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
#55.
찬영의 눈에 저 멀리 레드 스컬의 서식지가 보였다.
말이 넝쿨 성채지 한때 엘프의 보금자리였던 거목과 거목 위에 둥지처럼 엮여 있던 넝쿨들은 썩거나 생기를 잃었다.
거기다 레드 스컬에 살육 당한 짐승들의 썩은 시체에는 온갖 독충들이 가득했다.
그로 인해 숲 안엔 역한 냄새가 가득하다.
기기익…….
그 주변을 소수의 레드 스컬들이 유령처럼 배회했다. 하지만 이건 당장 눈에 보이는 녀석들일 뿐. 깊숙한 곳에 몇 마리가 있을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
‘자…….’
이를 본 찬영은 먼저 D급 옵저버를 꺼냈다.
옆에 있던 카일도 장비의 이름을 아는 듯 말을 꺼냈다.
“옵저버군요.”
“예.”
웃어 보인 찬영이 옵저버를 은밀히 가동시켰다.
가동 팔찌에 따라 레드 스컬을 피해 날아간 옵저버가 이 일대 마나 함유량 수치를 체크하기 시작했다.
‘꽤 쓸 만하단 말이지.’
이미 한 번은 써 봤기에 이번이 두 번째.
처음 옵저버를 써 본 때는 나침반을 따라갈 당시였다.
하운드 레드 스컬을 잡고 동굴을 들어가기 직전 사용해 봤다. 당시 옵저버가 체크한 마나 함유량은 ‘120,000’이 넘었다.
당시엔 조금 희한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동굴 안에 몬스터가 한 마리도 안 보였으니까. 하지만 일이 지나 버린 직후인 지금 돌이켜보면…….
‘옵저버는 정확했어.’
옵저버는 마나를 품은 프라이의 무덤이 밑에 있다는 걸 파악한 것이다. 이번 일로 마법 공학에 대한 신뢰가 한층 상승한 찬영이다.
지잉.
이윽고 가동했던 옵저버가 날갯짓을 하며 찬영에게 돌아왔다. 동시에 가동 팔찌를 통해 노이즈가 일렁이는 푸른 화면이 나타났다. 네모난 화면을 들여다보자 그 안에 현재, 이곳 마나 함유량이 적혀 있었다.
이곳의 마나 함유량은 13만. 이규복이 말해 줬던 걸 기억해 보면…….
‘D급의 마나 함유량 수치는 16만.’
그럼, D급까진 아니어도 E급 중에선 최상위에 속하는 수치인 게 확실했다.
그 정도라면…….
‘나 혼자서 가능할까?’
확실하게 말을 못하겠다. 12만의 던전을 이미 탐사해 보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프라이의 무덤이기에 그런 것일 뿐, 실제로 몬스터만으로 이뤄진 던전은 아니었으니까. 특히 이번 임무는 혼자만의 싸움, 여러모로 방심은 금물이다.
‘최대한 은밀히 기동하는 편이 낫겠어.’
레드 스컬들을 바깥에 있는 것부터 하나씩 부숴간다. 찬영이 옵저버를 인벤토리에 넣으면서 다시 카일을 쳐다봤다.
한데 지켜보던 카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눈 깜짝할 새 인벤토리에 사라진 옵저버에 놀란 것이다.
“방금…… 그건? 아공간 마법입니까? 그건 높은 서클의 대마법사만 가능한 것일텐데. 어떻게?”
찬영이 되물었다.
그게 뭔지 정말 몰랐다.
“아공간 마법?”
대마법사까지 나오는 걸 보면 엄청난 마법인 것 같은데 말이다.
“방금 그 큰 물건이 단숨에 사라진 걸 묻는 겁니다.”
“아…….”
인벤토리를 말하는 거구나.
하지만 게임의 형태에 익숙하지 않은 엘프를 눈앞에 두고 인벤토리에 대해 설명하려면 이 정도 얘기가 적당하지 않을까?
“제게 주어진 능력입니다. 몇 가지 물건들을 언제든 보관하기도 빼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놀랍군요…….”
카일의 감탄을 뒤로 한 채 찬영은 방향을 바꿔 움직였다.
“그럼…….”
“조심하십시오.”
카일이 못내 염려되는 듯 덧붙였다.
하지만 이건 찬영이 선택했고 카일의 손을 떠난 일.
