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
‘스토리 체험?’
생각지도 못한 전개였다. 곧장 플레이 체험으로 넘어갈 줄 알고 준비하고 있던 찬영의 눈빛에 놀라움, 긴장감 등의 복합적인 감정이 뒤섞였다.
동시에 검은 기류가 앉아 있는 찬영의 눈앞에 솟아오르더니. 넝쿨처럼 서로 뒤섞여 찬영 앞에 검은 인영을 만들기 시작했다.
희미한 형체를 일으킨 그림자. 그 그림자는 앉아 있는 찬영과 마주 앉은 채 조용히 찬영을 들여다보았다.
짙은 어둠의 형체가 지옥에서 올라온 듯 거칠고 소름 돋는 쇳소리를 자아냈다.
-누가 나를 깨웠는가?
찬영은 그저 지켜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다시 들려오는 목소리.
-입술을 달싹이는 것을 보아하니 겁을 집어먹은 게로군. 겁 많은 신관들도 네놈보단 낫겠구나. 다시 나를 돌려 보내라. 네놈 같은…….
“오히려 날 필요로 하는 건, 당신 아닙니까?”
무슨 말을 할지 쭉 지켜보던 찬영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자 어둠의 형체가 노했다.
-어딜 감히!
‘흡……!’
일렁이던 어둠이 삽시간에 찬영을 감싸자, 찬영은 숨이 턱 막힐 정도로 호흡이 가빠졌다.
-이래도, 그리 꼿꼿이 나를 노려볼 테냐.
찬영은 점점 옥죄어 오는 중에도 나타난 형체를 노려봤다.
그리고 힘겹게 내뱉은 한마디.
“죽여……! 그래 봤자 넌 계속 그렇게 어둠 속에 살겠지, 또 다시 언제 올지 모를 기회를 기다리면서!”
눈까지 충혈된 찬영은 괜히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었다. 스토리 체험에 대해 설명했던 그 문구를 떠올린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조건을 충족시키는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는 그 문구!
‘내가 맞다면…… 놈은 날 못 죽인다!’
그리고 찬영의 예상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서서히 눈앞이 흐려지기 직전. 숨통을 옥죄던 미증유의 힘이 삽시간에 사라졌다.
-근성은 제법 있구나. 그래, 그 정도는 되어야지…….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내쉬며 검은 인영을 노려본 찬영은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물었다.
“대체…… 넌 뭐지?”
-궁금한가?
“당신 같으면 안 그럴까? 보자마자 죽이려 든 건 그쪽이야.”
-오냐, 나는…….
검은 인영의 비밀스러운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로이크다.
“로이크?”
-그래, 위대한 별의 뜻이 함께 하는 자다.
도통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 그였다. 찬영은 잠자코 듣던 걸 멈췄다.
“알아듣게 얘기해. 난 시드 대륙의 사람이 아니야.”
-아니라고……?
“그래, 세상이 바뀌었지.”
의외로 다음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떠들어대던 검은 인영은 뭔가 고뇌에 잠긴 듯 아무 말이 없었다. 찬영은 침묵 속에 조용히 그를 기다렸다. 재촉하지 않아도 그와 제대로 된 대화가 되어야 제대로 된 스토리 진행이 열릴 게 뻔했다.
찬영이 원하는 건 하나.
문구에서 보았던 대로 염왕권의 봉인 된 부분을 개방시키는 것. 그러기 위해선 로이크와 원활한 대화를 이끌어 가야 했다. 그때 로이크가 침묵을 깼다.
-너를 통해 조금 들여다보았다. 대륙이 통째로 사라졌다는 것이냐?
“그랬다더군.”
-나약한 것들, 후세는 갓피스란 것에 기대어 무력하였구나. 얼마나 무력했으면 너같이 나약한 것에 의해 다시 재건되었을까? 내 시대엔 갓피스 따위는 없었다. 그저 강자와 약자뿐이었지.
찬영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로이크란 자는 딱 봐도, 힘 자랑 하기 좋아하는 유형의 군상이었다. 찬영이 그리 좋아하지 않는 유형.
“이봐, 난 당신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아. 그러니…….”
-감히, 네놈이 누구 말을 잘라!
찬영은 대답 하지 않고 호통친 놈을 노려보았다.
무작정 지켜볼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이 길 위에서 뒷걸음질 치기엔 너무 멀리 왔다.
“예의 차려 줄 때 잘 들어. 당신 후세들은 시드 대륙을 재건 중이야. 하지만 그들은 그 모진 일을 겪고도 다시 버텨내는 중이지. 강했었다고? 멸망을 겪고도 다시 일어선 그들보다…….”
