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자동보상-47화 (47/248)

#47

한동안 윤태규의 눈빛을 담담히 받아내던 찬영은 손을 뻗어 찻잔을 홀짝였다. 진지한 자리라 그런지 조금 목이 탔다.

“그렇습니까?”

이규복이 놀란 눈빛으로 윤태규에게 물었다.

“맞네.”

윤태규의 긍정에 이규복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찬영을 다시 쳐다봤다.

“그런데 어떻게 알고……?”

찬영이 말했다.

“몰랐어요. 다만 가볍기만 한 자린 아닐 것 같았습니다.”

“직감이라?”

잠깐 눈을 치켜뜬 윤태규의 눈빛이 날이 선 것처럼 예리해졌다.

“네.”

대답하는 찬영에게 윤태규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그 말이 맞습니다.”

듣고 있던 이규복은 여전히 혼란스러운 눈빛을 보였다.

이 상황은 전혀 전해들은 바가 없었다. 그사이 찬영이 신중히 물었다.

“그럼……?”

윤태규가 막 대답하려던 찰나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요리 준비됐습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윤태규가 흔쾌히 대답했다.

“들어오시게.”

드륵.

문이 열리고 코스 요리를 가져온 한식당 직원들이 들어섰다.

그 덕에 잠깐 대화가 중지됐다.

요리들이 하나 둘씩 원형 탁자에 깔리는 동안 찬영이 이규복에게 넌지시 속삭였다.

“모르셨습니까?”

“전혀요. 어떤 것도 전해 듣지 못했습니다.”

고개를 좌우로 젓는 이규복과 함께 윤태규가 헛기침을 하며 대화에 참여했다.

“다 들려서 하는 소리네만. 모르는 게 당연합니다. 직원들과 어떤 논의도 없이, 혼자 생각하고 건넨 제안이니까.”

드르륵.

그 말이 끝나자 룸은 요리들이 놓인 채 다시 세 사람의 공간이 되었다.

잠깐 끊어졌던 대화가 재개됐다.

“어떤…… 제안입니까?”

찬영이 물었다.

“찬영 씨를 이젠 프리가 아닌, V.O.의 대표 각성자로서 활동시켰으면 합니다. 상징이 중요한 시대에 살기에 내 뜻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충분히 알 거라 믿고…….”

윤태규의 제안은 분명 달콤했다.

이는 V.O.사의 전폭적 지지를 받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대신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를 가꾸게 될 것이다.

V.O.를 상징한다는 건, 찬영의 이미지와 V.O.의 이미지가 동일한 길을 걷게 된다는 뜻. 말 그대로 기업의 전속 모델이 된다는 얘기였다.

“어떤 조건을 내세우든 불가능한 조건이 아닌 이상 뭐든 들어 드리리다. 지금은 나의 독단적인 결정이나 후일은 모든 V.O.의 임원들의 동의가 따르는 결정이 될 거요. 난…….”

이제껏, 부드럽고 자애롭기만 하던 윤태규의 목소리가 한 순간 엄중하고 무겁게 바뀌었다.

“그럴 만한 자리에 있습니다.”

높은 직함의 무게를 견디는 인물. 전 사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 이가 보일 수 있는 위엄. 그게 찬영의 피부에 와 닿았다.

한동안 대면했던 베이콥 영주의 호탕함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리더다. 하지만 그의 느낌이 인상 깊다고 해서 결정의 영향이 있는 건 아니다. 차분히 다각도로 고려해야 한다.

그 전에…….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아까 내가 한 얘긴, 언제든 들어 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얘기이니 뭐든 물어봐도 좋습니다.”

찬영의 눈빛이 고요히 가라앉았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이 이어졌다.

“절 왜 택하려고 하십니까? 상징으로?”

“찬영 씨의 스토리는 평범한 사람에겐 노력하면 된다는 아이콘이 될 것이고, 마나를 보유한 각성자로 새 시작을 하게 된 이들에겐 넘어서야 할 목표가 될 것이며, 그 모든 생각들의 시작이 우리 V.O.가 될 테니까. 무엇보다…….”