더 이상 말릴 순 없다.
찬영이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믿어 준 보답입니다. 이제부턴…….”
나무 사이로 금세 사라지는 찬영이었다.
* * *
찬영은 외곽부터 차분히 휩쓸었다.
2,300 정도 되는 레드 스컬의 경우는 이미 상대해 본 경험이 있는 터라 처리하기 굉장히 손쉬웠다. 특히 전보다 한층 업그레이드된 장비와 이네이트 덕에 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빠른 토벌이 가능했다.
그러는 중 ‘공진’ 망토의 출중한 방어력까지 알게 됐다.
레드 스컬이 휘두르는 칼날에 흔적 하나 없이, 되려 칼날을 비껴내 듯 흘린다.
그 덕에 레드 스컬은 솜털도 건드리지 못하고 헛된 곳만 휙휙 휘저어댔다.
그렇게 놈들이 허우적댈 때 아슬란을 빼들었다.
이곳에선 건틀릿보다 아슬란이 더 효율적이었다. 적중 시 빙결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파밧!
찬영의 대검이 강한 한기를 머금고 스쳐갈 때마다 타겟이 된 레드 스컬은 무기 몇 번 휘두르다 제자리에 꽁꽁 얼어붙었다. 그다음 얼음 덩어리가 된 놈들을 몇 번 베어주면 그것으로 끝.
이제 2,300 정도의 레드 스컬은 찬영의 앞에서 도망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북평검과 붉은 바람, 그리고 진공나찰보까지 펼치는 찬영 앞에서 적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찬영은 거침없이 넝쿨 성채의 입구를 향해 나아갔다.
반면 이를 지켜보던 카일은 특유의 무표정을 유지하지 못하고 경악했다.
‘대체…… 이 무슨…….’
보고도 믿기 힘들다.
레드 스컬이 아무리 라비에 의해 언젠가 영역 싸움에서 내쳐질 몬스터라곤 해도…….
이건 극명한 힘의 차이다.
찬영은 순식간에 초입을 휩쓸어갔다.
외곽부터 초입의 중심부까지 카일이 보는 눈앞에서 레드 스컬을 얼리고, 부수고, 깨트렸다.
그러면서 보이는 움직임은 어떠한가. 민첩하고 효율적이다. 하지만 찬영은 그것조차 모자랐던지 초입을 금방 쓸어버린 뒤, 넝쿨 성채의 깊숙한 곳으로 차츰 사라져 갔다.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찬영을 보며 카일은 쥐고 있던 검은색 활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말이 전부 사실이었다.’
레드 스컬을 마치 갓난아이 다루듯.
저렇게 손쉽게 무너트리는 전사는 적어도 헤일로 골짜기 안엔 없다.
이젠 그를 믿고 싶지 않아도 믿어야 할 판, 아니 오히려 그를 도와야 한다.
그를 도우면…….
‘땅을 되찾을 수 있다!’
카일이 찬영의 뒤를 쫓아 땅을 박찼다.
“헤이스트.”
신체를 경량화시켜 더 빠르게 만드는 3서클의 바람의 마법. 그건 엘프족의 타고난 민첩성을 더욱 독보적인 빠름을 선사한다.
타닥.
어느새 나무 위를 타고 오른 카일이 빠르게 찬영의 뒤를 쫓아 그를 엄호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토벌의 막이 올랐다.
* * *
하나 그들은 몰랐다.
같은 시각.
“이런…….”
카슬라의 눈앞에 수백이 넘는 레드 스컬이 마치 어딘가에 홀린 듯 카슬라가 지키고 있는 능선을 타고 몰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엔 다 낡은 보랏빛 로브를 쓰고 있는 난쟁이들이 킬킬거리고 있었다. 회색빛으로 물든 죽은 엘프들의 호위를 받으며 ‘라비’들이 등장한 것이다.
드디어…… 온 건가?
카슬라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 * *
벡은 다른 부대장들과 약속대로 퇴로 중간 지점을 지키는 중이었다.
하지만 긴장을 놓진 않았다. 이곳은 토벌이 닿지 않은 곳.
언제든 레드 스컬이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을 장소다.
“긴장을 놓지 마. 긴장을 놓으면 대장이 도망칠 활로도 우리가 말아먹는 거다!”
벡은 단단히 엄포를 늘어놨다.
