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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자동보상-52화 (52/248)

# 52

#52.

프라이는 조용히 침묵하며 로이크를 바라보았다. 그가 서 있는 곳은 거대 철문의 한가운데였다.

하지만 그의 일시적 부활로 동굴은 더 이상 단순한 동굴이 아니게 됐다.

잊힌 프라이의 무덤이 깨어난 것이다. 종류석으로 가득했던 천장은 일제히 반짝이며 푸른 은하수 같은 빛을 발산했다.

반사된 그 빛은 어떠한가? 그대로 바닥을 향해 내리쫴서 찬영이 걸어온 돌의 길을 비췄다. 마치 달이 어두운 숲을 밝히듯.

그로 인해 푸르스름한 빛을 머금은 돌의 길은 방금 전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모했다.

양 사이드엔 길을 따라 둥근 얼음 기둥이 일정한 간격으로 솟아올라 있었고 그 끝엔 철제문이 정중앙에 세워져 있었다. 동굴 벽, 삼분지 일을 차지하고 있는 이 거대한 문은 그야말로 얼음장 같은 위엄과 차가운 경계를 가득 품고 있었다. 마치 프라이의 눈동자처럼.

스륵.

프라이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검붉은 망토로 온몸을 둘러싼 로이크의 영혼이 프라이의 주변을 맴돌았다. 프라이가 로이크를 불렀다.

-로이크.

-오냐.

-나는 평생 그대의 뜻에 따라 준 적이 없다. 우리의 길은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이 달랐다 생각하였다.

-지금도 다르진 않다.

-아니. 난 죽음의 끝에서 알았다. 우린 다르지 않았다, 벗이여. 하여, 나 또한 그대와 같이 호승심이 있었음을 인정하겠다.

-뭐라?

로이크의 검붉은 망토가 흩날렸다.

떨리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동시에 프라이가 말했다.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우린 우리의 삶을 그저, 살아가면 되는 것이었고 그 결과 또한 우리의 몫이었다. 후대는 결코 평가할 수 없다. 그들은 그대와 나의 뜨거운 심장을 느끼지 못하였다.

-그게 무슨 소리냐!

-후대의 이야기에 흔들리지 않겠다는 얘기이니라. 결과는 우리들의 몫. 하나 우린 그 끝을 보지 못하였지. 그래, 그것으로 끝인 게야. 더 연연할 것이 없다. 후대에게 물어볼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로이크가 부르르 떨었다.

-닥쳐라. 평생의 한과 한을 끌어 모아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 어서 놈을 시험하고 네 유산을 저놈에게 전해 주란 말이다!

-거절하마.

-그래? 좋다. 정 네 뜻이 그렇다면 내, 저놈의 몸을 빌려서라도 네놈과 끝을 보겠다.

로이크의 안광에서 검붉은 빛이 흘러나왔다.

한恨이다.

로이크가 되돌아서서 찬영에게 날아왔다.

찬영을 위기에 빠트린 의기양양하던 표정과는 달랐다.

-나를 받아 들여라, 애송아. 그렇지 않으면 네놈은 나의 유산을 전부 전승받지 못할 것이다.

동시에 창이 하나 떴다.

-로이크가 빙의를 요구합니다. 빙의 시 신체는 로이크의 제어를 받습니다.

“내 몸에 들어오겠다고?”

이를 본 찬영이 묻자 로이크가 주위를 맴돌며 이를 갈았다.

-그래, 시간이 없다. 놈이 사라지기 전에 네놈의 몸을 빌려, 저놈과 싸우겠다.

“직접 하지 그래.”

-빌어먹을 나침반에 붙어 살아온 세월이 나의 권능을 모두 소진시켰느니라. 후예의 안배로 무덤 안에서 얌전히 누워 있던 놈과 평생 잊힌 세월을 견뎌온 나의 권능이 같을 거라고 보지 마라. 그러니 어서!

악을 지르는 그를 보며 찬영의 표정이 점점, 딱딱해졌다.

“거절하지.”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이미 충분히 로이크의 장단에 놀아나 준 셈.

하지만 두 번은 없다.

안되겠던지 로이크가 찬영을 구슬렸다.

