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쓸데없는 소리 말고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요! 사람, 거참.”
장칠순이 조금 화가 난 듯 언성을 높일수록 오히려 그들이 불리해지고 있었다.
찬영은 그들의 장단에 절대 발을 맞춰 주지 않았다.
생각했던 페이스대로 분위기를 이끌어가며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아까 저를 국가에 귀속시킨다고 말씀하셨던 것 기억나십니까.”
“그래요. 그건 여전히 달라지지 않은 사실입니다. 양찬영 각성자가 갓피스라는 강한 존재로 불린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더욱더 국가의 통제를 받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V.O.가 아니라?”
“반드시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썩 유쾌한 일도 아니죠, 자유의지 없이 국가의 통제를 받는다는 건.”
“대의를 위해선 그리 할 수도 있어야지! 국가가 있어야 국민이 있는 거 아닙니까?”
고개를 끄덕인 찬영이 대답했다.
“대의를 위해 싸움터에 나서는 게 당연한 일인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그럼…….”
찬영이 눈썹이 꿈틀거렸다.
“의원님 말씀을 서먼 홀 당시 소환되어 죽은 수많은 민간인들의 가족과 그들을 그리워하는 수많은 각성자들에게 전해 볼까요?”
찬영의 말은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다.
각성자들은 이미 초인 혹은 그 이상이다. 그들 중엔 사망한 가족을 그리워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자신의 가족이 모욕당했다 여기면 얼마든지 괴팍한 일을 저지를 이도 있을 것이다.
장칠순은 암살 위험에 놓일지도 모른다.
사람 일이라는 건 모르는 거니까.
“그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 하던 장칠순은 결국 마이크에서 조용히 떨어졌다.
그제야 찬영도 그에게서 시선을 뗀 후 좌중을 돌아보며 말했다.
“모든 나라가 동의한 베이콥 영주와의 협약 체결서 중 10조 2항에 대해 아십니까?”
모를 리 없다.
이곳에 있는 이들은 그 매뉴얼을 작성하고자 심혈을 기울 집단의 엘리트들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그 내용을 기억할 터였다.
찬영이 말을 이었다.
“영지의 자국민은 지구의 법을 따르지 않는다. 단, 지구의 각성자들은 영지의 전폭적인 협조를 지원받는 대신 영주와 합의되지 않은 사항에 관해 개별 지휘권을 가질 수 없다.”
이 말을 기점으로 찬영이 직접 가져온 증서를 내밀며 덧붙였다.
“……이것은 영주님의 허락하에 그곳의 자국민이 되었단 증서입니다. 이건 대한민국의 이중국적 취득 법안에도 해당하지 않습니다. 영주의 영지는 지구에 포함되지 않으니까요.”
이로써 찬영은 국가에 귀속된다고 한들 지구의 법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 즉, V.O.와의 프리랜서 계약이 계속 유효한 상태로 유지되어도 상관없다는 얘기다.
이는 국가의 강제성이 전혀 들어갈 수 없는 부분이었다.
이번 일로 인해 찬영은 지구의 법으로 제지할 수 없는 애매한 존재가 되었다. 그것은 남한을 벗어난 어느 나라든 찬영을 욕심내고 도움받길 원할 수도 있게 된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타국 입장에서는 그편이 더 두 손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오히려 이제부터는 영주와 긴밀한 사이가 된 찬영을 두고 쟁탈전이 벌어질 가능성도 높았다. V.O. 계약이야 프리랜서 계약이기에 피차 안 맞으면 언제든 깰 수 있었기 때문이다.
블루 게이트에 관한 진실을 알게 된 타국의 펌들도 얻을 걸 다 얻었으니 더 이상 G.N.의 의견에 귀 기울여 주지 않을 테다.
결국 G.N. 측이 짜놓은 판은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된 셈이었다.
“크흠!”
가장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던 장칠순도, 이 일의 판을 짰던 김진수도, G.N. 소속으로 소환된 의원들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린 이 순간. 찬영이 단상에서 뚜벅뚜벅 걸어 내려왔다.
그 뒷모습을 보며 G.N. 소속 의원들은 그저 쓰디 쓴 마른침만 삼켜야 했다.
그리고 그 직후 찬영을 소환한 블루 게이트 안건은 모두 찬영의 뜻대로 무사히 정리되었다.
타국에서 온 펌의 임원들은 찬영과 한두 마디씩은 꼭 하고 퇴실했고, 이규복은 그런 찬영의 곁에 머물며 통역원 대신 그의 의사소통을 도와주었다.
그러는 사이 또 다시 김진수가 다가왔다.
성큼성큼 걸어온 그가 앞을 가로막고 서자 찬영이 힐끗 그를 올려다보았다.
“또 보게 될 거요.”
“기대하겠습니다.”
