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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자동보상-34화 (34/248)

# 34

그날 오후에 찬영은 홀로 영주에게 식사 자리를 초대받았다.

그들 사이에는 의사소통을 해결할 마법구가 둥실 떠서 자리 잡고 있었다.

서른 명은 함께 둘러앉아도 될 커다란 식탁 상석엔 영주가 자리 잡았고, 찬영이 대각선 좌측에 앉았다.

영주가 잘 구워진 고기 위에 칼질을 하며 물었다.

“방 안에 창문 하나 깨 먹었다지?”

음식을 꿀꺽 삼킨 찬영이 영주를 바라보았다. 겸연쩍었다.

“예, 어쩌다보니……. 죄송하게 됐습니다. 배상을 어떻게 해 드려야 할지.”

생각해 보면 현실에서의 화폐는 알폰 영지에서 제대로 쓰일 리 없었다.

그래서 물어본 것이다.

“푸하하! 하긴, 그것도 그렇군. 하지만 됐네. 우리 세상에서의 자네는 완벽히 알거지 아닌가.”

“예, 뭐……. 그렇긴 합니다만. 조속한 시일 내에 갚아 드리고 싶군요.”

“됐네.”

손사래를 친 영주가 웃으며 말했다.

“갓피스가 거지라니……. 이래서 오래 사는 게 최고라지. 이런 일도 경험하지 않나?”

그의 악의 없는 농담에 찬영도 픽 웃었다.

“처음 보는군, 그대가 제대로 웃는 건. 자넨 웃음이 너무 없어. 처음엔 메마른 사막이 얼굴로 형상화되면 자네가 아닐까 싶었네.”

찬영도 부정하진 않았다.

“딱히 웃을 일이 없어 그렇기도 했지만……. 틀린 말씀도 아니십니다.”

웬만한 일엔 눈 하나 꿈쩍 안 해서 차분하다 못해 삭막해 보인다는 얘기는 꽤 여러 번 들어왔다.

그래서 별 감흥이 없긴 했지만, 한 번 죽었다 살아 돌아온 것과 다름없는 영주의 말이 조금 다르게 느껴지긴 했다.

“흐음.”

찬영이 경청하자 짧게 한숨 쉰 영주가 말했다.

“한때 나도 자네와 같았지. 삶의 모든 걸 전투에 바쳤어. 검을 수련했고 더 강해지기만을 바랐지. 한데 이렇게 부활하고 나니 무슨 생각이 드는 줄 아나?”

그윽한 눈길을 보내던 영주가 덧붙였다.

“살아남는 게 최고일세. 먹고 마시고 즐기고, 웃고 사는 게 우리가 흔하게 경험하는 게 모든 게 축복인 것이야. 그러니 어쩔 수 없는 우리의 전쟁 중에도 우린 행복해야 하네. 그게 우리의 삶이야.”

그건 한 번 소멸되다시피 했던 영주의 피부로 느낀 조언이었고 찬영은 그 뜻을 공감했다.

찬영이 말했다.

“예, 새겨두겠습니다…….”

문득 지난 일이 스쳤다.

매번 긴장하고 도전하며 목숨을 거는 와중에도 찬영이 목표로 한 건 스스로의 행복.

그러다보니 위험한 가시밭길이 기회의 길이 된 셈이었고…….

영주가 기분 좋게 잔을 들었다.

“좋군, 우리의 내일을 위해!”

기분 좋은 건배는 이쪽 세상이나 저쪽 세상이 똑같은 모양이다.

찬영이 그를 향해 위로 잔을 들어 올려 보였다.

* * *

이어진 식사는 즐거웠다. 그 와중에 찬영은 궁금한 것들을 물었다.

“소란이 꽤 컸을 텐데. 한 명도 방에 들어오지 않더군요. 혹여…… 영주님께서?”

“맞네, 성에 거하고 있는 사용인들과 기사들에게 모두 얘기했지, 자네에겐 접근하지 말라고.”

찬영도 처음 듣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 난리를 피우고도 아무도 방 안에 들어오지 않은 것만 봐도 뭔가 영주의 배려가 있었을 거라 예상은 했었다.

하지만 의중은 모르겠다.

“어째서 그러셨습니까?”

“하루아침에 세상이 뒤집히고 나는 자네에게 대륙을 복원할 무게를 주잖았나? 갓피스라며 말이야. 당장 정신병이 와도 무방할 일이지.”

영주는 호방하고 시원한 말투와 남성적 매력과는 달리 의외로 세심한 데가 있었다. 겉만 거칠 뿐 속은 부드러운 사람이랄까? 찬영은 새로 알게 된 그의 배려에 무척 고마웠다.