말하다보니 진짜 화가 났다.
“……대단한가?”
마지막 질문 직후 로이크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놈이 운을 뗀 첫 마디는 놈의 유형상, 확실한 사과가 아니었다.
-세치 혀를 잘도 놀리는군. 좋다, 너그럽게 그 뜻을 받아 주지. 원하는 바를 들어 준다면 위대한 별의 뜻을 네게 전승해 주마.
찬영은 로이크가 여전히 마음에 안 들었다. 그래도 처음 태도보단 나았기에 좋은 성과를 거둔 셈이었다.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순순히 물러나 주었다.
여전히 딱딱한 말투는 유지했지만.
“그래서 네가 원하는 게 뭐지?”
-한때 이스트 마운틴이란 곳이 있었다. 후대에겐 영원히 잊힌 강자의 도시지. 그 도시가 세워진 근원은 단 한 사람에 의해서였다. 그가 어디서 왔는지, 왜 왔는지 그 연원은 아무도 모른다. 단, 그에겐 열 세 명의 제자가 있었고, 제자들은 그가 가진 언어와 문화, 강함의 근간을 배우고 닦았다.
찬영은 문득 그가 말한 별 어쩌고 한 말이 떠올랐다.
“그럼 당신이 말한 그 별의 뜻이라는 게?”
-맞다, 열 세 번째 별은 열 세 명의 제자와 그들이 남긴 유산을 함께 뜻한다. 날름거리는 세치 혀만큼 머리도 장식용은 아닌 모양이군.
시간만 나면 싸움을 걸어오는 로이크를 가뿐히 한 귀로 흘려버린 뒤 찬영이 연이어 물었다.
“당신이 그들 중 하나였던 건가?”
-아니, 난 그들의 맥을 이은 후예지. 하나 어중이떠중이 같은 방계 놈들과는 다르다. 나는 열세 번째 별들 중 붉은 별의 정통을 이었다. 이제 좀 존경스러워지느냐?
잠깐 말없이 그를 보던 찬영은 별 다른 대꾸 없이 그냥 재촉만 했다.
“계속하지.”
그편이 말이 길어질 것보단 나을 것 같았다. 놈도 찬영이 자길 인정하기 시작했다고 착각한 건지, 순순히 말을 이어갔다.
-내겐 적수가 많았다. 강자의 숙명이지.
찬영은 듣다보니 문득.
‘행동하는 걸 보면 스스로 적을 만들고 다닌 것 같다만…….’
그런 생각이 들긴 했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다.
그동안 로이크의 말이 계속 됐다.
-그중 유일하게 무패의 내게 결점을 남긴 자가 있다. 놈의 흔적을 찾아라. 그것으로 비교하고 증명해 보이겠다. 네놈을 통해.
“무엇을?”
-내가 더 강했다는 것을.
찬영은 내심 어이가 없었다.
놈이 원하는 건 결국…….
‘자존심.’
하기야 이해 안 될 것도 없다.
별것 아닌 일에 죽을 것처럼 뛰어드는 사람이 한 둘인가? 특히 로이크같이 힘을 숭상하는 부류는 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대륙은 봉인되어 있어. 그를 찾으려면…… 다른 도시를 깨워야 해. 그건 알고 말하는 건가?”
그러자 로이크가 의외의 이야기를 꺼냈다.
-아니, 놈의 흔적은 가까이 있다.
“네가 어떻게 알지?”
-놈과 나는 같은 운명. 붉은 별과 푸른 별은 서로 상극이다. 이는 자석과 같지. 상극이기에 끊임없이 서로 붙고 부딪친다. 평생을 그래왔지. 놈의 흔적이 흘러오는 곳이 느껴진다.
-흔적 (1)이 로이크에 의해 깨어납니다.
갑자기 나타난 창. 그 문구를 확인한 찬영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설마, 흔적 (1)이라면?’
오디를 잡고 획득한 한 방향만 가리키던 나침반이 틀림없었다.
그 생각이 맞았던 모양이었다.
갑자기 인벤토리에서 자동으로 빠져나온 나침반이 찬영의 눈앞에서 빙글 빙글 돌더니, 로이크에게 날아갔다.
-놈의 흔적이구나.
로이크의 음습한 목소리가 들려온 뒤 첫 퀘스트가 나타났다.
-스토리 퀘스트
-에피소드 (1) : 로이크의 숙적이자 또 다른 열세 번째 푸른별 프라이의 흔적을 찾으세요. 프라이가 남긴 나침반을 따라 이동하면 완수됩니다.
