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
#54.
카일은 행동파였다.
그는 그 즉시 부대장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부대장들은 넷이었다. 레인저 생활을 오래한 탓에 삭막한 인상들을 한 부대장들이 천막으로 들어왔다.
그들이 모인 천막에 미리 앉아 있던 찬영은 그들의 뜨거운 시선을 모두 견뎌야 했다.
시선에 섞인 건 의심뿐이었다. 기대도 안 했지만 기대감을 가지는 눈빛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험난한 몬스터와 일전도 치렀겠다, 이제껏 해 온 일들이 찬영에겐 값진 경험이 됐다.
그 덕에 그들의 의심 어린 눈빛 정도야 가뿐히 무시하고 넘길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한참 찬영을 노려보던 껄렁해보이는 중년 레인저가 카일에게 말했다.
“대장님.”
벡은 오슬로 구릉의 레인저로 이십 년을 넘게 활동한 경력자였다. 하지만 인간인 벡은 종족이 다름에도 엘프 카일 만큼은 누구보다 인정했다.
카일은 인간보다 차가운 이성을 보유했고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몬스터를 상대할 줄 알았으며, 인간의 두려움까지 이해할 줄 아는 만능 엘프였다.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다.
“말하게, 벡.”
카일이 대답했다. 벡이 불만 가득한 눈초리로 찬영을 쳐다본 후, 다시 카일을 쳐다봤다.
“저희는 왜 모인 겁니까?”
카일이 대답 대신 찬영을 쳐다봤다.
“제 대신 말씀하시겠습니까?”
“예.”
찬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제가 소집해 달라 부탁드렸습니다.”
벡이 찬영을 맹렬하게 노려봤다. 적의는 아니다. 일종의 텃세였다.
“그러니까 왜냐고 묻잖소! 질문에나 대답하쇼!”
벡은 둘러 가며 말하는 방식은 진작 잊어버린 모양이다.
그가 카일 못지않은 직진남인 것 같아서 찬영은 내심 웃었다.
하지만 이를 입 밖에 내진 않았다.
‘엄중한 분위기에 웃어서야 쓰나.’
대신 신중히 입을 열었다.
“이전부터 작전 수립은 되어 있어도 병력 부족으로 토벌되지 못한 던전이 몇 곳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곳을 가 볼까 합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부대장들 일부가 웅성댔다. 이곳에 모인 부대장은 인간이 둘. 엘프가 둘이었는데, 엘프 부대장들의 경우, 카일 못지않게 침착한 태도로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었고, 벡을 비롯한 나머지 두 명의 인간 부대장들은 감정을 못하고 조금 불쾌한 기색이었다. 이쯤 되자 벡 옆에 있던 여성 레인저 카슬라까지 찬영에게 톡 쏘아붙였다.
“옆집 놀러가는 것처럼 쉽게 말씀하시는데, 우린 그리 만만한 사람들이 아녜요. 우리가 가지 못한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고요. 그렇죠, 벡?”
카슬라가 동의해달라는 듯 그를 불렀다.
“당연하지! 혹시 알아? 입구만 조금 왔다갔다, 하다가 대충 체면만 세우려고 무사히 돌아온 척 하는 걸지.”
벡이 탁자를 탁 치며 말했다.
그때 침묵하던 여성 엘프 부대장 도레인이 그들을 말렸다.
“진정들하세요. 우선 나머지 얘길 들어보도록 했으면 합니다. 분명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실 테니까요.”
그러면서 찬영을 올려다보는 도레인. 찬영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녀도 어조만 차분할 뿐. 그들과 똑같이 설득해 보라며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혹은 어떻게 살아 돌아온 건지 등등을.
하지만 찬영은 침묵했다.
백 마디 말로 설득할 수 있었다면 진작 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카일에게 말했듯 이들에겐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찬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오해가 조금 있는 것 같습니다.”
벡이 짙은 눈썹을 꿈틀거리면서 물었다.
“무슨 오해 말이요?”
찬영은 그의 강한 눈빛에도 주눅 들지 않고 담담히 대답했다.
