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
#57.
발걸음이 무거워져가는 걸 느낀 카슬라.
“대체…… 이게 무슨!”
그녀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눈을 부릅떴다.
하나 찬영이 대답해 줄리 만무했다. 그는 말없이 그래비티 필드만 연이어 중첩했다.
콰악!
그래비티 필드가 펼쳐진 반경 안의 땅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균열이 나기 시작했다.
콰칵!
하나 그건 그저 시작일 뿐.
중첩이 늘어날수록 카슬라가 서 있는 자리가 다른 땅에 비해 점점 움푹, 파여 가기 시작했다.
쿵! 쿵! 쿵!
“허억……!”
전신을 땀으로 적신 그녀가 힘겹게 눈을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눈도 못 뜰 정도의 중력 앞에 눈을 깔았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손 끝, 팔, 다리 어떤 신체 부위도 움직이지 못한다.
그저 할 수 있는 건 죽음을 기다리는 것뿐.
쿠쿵!
“크흡!”
기어코 열 번째 중력이 쌓이자 그녀가 견디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콱!
쏟아진 중력에 입만 벙긋거릴 뿐, 비명조차 내지 못한다.
등을 보인 채 중력에 깔려 버린 그녀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렸다.
중력이 쌓이자 호흡까지 헐떡인다.
‘이쯤 해야겠군.’
찬영은 슬슬 그래비티 필드를 풀어 줘야겠다고 결정했다.
처음부터 그녀를 직접 죽일 생각은 없었다. 다만 그녀를 목책 전선에 있을 레인저들과 엘프들에게 맡길 것이다. 죽이든 살리든 그건 그들의 몫, 그럼으로써 분명 그들 간의 신뢰가 한층 더 성장할 건 당연하다.
그리고…….
‘가끔은 죽음보다 살아 있는 게 더 고통스러울 수 있겠지.’
평생 배신의 낙인을 찍힌 채 살게 될 거다, 저 여자는.
‘한데 대체 왜 배신하게 된 걸까?’
문득 드는 의문. 하지만 그 생각을 한 건 자신만이 아니었나 보다.
어느새 다가온 카일이 말했다.
“마법을 풀어달라고 말씀드리려 했는데. 이미 결정하셨나보군요.”
그래비티 필드에 모여든 마나가 서서히 흩어져가는 걸 카일도 느낀 모양.
그래비티 필드를 완벽히 거두며 말했다.
“네, 그녀의 목숨을 거두는 건 제 몫이 아니라 판단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진심이 담긴 카일의 눈빛에 찬영은 고개를 저었다.
“커흣! 우에엑!”
그동안 카슬라의 입에선 피와 구토물이 함께 섞여 나왔다.
새우처럼 허리를 구부린 채 바닥에 엎드린 그녈 보며 카일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 날카로워졌다.
그가 찬영을 쳐다봤다.
“하지만 당장은 결정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유가 따로 있습니까?”
“예, 카슬라에게 합당한 벌을 주는 것보다 급한 일이 생겼습니다.”
어느새 자신의 활을 다시 챙긴 카일이 덧붙였다.
“목책 전선이 위험합니다.”
“걱정하시는군요.”
“예전이라면 그랬을 겁니다.”
“지금은요?”
카일이 찬영을 봤다.
그는 더 이상 찬영에 대한 의심 같은 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저 깊숙한 넝쿨 성채에서 그의 진면목을 보고도 남았다.
“걱정…… 해야 합니까?”
찬영의 입가에 아주 잠깐 작은 미소가 맺혔다 사라졌다.
듣고 싶었던 대답이다.
* * *
돌아온 동료들에 의해 몬스터의 대규모 공습 소식을 전달 받은 고베이는 통신 마법구를 통해 영주에게 사태의 심각성을 알렸다.
더 이상 골짜기 경계가 불가능하다는 것과 당장 병력 증원이 필요하단 얘기에 영주는 지체 않고 병력을 보내겠다고 약조했다.
그러면서 대규모 병력 운용은 당장 여의치 않아 소수 병력을 보내되, 자신이 직접 도우러 오겠다고 답했다.
하지만 약속만으론 부족했다.
아무리 빨리 와도 그들이 오려면 열흘 정도가 걸릴 거다.
이럴 때 대규모 마법진과 마법 공학을 결합해 만드는 ‘포탈.’이라도 있다면 좋았겠지만, 포탈을 세우는 조건은 까다롭다.
우선 마나를 잘 다루는 7서클 이상의 대마법사와 수십 명의 5서클 이상 마법사들이 필요하다.
시공간을 조절해 수십 일 걸리는 거리를 몇 분도 채 되지 않아 이동하는 마법이라 정교한 마나의 컨트롤이 필요했다.
