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오슬로 구릉을 벗어나기 직전 찬영은 마침내 마지막 경사면 위에 올라섰다. 창을 힐끗 보니 2회 차 17회 차였다. 이제 3일만 더 지나면 20회 보상받기가 가능했다.
기다려진다.
물론 결과가 설레는 건 로그인 캘린더뿐만이 아니다.
오는 동안 틈틈이 확인한 스텟 농장도 나름의 성과가 있었다. 도타는 현재 프린초의 씨앗을 통해 정성들여 개간을 시작 중이다. 프린초의 첫 개간이라서 그런지 아직 개간 완성은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당연히 도타를 데리고 사냥을 나가는 건 포기했다.
반면 병아리는 도타의 품에 무럭무럭 커가고 있어서 슬슬 영계의 모습을 띄기 시작했다.
‘조만간 녀석이 낳은 알을 볼 수 있겠지.’
추가로 민첩성의 상승이 있었다. 무려 ‘+2’ 상승이었다.
이로 인해 이동 계열 기술들이 좀 더 신속하고 더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을 것이었다. 하여, 현재 민첩성 총합 수치는 95가 되었다. 조금만 더 상승시키면 100을 넘길 것 같다.
‘100이 되면 달라지는 변화가 따로 있을까?’
이제껏 변화가 꼬리에 꼬리를 물 듯 연쇄적으로 진행됐던 걸 고려해 봤을 때…….
‘어쩌면?’
그런 생각을 하며 찬영은 지고 있는 노을을 응시했다.
저 멀리 지평선 위에 덧댄 듯 줄지어 선 목책들이 보였다. 목책의 선봉은 헤일로 골짜기 입구를 방패로 막아선 듯 세워졌다. 나머지 목책은 빼곡한 나무들 사이사이에 비집고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그 목책들을 방패삼아 수십 채 정도 되는 임시 천막들이 대거 자릴 잡고 있었다.
‘저곳이…… 헤일로의 골짜기.’
찬영은 목책들을 향해 다가가기 위해 언덕배기를 거침없이 내려갔다.
* * *
찬영이 다가오기 시작하자 저 멀리 하늘에서 작은 비행체들이 하나 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새였다.
배에 영롱한 빛이 흐르는 새들…… 그 새들이 세 마리쯤 하늘을 선회하며 찬영의 동태를 살폈다. 찬영이 목책 진입을 한 300m쯤 거리를 목전에 뒀을 때, 목책 문이 열리고 스무 명 가량의 레인저들이 나타났다.
검정색 화살통을 멘 그들은 하나같이 얼굴을 모두 가리는 붉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이들을 본 찬영이 섬뢰보의 속도를 줄였다. 그런 그를 제일 먼저 반긴 건 선두에 있던 한 남자였다.
한데 그의 귀가 조금 특이했다. 귀 위쪽이 뾰족했고 눈동자의 동공이 두 개였다. 그가 가면을 벗으며 무미건조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그 유명한 갓피스로군요.”
그러자 그의 말이 번역되어 잘 들려왔다.
‘신기하네.’
찬영은 팔에 차고 있는 팔찌 형태의 아티팩트를 내려다봤다.
이 아티팩트 역시 말이나 글을 번역하여 의사소통에 도움을 준다.
영주가 준 늘 데리고 다니던 구슬 형태의 의사소통 마법구는 더 이상 쓰지 않기로 했다. 언제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는 판국에 그게 말이 되냐며 그녀가 선물을 준 덕분이다. 겸사겸사 이것 외에 몇 개를 더 받기도 했다.
“예, 그쪽은 누구십니까?”
찬영이 되레 물었다.
“모르고 왔습니까? 그럼 여긴 어떻게……?”
찬영이 이곳까지 온 배경을 간략이 설명해 줬다.
남자는 찬영의 이야기를 듣고 대답했다.
“그렇군요. 난 갓피스 당신이 우릴 위해 파견 나온 줄 알았습니다.”
무덤덤하게 대답한 뒤 목책을 돌아보며 말했다.
“나는 카일입니다. 그리고 이 앞은 헤일로의 골짜기라 불리는 협곡입니다. 우린 이곳을 수복 중에 있습니다.”
찬영의 눈에 이채를 띠었다.
“수복 중이라면……? 아직 영지의 병력이 한 번도 오지 않았습니까?”
“병력은 한정적이고…… 알폰 지방은 넓습니다.”
이 대답에 찬영의 궁금증이 풀렸다.
“병력 부족이군요.”
카일은 동의하며 말을 덧붙였다.
“예, 하지만 우리 헤일로의 엘프들과 오슬로의 레인저 대대는 숲을 다시 수복하기 위해 이곳에 전선을 꾸렸습니다.”
찬영은 동시에 눈을 빛냈다.
‘엘프? 생김새가 특이했던 게 종족이 달랐기 때문이었던 건가?’