-나의 모든 걸 전수받을 기회도 사라질 것이다. 그래도 좋으냐?

“기꺼이.”

찬영은 더 이상 로이크에게 매달리고 싶지 않았다.

힘?

‘그래, 필요하다.’

대륙을 복원시키고 이 모든 사태를 일으킨 작자를 찾아내야 한다. 그래야 이 길의 끝이 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결정이었어!’

이제껏 모든 게 그래왔다.

당장의 일이 급하다고 해서 자유조차 내놓고 싶진 않다. 하지만 만약 이런 이유로,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아 염왕권을 완성시킬 수 없다면?

‘그래, 분명 아까운 선택일 것이다.’

하지만 다른 선택은 얼마든지 있다.

“염왕권의 심법을 소유하는 게 필요한 옵션이긴 하지만…….”

찬영의 눈빛에 힘이 들어갔다.

“전부를 걸어야 할 정도는 아니야.”

프라이와 목숨을 걸고 싸우는 건 로이크와의 거래 옵션에 없었다.

-감히! 나, 로이크를 거부해. 내 온 힘을 다해 네놈의 몸을 빼앗겠다!

로이크의 검붉은 망토가 일순 찬영의 눈앞을 가득 메웠다. 몸 안을 파고들려하던 망토.

그 순간.

하얀빛이 찬영의 심장 부근을 기점으로 얇은 막을 생성시켰다.

따스한 품.

찬영은 비슷한 느낌을 받아 본 적 있었다.

‘베아트리체!’

그래, 그녀였다.

‘그럼 그녀가 나를?’

그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몸 안에 파고들려 했던 로이크의 영혼이 강하게 튕겨졌다.

콰앙!

-네놈 안에 어찌, 이리 많은 영이 있을 수 있단 말이냐.

깨어나지도 않은 자들이 왜 이리…….

찬영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맺혔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아직 카드 뽑기는 한 번 밖에 안했다.

그 말은 직접 뽑지 않은 카드들이 무수히 많다는 얘기고.

버프를 위해 준비되어 있는 대륙의 인물들이 무수히 많단 얘기.

그래, 그들이…….

‘내 안에 있다!’

찬영이 눈을 들어 로이크를 두 눈뜨고 바라봤다.

놈의 선택권이 이제 전무하다.

그럼?

놈은 숙원을 이룰 수도 없는 처지에 처한 것.

찬영은 사라져가는 프라이의 뒷모습을 힐끗 본 후 말했다.

“로이크.”

-…….

희망을 잃은 듯 놈에겐 아무 말이 없었다.

찬영이 말을 이었다.

“너는 싸울 기회를 잃었어. 그럼 네게 남은 게 뭘까?”

-현혹하는 것이냐?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네가 내게 말한 제안은 하나였어.”

-…….

“너의 유산과 프라이의 유산을 이어 받아, 나를 통해 우열을 가리는 거였지. 그럼, 그걸 기대해 봐. 나를 통해.”

-크큭, 가소롭구나. 엄연히 빙의와 전승은 다르다! 네가 당장 내 심법을 전승 받는다 하더라도 프라이를 쓰러트릴 순 없단 말이다! 애송아!

“싸우겠다고는 말하지 않았어.”

찬영이 저 멀리 어둠 속 문을 향해 흐릿해져가는 프라이를 바라보았다.

“난 너와 다른 선택을 할 테니까.”

때마침 로이크의 검붉은 망토가 절반쯤 사라지고 있었다.

“어서 결정해. 시간은 네 편이 아니다.”

-으아아!

분노한 로이크가 울부짖었다.

* * *

스스스.

결국 로이크는 사라졌다. 하지만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솨아아.

그의 흔적이 남아 찬영에게 스며들었다.

-로이크의 잔여 마나가 귀속되었습니다. 잔여 마나로 인해 염왕권과 염왕초혼심법의 숙련도가 상승합니다.

-마나 2000 상승합니다.

-근력이 100 상승합니다.

-민첩성이 50 상승합니다.

-체력이 F 급 개방되었습니다.

-손재주 F 급 개방되었습니다.

-화火 속성 친화력 E급 개방되었습니다.