거기다 마법진에 필요한 대량의 마나와 마나 제어 기술 등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
물론 마나량이야 맞춰 볼 수 있다.
마정석들을 있는 대로 쌓아두면 불가능한 건 아니니까.
하지만 ‘포탈.’ 마법진을 그리고 마법 공학 기술을 통해 대량의 마나를 제어할 수 있는 고위급 마법사는 시드 대륙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적었었다.
알폰 지방 밖에 재건되지 않은 지금으로썬 애당초 불가능했다. 찬영처럼 섬뢰보를 쓰며 꾸준히 달려오지 않는 이상, 꼼짝 없이 열흘 동안 목책 수비를 해내야 한단 얘기였다.
그래서일까?
북쪽 목책 전선 내부는 엘프, 레인저 할 것 없이 모두 바삐 돌아갔다. 지원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 따위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는 거다.
그들은 모든 망루에 활을 들고 자리를 잡았고, 동시에 목책 사이사이에 성벽의 네모난 창과 같은 공간을 개방시켰다.
망루가 아닌 목책 뒤에 자리 잡은 병력들은 그 공간을 통해 활을 겨누고 마법 주문을 슬롯을 통해 미리 준비해 뒀다.
슬롯이란, 마법 주문을 미리 준비했다가 즉시 사용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이다. 마법 하나를 발동시키는 데 소모되는 캐스팅 속도가 전혀 들지 않는 것이다.
단, 그건 마법사의 마나 제어력, 마나량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평균이란 건 있다. 3서클 마법사의 경우, 슬롯을 두 개 정도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후였다. 목책에 접근하는 적들을 향해 2, 3서클의 마법들이 초고속으로 쏟아내고, 준비한 슬롯을 다 사용한 후에는 뒤에 준비하고 있던 궁수들이 활을 사용, 다가오는 적들을 견제할 거다.
그럼 그 다음은?
결국 엘프나, 레인저나 점차 피로해지고 지쳐갈 거다. 압도적인 숫자 앞에선 모두가 절망하리라.
하지만 누구도 이 순간, 퇴각하자란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오슬로 구릉의 레인저나 헤일로의 엘프나 그간 함께 해 온 끈끈한 결속이 두려움 속에서 빛을 발한 것이다.
그리고…….
레드 스컬의 대규모 공습이 서서히 그들을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기기긱! 기기긱!
* * *
벡은 있는 힘껏 달렸다.
“헉. 헉.”
기기긱! 기기긱!
하지만 이젠 한계다.
등 뒤에서 계속 쫓아오는 적들.
그것들은 맹수의 형태를 가진 레드 스컬들이다.
그뿐인가?
설상가상으로, 특히 저놈들의 곁엔 라비들이 부린다는 꼭두각시들이 붙어 있다.
한 땐 등을 지켜 줬을 그들의 동료였던 엘프와 레인저들.
이름하여 섀도 헌터. 하지만 그건 그렇다 쳐도 도통 이해가 되질 않는다. 서로 종이 다르면 부딪치던 녀석들이 대체, 어떻게 서로 협력하기 시작한 걸까?
마치 대륙의 종말 직전 같은 몬스터 규합이 벌어진 것 같다. 짧은 생각이 스쳐가던 사이, 결국 벡의 어깨를 화살 두 대가 훑고 지나갔다.
쐐액!
뚫리진 않았으나 스치긴 했다.
“흡!”
그 탓에 대다수의 레드 스컬과 싸우느라 진이 빠진 벡이 밟고 있던 나뭇가지를 헛디뎠다.
쐐액!
추락하는 벡.
“아직은 어림없다!”
그가 회전하며 어깨에 장착되어 있는 ‘윈드 로프’를 쏘아 날렸다.
어깨 위에 둥그렇게 난 원통형 구멍에서 밧줄이 쐐액, 튀어나왔다.
윈드 로프란.
마나를 주입하면 겉에 닿는 뭐든지 휘어 감는 밧줄이다. 이것 때문에 여러 번 목숨을 건진 벡이다.
촤학!
곧 날아간 밧줄이 나무를 통째로 휘감자, 팽팽하게 이어진 줄 덕에 그의 추락 속도가 줄어들었다.
파밧!
그 덕에 땅을 박찰 수 있는 여유가 생긴 벡은 줄을 바짝 당기며 앞에 있는 나무를 향해 몸을 날렸다.
쌩!
“크읏!”
그러자 이번에는 그의 어깨 너머로 윈드 스피어가 스쳐 지나갔다.
귓불이 베인 것인지 어깨 위로 핏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그걸 확인할 여유는 없다.
‘계속…… 계속 가야 한다!’
카일이 있을 넝쿨 성채까지 머지않았다.
하지만 그 생각과 함께 동시에 스쳐간 생각.
‘내가 간다고 상황이 달라질 것인가?’