그래, 틀림없었다. 하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종족이 달라 낯선 눈으로 보는 게 괜한 실례로 비춰질까 신경 쓰였다.
“놀랍네요.”
“무엇이……?”
“척박한 환경처럼 보이는데, 이 정도 전선을 세우신 게 놀랍습니다.”
찬영의 입에서 진심으로 나온 칭찬에 무표정하던 카일이 잠깐 웃음기를 보였다.
금세 사라지긴 했지만.
하지만, 정말 그렇게 얘기할 만했다. 찬영이 오는 길목 내내 이곳은 굉장히 척박한 환경이었다. 영지에서 도와주긴 했을 테지만 그래도 이곳에 머문다는 건 많은 인내가 필요할 것 같다.
찬영이 그 생각을 하는 동안 카일은 옆으로 슬쩍 비켜섰다.
목책 안으로 진입하는 문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들어가지요. 방문 목적이 어찌됐든 갓피스의 등장은 우리의 땅이 머지않아 평화로워질 거란 희망을 줄 겁니다.”
“아, 네. 환대에 고맙습니다.”
“잊힌 세계수의 가호가 그대와 함께 하길 빕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축복을 기원하는 카일과 함께 찬영은 커다란 목책 문을 올려다보았다.
파드득!
때마침 아까 찬영을 감시하던 새들 중 한 마리가 카일의 팔에 앉았다.
‘음?’
찬영은 신기한 듯 새를 바라보았다.
‘이 새는 대체 뭘까?’
그러다 카일과 눈이 마주쳤다. 카일이 새와 찬영을 번갈아보더니 찬영의 호기심을 눈치 채고 말했다.
“블루 버드입니다. 마나를 함유한 존재들을 감지하는 새죠. 사람이든, 몬스터든 뭐든 탐지합니다. 희귀종이죠.”
카일은 블루 버드의 부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며 덧붙였다.
“엘프는 동물과 교감이 가능합니다. 이 친구를 통해 저는 저 멀리 당신이 오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죠.”
찬영은 도착하기도 전에 카일이 배웅 나왔던 걸 떠올렸다.
“그랬군요.”
들으면 들을수록 엘프라는 종족은 다양한 능력을 보유했다. 새삼 또 다른 세계를 거닐고 있다는 게 피부로 와 닿았다.
그동안 8m쯤 되어 보이는 목책 문으로 진입하던 카일이 다시 찬영을 불렀다.
“안 가십니까?”
“예, 갑니다.”
찬영이 그 뒤를 쫓았다.
* * *
헤일로 전선에 접어들고 난 뒤, 카일의 배려에 찬영은 대형 천막을 홀로 사용할 수 있게 됐다. 반나절쯤 쉬고 움직이려 했으니 이만하면 큰 도움을 받은 셈이었다. 위험이 도사리는 밖에서의 노숙보다 안전한 건 두말 할 것 없었다.
하지만 반나절 쉰다고 해서 무작정, 멍하니 누워 있을 생각은 없었다. 찬영은 카일을 직접 찾아가 조언을 좀 받기로 했다. 지도는 미니 맵을 통해 보고 있으니, 길을 헤맬 염려는 없었으나…… 문제는 지도에 나오지 않는 변수들이었다.
몬스터부터 시작해 각종 독충, 짐승들까지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베아트리체의 버프로 인해 독에 대한 내성이 높아지긴 했지만 오디 당시를 생각하면 아직도 부족한 게 현실이었다. 최대한 위험한 변수들은 피해갈 수 있으면, 피해갈 수 있는 게 낫다.
지금 원하는 건 이 나침반이 가리키는 마지막 목적지다.
그러니 그곳에서 힘을 소비해야지, 괜한 곳에서 힘을 소비할 순 없다.
그래서 카일을 찾았다.
카일은 찬영이 온 게 별로 놀랍지도 않은지, 도움을 주겠다고 담담히 말했다.
“자…….”
그가 탁자에 양피지 지도를 깔아 뒀다.
헤일로 골짜기와 관련된 지도다.
찬영은 지도를 샅샅이 훑어봤다.
이렇게 보고 있는 게 미니 맵에 저장될 테니…….
동시에 뜨는 창.
-헤일로 골짜기 신규 맵이 업데이트 되었습니다.
보통 과거의 지도와 다른 형태의 지도를 보고 나면 이런 식으로 미니 맵의 업데이트를 알려주었다.
특별한 건 없다. 그냥 알람 정도다.
덩달아 지도를 전부 확인한 찬영이 고개를 들었다.
“혹시 여기 붉은색 말들이 토벌 지역을 뜻하는 겁니까?”
찬영이 붉은색 말들을 가리켰다.
카일이 고개를 끄덕인다.
“예.”
찬영은 그 대답에 얼굴이 살짝 굳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붉은색 말이 있는 지역은 달랑 구석 어귀다. 그럼 이곳을 제외한 대부분이 아직 몬스터의 영역이란 얘기.
