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자동보상-44화 (44/248)

#44

“비공식 소환이요?”

찬영이 반문하자 이규복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분명 긴장할 만한 얘기였다. 하지만 찬영은 놀란 기색은커녕 담담하기까지 하다. 오히려 예상한 듯 보였다.

하도 표정의 변화가 없어 이규복이 넌지시 물었다.

“혹시 알고 계셨던 건 아니죠?”

“그럴 리가요?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지 일주일도 안 됐잖습니까?”

“아, 그렇죠……. 참, 너무 아무렇지 않게 말씀하셔서 혹시나 했습니다.”

“어느 정도 예상한 부분이라서 그렇습니다. 오히려 늦은 감이 있죠.”

그 말을 하면서도 찬영은 ‘흐음’ 하며 가볍게 신음을 흘렸다. 사실을 말하자면, 올게 왔단 표현이 맞을 것이다.

‘……V.O.는 물론 그들의 룰 밖의 행동을 통해 이뤄 낸 일이니까.’

결과적으론 좋게 풀리긴 했지만 분명 자신의 행동은 여러 펌들은 물론 국가들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그들은 굉장히 궁금해 하고 있을 것이다.

G.N.은 왜, 몰살당했고 찬영은 어째서 살아남았는지, 왜 블루 게이트가 시작됐는지 등등.

그렇기에 언젠가 이런 상황이 한 번쯤은 올 거라 예상했다. 일종의 질의응답.

그리고 그 생각이 맞았다.

이규복이 찬영의 눈치를 보면서 말했다.

“아마 질문이 쏟아질 겁니다. 청문회라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괜찮으시겠어요?”

이규복이 아는 찬영은 공식적으로 나서길 좋아하지 않는다. 유명인사가 되고 싶지도, 겉치레를 하고 싶지도 않은 스타일이다. 조용히 자신이 맡은 일을 우직하게 해 내는 유형의 사람이라…….

앞으로 귀찮아질 요소들을 최대한 피해오던 사람이다.

그런데 이건 그에게 귀찮은 요소가 될 가능성이 다분해 보였다. 그렇기에 이규복은 찬영이 단호히 거절하리라 생각하면서 제안하긴 했다.

왜냐고?

여러 복잡한 상황들로 인해 찬영의 선택을 존중하고 지켜 주는 데 한계에 달했기 때문이다.

한데 이런 반응은.

‘의외인데……?’

그 생각을 하는 사이, 찬영이 이규복에게 넌지시 물었다.

“만약 그 소환에 제가 응하지 않을 경우엔 어떻게 됩니까?”

“그건…….”

이규복이 쓰게 웃었다.

“장담할 수 없지만, 아마 V.O.의 활동이 조금 힘들어질 겁니다. 저희는 찬영 씨를 포기할 수도, 그렇다고 여러 펌들과 갖고 있는 공유 포지션을 포기할 수 없으니까요.”

듣고 있던 찬영이 이규복이 염려하는 바를 정확히 짚어 냈다.

“입장이 곤란해지겠네요. V.O.가 폐쇄적인 이미지로 낙인찍힐 수도 있는 부분이라…….”

“예.”

이규복은 대답을 하면서도 새삼 놀랐다. 직관력, 통찰력 등이 뛰어난 사람인 줄은 알았지만…….

‘상황 돌아가는 걸 정확히 읽고 있네.’

정말 양파 같은 사람이다.

만약 서먼 홀이란 기괴한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이런 인재는.

‘주방에만 있었겠지?’

어쩌면 서먼 홀의 시작은 많은 인재들에게 또 다른 기회로 제공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드는 이규복이다. 그동안 고민을 끝낸 찬영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하죠, 질의응답. 하겠습니다. 대신 조건이 있는데…….”

이규복이나 V.O. 입장에선 찬영이 나서 준다니,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다. 찬영을 억지로 밀어붙일 수도 없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영주의 보호 아래 있는 그를 누가 강제할까?

“예, 뭐든 들어 드리죠.”

대답한 이규복 입장에선 처리해야 할 서류들이 엄청나게 줄어드는 결정이기도 했기에, 더욱 기분 좋은 일이다.

“뭐든지요?”

찬영이 반문하자 이규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당연하죠. 힘든 결정을 하셨으니까요.”

사실이 그렇다.

이제껏 어떤 감투도 써 본 적 없는 민간인이 정치인들이나 할 법한 대규모 청문회를 경험해야 한다고 생각해 보면, 식은땀이 절로 나고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할 것이다.

분명 힘든 결정이 맞다. 반면 찬영은 오히려 그런 생각을 가져 주는 이규복이 고맙기도 했다.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히면 상식적인 것마저도 당연하다 여기지 않는 세상이니까.

늘 자신의 입장을 돌아 봐 주는 이규복이 고마웠던 것이다.