목숨 빚, 가보, 그리고 이런 세세한 배려까지…….

그에겐 충분히 신세를 진 셈이다.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아네, 그댄 내게 빚을 진 거지.”

슬쩍 웃음 지은 영주가 천으로 입을 닦으며 나이프를 내려놨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나 또한 자네에게 빚을 졌지. 영주 성이 있던 알폰 지방의 중심부를 되살린 건 바로 그대니까. 아니 그런가. 그러니 우린 이제 빚이 없네. 채무 관계가 청산됐으면 언제든 친구가 될 수 있지.”

영주가 찬영을 보며 눈을 빛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난 친구에게 격식 차리는 걸 좋아하지 않네. 물론 씀씀이도 크지! 하하, 그러니…….”

영주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찬영을 빤히 바라봤다.

“성 안에 있는 모든 곳을 활용하게나. 바뀐 세상 밖에 나설 준비를 마칠 때까지 틈틈이 나와.”

영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대련도 해 주고.”

“대련 말씀이십니까?”

“왜, 나라고 앉아서 자네가 대륙을 복원하는 걸 구경만 할 줄 알았나? 난 스무 번째 검이야. 가만히 앉아 지켜보는 건 성미에 안 맞지.”

영주는 그 말을 마치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예의에 어긋나지만 식사 중에 먼저 일어나겠네. 백수인 그대와 달리 나는 영주라서.”

끝까지 찬영을 한 번 놀린 그는 돌아서며 말했다.

“새로운 세상에 더 궁금한 게 있다면 이 마법구를 가지고 마법 병단 숙소 근처의 도서관으로 가게.”

영주가 톡 밀어내자 허공에 뜬 구슬이 찬영의 앞으로 둥실 다가왔다.

“의사소통뿐 아니라 글자 해석도 가능한 마법구라네. 이를 통해 도서관의 책들을 읽다보면 그것들은 그대가 이 세상에 적응할 기반이 되어 줄 걸세. 물론 새 친구도 사귈 겸 말이야.”

찬영은 그때까지 새 친구란 이야기가 그냥 해 준 말이라고 생각했다.

* * *

알폰 지방 (1)의 영주 성은 컸다.

어떤 영지의 영주 성과 비교해도 그리 작지 않은 규모.

그리고 그 규모의 영지를 부여 받을 때까진 뿌리 깊은 베이콥 가문의 노력이 있었다. 그러나 베이콥 가문 못지않게 자신들 가문의 명성을 드높인 이들이 있다.

그들은 바로 베이콥 가문이 자랑하는 마법 병단이었다.

의아하기는 하다.

‘검으로 유명한 가문에 왜 기사단보다 마법 병단의 명성이 높았었을까?’

그 이유에는 베이콥 가문을 일으킨 초대 가주와 오래토록 한 배를 탔던 하얏트라는 마법사가 일궈 놓은 터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얏트가 내려놓은 뿌리가 검가로 유명한 베이콥 가문에도 높은 서클의 마법사를 자체적으로 키우고 성장시킬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하지만 기반이 있어도 마법의 재능을 가진 자는 희귀한 편이었다. 체계를 갖춰 놔도 영지 내에 재능 있는 자는 소수였으니까. 마법 병단의 소속된 숫자가 서른 명이 채 되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중 5서클의 전투 마법사이자 당장 마법 병단을 이끄는 실무 단장 제이나. 그녀는 왕국 수도에서 이뤄졌었던 학회 세미나에서 떠오르는 스무 명의 마법사에 늘 선정될 정도로 명성이 드높았었다.

그만큼 실력이 출중하고 성격도 고고하다.

결코 직접 눈으로 보지 않는 건 믿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알폰 지방 (1)의 복원을 불러왔단 갓피스의 이야기가 들려도 그녀는 의문을 가졌다.

지구란 세계와 새로운 다리를 이어 준 갓피스가 과연 대륙 복원의 기틀이 될까? 한때 대륙에도 갓피스들은 존재했다.

그러나 그들도 대륙의 멸망을 막지 못했다.

이번이라고 다를까?

제이나는 소수의 갓피스에게 세상의 운명을 기댈 게 아니라 모든 힘을 동원해 대륙의 복원을 이뤄야 한다고 믿는 쪽이었다.

“단장님.”

생각에 잠긴 그녀를 누군가 불렀다.

‘음?’

마법 병단의 경험 많은 부단장이다. 이를 본 제이나가 붉은 입술을 열었다.

고르게 난 하얀 치아가 언뜻 드러났다.