윤태규가 눈을 굴려 이규복을 바라보았다.

“이 대리가 검증한 사람은 한 번도 실망한 적이 없습니다.”

이규복이 조용히 고개만 숙였다.

윤태규는 그에 그치지 않고 생각해 둔 바를 힘 있게 이어갔다.

“그뿐일까? 블루 게이트를 최초로 밟은 각성자. 이는 새로운 세계를 동경하는 이들의 발걸음을 V.O.로 돌리게 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할 테지. 교역 면에선 어떨까? 어떤가?”

불현듯 윤태규가 이규복에게 던진 질문.

이규복이 침착히 대답했다.

“많은 이익이 있을 겁니다. 베이콥 영주와 찬영 씨만큼 가까운 각성자는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찬영은 잠깐동안 아무 말을 잇지 못했다. 놀란 탓이다. 윤태규가 그 틈을 파고들었다.

“부든, 명예든, 원하는 건 뭐든. 찬영 씨의 손에 쥐게 될 겁니다.”

하지만 찬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잠자코 있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나, 뜨거운 감자가 된 건가?’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 같은 것은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이란 건 의도와는 상관없이 돌아간다.

이번 경우가 그랬다. 하나 찬영은 상황에 휘둘릴 생각은 없었다.

어떤 구설수가 생기든 묵묵히 생각해 둔 목표를 이뤄가면서 가던 길을 갈 뿐.

그러니 지금은…….

‘이런 명성 따위에 신경 쓸 때가 아니다.’

명성보다 중요한 게 저 멀리, 알폰 지방에 기다렸다.

한동안 생각에 잠겼던 찬영이 신중히 입을 열었다.

“분명……. 감사한 제안입니다. 과분할 만큼.”

윤태규가 고개를 저었다.

“과분할 것 없습니다. 찬영 씨의 가치는 그만큼 특별해졌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천천히.”

“아뇨, 충분히…… 신중하게 결정했습니다.”

마주한 찬영의 눈빛엔 분명 단호함이 깃들었다.

윤태규는 겸손한데다 두려움 없이 당당한 그의 눈을 마주했다.

경험상 이런 눈은…….

‘물러섬이 없지.’

결정이 끝났다면 닦달해 봐야 아무 소용없을 것이다. 윤태규는 괜한 입씨름을 접어 뒀다.

그리고 기다렸다.

동시에 찬영이 입을 열었다.

“제 결정은…….”

* * *

윤태규는 찬영의 대답을 듣고 웃으면서 자리를 떠났다.

드륵.

그를 배웅하고 돌아온 이규복이 사색에 잠겨 있는 찬영을 불렀다.

“찬영 씨.”

“아, 예.”

기척도 못 느낄 정도로 생각에 잠겨 있던 찬영이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이규복이 찬영의 시선 끝에 자리 잡으면서 말했다.

“아쉬워하셨어요. 많이.”

“그러셨습니까……?”

“네.”

“이 대리님은요?”

이규복이 피식 웃었다.

“저야…… 뭐, 찬영 씨가 당연히 거절할 거라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 찬영은 거절했다. 그리고 이규복은 이를 충분히 예상했다. 찬영이 거절한 이유는 간단했다.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V.O.의 일을 맡을 만큼 여유롭지만은 않습니다.”

그 한마디였다.

그리고 난 후 윤태규는 더 묻지 않았다.

충분히 알아들었다는 듯, 함께 밥을 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신 언제든 재고해도 된단 얘기를 남긴 뒤 떠났다.

그리고…….

찬영은 이제 이규복을 걱정했다.

“이젠 이 대리님이 걱정이죠.”

“예? 뭘요?”

“절 포섭하는 게 회사에서 맡은 이 대리님의 임무 중 하나, 아닙니까?”

이규복이 가볍게 웃었다.

“그렇긴 하지만. 인력이 어디 사람 뜻대로 되나요? 염려 안 하셔도 됩니다. 제가 아는 장인어른은 누군가의 의지를 강제로 꺾고 자기 뜻을 관철할 만큼 모질지 못 하세요.”

