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
#51.
‘5,200?’
이제껏, 상대한 어떤 몬스터보다 강한 녀석이다. 찬영은 경계했다. 가치 측정에선 당연히 자신의 장비 하나가 녀석을 능가하지만 이건 실전이다.
가치 측정이 객관적 지표가 될 순 있어도 변수로 인해 언제든 상황이 바뀔 수 있었다.
‘신중해야 해!’
숨죽인 채 녀석의 주위를 맴돌던 그때 뼈와 뼈가 맞닿는 마찰음을 낸 녀석의 날개들이 바짝 힘이 들어갔다.
기이익! 타닥!
동시의 놈의 네 발이 땅을 박차고 찬영에게 날아왔다.
쐐액!
때를 맞춘 찬영이 민첩하게 물러났다.
파밧!
하지만 놈은 그치지 않고 세 번을 연달아 땅을 박차며 이빨을 들이밀었다. 그럴 때마다 놈의 이빨에 물려 다리가 잘려나갈 뻔 했다. 하나 그것뿐, 놈의 패턴은 단순했다.
찬영은 오히려 의아했다.
‘놈은 오로지 이빨을 활용한 공격만 사용해. 그럼 날개는 대체 왜 달린 거지?’
이유를 모르겠다.
분명 필요 없이 달린 건 없을 것이었다. 어딘가에 반드시 쓰일 터. 놈의 날개가 무척 거슬렸다.
콰직!
하지만 그동안에도 놈의 패턴은 달라진 게 없었다. 또 다시 같은 패턴으로 달려든 것이다. 그렇다면 이를 이용 못 할 건 없었다.
놈이 달려드는 때를 맞춰 훌쩍 옆으로 움직였다. 이빨이 스쳐가는 것과 동시에 에어펀치를 활용했다.
쐐액!
총알처럼 날아간 찬영의 주먹.
퍼펑!
놈의 머리 뼈 절반이 날아가며, 그 힘에 떠밀린 거대한 놈의 몸체가 힘없이 바닥을 굴었다.
쿠콰캉!
쐐액!
찬영이 틈을 주지 않고 두 번째 주먹을 뻗었다. 그러자 놈이 주먹을 막기 위해 두 날개로 빠르게 몸을 감싸 덮었다. 하나 날개로 감싸도 소용없다. 주먹이 맞닿자 건틀릿에 위력에 놈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찬영이 재차 쐐기를 박으려 하던 순간, 놈의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이건?’
강한 위화감이 느껴진 찬영은 뻗어가던 주먹을 멈칫거렸다.
기기긱.
잇달아 날개 끝에 달린 뼈들이 갑자기 분리되었다. 전광석화 같은 기습!
쐐액!
수십 개 뼈들이 미사일처럼 일제히 쏟아졌다.
코앞에서 비산하는 뼈들. 삽시간에 모든 가시가 찬영의 전신을 뒤덮어 버렸다.
그때였다. 모든 것들이 허공에서 정지했다.
그래비티 필드가 펼쳐진 것이다.
이윽고 ‘쿵’ 하며 강한 중력이 놈의 두 날개를 짓이겼다. 수십 개의 뼈들 역시 마찬가지. 와르르 바닥에 떨어져 위력을 상실했다.
하지만…….
‘위험했다!’
찬영은 등골이 섬뜩했던 걸 떠올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만약 직감을 거스르고 계속 주먹을 뻗었다면?
‘그래비티를 펼칠 시간도 없었을 테지.’
신경 쓰였던 날개를 염려하며 움직였던 게 유효했다. 이제 전투는 끝났다. 속박된 놈을 정리하면 그뿐.
‘음?’
막 그러려던 찰나.
기기깅.
놈의 부서진 하관이 미세하게 떨리며 움직이려 했다. 찬영의 눈에 이채를 띠었다.
‘움직인다고?’
물론 그래비티 필드가 무적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치 5,000의 하관이 미세하게 떨릴 정도라면 그 이상 가치 측정을 가진 적들은?
찬영의 눈에 고심이 일렁였다.
‘그래비티가 통하지 않을 경우의 전투도 신경 써야겠어.’
실전을 통해 또 한 번, 경험이 쌓이는 찬영이었다.
‘자, 그럼…….
찬영은 정말 끝을 보기 위해 속박된 녀석의 몸을 타깃으로 잡고 건틀릿을 겨눴다.
웅, 웅 소릴 내는 건틀릿.
불꽃인가? 아니, 이번엔 화염이 아니다.
작은 바람이 모여들어 압축된 공기가 휘돌며 건틀릿의 손아귀를 감쌌다.
스툼브레이크의 발동.
주변의 흙먼지가 자연히 스툼 주변에 빨려들며 치칙 거리며 잘게 부서졌다.
타닥.
오로지 필드 안에선 찬영만이 자유롭다.
탁, 탁.
성큼 성큼 걸어간 찬영이 스툼으로 레드 스컬의 정수리를 내리 찍었다.
콱!
놈의 두개골이 와르르 무너지면서, 스툼의 주위로 나선형의 바람이 휘돌았다.
콰지지직!