“이 작전에 여러분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동시에 모두가 얼어붙었다.
잠자코 있던 엘프 부대장 중 최고 연장자인 고베이가 말했다.
“갓피스여, 그럼, 또 다시 단신으로 저 골짜기에 들어가시겠단 말씀이시오?”
“아뇨, 저를 포함해 한 분이 더 갑니다.”
찬영이 대답과 함께 카일을 쳐다봤다.
이 시선이 뭘 뜻하는지 부대장들이 모를 리 없었다.
벡이 급히 소리쳤다.
“안 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쇼. 대장. 언제 라비 새끼들이 들이닥칠지도 모르는데 이방인 놈이랑 죽을 길을 찾아가겠다고?”
말투만 거칠 뿐, 분명 벡은 카일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것도 깊이.
카일이 이를 모를 리 없다.
“해야 한다면…… 그래야겠지. 형제여.”
지켜보던 카슬라가 의견을 얹었다.
“결정은 대대장이 하시겠지만, 저는 전혀 동의 못 해요. 절대……!”
그녀의 시선이 대놓고 찬영을 경계했다.
“대체 뭘 믿고…….”
이해 안 된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그녀.
물론 이 와중에 나머지 두 명의 엘프는 침묵했다.
그들은 감정적인 인간 부대장들과 달리 이성적으로 각자의 생각을 정리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모두가 이 의견에 대해 부정적일 거라는 것.
한동안 그들의 이야기를 조용히 수렴해가던 찬영이 다시금 운을 뗐다.
“여러분의 의견은 충분히 들었습니다. 그러면 퇴로 확보만 부탁드리겠습니다.”
벡이 토를 달았다.
“흥. 꽁무니 빠지게 도망갈 생각부터 할 거면 처음부터 진입하질 마쇼!”
조금 흥분한 벡과 달리 찬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차분했다.
“그건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카일 대대장님을 던전 부근에서 무사히 빠져나가게 하기 위한 겁니다. 전투엔.”
찬영이 탁자에 깔린 지도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 혼자 진입합니다. 그 후 별일이 없다면…….”
찬영이 카일을 다시금 쳐다보았다.
“카일 대대장님께서 전투 후 결과물을 확인하실 테죠.”
혼자 던전에 진입해서 몬스터를 괴멸시키고 결과물을 카일에게 확인받겠단 말이었다. 결정을 짓는 듯한 찬영의 말에 더 이상 누구도 말을 얹지 못했다. 아니, 얘기할 만한 거리가 없었다. 찬영은 희생을 자처했을 뿐 아니라 모두가 반박할 만한 거리를 계획에서 제외시켰다.
누구도 희생당하지 않는 계획.
희생된다면…….
찬영이 유일했다.
벡이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는다는 양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왜 이런 미친 짓을…….”
“가끔은……. 미친 짓이 뭔가를 바꿀 때도 있더군요.”
대답하는 찬영은 정말 진심이었다.
이제껏 해 온 일들 중에선 정말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미친 짓이라고 떠오를 만한 일들이 많았다. 그게 옳았던 건지 아니었던 건지는 확실히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누군가 해야만 했던 일이란 건 맞다.
그게 하필…….
‘나였고.’
그래.
그러니 곁에서 보기엔 분명, 무모해 보일 거다.
하지만…….
알폰 지방에 사는 모두에게 존경심 +120의 버프를 받고도 당장 그들의 눈에 깃든 건 경계심뿐.
찬영을 이를 걷어내고 싶었다.
그리고 그걸 위해선 그들 속에 있는 상황에 대한 의심의 싹을 잘라 버려야 했다.
어렵더라도 이번 일이 지나면…….
‘그들은 내게 호의적이게 될 거다.’
그때부턴 그들과 힘을 모아 저 헤일로 골짜기를 수복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이면 된다. 그러니 찬영의 던전 단독 진입은 선순환으로 이어질 것이다.
찬영은 다시 이곳에 돌아오며 생각해 둔 큰 그림이 있었다.
