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이규복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구름 위 거대한 대륙이 회색의 얇은 막으로 덮여 있었던 것이다.
면적이 어느 정도인지 구분도 되지 않는다.
섬, 아니 그 이상의 수준이었다.
그리고 그 거대한 땅 덩어리 위엔 불 꺼진 방처럼 아무 것도 들여다 볼 수 없는 막이 존재했다. 구름을 떠다니는 천공 대륙.
영상을 찍고 있던 사람이 외쳤다.
-맙소사, 저걸 봐!
-저, 저게 뭐야?
그 이후 영상이 끝났다. 펜을 갈무리한 이규복이 어깨를 으쓱였다.
“설명, 참 깔끔하죠?”
찬영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정말 그렇다.
이 영상 하나로 찬영은 이규복이 한 얘기를 모두 이해했다.
결국…….
‘베아트리체가 말했던 시드 대륙의 일부인 알폰 지방이 공중 도시처럼 나타났다는 건가.’
동시에 함께 이야기를 나눴던 베아트리체의 말들이 하나, 하나 다 충분히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알폰 지방은 붕괴됐다던 시드 대륙 재건의 시작점일 뿐이야.’
놀라운 일이었다.
휴거를 제거하는 게 단순히 종말을 막는 게 아니라, 또 다른 이세계의 재건을 가지고 오는 길이었다니.
그러나 찬영의 표정을 살피던 이규복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듯 고개를 내저어 보였다.
“아직 다 놀라긴 일러요.”
“뭐가, 더 남았습니까?”
평소 늘 차분해 보이는 찬영 역시도 전해들은 일련의 일들에 적응하는 건 시간이 좀 필요해 보였다.
‘이런 눈빛은 처음이네.’
끊임없이 놀라는 찬영을 보며 이규복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알폰 지방만 등장한 게 아니에요.”
“그럼?”
“이곳에 살던 수많은 이들도 함께 부활했어요.”
계속해서 들려오는 믿기지 않는 이야기에 찬영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부활이요?”
“네, 놀랍게도 다양한 이종족들이 살더군요, 이곳엔.”
이규복은 처음 이 영지에 발을 들였을 때를 떠올리며 덧붙였다.
시드 대륙의 일부인 이 알폰 지방은 정말 놀라운 곳이었다.
“지구의 뉴 게이트는 전부 사라졌어요. 북한산에 놓인 단 하나의 문을 제외하곤 말이죠.”
이규복이 쓰고 있던 안경테를 추켜올리며 말했다.
“그 문은 뉴 게이트 아니, 이젠 블루 게이트로 명명된 장소가 됐죠.”
“블루…… 게이트요?”
“네, 일종의 차원 다리더군요. 들고 다닐 수 있는 물건들의 한계 중량은 50kg까지. 어찌 보면 서먼 홀 당시와 흡사하죠?”
“그러네요, 확실히.”
“뭐, 그런 건 둘째치더라도 새로운 세계의 발견은 전 세계적으로 큰 변혁을 가져오고 있어요. 이곳은 오로지 각성자들에 의해서만 진입이 가능하거든요.”
“놀랍군요.”
“네, 누가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이런 일은…….”
“신이여야 가능하겠죠.”
찬영의 대답에 동의한 이규복이 남은 얘기를 계속해서 말해 주었다.
“벌써 세계 각국 지도자들의 협의 아래 만들어진 협약서가, 수많은 펌들의 연합 아래 이곳의 지도자인 베이콥 영주에게 도착했고, 그는 기꺼이 이를 받아들였어요.”
그 직후 자세한 협약 내용에 관해서 이규복이 들려주기는 했지만, 크게 새겨들을 필요는 없는 당연한 수칙들이었다.
각자의 종족에 대한 살인 등, 윤리적인 것들을 우선시한 협약들이었기 때문이다.
윤리적으로 올바른 가치관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든 지킬 수 있는 정도였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찬영이 물었다.
“그럼 대화를 나누는 건 어렵지 않았습니까?”
“그들에게 마법구가 있던데요? 놀라웠습니다. 누가 되었든 의사소통이 가능해지는 마법구라니……. 그 밖에도 각성자들을 강화시킬 수 있는 수많은 도구들이 여기엔 널려 있더군요.”
찬영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겨우 열흘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고는 정말 믿기지 않는 상황들이다.
“놀랍네요.”
이규복도 그 점엔 동의했다.