-로이크가 남긴 장비를 획득……

눈앞에 떠 있는 여러 개의 창에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분명 이대로 돌아가도 목표했던 성과 이상이었다.

그러나 찬영의 눈은 여전히 문 뒤, 어둠 속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프라이를 향해 있었다. 로이크에게 말했듯, 그와 자신은 다르다.

파밧!

찬영이 섬뢰보를 펼쳐 발끝이 사라지고 있는 프라이의 앞으로 달려 나갔다.

탁.

어느새 그의 앞을 가로 막은 찬영이 고개를 돌렸다.

-로이크가 소멸됐군.

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들어서 알겠지만 그는 내 몸을 빌려서라도 당신과 싸우고자 했어.”

-들었다.

“난 거절했고.”

-그 역시 들었다. 영리하구나.

프라이 또한 찬영이 위기를 기회로 삼은 것을 보았다.

“칭찬은 고맙게 받지. 그 전에 당신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왔어.”

-무엇이지? 나는 잊힌 자. 더 이상 현세에 기대할 것은 없다.

“그래, 그로 인해 당신의 시험을 받을 수 없다는 것도 잘 알아.”

-그럼 내, 단잠을 방해 말아라.

“방해하고 싶지 않아. 구태여 싸우고 싶지도 않다.”

-한데?

“도움을 청하는 거다.”

-로이크의 것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앞으로의 싸움은 부족할지도 몰라. 잊힌 열세 별들의 능력을 모두 모은다 해도.”

프라이가 처음으로 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가 발을 내딛을 때마다 주변을 얼리던 얼음이 삽시간에 뻗어나가 찬영의 주변을 원으로 감쌌다.

-나는 거짓을 증오한다.

“거짓말이 아니다. 직접 보여 줄 수 있었으면 좋겠군.”

순간 프라이의 푸른 안광이 더 없이 강하게 일렁였다.

-진실이여.

어느새 찬영의 양손을 얼어붙게 만든 얼음이 그의 팔을 따라 목 위를 옥죄어왔다.

‘흡…….

찬영의 숨이 점점 가빠져왔다.

얼음 때문에 숨을 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서렸다.

저벅저벅.

어느새 찬영의 앞에 선 프라이의 형체, 그가 푸른 안광을 들이밀며 말했다.

-내게 말하라.

찬영은 그의 말이 끝나자 일순 카메라 플래시가 터진 것 같았다.

눈앞이 잠깐 번쩍이며 흐려진 직후.

어느새 프라이가 일으킨 얼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나의 대륙이 잊혔는가.

찬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아마, 방금 전 그건…….

‘프라이가 나를 통해 기억을 엿본 건가?’

오히려 다행이다.

굳이 입으로 설명할 필요가 사라진데다, 결백을 입증했다.

찬영의 말에 더욱 강한 의지가 실렸다.

“누구에게도 쓰임이 되지 않고 있다면…… 당신의 흔적이 쓸모없이 묻히는 것보다는 내 길에 쓰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그래서 제안하는 거다.”

찬영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전승해 줘. 당신의 모든 것을.”

프라이는 침묵했다.

그러더니 쥐고 있던 대검을 바닥에 쿵 찍으면서 말했다.

-나의 검, 아슬란아. 이제 주인이 바뀌겠구나. 오래토록 나를 지켜온 너의 충성에 경외한다.

아슬란이라 이름 붙은 그의 푸른 빛 대검이 마치 대답하듯 반짝였다.

동시에 프라이가 다시 찬영을 노려보았다.

-붉은 별의 투지를 이어 받은 자여, 그대는 푸른 별의 냉혹함을 이어받을 준비가 되었는가?

“언제든지.”

고개를 끄덕이는 찬영과 함께.

-좋다.

아슬란을 두 손으로 쥔 채 프라이가 사라졌다.

스스스.

동시에 허공에 둥실 떠오른 아슬란.

허공 어딘가에서 프라이의 목소리가 동굴 안에 울려 퍼졌다.