이규복의 얘기를 듣던 중 찬영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장인어른이요?”

정말 놀랐다. 아니, 생각지도 못했다.

두 사람 간에 불편한 뭔가가 있다고 예상하긴 했지만…….

‘장인어른이라니…….’

찬영이 놀란 가운데 이규복이 덧붙였다.

“네< 장인어른이세요.”

그의 대답에 찬영이 ‘아’하며 입을 닫았다.

이제야 이규복이 V.O.의 임원이나 알 법한 고급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럼 왜?

‘굳이 대리에 있는 걸까?’

그 생각을 읽은 걸까?

이규복이 쓴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장인어른을 도와 이 일을 시작하면서도 계속 현장에 있고 싶었어요.”

이유는 이미 찬영도 안다. 이규복의 ‘그녀’.

가볍게 숨을 고른 이규복이 말을 이어갔다.

“높은 자리에 오르면 그만큼 많은 책임을 짊어지기 때문에 현장에 나오는 것보다는 사무적인 일을 도맡는 것도 벅차죠. 물론, 도와 드릴 수 있는 데스크 일은 최대한 돕고 있지만…….”

“그랬군요.”

찬영은 김진수와 이규복의 대화부터 이제껏 이규복에게 가졌던 의문점들이 일거에 해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 부담도 없이 딱 그뿐이다.

사람이 바뀐 건 아니니까.

이규복도 그 점이 걱정됐는지 조심스레 물어왔다.

“불편하십니까? 제 환경이?”

찬영이 웃으면서 되려 물었다.

“아뇨, 그래 보였나요?”

이규복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눈 하나 꿈쩍 안 하실 줄 예상하고도 남았어요.”

찬영이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현장에 계속 남아 주세요. 앞으로도.”

“네, 그럼요.”

이규복이 함께 일어나며 대답했다.

더 이상 오고 갈 말은 필요 없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찬영도, 이규복도 새 시대를 준비해가며 나아갈 뿐.

둘은 룸을 벗어나 주차장으로 향하면서 대화를 나눴다.

“……챙겨 드린 던전 매뉴얼은 보셨습니까?”

“아뇨, 아직.”

“얼른 보세요.”

“예.”

“블루 게이트로 가실 건가요?”

찬영은 잠깐 고민했다.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가 하루 쉬고 싶긴 했지만…….

그보다 지구에서 미뤄 둔 일부터 정리하기로 했다. 할 게 너무 많다.

‘알폰 지방의 영주 성은 몬스터를 막기 위한 방파제야. 언제든 무너질 수 있지.’

영주 성이 있다고 지구가 안심할 단계는 아니다. 던전은 많고 대륙 복원의 길은 멀었다. 심지어 이 모든 일의 시작이 어디서 기인됐는지 아무도 모른다.

찾아야 한다.

그게…… 모두의 일상을 돌리는 길이라면.

나의 평화 역시.

찬영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블루 게이트로 갑니다. 대신 이곳에서 마무리 지어야 할 일들이 좀 남았어요. 세 시간 후에 뵙죠.”

쉴 틈이 없었다.

* * *

한적한 도로 위.

정차한 이규복의 차의 조수석에서 찬영이 걸어 나왔다.

“이따 봬요. 저도 본사 다녀와야 해서 시간이 좀 걸릴 거예요. 이곳에서 뵙죠.”

“네.”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닫자 이규복의 차가 다시 출발했다.

떠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린 찬영은 오랫동안 찾아오지 못한 시스테마 도장을 향해 걸어갔다.

도장은 여전했다. 다만 원생 수가 급격히 줄긴 했다.

“어서…….”

새로운 손님을 맞이하려던 동식이 깜짝 놀랐다.

“엇? 찬영 씨!”

“예, 오랜만에 뵙네요.”

“그러게요!”

동식은 찬영의 손을 맞잡고 웃었다.

“소식이 없어서 무슨 일 있는 줄 알았어요. 블루 게이트다, 뭐다 해서 시끄럽잖아요.”