일정 부분 그가 있기에, 이번 결정을 한 것이기도 했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

“음, 제 조건은…….”

찬영이 실질적으로 이번 소환을 받아들인 이유이자 반드시 수반되어야 할 조건을 얘기했다.

* * *

조건이나 소환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마친 뒤 이규복이 몇몇 서류를 보여 주면서 말했다.

“이번 소환을 통해 필수적인 서류들은 제가 전부 준비해서 제출할 겁니다. 인적 사항, 사회관, 국가 가치관 등등 그런 세세한 부분들요. 이런 게 대체, 블루 게이트와 무슨 관련이 있는진 모르겠지만요.”

“예.”

“본래는 3개월 정도 시간을 가지고 준비하긴 하는데……. 사안이 사안인데다 저희 윗사람들도 이제 더는 못 막겠다고 해서요. 당장 내일 시작될 겁니다.”

“엄청 빠르네요.”

“네, 그런 셈입니다. 말도 안 되죠, 사실.”

찬영도 그 부분엔 동의했다.

‘대체 얼마나 많은 압력이 있기에…….’

질의응답을 해야 하는 자신에게 하루만 말미를 주는 것일까? 돌아가는 상황이 납득되지 않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했다.

‘다른 유수의 펌들의 경우야……. 다른 나라의 각성자가 새로운 대륙의 지도자와 가까워진 게 볼썽사납겠지.’

아무리 멸망을 앞둔 상황에도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이해관계를 따진다.

이번 경우도 그럴 것이다. 그리고 찬영의 생각이 맞았다.

“미안합니다, 워낙 다른 나라의 입김도 거세서 더 이상은…….”

“이해해요. 그들 입장에선 자기 나라의 각성자가 이 상황을 주도해가길 바랄 테니까, 제가 아무래도 눈엣가시 같겠죠.”

“맞습니다. 따로 설명 안 드려도 되겠어요.”

“아녜요, 그냥 어렴풋이 짐작하는 것만 말하는 건데요.”

이규복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다른 이들의 속내라도 꿰뚫어 보고 있는 듯 얘기하는 건 분명 현명한 거다.

하지만 굳이 칭찬을 입에 담진 않았다. 그보다 해야 할 다른 이야기가 많았다.

“하지만 제일 큰 문제는 역시 G.N. 측이에요. 이번 소환이 이렇게 빠르게 진행된 것도, 저희 측 정부의 방관과 G.N.의 압력 때문이었으니까요.”

“다른 나라야 손 안 대고 코 풀기니까 G.N.의 의사를 함께 따르는 것이겠죠?”

“네, 맞아요. 그들은 별말 없이 지켜볼 거예요. 대부분의 의사 발언은 G.N.에서 주도해서 이끌겠죠?”

찬영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안달 났을 이유는 찬영이 생각하기에도 간단했다.

‘정예 각성자들의 죽음 때문이겠지.’

하지만 단순히 그뿐만은 아닐 것이다. 아마 경쟁사인 V.O.를 견제할 명목일 가능성이 제일 높다.

일석이조.

V.O.도 견제하고 찬영의 날개도 꺾어 버리면서, 동시에 이번 일에 대한 앙갚음도 하는 식이 될 터.

찬영은 이규복의 눈을 조용히 바라봤다.

쉽게 당하지만은 않을 생각이다.

* * *

다음 날, 파크 하이트 소환장.

블루 게이트가 한국에 있기에 결정된 장소였다.

찬영 역시, 블루 게이트를 지나 오랜만에 귀국했다.

저벅, 저벅.

이규복과 함께 회의장에 들어선 찬영은 아직 비어 있는 수많은 의자들을 둘러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비공식 소환이다 보니 기자들과 카메라 등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각국의 정상들에게 파견된 정부 소속 각성자들 혹은 그에 수반하는 정치 거물들이 올 예정이었다.

그래서일까?

소환장 안은 잔뜩 날이 선 칼날들이 가득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분위기와는 달리 느긋하게 자리에 앉은 찬영은 늘 그렇듯 차분하고 담담했다.

마치 이런 일을 많이 한 사람처럼. 오히려 곁에 있는 이규복이 더 긴장한 눈빛이었다.

“이번 일…… 잘 준비했으니 너무 긴장 안하셔도 될 겁니다.”

찬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 부탁으로 마련된 법률 안배도 확실히 잘 됐다면 그럭저럭 잘 풀릴 수 있지 않을까요?”

가능하다, 충분히.

그간 영주와 모든 나라 간에 쌓인 협약이라면.

찬영은 오랜만에 입은 슈트의 매무새를 고치면서 조용히 기다렸다.

질의응답이 시작되길 기다린 지 한 시간쯤 흐르자 하나 둘씩, 다른 나라의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각국의 주요 인사들이었다.