아마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은 깜짝 놀랄 것이다.
장담할 수 있다.
‘이건 시작에 불과하니까!’
마침 카일이 복잡한 심경이 담긴 눈빛으로 찬영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이미 결정했네. 그와 동행하기로.”
* * *
부대장 소집 직후.
헤일로 전선이 바빠졌다.
카일은 찬영과 동행하기로 결정했고 부대장들은 못내 카일의 뜻을 따라 주었다. 그러면서 카일은 늘 자기의 좋은 조언자였던 고베이에게 임시 대대장을 맡겼다.
말이 임시 대대장이지, 살아 돌아오지 못하면 대대장의 권한이 고베이에게 향하는 것이었다. 이를 알면서도 다른 부대장들은 카일의 고집을 선뜻 말리지 못했다.
‘만약 카일의 말대로 갓피스가 그들의 땅을 되찾을 강한 힘을 보유했다면? 정말 기대를 걸어 볼 수 있는 희망이라면?’
이런 생각들이 부대장들의 마음속에 조금씩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저 막연한 기대일 뿐.
아직은 누구도 확신하지 못했다.
그렇게 전선의 부대장들이 고민에 휩싸인 사이.
정작 고민거리를 안겨준 찬영은 담담히 자신의 일에만 몰두했다.
헤일로 전선에 돌아오느라 미처 디테일하게 확인하지 못했던 장비와 새로 귀속된 이네이트들을 살피기 시작한 것이다.
붉은 별의 염왕초혼심법炎王招魂心法-세트
-가치 : 4,100
-숙련도 : 8%
-화(火) 속성 친화력 20% 상승
-염왕권 중첩 발동 시 확산 범위 2% 증가
-초열봉황익 발동 시 염왕세계-炎王世界 발동
“굉장한걸.”
막 플레이체험을 다녀온 찬영은 염왕초혼심법을 활용한 공격 패턴을 겪어본 후 경악할 만큼 감탄했다.
염왕초혼심법을 중심으로 한 공진, 염왕권의 공격 패턴이 무지막지할 정도로 위력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점은 있었다.
그건 바로 ‘마나.’
많은 마나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오래 지속할 수 없는 공격패턴이었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장기전 전투 시엔 프라이의 이네이트를 활용하는 게 마나 효율성 면에서 나을 것 같다.
하지만 이건, 상황에 따른 공격 패턴을 정하는 것일 뿐.
실상 이 두 개의 유산들은 어디서도 획득할 수 없는 최상의 지식들이기에 비교 자체가 무의미하다.
특히.
푸른 별의 북빙진기北氷眞氣-세트
-가치 : 4,380
-숙련도 : 11%
-수(水) 속성 친화력 20% 상승
-북평검 중첩 발동 시 확산 범위 2% 증가
-아슬란 보유 시 북풍천하北風天下 발동(초당 마나 420 소모)
로이크와 프라이가 가졌던 일부 마나에 대한 지식이 이네이트와 함께 전해졌다.
무지했던 마나 이해도가 각인을 통해 급성장한 거다.
그래서 이젠 안다. 마나는 원형 그대로일 뿐. 북빙진기와 염왕초혼심법은 그 힘을 어떻게 활용하는지에 대한 방법이라는 것을.
특히 이 두 개의 마나 심법은 서로 부딪치지 않고 제각기 길을 따라 조화롭게 움직인다는 장점이 있다.
애당초 열 세 개의 별이 이스트 마운틴이란 한 뿌리에서 시작됐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 덕에 추가로 궁금해진 것도 있다.
이런 경우가 이 두 개의 유산에만 해당되느냐, 그렇지 않느냐다.
‘다른 기사들 역시, 여러 개의 심법을 한 번에 사용할 수 있는 건가?’
글쎄. 모를 일이다. 프라이와 로이크를 통해 얻은 일부 마나 지식에도 이 질문에 대합 해답은 없었다.
둘 모두 각기 자기 것만 수련했을 뿐, 두 개의 심법을 한꺼번에 획득해 본 적이 없어서일 것이다. 아니면 굳이 도전해 본 적이 없을 수도 있고.