의외로 찬영에게서는 힐난이나 차가운 목소리가 아닌 차분한 어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의외였기에 김진수 역시 조금은 놀란 눈치였다.
“의외군. 어째서?”
“다음 만남은 오늘보다 최악은 아닐 테니까요.”
무미건조한 김진수의 표정에 희미한 웃음기가 보인 것도 잠시, 그는 다시 냉정한 G.N. 소속 사람으로 돌아갔다.
“그럼…….”
“…….”
마침내 끝난 것이다.
동시에 이규복이 찬영에게 슬쩍 다가와 덧붙였다.
“저분, 엄청 깨질 겁니다.”
“예?”
“G.N.에서 이번 일을 단단히 벼르고 있었으니까요. 특히나 G.N.의 경우엔 투자자와 각성자 사이를 존중하는 룰 같은 게 없어요. 저희 쪽을 견제한다고 빠르게 회사를 키워가느라 세세한 배려가 없죠.”
“투자자들 마음대로 경영해도 된단 얘기로 들리네요.”
“네. 투자한 기업들이 모든 걸 결정하죠, 하나도 빠짐없이. 그러니…….”
찬영이 김진수의 뒷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물었다.
“엄청 깨질 거다?”
“네.”
이규복은 그렇게 확신했다.
하지만 그건 이 판을 짠 그의 몫이다. 그 책임 또한 스스로 감당해 내야 할 일이었다.
‘입장의 반대편에 섰던 적에 대한 걱정은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찬영을 돌아보자, 찬영은 어느새 회의장을 빠르게 벗어나고 있었다.
* * *
탁.
이윽고 이규복 차에 올라탄 찬영은 그제야 깊은 숨을 내뱉었다.
“후우…….”
찬영을 따라 함께 올라탄 이규복이 파리하게 질린 안색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요? 어디 아픕니까?”
“아뇨, 조금 긴장했나 봅니다.”
“에? 뭔 긴장이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찬영에게서 흘러나올 말이라고는 생각지 않았기에 이규복은 전혀 이해가 안 된단 표정을 보였다.
찬영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왜요, 전 긴장도 안 하는 줄 아셨어요?”
“예, 뭐. 또박또박 말도 어찌나 잘하시는지. 감탄하면서 들었거든요. 청문회 몇 번 해 보신 줄 알았어요.”
“나름 최선을 다한 거예요, 있는 힘껏……. 하지만 이번에 확실히 느꼈어요.”
“뭘요?”
“이런 일은 확실히 제가 잘하는 일이 아닌 것 같아요.”
찬영은 숨도 쉬기 힘들 만큼 쏟아지던 질문 공세들을 떠올리며 혀를 내둘렀다.
그에 결국 이규복도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왜요, 잘하시던데요. 이참에 V.O. 정규직 전환이나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러나 찬영이 차 시트에 등을 더 깊이 파묻으며 단호히 말했다.
“사양합니다.”
이규복이 입맛을 다셨다.
“아쉽네요. 그나저나, 확실히 영주님 카드는 제대로 먹혔어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신 거예요?”
“인맥을 그들만 쓰라는 법은 없죠.”
영주는 찬영의 편이다. 그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웬만하면 들어줄 사람이다.
“하기야…….”
이규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영주의 자국민이 되겠단 패는 찬영이 처음 이규복과 얘기를 했을 때부터 준비하기로 했던 패였다. 찬영 스스로가 지구의 법적 규제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데다 V.O.에게 피해도 끼치지 않으면서 동시에 G.N.이 깔아 둔 밥상을 엎어 버리는 결과까지.
그리고…….
“이젠 지구의 법적 규제가 더 이상 찬영 씨에게 효력이 없죠, 당장 다른 법안이 만들어지지 않는 이상은?”
“네, 앞으로의 일들을 생각하면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어요.”
“맞아요.”
찬영은 오늘과 같은 일에서 벗어나는 것뿐 아니라, 내일 혹은 그 이후의 일까지 걱정하며 움직인다. 보면 볼수록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사람 같다. 환경적 요인에 의해서, 혹은 스스로의 신념을 공고히 지키기 위해서.
‘이젠 정말 기대된다, 그가 얼마나 발전할지.’
이규복이 찬영을 빤히 바라보았다.
“제 얼굴에 뭐 묻었습니까?”
그의 시선을 느낀 찬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뇨, 별거 아닙니다.”
이규복은 찬영을 향해 씩 웃어 준 뒤 핸들을 잡았다.
찬영이 다시 입을 연 것은 이규복의 차가 출발한지 삼십 분 후였다.
그 삼십 분 동안 그는 잠들어 있었다.
‘언제…… 잠이 든 거지?’
풀린 눈을 들어 올린 찬영은 부스스해진 앞머리를 쓸어 넘기면서 이규복을 쳐다봤다.
“잘 잤습니까?”