거기에다 푸른 로브 안에 감춰진 잘록한 허리선을 따라 올라가는 매끈한 몸매, 고혹적인 붉고 적당히 도톰한 입술, 높은 콧대, 티 없는 피부까지. 정말 나무랄 데 없는 미인이었다.

하지만 옥의 티가 있다면 그녀의 눈빛이었다.

그 이지적이고 차가운 눈빛에 웬만큼 담력이 좋은 강한 기사도 딱딱하게 얼어붙을 정도.

그럴 법했다.

그녀의 눈빛엔 지식을 탐구하는 마법사 특유의 고고한 기품과 날카로운 기세가 공존했으니까.

“돌입했나?”

제이나가 물었다.

“예, 그렇습니다. 총 다섯 개 소대에 해체 1차 작업을 마쳤습니다.”

해체 작업.

메이든 숲 바깥의 토벌 구역에서 획득한 몬스터들을 쓰임새에 따라 절단하고 해체하는 작업을 말했다.

시드 대륙의 경우, 1차적인 해체 작업을 도맡는 건 마법사였다.

그들은 몬스터 사체 안에서 마정석 조각을 획득하는데 그 마정석 조각들은 순도 높은 마나를 보유했다.

이들은 이를 통해 마법 공학을 발전시켰었고 그에 관련한 마법 도구, 즉 ‘아티펙트’가 높은 수준으로 발전했다.

그 문명 위에 지구에서 각성자들이 가져온 과학이란 문명과 마법이란 문명이 결합되고 있었으니, 새로운 과제를 얻게 된 수많은 탐구자들이 바빠진 건 당연했다.

멸망이란 공동의 문제 앞에 두 문명이 서로의 모든 기술을 개방한 셈.

그렇기에 1차 해체 작업엔 현재 지구에서 넘어온 각성자들이 참관하거나, 해체 작업을 보조하며 작업 방식을 배워 가고 있는 중이다.

제이나가 보고를 마친 부단장에게 물었다.

“갈등은?”

이를 묻는 건 각성자들과 영지의 마법 병단 사이에 다툼은 없었는지 묻는 것이기도 했다.

평화 협약까지 맺었으니 영주는 각별히 다툼을 방지해 두라고 제이나에게 명령한 것이다.

부단장이 대답했다.

“없었습니다. 인수인계도 원활히 진행되는 중입니다.”

“그럼 됐어, 일부 결과물은 마법 공학자들한테 보내고.”

“예.”

하얏트 아카데미를 수료한 마법 공학자. 현장에서 뛰는 전투마법사인 레이나와 전혀 다른 일을 하는 연구진이다.

과학을 연구하는 각성자들은 대부분 이들과 시간을 보낸다.

하나 제이나는 전투 마법사였다. 전투 현장을 지휘하고, 효과적으로 적을 살상하는 것을 연구하지, 새로운 연구 과제를 탐닉하는 마법 공학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가 고민하는 것은 늘 다음 토벌뿐이었다. 어떻게 싸워야 할지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골치 아팠다.

“다들 좀 쉬도록 해.”

“예.”

부단장이 물러가자 제이나도 다시 돌아섰다.

한때 브린 마을이라 불렸던 구역까지 토벌하느라 피로가 누적됐다. 그녀가 자기 숙소로 돌아가려 하는 그때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저자는?’

분명 갓피스다. 영주와 함께 누워 있는 갓피스의 얼굴을 본 적이 있기에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딜 가는 거지?’

힐끗 그가 가는 길을 보니 도서관이 있는 쪽이 틀림없었다. 없던 관심이 생겼다. 세상을 구한다는 갓피스가 첫 행보로 도서관을 정했다.

‘왜?’

평소라면 남의 일에 무심했을 그녀조차도 세상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갓피스의 행보에는 궁금함이 있었다.

숙소로 돌아가려던 그녀는 발걸음을 도서관 쪽으로 바꾸었다.

갓피스라는 자가 과연 대륙 복원에 어떤 도움이 될 건지 스스로 관찰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기도 했다.

* * *

한 편 찬영은 제이나의 쫓아오는 시선을 느끼지 못 하고 미니 맵의 활용성을 시험해 보는 중이었다.

미니 맵이라는 홀로그램은 정말 신기했다.

동그란 나침반 형태의 홀로그램은 원할 때마다 확대 등이 가능했고, 확대하면 한 번 스쳐 가거나 지도를 통해 알게 된 장소들이 보였다.

벌써 지나온 성 내부의 지도 또한 완성되어 가는 중이었다. 길치도 이것만 있으면 한 번 지나간 길은 헤매지 않을 거다.

‘미로 같은 장소에서 유용하게 쓰이겠어.’

새삼 이런 생각도 같이 들었다.

‘오디가 복덩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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