‘적진 안으로 뛰어들란 건데…….
찬영이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것 물러날 순 없다. 가려면 끝까지 가야 한다. 조금 걱정스러운 찬영의 눈치를 읽은 걸까?
카일이 말을 걸었다.
“이곳을 지나야 한다 하셨지요.”
“네,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저희의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직설적인 질문. 하지만 카일의 직설적 화법엔 찬영도 슬슬 적응 중이었다. 그는 빙빙 돌려 말하는 타입이 아닌 모양이다.
찬영도 그에 맞게 대답해 줬다.
“아뇨, 괜찮습니다.”
진작 도움을 받을 거라면 영주성에서부터 그랬을 것이다. 하나 명분이야 어쨌건 개인적 목표를 달성하러 가는 길이다. 언젠가 대대적 토벌 전투에 들어가야 할, 그들에게 괜한 희생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위험은 로이크의 힘을 얻을…….
‘나 혼자 감당해야지.’
그게 당연한 거다.
“의외군요. 도움을 구하실 줄 알았는데.”
“뭐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어쩌면 헤일로의 골짜기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고요.”
“두려워하시는군요. 괜한 희생이 될까 봐.”
순간 찬영은 그의 두 개의 동공이 속내를 훑어본 것 같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래서일까,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예.”
그 대답이 마음에 든 건지 카일이 또 다시 가볍게 미소를 지을락 말락 하더니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이게 저를 어디로 끌고 갈지 알 수가 없어서요.”
찬영이 나침반을 들어 올렸다. 그걸 본 카일의 눈에 이채를 띠었다.
“이걸 쫓아가고 계신 겁니까?”
“네.”
“무모하군요.”
잠깐 나침반을 묘한 눈길로 바라보던 카일이 덧붙였다. 찬영은 조금 민망했다.
‘하긴, 무모하긴 하다만…….
달리 방법이 없다. 수많은 위험들이 시시각각 다가오는데, 앉아서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을 순 없었다. 더 성장해야 한다.
찬영 또한 부정할 수 없는 말이라 고개만 끄덕였다.
잠깐이었지만 찬영을 머쓱하게 만든 카일이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아무튼 병력 지원을 거절하신다니, 더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네.”
찬영도 오히려 이편이 편했다. 상대를 생각지 않는 과한 배려보단 깔끔한 배려가 오히려 편하다고나 할까? 점점 카일이 마음에 드는 찬영이었다.
“예, 대신…… 다른 걸 좀 여쭤볼 수 있을까요?”
“어떤 걸?”
“헤일로의 골짜기가 고향이셨던 데다가 이곳 전선에 오래 계셨으니, 조언을 좀 듣고 싶습니다.”
“네, 그러죠.”
카일은 두루마리 종이들을 하나둘씩 펼치며 찬영을 보여주었다. 돌돌 말려 있던 것들이 하나씩 펼쳐지자 한때 몬스터의 침범이 없었던 과거의 상세 지도가 나타났다.
이를 본 찬영의 눈에 이채를 띠었다.
‘디테일한데?’
정말이다. 마침, 미니 맵이 업데이트됐다는 알람이 떴다.
이제껏 봐 온 어떤 지도보다도 디테일했다.
헤일로 골짜기라는 한정적 지역을 4등분해서 나눠 그렸기에 그런 것 같았다.
카일이 설명을 시작했다.
“헤일로의 골짜기는 남쪽의 험악한 늪지대를 피해야 합니다. 만약 그곳으로 가시게 될 경우…….”
가뜩이나 굳어 있는 카일의 얼굴이 더욱 딱딱하게 굳었다.
“피하세요. 무조건!”
워낙 단호한 어조여서 찬영은 되레 궁금해졌다.
‘그는 뭘 걱정하는 걸까?’
그리고 나침반은 과연…….
‘날 어디로 이끌까?’
여러 가지 생각을 품은 찬영은 잠자코 듣다가 카일에게 넌지시 물었다.
“이렇게 만류하시는 연유가?”
“그곳에 서식하는 몬스터 때문입니다. 현재 헤일로의 골짜기를 토벌하는 게 불가능한 이유죠.”
“대체, 어떤 몬스터입니까?”
“그건…….”
카일이 잠깐 머뭇거렸다.
이제껏 거침없던 언사를 뱉던 그였기에 그의 머뭇거림이 찬영은 의아했다.
덩달아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몬스터 사이엔 우리의 옛 형제들이 있습니다.”
슬픈 과거를 회상하듯 읊조리는 카일, 무미건조하던 그의 눈빛이 처음 흔들렸다.
찬영도 그가 침묵한 의미를 깨달았다.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장엔 물어보기보단 그가 얘기해 주길 기다리는 게 예의일 것 같았다.
카일이 다시 말을 이었다.
“모든 것이 잿빛이 된 멸망이 도래하기 전, 우리가 싸우고 있던 건 비단 몬스터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카일이 본격적으로 얘기를 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