그러면서도 그는 카일이 사라진 길을 다시 돌아봤다. 카일의 선택이기에 못마땅해도 따르긴 했지만…….
‘젠장!’
이건 아무 의미 없는 희망고문일 뿐이다.
‘그깟 이방인 갓피스가 뭐라고.’
그래, 분명 그가 살아 돌아온 건 맞다.
‘하지만 모를 일이지. 그가 속임수를 부린 걸 수도 있고!’
설령 아무 일 없이 돌아왔다고 한들.
‘분명 운이 좋았던 거야. 그래, 그러겠지.’
벡은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되질 않는다고 생각했다.
“부대장님. 저기…….”
“알아, 보고 있어.”
벡이 생각을 잠시 접고 동료의 부름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건, 블루 버드인데?’
이상했다. 동시에 흐르는 식은땀.
‘뭔가 잘못 됐다!’
직감했다.
블루 버드는 엘프들의 전유물. 블루 버드가 괜히 나타났을 리 없기 때문이다.
허공을 선회하며 한 젊은 엘프 팔위에 내려앉은 블루 버드를 본 벡의 눈에 이채를 띠었다. 대장은 블루 버드를 데려가지 않았고, 이를 데려간 건 헤일로 엘프족의 도레인.
별일이 없다면 갑자기 블루 버드를 보내지 않았을 터.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벡이 함께 있던 엘프에게 말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아봐!”
블루 버드는 엘프와 교감이 가능하다.
그의 부름에 젊은 엘프가 신속히 외쳤다.
“그러겠습니다!”
엘프가 날아온 블루 버드와 교감을 막 진행하기 시작한 사이. 500m 지점을 지키던 동료들이 하나둘 씩 나타나 보고를 시작했다.
“레드 스컬이 출몰했습니다! 적어도 10분 안에 수십 아니, 그 이상이 당도할 겁니다.”
“이쪽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방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높은 나무 위나 고지대에 자리 잡고 있던 레인저들이 모두 돌아왔다.
그들이 본 건 모두 같았다.
레드 스컬의 대규모 출몰.
‘대체……!’
벡의 얼굴에 긴장이 스쳐 지나갔다.
하필 이런 상황에 대규모 출몰이라니!
최근 잠잠하던 녀석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자신들에겐 최악의 타이밍을 잘도 골라 몰려오고 있었다. 이를 간 벡이 레인저 한 명에게 말했다.
“넌 목책으로 돌아가라. 고베이 부대장께 대규모 공습이라고 말씀드려. 그리로 갈 수도 있다고. 지원은…….”
벡은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어떡하지? 지원을 청해야 하나? 아니 괜히 지원을 왔다가 본진에 있는 병력들이 전부 휩쓸리면?’
그 생각을 하는 사이 젊은 엘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가뜩이나 하얀 피부가 창백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부대장님…….”
“말해.”
“도레인 부대장께선 상황이 여의치 않아 함께 있던 병력을 목책 전선으로 돌려보내셨고, 혼자 이 소식을 알리기 위해 넝쿨 성채로 가셨답니다.”
콰직…….
그 얘기에 이를 으스러지도록 꽉 다문 벡. 이젠 선택을 내릴 차례다. 그가 힘겨운 명령을 토해 냈다.
“지원은 포기하시라고 말씀드려. 보고 그대로라면…… 목책 전선 유지하는 게 최선이야! 제기랄!”
“예!”
그의 얘기가 끝나기 무섭게 명령 받은 레인저가 자리를 떠났다. 다음은 카일이 있는 방향으로 갈 레인저를 정해야 한다. 하지만 누굴 보내야 할지 모르겠다.
분명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임무다.
이제껏 이 정도 대규모 공습은 몇 차례 없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때마다 정말 많은 사람들과 엘프가 죽어 나갔다.
산전수전 다 겪은 벡조차 덜컥 겁이 날 정도였다. 하지만 내색할 수 없다. 그는 부대장, 긴장한 기색은 던져 버려야 할 직책이다.
겁먹은 동료들을 돌아봤다. 모두 두려움이 일렁였다.
벡이 그들을 호되게 꾸짖었다.
“눈 똑바로 안 떠! 너희가 정신 못 차리면 그 다음은? 그 다음은? 이 새끼들아! 영지 병력이 올 때까진 아무도 없어. 다 쓸리는 거야! 우리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해!”