-완수하는 즉시 염왕초혼심법을 습득합니다.
-단, 염왕초혼심법은 귀속 기술입니다. 최초 습득자에게만 효력을 일으킵니다.
-최초 스토리 퀘스트 발생,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골드 10급 박스 추가 획득합니다.
업적으로 인한 추가 보상까지……! 로이크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보람이 있었다.
-이를 따라가라. 그리하면 얻을 것이다. 나의 정수를.
“염왕초혼심법을 말이지.”
-오냐.
“그럼, 그 전에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
-무엇이냐?
“네가 말한 그 심법이라는 것, 그것 역시 기사들의 마나 심법의 한 갈래인 건가?”
-착각했군, 실언을 하였다. 네놈 머리는 장식인 게 분명하거든.
찬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얘기지?
“마나 심법이 아니란 얘긴가?”
-나의 정수가 그따위 하찮은 마나 심법과 비교될 것 같으냐! 놈들의 것은 그저 뿌리에서 이어진 잔가지일 뿐. 나의 정수는 뿌리이자 근본 자체였느니라.
그 얘기를 듣고 난 후 찬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무척 만족스럽다. 아니, 기쁘다.
‘로이크의 말대로라면 굳이 영주 성의 기사를 통하지 않더라도…….’
마나 심법의 시초를 익히게 되는 것이다. 분명 좋은 기회였다.
그뿐인가?
흔적이란 걸 찾고 난 후엔 로이크가 얘기한 대로 그와 동수를 이뤘다는 푸른별의 유산을 획득할 것도 확실해 보인다.
그야말로…….
잭팟이 터진 것이다. 가뜩이나 마나 심법을 익히기로 마음먹었었기에, 지금의 이 기회는 더 없이 소중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임무, 완수해야 해.’
이 일만 잘 완수하고 나면 싸울 수 있는 패턴이 무한정 늘어난다. 가지고 있는 이네이트의 합뿐 아니라 이네이트를 기반으로 건틀릿의 근접 기술을 맘껏 활용할 수 있다.
‘좋아, 그럼…….’
한시라도 빨리 나침반이 이끄는 장소로 가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는 게 우선이었다. 아직 알폰 지방은 토벌 중이다. 어떤 변수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던전과 위험 요소로 가득하다.
준비는 당연했다.
“많은 걸 갖춰야겠어. 그곳으로 향할…….”
로이크가 웬일인지 찬영의 중얼거림에 동의했다.
-그래, 만반의 준비를 갖춰라. 녀석은 영악했다. 놈의 흔적에 다가가기 전에 어떤 난관을 만날지는 모를 일이지. 네놈같이 허약한 건 근처에 가기도 전에 핏덩이가 되어 버릴 거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로이크의 인영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나를 소환한 힘이 다시 잊혀 가는구나. 이제 헤어져야 할 시간이다. 버릇없는 애송아. 다시 잊힘 속에 접어드는가……?
그 말이 끝이었다.
더 이상 오만한 말투는 들려오지 않았다.
찬영은 그제야 깊은 숨을 내뱉었다. 남은 긴장이 풀린 것이다. 놈에게 빈틈을 보일까 봐 내색하진 않았지만 언제 공격적으로 돌변할지 모르는 녀석을 경계한 게 사실이니까.
‘끝난 건가?’
확실하다.
놈이 있던 자리엔 더 이상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고 남아 있는 건 눈앞에 떠 있는 창들뿐. 찬영은 문득 놈이 옥죄어왔었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이번엔……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 덕에 더 많은 연계 보상들이 찾아올 게 보였다. 시스템은 여전하다. 공을 들이면 들인 만큼 내주는 보상. 그러니 오늘 역시 쉴 틈 따윈 없다.
그럼 이제 남은 건…….
찬영의 눈이 빠르게 다음 창을 향했다.
‘우선 골드 10급 박스는 뒤로 미뤄 둔다.’
10급 박스는 자주 봤지만, 스텟 농장의 경우엔 처음 개방된 것이다. 호기심이 찬영을 이끌었다.
‘분명 스텟에 관련된 게 확실하긴 한데.’
생각에 잠긴 동안 또 다른 창이 나타났다.
-스텟 농장에 진입하시겠습니까? (예/아니요)
당연히 대답은 ‘예.’
그러자 끼익, 소리를 내며 작은 나무문이 나타났다.
‘들어오라는 건가?’
어디로 향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다만 찬영을 향해 열려 있을 뿐. 하지만 찬영의 걸음에 주저함은 없었다.
성큼성큼 걸어가 문을 통과해 버렸다. 동시에 보고 있던 모든 게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