그 바람이 단숨에 놈의 몸체 중심부를 와르르 헤집었다.
5m쯤 됐던 놈의 길쭉한 뼈들이 산산조각 났고.
콰직!
그 소리를 마지막으로 놈의 남은 뼈가 전부 무너져 내렸다.
* * *
리더 몬스터를 처리한 뒤 들어간 동굴은 무척 어두웠다. 앞을 비출 것이 필요했기에 찬영은 얼른 인벤토리를 살폈다.
치직.
이어서 손에 놓인 작은 구슬.
그 구슬은 마나 충전 없이 다섯 시간이나 효력이 있는 ‘케어라이트’ 다.
레인이 준 도움이 쏠쏠했다.
사방이 확 트인 듯 밝아지자 이번엔 역한 냄새가 났다.
카일에 의하면 간혹 향을 통해 독을 살포하는 독초들이 있다고 했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또 다시 인벤토리를 뒤적거리는 찬영.
동시에 손에 집어든 건 검붉은 마스크다.
3서클의 ‘브레스실드’ 가 중첩되어 있는 아티팩트.
물론, 10회 제한이 있는 아티팩트다. 10번 사용하면 중첩된 마법이 사라진단 얘기. 하나 적어도 지금은 굉장히 만족스럽다.
코 밑부터 턱까지 얼굴 절반을 덮은 부드러운 질감은 물론, 공기에서 살포된 독이나 부패한 것들을 마나를 통해 제거시킨다. 마나를 활용한 방독면인 셈.
사방이 흙으로 둘러싸인 동굴 통로는 가면 갈수록 좁아져갔다. 나중에는 허리를 반쯤 숙이고 가야할 정도.
그때쯤 손에 놓인 케어라이트의 불빛 사이로 작은 전갈 형태의 벌레가 사사삭 지나갔다.
덩달아 나침반이 이번엔 땅 아래를 가리켰다.
‘서 있는 곳 아래?’
마침 지나가는 벌레를 따라가자, 벌레는 흙더미 밑으로 금방 사라져갔다. 땅을 파는 기색도 없었다. 마치 안이 비어 있듯.
황급히 몸을 낮춰 양손으로 흙을 파내듯 흩트리자 커다란 공동의 입구가 나타났다.
찬영의 눈에 이채를 띠었다.
알고 보니 이 통로는 다른 곳으로 향하는 입구였을 뿐.
만약 나침반이 없었다면 전혀 알아채지 못했을 거다.
찬영이 손을 뻗어 맨홀을 옆으로 열어젖히자 저 멀리서부터 뭔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쿵! 쿵! 쿵!
느낌이 좋지 않았다.
황급히 열린 공동 안으로 진입하면서 다시 입구를 닫았다.
쐐액! 탁!
그러자 바로 아래층에 또 다른 통로가 보였다. 나침반을 보자 앞쪽으로 방향이 움직였다. 하나 느긋할 틈이 없었다.
닫혀 있던 입구가 달가닥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맨홀 틈 사이로 흙들이 당장, 쏟아질 듯 푸스스 떨어지고 있었다.
그로 인해 알 수 있는 건 하나.
통로가 무너지고 있다!
‘제길!’
쿠쿵, 쿠쿵.
황급히 섬뢰보를 발동하는 찬영.
콰콰!
하지만 땅굴이 무너지는 속도도 만만찮게 빨랐다.
타타타탁!
달리면서 이를 악물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만 봤다.
어차피 뒤를 돌아보든 안보든, 휩쓸리는 땅굴에 파묻히면 위험한 건 매한가지다.
달리는 시간도 모자라다!
그 일념 하에 있는 힘껏 달리던 그때, 저 멀리 빛이 새어나오는 게 보였다.
콰콰!
‘조금만 더!’
타악!
뒷발을 축으로 몸을 내던진 찬영.
무너지던 흙먼지가 일제히 휘몰아치며 등을 밀어냈다.
쐐액!
그 힘에 떠밀린 찬영이 허공제비를 돌며 종이인형처럼 날아갔다.
쐐액!
하지만 짧은 순간에도 찬영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침착했다. 땅에 머리로 착지하기 직전 진공나찰보를 발동한 것이다.
타탁.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발판삼아 몸을 휘감은 찬영이 어렵사리 땅바닥에 무사히 착지했다.
쿠당탕!
워낙 균형을 크게 잃어 몇 번 구른 건 어쩔 수 없었지만.
탁. 탁.
온몸에 흠뻑 묻은 흙먼지를 털어 내고 나서야 찬영은 그제야 주위를 제대로 둘러볼 수 있었다.
‘대체……. 여긴 어디지?’
고개를 돌리자 천장엔 종유석들이 있었고 회색 빛깔의 돌을 깔아 만든 기다란 라인이 들어왔다.
하지만 그뿐이다. 이곳엔 아무것도 없다. 사방이 돌로 막혀 있을 뿐.
찬영이 다시 나침반을 확인했다.
그러자 나침반은 놀랍게도…….
‘저 선을 가리키잖아?’
하지만 저 선을 따라가도 문제다. 끝에는 어차피 벽만 보일 뿐이었다.