또 다른 나뭇가지를 밟고 날아오르며 벡은 입술을 콱 깨물었다.
따지고 보면 놈들을 다 따돌리지 못한 이상…….
‘난 짐에 불과하다.’
카일이 살아 있다고 한들, 놈들을 몰고 데리고 가는 건 오히려 카일의 죽음을 재촉시키는 것 밖에 안 된다.
도움은커녕 놈들을 카일에게 데려다주는 꼴이 되는 것이다.
‘그걸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벡은 스스로를 자책하며 이를 갈았다.
그럼 이제라도…….
‘방향을 바꿔야한다!’
벡은 다음 번 나무에 윈드 로프를 쏘려다가 그 반대 방향에 윈드 로프를 쏘아 올렸다.
휘리릭!
하지만 그 순간 윈드 스피어 수십 다발이 그의 앞으로 날아왔다.
‘흡!’
깜짝 놀란 그가 윈드 로프를 놓치며 맨 땅으로 몸을 날렸다.
휘리릭!
하나 지쳤다곤 해도 그는 웬만한 기사보다 나은 실력자.
파밧!
벡이 나무 위를 밟고 그 탄력성으로 허공제비를 돌았다.
동시에 바닥에 와당탕, 구르며 착지한 그가 빠른 속도로 덤불 속으로 몸을 던졌다.
이제부턴 시간 싸움이다.
놈들이 카일에게 몰려가지 않도록 최대한 시선을 끌어주는 게 최선.
이미 목숨은…….
‘포기했다.’
씁쓸하지만 그게 현실.
벡은 골짜기를 가로질러 달리면서 이를 악물었다.
쌔새색.
뒤편에서 나무를 타고 쫓아오는 소리가 수없이 많이 들렸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는 순간, 모든 걸 포기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냥 앞만 보고 달렸다.
그렇게 수풀의 수풀을 뚫고 나아가던 그때, 벡은 문득 깨달았다.
“헉……헉…….”
옆에서 누군가 달리고 있다는 것을.
동시에 고개를 돌린 벡, 그의 옆엔 여유롭게 달리고 있는 찬영의 얼굴이 보였다.
“이제 그만 달리셔도 됩니다.”
나직한 음성.
“악!”
너무 놀란 벡이 결국 두 다리가 꼬여 바닥에 나뒹굴었다.
쿠당탕!
달리던 속도가 붙어서인지 한참 미끄러지듯 데굴데굴 구른 벡. 그 끝엔 그토록 찾던 카일과 파리한 안색으로 그의 뒤에 서 있는 도레인이 보였다.
“벡!”
카일이 그를 반기자 벡은 이게 현실인지 제대로 분간이 가질 않아 잠깐, 어벙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무슨!”
도통 어떤 상황인지 파악 못한 그의 뒤로 찬영이 터벅터벅 걸어왔다.
이어서 손에 들린 레드 스컬의 얼어붙은 머리를 벡 옆에 툭 던진 찬영.
이를 본 벡이 화들짝 놀라며 찬영을 올려다봤다.
“이…… 이건?”
“당신을 쫓던 레드 스컬의 머리입니다. 나머지 한 마리도 정리해 뒀습니다.”
벡이 이해가 되질 않아 찬영에게 다시 물었다.
“자, 잠깐. 뭐…… 뭘 정리했다고?”
찬영이 레드 스컬의 머리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보시다시피.”
“허…….”
벡은 이걸 믿어야 할지 말아야할지 분간이 안 됐다.
“그, 그럼. 섀도 헌터는?”
“시체를 부활시킨 그것들 말입니까?”
“그렇소!”
눈이 튀어나올 듯 찬영을 올려다보는 벡.
“워낙.”
찬영이 담담한 어조로 덧붙였다.
“꽁무니 빠지게 도망가는 편은 아니라서…….”
결국 전부 제거했다는 얘기.
벡이 도망치는 동안 찬영이 두 마리의 레드 스컬과 스물이 넘던 섀도 헌터를 전부 제거했단 것이다.
분명 믿을 수 없는 말에 벡은 카일을 다시 돌아봤다.
카일은 이미, 찬영의 말을 믿어 의심치 않는 눈빛이었다.
하기야 이런 결과를 두고 아직도 의심하는 게 바보 같은 짓이었다. 그들을 일거에 휩쓸 힘을 가졌다는 건 골짜기에서 무사히 돌아왔다는 것 또한 납득 가능하단 얘기다.
벡은 찬영의 말에 한동안 그를 의심하기만 했던 스스로를 떠올리며 차마 내색은 못하고, 조용히 얼굴만 붉혔다. 틀렸다는 말을 하기에 차마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았다.
하지만 이 순간 기댈 건 찬영뿐.
“내가…….”
그깟 스스로의 자존심보단 목책의 동료들을 살리는 게 우선순위.