하지만 찬영은 이 일이 엄청난 일이라곤 생각지 못했다. 그저 ‘자신에게 가능한 일이니, 다른 이라고 불가능할까?’ 싶었다.
하지만 그건 후일 알게 될 일. 지금의 찬영은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어쨌든 좋은 게 좋은 거라 생각할 뿐.
그리고 그의 생각대로 두 개 심법을 한꺼번에 운용한 덕택에 얻게 된 장점은 굉장히 많았다.
1회 수련 시, 늘어나는 마나 보유량이 심법 한 개를 운용할 때보다 두 개를 운용할 때 더욱 많았다. 또한 이를 동시 활용할 수도 있게 됐다.
왼손엔 염왕권을, 오른손엔 프라이의 아슬란을 쥐고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혹은 그 반대로도 가능하고 말이다.
단 한 번의 무덤 탐사로 든든한 보조 장비와 이네이트를 얻은 셈이다.
조금 무모해 보였으나 나침반을 따라 움직이길 잘했단 생각이 든다. 만약 서두르지 않았다면 성장이 더욱 더디게 진행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토벌을 위한 준비가 끝났다.
* * *
그사이 시간이 훌쩍 흐르고 저녁노을이 헤일로 골짜기 일대를 덮기 시작 했다. 레인저들은 은신과 매복, 감시에 탁월하기에 그들의 출동 시기 또한 어두울수록 적합하다.
그래서 노을이 진다는 건 출정을 뜻했다. 곧 출정 준비를 마친 레인저들이 찬영과 함께 목책을 나섰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카일이 정한 던전. 한때 헤일로 엘프들에게 넝쿨 성채라 불렸던 구역이었다.
카일이 이곳을 정한 이유는 퇴로가 용이해서였다. 북쪽 전선과 인접해 있는데다가, 아직 토벌하지 않은 레드 스컬 지역 중 유일한 북동쪽 구획. 만약 던전 토벌에 성공한다면 전초기지로 사용하기 탁월했다.
특히 동쪽으로 향하는 부근엔 능선이 있기에 높은 지대를 점할 수 있다. 다른 레드 스컬 무리의 급습을 예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보조하는 부대장은 세 명이 정해졌다.
한 명은 카슬라.
“여전히 못마땅한 건 사실이에요.”
그녀는 카일에게조차 뾰족하게 말하며 자길 따르는 두어 명의 레인저와 함께 능선 위에 자리 잡았다.
정찰대로서 또 다른 레드 스컬 무리가 등장하면 알리는 역할을 맡은 거다.
다른 두 명은 벡과 도레인.
그 둘은 넝쿨 성채와 북쪽 전선 중간 지점에 자리 잡았다.
벡은 목책 전선에 있을 고베이에게 상황을 알리는 전달자 역할을, 도레인은 소수의 레인저들과 함께 퇴로 일대를 지키며 여차하면 카일에게 투입되는 전투 임무를 맡았다.
하지만 만약 작전이 실패했을 시 퇴로 임무가 원활히 이뤄지려면, 카일과 찬영은 벡이 있는 중간 지점까지 도망쳐 줘야 한다. 퇴로 지점과 넝쿨 성채와의 거리가 생각보다 멀기 때문이다.
* * *
그렇게 함께 이동하던 부대장들이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찬영은 카일과 은밀히 기동해 넝쿨 성채 초입에 신속히 당도했다.
찬영이 물었다.
“저기입니까?”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저곳이…….
말끝을 흐린 카일의 눈빛은 깊은 회한에 사로 잡혀 있었다.
한때 평화롭던 넝쿨 성채.
어린 엘프들이 뛰어놀던, 아늑하기만 하던 이 공간이 이젠 어둠이 가득한 몬스터의 서식지가 되어 버렸다.
재건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까?
카일은 가슴이 먹먹했다.
생각에 잠긴 그를 두고 찬영이 말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이제부턴 찬영 개인의 단독 임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