수많은 변화들이 시작되었으니까.
“네, 찬영 씨가 잠들어 있던 열흘 정도의 시간 동안 정말 많은 일들이 벌어진 셈이죠. 여러 가지 분란들이 있긴 했지만 무사히 넘어갔고요. 아직도 분란들이 남아 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천천히 적응해 갈 일이죠, 다들. 아 그리고…….”
이규복이 방금 생각이 났단 얼굴로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영지 소유의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이 일대의 휴거들이 전부 소탕된 건 아니에요.”
그 말에 찬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입니까?”
“알폰 지방이 재건되었다는 게 알폰 장소의 모든 장소에서 휴거들이 토벌되었다는 걸 뜻하는 게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그럼?”
“휴거와의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거죠. 현재 이곳 현지인들과 여러 곳에서 파견된 펌이 조합을 이뤄 토벌을 하나하나 이뤄 가고 있어요.”
이규복이 펜으로 찍은 하나의 지도를 띄워 주었다.
“우린 이제, 그곳을 ‘던전’이라고 부릅니다.”
그 순간 찬영은 베아트리체가 남긴 얘기들이 떠올랐다.
‘차원 다리를 지배한 올드 원들의 하수인들을 걷어내라.’
그래, 그녀는 분명 그리 말했다.
그게 만약 지금의 상황과 결부된다면?
시드 대륙의 복원.
올드 원들의 하수인.
그리고 지구의 종말, 즉 붕괴를 막는 일은 모두 한데 섞여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이면에 숨겨진 또 다른 진실, 그녀가 자신에게 말했던 사명에 관해서도.
분명 시드 대륙의 복원을 통해 하나씩 알아 갈 수 있을 거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찬영은 조용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인정한다. 새로운 세상이 열렸음을, 그리고…….’
벌컥!
또 다시 문을 열고 예상 못한 낯선 손님이 등장했다.
갑자기 등장한 중년인은 수염이 덥수룩한 반백의 사내였다.
덩치는 찬영의 두 배는 될 법했고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은 이규복의 대검의 삼분의 일 정도 됐다.
그럼에도 꽤나 큰 검처럼 보였다.
“누구……?”
막 입을 열려던 찬영과 달리 이규복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동시에 그들 사이에 떠오르기 시작한 마법구.
의사소통을 위한 것이었다.
세 사람의 대화가 물꼬를 텄다.
“영주님께서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이규복의 목소리와 함께 엉거주춤 일어난 찬영은 둘을 번갈아 보며 그제야 깨달았다.
‘이 사람이?’
이곳의 지도자라는 영주인 모양.
그래서일까?
가치 측정은 무려…….
‘21,200?’
감히 찬영이 다가서지도 못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런 사람조차도 막지 못한 시드 대륙의 멸망. 찬영은 새삼 베아트리체가 나아가라고 했던 그 길이 쉽지 않을 거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는 사이 영주가 이규복의 말에 대답해 왔다.
“아닐세, 함께 싸울 이방인이여. 갓피스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도 어찌 직접 오지 않을 수 있겠나?”
그 직후 영주가 찬영을 돌아보았다.
눈빛에 서린 위압감이 상당했다.
범접할 수 없는 권위가 찬영의 피부에 확실히 와 닿았다.
하나 그의 푸른 눈동자가 가진 위엄을 느꼈음에도 찬영의 눈빛엔 큰 흔들림이 없었다.
인사를 위해 고개를 숙이면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처음 뵙습니다. 양찬영이라고 합니다.”
“필립 베이콥이라 하네. 갓피스여, 자넨 나를 조마조마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군.”
영주의 대답에 찬영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의 말에 영주가 의미심장하게 웃어 보였다.
동시에 찬영은 궁금해졌다.
‘무슨 뜻이지?’
이해가 되지 않아 이규복을 쳐다보자 이규복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눈치를 보였다.
하지만 의문은 영주의 이어진 이야기에 금방 풀렸다.
“우리가 자넬 발견했을 때 자넨 중독되었었네. 하나 자넬 구해 낸 노티스 여신의 신관들이 말하더군. 자네 스스로 독을 견뎌 내고 있었다고.”
그제야 찬영은 그의 조마조마했단 말이 이해가 됐다.
‘죽을 뻔 했던 건가…….’
매순간 위기를 넘기는 일은 맞닥트릴 때마다 적응되지 않는 일이었다.
오디와 싸울 때의 기억을 떠올리자 아직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마음을 다독였다.