그중엔 각성자나 각성자 관련 법안을 다루는 정치인들도 함께 있었다. 하지만 제일 눈에 띄는 건 G.N.의 거물이자 이번 소환을 이끌었다는 입지전적의 남자, 그는 찬영을 발견한 뒤 성큼성큼 다가왔다.

손을 뻗는 그와 함께 일어나는 찬영.

“반갑소. 나, 김진수요.”

찬영은 손을 잠깐, 내려다보았다.

동시에 들어온 수치.

‘13,300.’

만만찮다.

찬영은 김진수란 사람을 손부터 빠르게 훑었다. 불거진 핏줄이 툭 튀어나온 굵은 손은 굉장히 두텁다. 더불어 승모근과 이어진 탄탄한 어깨 라인을 두른 김진수의 체격은 찬영의 1.5배쯤 커 보였다. 하지만 크기만 크진 않다.

완벽한 균형감을 가진 거한이다.

눈빛도 어찌나 살벌한지 웬만큼 담력이 있지 않는 이상 그의 날선 눈빛에 한마디도 못할 정도였다.

“네, 반갑습니다.”

그러나 그의 손을 잡는 찬영의 목소리엔 딱히, 차이가 없었다. 평소와 같은 어조, 평온한 표정.

그래서일까?

찬영와 손을 맞잡은 김진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대신 조용히 찬영의 면면을 뭔가를 판별하듯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그가 손을 놓으면서 말했다.

“얘긴 많이 들었습니다, 양찬영 씨.”

찬영이 대답했다.

“나쁜 얘긴 아니었길 바랍니다.”

김진수가 대답했다.

“그렇진 않을 겁니다. 더 나빠질 게 없어서.”

그는 단호히 말하고 있었다. 찬영은 V.O. 편. 자신은 그 반대편이라고. 찬영도 오히려 그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적이라고 판별해 놓고 말을 하는 상대가 더 깔끔하다. 정면으로 덤벼드니 꼼수는 쓰지 않을 테니까.

그동안 곁에 있던 이규복은 내심 미소 지었다.

김진수 앞에서 저렇게 돌부처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적어도…….

‘난 아니었는데 말이야.’

그러고 보면 찬영은 어디, 목숨 내놓고 사는 사람 같다.

하지만 그 생각은 잠시 접어 두고 이규복 역시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랜만이군. 이 대리, 여전히 직함은 그대로인가?”

“네, 떠나신 후에도 여전합니다.”

“고집하고는…….”

서로만 알 듯한 대화를 나눈 뒤 김진수가 다시 찬영을 쳐다봤다.

“먼저 만났으면 좋았을 것을…….”

찬영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다 큰 동요 없이 입을 열었다.

“꼭 그렇진 않았을 겁니다. 지금보다 좋아질 게 없어서.”

G.N.과 협조하는 것보단 V.O.에 남아 있는 편이 낫다는 걸 돌려서 말한 거다. 우회적으로 얘기했던 김진수에게 그대로 돌려준 셈이었다. 찬영의 센스에 김진수가 덤덤히 대답했다.

“담대한 게 마음에 드는군. 하지만 공사는 구분하는 편이라서 사적인 양보는 조금도 없을 거요.”

그 말을 끝으로 김진수가 돌아서자 찬영이 자리에 앉으면서 이규복에게 덧붙였다.

“G.N.에서 저에 대한 조사를 마친 것 맞습니까?”

“예?”

무슨 말인가 싶어 반문하는 이규복에게 찬영이 나지막이 말했다.

“저분. 확실히 저를…… 잘 모르시는군요.”

찬영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는 이규복이 조용히 씩 웃었다.

“우리가 유리한 이유죠.”

공사를 구분하고 단호한 걸로 따지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 옆에 있기에.

그동안 나무 탁자를 두드리는 의사봉 소리와 함께 회의가 시작됐다.

땅.

“블루 게이트 안건에 참석하신 참석 의원들께선 정해진 자리에 착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 * *

딱딱한 분위기 속에 각국에서 파견 나온 거물들은 각자 자리에 앉아 찬영을 유심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중엔 많은 각성자 집단에서 파견 나온 상무도 많았다.

캐나다 ‘세드나.’

대표적 캐나다 최대 에너지 기업인 Gaz Metro 사의 후원을 받으며 성장한 각성자 펌부터, 미국 구글 사와 애플 사의 협력 등 각종 다양한 대기업의 원조를 받으면서 급성장 중인 ‘메이플라워.’ 란 펌의 임원까지.

많은 이들이 이번 안건에 참석한 것이다.

하나 그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바로 관찰이다.

블루 게이트의 중심에 서 있는 자, 찬영에 대해 좀 더 알아가고 싶은 게 클 것이다. 블루 게이트 사안에 대해서도 그렇겠고.

말 그대로 동상이몽. 각자의 생각과 함께 접어들기 시작한 소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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