“네, 크게 별 일은 없었어요. 좀 바빠서 그랬지.”

이규복이 들었으면 할 말을 잃었을 소리를 태연히, 입에 담은 찬영은 이용태 강사를 찾았다.

“강사님은……?”

“아, 사실 그게…….”

뒷머리를 긁적인 동식이 덧붙였다.

이후 동식이 해 준 이야기는 찬영으로서도 놀라운 일이었다.

“각성자는 이제 좋은 직업으로 분류되거든요. 각성자가 되기만 해도 꽤 많은 돈을 버니까요.”

마나라는 새로운 대체 에너지, 그 에너지를 활용하는 수많은 직업군들이 생겨나는 동안 각성자의 위상은 당연히 높아졌다.

“저 역시…… 테스트를 보긴 했는데. 떨어졌어요. 마나가 안 흐른다고 하네요.”

찬영이 반문했다.

“그럼 강사님은?”

“각성자가 되셨어요.”

“네?”

“몬스터랑 싸우는 게 일상이 된 세상에서 사람을 방어하고 공격하는 시스테마가 인기가 있을 리가 없으니까요…….”

찬영은 문득 이용태가 무슨 생각을 할지, 스쳐 가는 바가 있었다.

“설마……. 몬스터를 상대로?”

“네, 몬스터한테 통하는 진화된 시스테마를 개발하시겠다고 하네요. 어제 전화 주셨는데 V.O. 소속이 되셨다고 하던데요? 요즘 V.O.에서 설립한 트레이닝 센터에 기숙 생활을 하셔서 연락주실 때까진 먼저 연락 못 드리거든요.”

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적은 나이가 아님에도 도전하는 그의 모습이 멋있었다.

잘 된 일이다.

그리 생각하며 찬영이 동식에게 덧붙였다.

“그럼 나중에 소식 전해 주세요. 저도 더 이상 강사님을 못 뵐 것 같아서요.”

“바쁘신가 보네요.”

“네, 조금.”

“알겠습니다. 연락오시면 그리 전해 드릴게요. 아, 그리고…….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동식이 뭔가 생각난 듯 황급히 사무실에 들어갔다 나왔다.

그가 가져온 건 두터운 공책 두 권.

“이게 뭡니까?”

나직이 묻는 찬영에게 동식이 공책들을 건네면서 대답했다.

“강사님께서 드리래요. 언젠가 찾아오실 거라면서.”

“이건…….”

공책을 받아든 찬영이 내용을 살피자 동식이 설명하듯 덧붙였다.

“시스테마의 동작들 중에 몬스터와 싸울 때 필요할 것 같은 동작들과 몸이 한계에 달했을 때 쓰는 호흡법 같은 걸 적어 두신 것 같아요. 못 참고 제가 슬쩍 봤거든요.”

“아…….”

찬영은 공책의 내용을 일부 살피면서 감탄했다.

정성이다. 내용이 어떻든 간에 그는 어떻게든 도움이 되어 주고 싶었던 모양…… 고마운 사람이다.

찬영은 따뜻한 눈으로 동식을 바라보았다.

“고맙습니다. 정말…….”

“아, 제가 한 것도 아닌데요, 뭘. 그래도 확실히 전해 드릴게요. 정말 고마워하셨다고.”

“네, 그래 주세요.”

가볍게 웃은 찬영은 이용태의 진심이 담긴 공책 두권을 쥐고 힐끗, 운동 기구들을 돌아 보았다.

온 김에…….

“운동을 좀 하고 가야겠네요.”

다신 못 오기 때문일까? 문득 아쉬운 마음이 든 찬영이었다.

“물론이죠.”

동식이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귀국 날의 해가 그렇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 * *

한창 찬영이 운동하고 있던 사이 본사에 도착한 이규복은 갑자기 도착한 통신에 잔뜩, 얼굴이 굳어 있었다. 통신 내용 때문이다.

통신엔…….

-E급 세드몬 수도원 파견팀‘부상 15명. 사망 6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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