날아와 레드 스컬들의 몸통을 두터운 발톱으로 낚아채 위로 붕 띄워 주었다.
기기긱!
그 덕에 레드 스컬들이 단숨에 목책을 뛰어 넘어 안으로 뛰어들던 그때, 망루에서 내려온 고베이가 두 개의 화살을 동시에 날렸다.
탁.
그리고 이어진 마법 주문.
날아가는 화살에 덧씌운 4서클 마법.
“토네이도 스윙.”
날아가는 화살 위에 덧 씌워진 회오리 마법이 레드 스컬이 땅에 닿기도 전에 머리부터 꼬리를 일직선으로 꿰뚫어 버렸다.
콰콰콰!
하지만 그사이 여섯 마리 레드 스컬이 목책 안으로 진입했다.
‘이런!’
진입한 레드 스컬을 그대로 놔두다가는 대열이 흐트러지고, 그럼 목책 전선이 어디 한 군데 뚫릴 것이다.
목책 전선은 그나마 대규모 병력으로부터 포위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어책이다. 저곳이 뚫리면 목책 방어 병력보다 수배는 더 많을 몬스터 부대가 밀려들어 온다.
타닷!
당장 부대장급은 모두 자리를 비운 상태.
고베이는 기꺼이 선봉에 서서 레드 스컬 정리에 나섰다.
콰직!
하지만 그사이, 하늘 위를 선회하던 레이븐 떼가 전략을 바꿨다.
퍼덕퍼덕!
섀도 헌터들을 두세 명씩 발톱으로 붙잡아 목책 안에 투하하기 시작한 것이다.
섀도 헌터들이 목책 안에 하나 둘씩 낙하하며 진입했다. 목책 전선 안쪽이 전장이 되어 버렸다.
“으악!”
“이, 개자식들!”
“크헉!”
서서히 죽어가는 동료들.
쾅!
기어코 목책 일부가 뒤로 기울어졌다.
한쪽이 무너지자 지탱하던 힘의 균형이 깨진 목책들이 일제히 뒤로 무너져내려간다.
콰콰쾅……!
보고 싶지 않았던 절망의 순간.
구구궁!
목책들이 일제히 무너져 내려 간다. 이를 쳐다본 고베이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결국…… 막을 수 없었던 것인가.’
동시에 ‘키키킬.’ 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면서, 난쟁이 라비들이 목책을 밟고 대거 등장했다.
여유롭게 시체 수거를 시작하는 놈들.
방금 죽은 동료 시신 밑에서 갈색 뿌리가 튀어 올라 그들의 영혼을 갈취했다.
저주 받을 마법이 동료들을 섀도 헌터로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야말로 악순환.
“그으윽…….”
“그으윽…….”
방금 전만 해도 든든했던 우군들이 섀도 헌터가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이대로라면 다 흩어진 채 죽어갈 것이다.
고베이는 결정했다.
아직 다 못 죽인 레드 스컬에 집중하는 것보단 동료들을 다시 규합해 마지막 사투를 벌이는 게 더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가 물러나며 외쳤다.
“나를 중심으로 모이게!”
부상 입거나 아직 버티고 있는 엘프, 레인저들이 하나 둘씩 물러나면서 고베이를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공중과 지상, 어디로도 빠져나갈 구멍 따윈 없었다.
처음부터 퇴각 따위는 생각지 않았으나 운명이 낭떠러지 끝에 놓인 게 사실이었다.
“후우…… 후우…….”
고베이는 회색 머리카락을 머리 위로 쓸어 올리며 절망적인 전황을 쳐다보았다.
그를 중심으로 모여든 아군들은 그래 봐야, 이제 수십 명.
적은 여전히 수백이다. 아니, 더 늘어났다.
죽은 동료들이 섀도 헌터가 되어서 놈들에게 합류한 것이다. 그로 인해 목책은 놈들에 의해 장악된 상태였다.
더구나 뭉쳐 있는 그들을 향해 섀도 헌터, 몇 마리 남지 않은 레드 스컬은 지상에서 그들을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레이븐들이 그들을 낚아채기 위해 하강하고 있었다.
모두의 눈빛에 두려움이 실렸다. 버리고 싶어도 버릴 수 없는 게 공포심이니까.
그러자 고베이가 외쳤다.
“우린 못 살아나갈 걸세!”
솔직한 심정.
“하지만 버티고 싶네. 살육에 미친 몬스터 따위에게 굴복하고 싶지 않네. 그대들도 그러하리라 믿네.”
뒤따라 들려오는 동료들의 목소리.
아마 이게 그들의 유언일 것이다.
그들이 긴장을 털어내듯 한두 마디씩 거든다.
“암요.”
“물론입니다. 고베이님!”
“우리가 다 귀한 목숨이라는 걸 똑똑히 가르쳐 줍시다!”
고베이는 슬펐다.
그리고 쥐고 있던 활을 버렸다.
화살이 다 떨어진 탓.
대신 최후를 오연히 맞이하면서 롱소드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잊힌 세계수여, 또 다시 우릴 버리시나이까?’