벡은 그리 말한 뒤, 모여 있는 동료들을 신속히 둘러봤다.
다시 모인 건 벡을 포함한 여덟 명 정도의 엘프와 레인저들이 전부였다.
그러나 이대로 이들과 함께 갈 순 없다.
동료들이 아직 남아 있다.
현재 전장에 남은 건 도레인과 카슬라……!
그리고 그녀를 따라간 소수의 레인저들…… 그들이 미친 듯이 걱정 됐다.
카슬라는 그와 가장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온 여성 레인저. 한 땐 그녀를 사랑하기도 했었던 벡이다.
하지만 솔직히?
당장 동료들에겐 목책 전선을 이끌 리더가 필요하다. 대대장인 카일의 목숨 보존이 우선인 것이다.
도레인 혼자선 힘들다. 벡이 입안이 텁텁한지 침을 삼켰다.
“난 지금부터 도레인의 뒤를 따라 넝쿨 성채로 이동할 거다. 그사이에 너희들은 남은 동료들을 오 분 정도만 기다린 후 목책 뒤로 돌아가라.”
벡이 내린 최선의 결정이었다. 카슬라보단 대대장인 카일부터 구하는 게 순서다. 먼저 출발한 도레인을 도와야 한다고 판단한 벡이었다.
그렇다고 동료들에게 아무 소식이 없는 카슬라를 구하러 가라는 말도 안 되는 임무를 시킬 수는 없는 법. 그러니 대신 카슬라가 혹시나 돌아올 걸 기다려주는 걸 부탁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나저러나 벡이 선택한 임무는 자살 임무나 다름없는 게 사실.
넝쿨 성채와 목책 전선 사이를 레드 스컬이 장악해 버리면…….
‘전선으로 쉽게 돌아오진 못하겠지.’
벡도 충분히 아는 바였다.
오히려 넝쿨 성채에 있는 레드 스컬과 현재 몰려오는 레드 스컬 사이 양 쪽에서 포위가 될 게 자명했다. 이를 들은 동료들이 아우성쳤다.
“하지만……! 부대장님!”
“함께 가겠습니다!”
“저희가 같이 가는 게 살아 돌아올 확률이 더욱 높을 겁니다!”
결국 벡이 빽 하고 소릴 질렀다.
“입 안 다물어? 지금은 싸구려 동료애보다 차갑게 상황을 봐야지. 목책 전선을 유지하는 게 그 어떤 일보다 중요하다.”
그의 말이 맞다.
목책마저 무너지면 돌아올 곳이 사라진다. 보금자릴 지키는 건 그 어떤 것보다 우선시 되어야 할 최우선 임무. 그 다음이 대대장을 구하는 일이다.
해서, 벡이 택한 건…….
“그러니 나 혼자 간다는 거다. 너희들은 우리의 전선을 지켜라. 돌아올 자리가 남아 있어야 돌아올 것 아니야!”
그 말에 아무도 말을 못 이었다.
벡이 재차 외쳤다.
“무엇보다 너희들 중에 나보다 더 뛰어난 놈이 있나?”
하기야 벡의 말이 백 번은 맞다.
여기 있는 젊은 엘프들은 2, 3서클 마법과 궁술 등에 능하다.
하지만 벡에겐 안 된다.
그는 한때 베이콥 영주의 총애를 입은 레인저. 마나 심법을 익힌 지 오래인데다 엘프들과 지내면서 그들이 가진 3서클 마법에 대응 방법 정돈 꿰고 있다.
그뿐인가?
제법 수준 높은 기사를 상대해도 웬만해선 밀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장기는 기사들과 같은 정통 검술이 아니다. 암습, 매복, 등 지형지물을 이용한 공격들이다. 특히 소규모 트랩을 단시간에 설치하는 건 벡을 따라갈 사람이 없다.
그러니 누구도 그의 말에 반박하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벡이 별일 아니라는 투로 기세 좋게 외쳤다.
“자식들이, 까불고 있어!”
더 이상 누구도 반박하지 못하는 동안 벡은 자리를 박찼다.
“또 보자.”
벡이 씩, 웃었다.
평소 같은 작별 인사였지만 모두 목구멍까지 찬 울음을 꾹 누르는 듯 얼굴을 딱딱히 굳혔다.
이를 아는 벡도 신속히 자리를 떴다.
얼른 사라져 줘야 녀석들이 안 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