‘아님…… 이 동굴 너머를 의미하는 건가?’
하지만 찬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다.
분명 나침반이 안내하는 데로 잘 왔다고 확신한다.
그럼…….
‘일단 가보자.’
벽에 어떤 장치가 있을지도 모르질 않나? 여긴 마법이 있는 세계니까.
그 생각을 쫓아 찬영은 색이 다른 돌길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때 나침반을 보며 걷고 있던 찬영이 얇은 막 같은 걸 통과했다.
‘뭐지……?’
찬영은 묘한 느낌에 방금 지나온 길을 돌아봤다. 마치 대로변을 걷다가 거미줄 사이에 걸린 느낌과 흡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미줄과는 달랐는데?’
그 순간, 방금 전까지 동굴이었던 자리에 금은보화가 넘쳐났고, 사방에선 아름다운 여인들이 나신인 채로 춤을 추면서 주변을 거닐었다.
‘꿈인가?’
그런 생각으로 고개를 돌리자, 등 뒤에 고개 숙이고 있던 남자들이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낙원의 왕이시여. 분부만 내려주시옵소서. 영원불멸의 삶이라도 바치겠나이다.”
돈, 여자, 인력…… 없는 게 없었다.
방금까지 차가워 보이기만 하던 동굴과는 전혀 다른, 안락한 가구와 침실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그냥 쉬고 싶다.
찬영마저도 흔들렸다. 누가 어렵고 힘든 길을 좋아할까? 여기라면 뭐든, 해낼 수 있고 이룰 수 있다.
의식주의 모든 게 갖춰져 있고, 풍족함이 가득했다.
어디서든 욕망을 채울 수…….
그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던 찰나, 흐리멍덩해져가던 찬영의 눈빛이 다시 본래의 색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래, 마음에 든다. 이 모든 게.’
마음이 흔들린 게 사실인 것이다.
그러나 다행인 건 이 환영을 고안한 자가 자신을 모른다는 거다.
그에겐 불행히도…….
‘나는 이유 없는 행운은 즐기지 않아.’
평생을 무작정 주는 공짜 세일도 안 쳐다보고 살았다.
공짜가 어디 있나?
‘시대착오적인 발상이지.’
그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모든 환영들이 일거에 사라졌다.
‘됐다.’
흔들렸던 마음을 다잡으며 눈을 똑바로 든 찬영의 앞에 방금 전 동굴의 정경이 들어왔다.
하나 그뿐이 아니다.
정면에 숨겨진 대문이 나타났다.
‘아까 들어왔을 땐 분명 없었는데!’
찬영은 그제야 깨달았다. 방금 그 환영 마법 같은 것은 저 문을 열게 하기 위한 일종의 테스트였던 모양.
설마…….
문득 들고 있던 나침반을 내려다보자, 나침반은 더 이상 방향을 가리키지 않고 빙글빙글 돌기만 했다. 마치 이곳이라 얘기하듯이.
동시에 열려 있던 문 사이로 푸른빛이 일렁이는 존재가 걸어 나왔다.
-탐욕에 현혹되지 않은 그대가 나를 깨웠는가? 아님, 로이크 그대인가?
생전의 모습을 갖춘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은 사내가 온몸이 푸른빛으로 둘러싸인 채 입을 열었다.
그가 한 손에 쥔 커다란 대검으로 땅을 내려 찍자, 나침반이 찬영의 손에서 벗어나 사내의 앞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나침반 안에서 어둠의 불꽃을 가진 로이크가 나풀거리는 찢어진 검은 망토를 갖춘 채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이구나. 나의 숙적, 프라이.
-아직도 영혼을 불사를 그대의 투지는 그대로구나.
-여전히 얌전한 흉내는 잘도 내는구나. 프라이. 네놈의 호승심을 내 모를 것 같으냐?
-후후, 하나 우린 잊혔고, 그대와 나의 승부는 고대의 것이 되었다. 잊힌 자들의 승부가 무엇이 그리 중요할까?
-아직, 모든 게 끝나진 않았다.
-어째서……?
-한때 네가 말하였지. 네놈과 내가 가진 모든 것의 우열은 후세들의 몫. 그래, 그래서 내가 데려왔다. 네놈의 것을 전해다오.
-나의 것……? 푸른 별 프라이의 것을 말이냐.
-오냐, 맘껏 시험하라. 마나조차 제대로 이해 못한 저 애송이가 네 말대로 명확한 답을 가져올 후예라면…….
로이크의 검붉은 안광이 찬영을 향했다.
-오늘 네놈에게 살아남을 수 있겠지.
로이크의 안광을 마주한 순간, 찬영은 비로소 깨달았다.
‘그래서 만반의 준비를 갖추라고 했던 건가?’
단순히 던전을 탐사하는 것만 기다린 게 아니었다.
로이크는 프라이와의 싸움을 준비하라고 했던 거다.
놈은 왜, 진작 말하지 않았던 걸까?
“왜, 이제야……?”
찬영이 묻자 로이크가 웃었다.
-순순히 내 유산을 줄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애송이.
이제야 알겠다.
이게 로이크의 진짜 시험이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