-아슬란을 잡으라. 그가 그대를 허락하였다. 두 개의 별을 전승 받은 후예여. 이제 남은 열세 별은 그대를 향해 끌릴 것이다. 무엇을 마주하건 늘 오연하라. 푸른 별의 뜻을 이어받은 후예는 능히 그래야 함이다. 잊지 마라. 그대는 북풍의 한설을 불러일으킬 신력을 얻었음이다. 자, 아슬란을 잡아라! 북풍한설이 오연한 네 군림 아래 있음을 증명하라!

휘이이잉!

동시에 동굴 안에 강한 얼음 폭풍이 몰아쳤다.

찬영의 얼굴을 때리면서 몸을 부술 듯 몰아치는 바람.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든 이 시간.

찬영은 뜨기도 힘든 눈을 애써 부릅떴다, 이 순간 뭘 해야 할지 알기에.

그렇기에 한 걸음씩, 아슬란을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고통스럽다. 발끝이 당장 잘려나가도 모자라지 않을 만큼 이젠 감각이 없다. 아니, 온몸이 그렇다.

하지만…….

‘손에 넣을 것이다.’

콰드득.

입 안 가득 들어온 얼음 덩어리들을 이가 으스러지듯 깨물며 사력을 다해 손을 뻗었다.

-프라이의 장비, 아슬란을 획득하였습니다.

몰아치던 얼음 폭풍이 애초에 불지 않았던 것처럼 씻은 듯 사라졌다.

* * *

완벽히 고요해진 동굴.

쏟아진 광풍이 사라진 가운데 찬영은 고개를 들었다.

더 이상 프라이의 모습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다.

‘내가 검을 쥔 후 소멸된 건가?’

아마 로이크처럼 잊힘 속으로 사라졌겠지. 하지만 고맙다.

그는 끝까지 자신에게 귀를 열어 줬고 그의 평생이 깃든 것들을 넘겨주었다.

이것만 봐도 이미 두 사람의 우열은 충분히 가려졌단 생각이 스쳤다. 로이크는 과거에 얽매여 잊혀져가는 순간까지 스스로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으나, 프라이는 달랐다.

그는 잊힘을 인정했고 후세들을 찬영을 통해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가 할 수 있는 것을 다했다. 그가 가진 평생의 모든 것을 물려주는 것.

푸른 별의 이네이트와 장비.

찬영이 아슬란을 늘어트린 채 살짝 비껴 보았다.

유려함을 갖춘 형태.

보고 있던 시선을 움직였다. 검날에 이은 검신이 들어왔다.

푸른빛의 검신.

표면도 티 없이 맑으며 매끄럽게 뻗어 있다.

실제로 찬영의 얼굴이 비춰질 정도. 명검을 보는 눈은 없지만, 무기에 대한 경험이 없다 해도 이건 분명 명검이라고 감히 확신한다.

명검만의 기품이 있다면 이런 게 틀림없을 테니까.

찬영은 부드럽게 아슬란의 손잡이를 쓸어내려 두 손으로 대검을 쥐었다.

손잡이에 새겨진 옴폭한 글씨로 인해 손끝에 걸린 음각陰刻의 글씨체, 균형감, 전체적인 라인마저도 담담함이 느껴졌다.

고대어라 뭐라 확신할 순 없지만.

이 검의 이름이 ‘아슬란’ 이니, 아슬란이라 쓰여 있는 게 틀림없다.

뜻은 몰라도 괜찮다.

세상 유일무이한 검이란 게 글자 덕택에 확연히 느껴졌다.

마음 속 고양감이 일어날 정도였다. 가벼운 흥분이 일은 상태로 아슬란을 천천히 들어 보았다.

양손으로 쥔 아슬란을 가슴 앞에 세운 뒤, 머리 위를 한참 지나 천장을 향해 뻗어 있는 검 끝을 보았다.

바스타드 소드보다 검신의 표면은 두 배 넓적하고, 쥐고 있는 둥근 손잡이는 바스타드 소드의 손잡이보다 훨씬 길다.

일반적인 검의 종류에 속하지 못하는 검.

이 검의 이름은 그저…….

“아슬란.”

찬영이 깊은 숨을 토해 내듯 말했다.

하지만 놀라운 건 따로 있다.

이 검을 쥐고 있는 바로 자신.

‘전혀 무겁게 느껴지질 않아.’

하나 찬영은 이미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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