그가 혹시나 자신으로 인해 손을 떼려 한다면? 괜한 오만으로 든든한 지원군을 놓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사과를 해야 했다.
“단단히 잘못 생각한 것…….”
막 말을 잇던 그의 입을 찬영의 말이 막아 버렸다.
“툭 털고 일어나세요.”
동시에 찬영이 손을 뻗었다. 잡으라는 듯 내민 손.
“뭐…… 요?”
잠깐 멍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는 벡에게.
“……뱉은 말은 지키셔야지. 당하기만 할 겁니까?”
찬영은 단순히 손을 건넨 게 아니다.
마음을 함께 건넸다. 의심은 당연하다. 이해한다며, 그간 일은 진즉, 털어 버렸다는 듯한 말과 행동이었다. 그리고 찬영이 해 온 인내는 그동안 꽁꽁 닫혀 있던 벡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찬영이 그토록 원하던 것, 의심과 의문의 해소…… 그리고 결속. 이제, 벡을 시작으로 헤일로 골짜기는 찬영의 새로운 베이스캠프가 될 것이다. 아군으로 득실거릴.
한동안 멍하니 찬영의 손을 올려다보던 벡이 이를 꽉 다물었다.
‘그래, 내가 졌다.’
두손 두발 다 든 사람의 얼굴. 벡은 찬영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것이다.
탁.
단숨에 찬영의 손을 잡고 일어나게 된 벡. 동시에 카일이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
“그 전에 알아야 할 게 있네.”
카슬라에 대해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할까?
카일은 근처에 잠시 묶어 뒀던 카슬라를 벡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됐다.
“뭡니까?”
“따라오게.”
근처 나무에 포박되어 있는 카슬라를 보여주기 위해 카일이 벡을 데리고 갔다.
당연히 벡은 놀랐다.
“이……이게 무슨…….”
그는 기절한 카슬라를 당장 풀어주고자 했다.
하지만 그를 말린 건 카일.
“이거 놓으십쇼! 대체……이게 무슨 짓입니까!”
피로 물든 카슬라를 보며 벡의 눈빛이 흔들렸다.
하지만 그 순간, 잠자코 있던 도레인이 입을 열었다.
“이 상처, 그녀가 남긴 거예요.”
그의 눈에 파리하게 질려 있는 도레인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리고 도레인의 쇄골에 난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까지.
“설마……? 그럴 리가!”
벡이 부정하자 도레인은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사실이에요.”
이어서 도레인은 카슬라와 있었던 이야기를 전해 줬다.
벡이 믿을 수 없는지 버럭 소리 쳤다.
“대체 왜!”
도레인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알아내지 못했어요. 저 역시 그녀의 배신을 믿지 못하고 있으니까.”
벡은 아무 말도 못했다.
아니야. 아닐 거다.
여전히 고개를 저으며 부정하는 그를 향해 카일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후일, 그녀로부터 직접 물을 걸세. 부정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많은 정황이 그녀의 배신과 일치해.”
“정황…… 말입니까?”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자, 벡은 그간 있던 일을 떠올려 봤다.
갑작스러운 레드 스컬의 대규모 출몰, 그리고 보고 하지 않고 갑자기 실종되어 버린 카슬라와 그 동료들, 그로 인해 고립되어 버린 도레인과 자신.
‘모든 게 들어맞아……!’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벡은 믿기 힘들었다.
“어떻게 싸웠는데…… 우리가…….”
뜨거운 눈물을 삼키는 벡을 보면서 카일도 쓰디 쓴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우린 이 일을 한 치의 의혹 없이 공정히 파헤쳐갈 걸세. 하나 그러기 위해선 이 전투에서 살아남는 게 우선이야. 잊지 말게, 벡.”
벡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카일을 쳐다봤다.
“그녀가 깨어나면 제일 먼저 이야기를 나눌 사람은 내가 될 겁니다.”
“그래, 물론.”
그제야 벡은 스스로를 진정시키면서 찬영을 쳐다봤다.
“당신도 그녀의 배신을…… 보았소?”
찬영이 딱 잘라 말했다.
“예, 틀림없이.”
“젠장할……!”
돌아서는 벡이 카일을 보며 덧붙였다.
“이번 전투에서 우리가 살아남아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긴 것 같습니다, 대장.”
카일도 동의했다.
카슬라의 배신에 대한 진실, 그 뒤에 있는 게 무엇일지 알아내는 것! 그게, 그들에게 놓인 새로운 과제였다.
동시에 벡이 찬영을 지나치며 말했다.
“그러니 도와주겠소?”
찬영이 대답 대신 손을 옆으로 뻗었다.
지잉!
전류 섞인 노이즈와 함께 나타난 아슬란을 움켜쥐었다.
“기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