한데 그 순간, 공중을 빼곡히 메운 레이븐 덕에 새까맣기만 하던 하늘 사이로 푸른빛의 균열이 일어났다.
‘저게……뭐지?’
고베이가 의아해 하던 그때, 그 푸른빛이 하강하는 수십 마리의 레이븐을 뒤덮어가기 시작했다.
파드드드득!
난데없이 밀려든 빙결 폭풍이 레이븐 떼를 일제히, 얼어붙게 만든 거다.
하지만 고베이는 알 수 있었다.
‘대규모 얼음 마법인가? 아니, 그런 게 아니다!’
푸른 빛 사이로 인영 하나가 허공을 가로지르는 게 보였다.
공중을 나는 레이븐의 등을 제 집처럼 드나드는 존재.
그리고 그가 든 검, 푸른빛의 정체는 바로 그 검으로부터 시작됐다.
콰콰!
검에서 뻗어진 푸른 호선이 허공을 휘저을 때마다 그 선의 반경 안에 닿는 모든 게 얼어붙는다.
-까악!
위험을 느낀 레이븐들이 도망가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방향을 선회하기도 전에 커다란 대검이 놈들의 날개를 얼려버렸다.
슈아아앙!
전황의 흐름이 묘하게 바뀐 건 그때부터였다. 하강하던 레이븐 떼가 더는 날갯짓을 하지 못하고 하강하던 속도 그대로 푸른 유성처럼 추락했다.
쾅! 쾅! 쾅! 쾅!
얼어붙은 레이븐 떼가 적아를 가릴 리 만무하다.
콰콰콰!
기기긱!
아직 살아남은 레드 스컬이 추락한 레이븐을 피하지 못하고 자기네들끼리 부딪치며 박살났다.
라비조차 추락하는 레이븐을 피하고자 사방으로 흩어졌다.
살아남은 병력을 한 치의 틈도 없이 둘러쌌던 몬스터 부대가 썰물 빠지듯 사방으로 흩어지는 장관이 벌어진 것이다.
쐐액!
동시에 부서진 목책 뒤로 두 개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토네이도 스윙.”
“윈드 스피어.”
화살에 덧씌워진 마나 소용돌이가 라비들을 저격하고, 날아온 바람의 창이 라비의 지팡이를 부숴 버렸다.
“키이이익!”
칼날 같은 소용돌이와 함께 날아온 화살촉에 가슴이 뻥 꿰뚫린 대 여섯 마리의 라비들.
설마 목책 너머 적이 등장할 줄은 몰랐는지 라비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토네이도 스윙.”
“윈드 스피어.”
하지만 끝이 아니다.
마법은 또 다시 라비의 등 뒤로 날아왔다.
콰앙! 콰앙!
곧 부서진 목책을 밟고 모습을 드러낸 세 사람이 보였다. 저 멀리 지켜보던 고베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들이…… 돌아오다니!”
뒤따라 카일의 성난 목소리가 목책을 휩쓸었다.
“끝까지 싸우라! 헤일로의 전사들이여!”
상처 입은 도레인조차 카일의 뒤를 보조했다.
“멈추지 말고 나아가자!”
바닥에 떨어진 또 한 자루의 롱소드를 낚아챈 벡이 양손에 두 개의 롱소드를 쥔 채, 레드 스컬 시체 위에 침을 뱉었다.
“다 죽여 버리겠다!”
단 세 사람의 합류였으나 계속 고립됐던 레인저들에겐 기대하지 않았던 기적이었다.
고베이를 필두로 지쳐 있던 헤일로 전선의 병력들이 다시 무기를 고쳐 쥐고 돌격했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쐐액!
혼란에 빠진 라비들 한가운데로 추락하는 존재가 있었다.
쾅!
얼어붙은 레이븐이 추락하자 ‘콰직!’ 두어 마리의 섀도 헌터가 도망치지 못하고 휩쓸렸다.
그오오.
그리고 피어오른 먼지바람.
터벅.
그 속에 기척이 있었다.
이를 느낀 섀도 헌터들이 일제히 마법을 난사했다. 순식간에 마법, 화살 등이 먼지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당연히 들려와야 할 굉음이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흙먼지 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서서히 바람이 걷혀지기 시작하자, 그 이유가 드러났다.
마법, 화살 할 것 없이 모든 것들이 허공에 뜬 채 속박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중첩된 그래비티 필드에 의해 마법은 무효화 되고 모든 화살이 바닥에 힘없이 널브러졌다.
터벅터벅.
하나 섀도 헌터는 살육만을 위해 다시 태어난 존재, 놈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찬영을 향해 쇄도했다.
일백이 넘는 잿빛 존재가 단 한 명, 찬영을 제거하기 위해 달려 나갔다.
찬영은 당황한 기색 없이 기다렸다는 듯.
“공진.”
망토를 소환했다.
뒤이어 목을 두르며 몸을 둘러싸는 검붉은 망토.
그의 눈빛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광화狂火 발동.”
다 보여주려면 아직 멀었다.
화르륵!
몸을 둘러싼 검붉은 망토가 변화를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