운전하며 묻는 이규복에게, 찬영이 방금 일어나 조금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겠네요.”
“정말 긴장 많이 했나 봅니다? 이렇게 곤히 자는 건 기절할 때 말곤 못 본 것 같은데.”
찬영이 조금 멋쩍은 표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
“고생했어요, 정말.”
“아닙니다. 그나저나…… 곧 도착하겠네요.”
“네, 한…… 십 분 뒤?”
찬영은 그 대답을 들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곧 찬영은 저 빌딩 중 하나에 도착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 만나기로 한 사람과 조우하게 되리라.
그는 V.O.를 책임진 사람이자 그야말로 각성자계에서 가장 빼어난 인물인 50대의 남자, 대표이사 윤태규였다. 그가 이번 일이 잘 마무리된 것을 축하하는 의미로 식사 자리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물론 일이 잘 안 풀렸다면 이 식사 자리는 앞으로의 일을 함께 고민하는 자리가 됐을 테지만.
어쨌든 찬영은 감회가 새로웠다. 이전의 삶과 지금의 삶은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그는 각성자란 직업을 선택한 후, 살면서 한 번도 못 본 외국 거물들에서부터 대기업의 원조를 받는 유명인까지 한꺼번에 마주하고 있었다. 새삼 삶이 완전히 뒤집힌 기분이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생각에 잠긴 찬영을 보며 이규복이 묻자 찬영은 솔직히 토로했다.
“많은 게 바뀐 것 같아서요. 단순히 주방만 지키던 제가 이젠 소환까지 당하게 되어 버린 게…… 조금 놀랍고도 낯서네요.”
“차차 적응될 거예요. 원래 시작이란 게 다 그런 거잖아요.”
“네, 그것도 그러네요.”
‘그래, 나아질 거야. 조금씩, 무엇이든.’
찬영이 속으로 읊조렸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두 사람을 태운 차는 V.O.와 만나기로 한 호텔 입구로 진입하고 있었다.
* * *
“하하, 내가 윤태규요.”
호텔의 한 한식당. 홀로 앉아 있던 윤태규는 자리에서 일어나 찬영을 맞이했다.
“예, 양찬영입니다.”
함께 손을 맞잡으며 화답한 찬영은 자연스레 윤태규를 살폈다.
윤태규는 김진수처럼 위압적인 스타일은 아니었다. 겉에 흐르는 분위기는 날 선 기세라기보다 기품이 내재된 느낌이다.
“자, 앉읍시다. 자네도 앉지. 자네와 이렇게 식사 자리를 한 것도 오랜만이잖나?”
윤태규의 말에 이규복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이규복은 조금 굳은 표정이었다. 찬영이 평소 마주하는 부드러운 미소의 이규복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상사라서 그런 건가?’
글쎄, 뭐라 콕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직접 물어보지 않고선 모를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동안 자리에 다시 앉은 윤태규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으면서 찬영을 향해 입을 열었다.
“G.N.은 이제 찬영 씨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 거요, 열 받아서.”
“어쩔 수 없는 일일 것 같습니다.”
“그래, 그래. 원래 각자의 이해가 충돌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나저나…… 전부터 만나고 싶었는데 이제야 만나는군요.”
윤태규가 음식이 나오기 전 나오는 따뜻한 차를 홀짝이며 말했다.
세련된 네이비 색 슈트를 갖춰 입은 반백의 신사는 말투에서도 여유가 흘러나왔다. 조금도 경박스럽지 않았고, 오히려 진중하면서 사려 깊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인상 깊은 분이네.’
찬영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네, 저도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화답한 찬영이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
“음?”
윤태규의 시선 속에 찬영이 차분히 생각해 둔 바를 얘기했다.
“이 식사 자리가 만약 제가 알고 있는 대로 오늘 일을 마무리 짓는 자리가 아니라…… 다른 일을 위한 자리이기도 합니까?”
찬영이 그렇게 생각한 데엔 윤태규가 직접 식사를 초대했다는 게 컸다.
물론 오늘 소환은 V.O.의 입지와 아주 중요한 관련이 있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대표이사같이 높은 직함의 사람들이라면 그 스케줄은 살인적일 게 분명하다. 수많은 만남이 예정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한가롭게 축하 따위를 하며 식사 자리를 마련한다?
‘설마. 분명 복합적인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찬영은 굳이 축하하겠단 명목으로 이 자리를 만든 윤태규가 의심스러웠다. 그래서 그렇게 물은 것이다.
그리고 찬영의 생각이 맞았다.
빙긋 웃은 윤태규가 이규복을 쳐다봤다.
“어디서 이런 사람을 찾았나? 하하.”
웃음을 끝으로 찬영을 바라보는 윤태규의 눈빛이 고요히 가라앉았다.
V.O. 대표이사, 윤태규.
그와의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