그리고…….
“치료를 못 받았다면 생각만으로도 끔찍하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목숨을 건지게 도와 준 고마움도 당연히 표해야 했다.
영주가 괜찮다며 손을 내저었다.
“아닐세, 우리 또한 자네가 갓피스란 걸 보고 치료한 것이니. 서로 필요에 의해 도움을 주고받기로 한 것이라고 보면 되네.”
찬영은 듣다보니 이상함을 느꼈다.
‘영주가 어떻게 알았던 거지?’
이해가 되지 않아 곧바로 물었다.
“제가 갓피스란 걸 어떻게…….”
“그거야 자네의 눈을 보면 되지. 그 눈은 우리 대륙의 사람들에겐 나뭇잎 형태로 보이네. 그대들에게는 아닌가?”
영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규복에게 물었다.
“아닙니다, 영주님. 전혀 못 보았습니다, 그런 차이는.”
이규복이 얼른 고개를 저었다.
차이를 느꼈다면 다시 재회했을 때부터 말해 주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규복은 영주와 찬영의 대화를 전혀 이해 못했다. 그러니 지금 대답은 당연했다.
영주는 신기한 눈치였다.
“허면 자네의 종족들이 아닌, 우리에게만 보이는 표식인가보군.”
찬영이 조금,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습니다.”
이유는 모르나 영주와 이규복의 말에 비춰보자면 확실히 그랬다.
“그런가…….”
하고 고개를 끄덕인 영주가 찬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덧붙였다.
“자네의 눈에 나뭇잎 무늬가 새겨졌다는 것은 갓피스로서의 진정한 운명이 시작됐다는 것을 뜻한다네. 우리 시대에도 그들은 존재했지. 하나…….”
말끝을 흐리면서 이맛살을 찌푸리는 영주.
썩 좋은 기억이 아니기에 그랬다.
“그들은 대륙의 멸망을 막지 못했네. 그리고 회색의 지옥이 우릴 덮쳤지. 하나 대륙의 멸망 당시 펼쳐졌다던 최후의 성전은 당시 참전한 갓피스들과 그 일에 관련된 소수만 알 뿐…… 나 또한 아는 바가 없다네. 내가 아는 건 그저 아직 남아 있는 적들이 대륙에 가득하다는 거지.”
결국 영주가 아는 건 한때, 대륙에도 갓피스란 존재들이 있었다는 것 정도였다. 그래서 찬영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물었다.
“그럼 알폰의 성녀에 대해서도 잘 모르십니까?”
질문을 한 이유는 만약 영주가 그녀가 남긴 흔적들에 대해 알고 있다면 갓피스에 알아 가는 데 다른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러자 그 이름을 언급할지 몰랐었는지 영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를 어찌 아는가? 자넨 그녀와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인데?”
설명하자면 길었기에 찬영은 적당한 대답을 곧바로 떠올렸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의식을 잃어버리고 있던 내내.”
“놀랍군, 정말 놀라워. 사라진 갓피스가 후대의 갓피스에게 연결되었다는 것인가?”
해석은 영주의 마음이었지만 찬영은 그 말도 틀리진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정하지 않고 영주의 해석에 동의하자 영주는 기적이라도 본 얼굴로 말했다.
“서로 다른 세계의 갓피스의 연결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직은 모르겠지만 기분 좋은 희망처럼 들리는군. 그건 그렇고 나는…….”
영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녀에 대해 잘 모른다네. 물론 알폰의 성녀가 알폰에서 태어났다는 것 정도야 알고 있지만 말이야.”
찬영은 아쉬운 눈빛을 보였다.
하지만 예상 못한 건 아니었다.
최후의 성전에 대해도 무지한 영주가 갓피스인 성녀와 알고 있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니. 마침 영주도 그 마음을 눈치챘나보다.
“원하는 답을 주지 못한 모양이군.”
“아닙니다. 단지 그녀에 대해 알아가고 싶은 마음이 좀 컸습니다.”
“이해하네. 그들의 행적을 밟다 보면 자네가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좀 더 명확해질 테니, 그렇지?”
“예, 어느 정도는…….”
찬영의 대답을 들은 영주가 고개를 끄덕인 후 넌지시 물어왔다.
“그래, 그럼 나 역시 자네의 행적을 통해 답을 하나 얻었으면 하는데?”
“어떤 것입니까?”
“자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영주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우리가 재건된 것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