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
그렇게 뉴 게이트에 진입한 순간 새로운 광경이 펼쳐졌다. 찬영은 발아래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 나서야 깨달았다.
‘성벽?’
벽돌 사이사이 틈을 흙으로 발라 지어진 성벽은 견고히 늘어서서 빙 둘러져 있었다. 성벽 밖은 회색 초원이 보였고, 그 초원을 지나 그 뒤엔 나무로 빼곡한 깊은 회색 숲이 보였다.
거기에다 성벽 안쪽을 내다보자 저 멀리 한때 수많은 사람들이 살았을 법한 집, 저택, 광장 등이 점처럼 아득히 보였다.
하지만 이상한 건 모두 잿빛이라는 것.
‘회색 페인트라도 흠뻑 칠한 것 같네.’
그럴 만도 한 게 성벽을 포함한 모든 중세 건물은 온통 잿빛으로 가득했다. 찬영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뉴 게이트 진입과 동시에 오디가 나타날 줄 알았는데.
‘지금 보고 있는 것들은 대체 뭘까?’
당혹스러웠다.
낯선 장소란 건 둘째 치더라도 이곳이 휴거란 괴물들이 사는 곳이라고는 조금도 믿을 수 없었다. 그 험악한 괴물들이 저런 작은 집을 짓고, 성을 짓고, 성벽을 만들었다는 게 이해가 되질 않았다.
‘정말 놈들이 여기서 시작됐다고?’
아니, 찬영이 보기엔 전혀 아니었다.
좀처럼 지금 보고 있는 것들에 대해 이해하기 힘들어 눈살을 찌푸린 그때였다.
쉬익!
등 뒤에서 공에서 바람이 빠지는 희한한 소리가 났다.
‘음?’
고개를 돌리자마자 보인 건 서서히 소용돌이치며 사라진 뉴 게이트. 그건 찬영이 뭘 할 새도 없는 찰나였다.
돌아갈 문이 없어져 버렸다. 찬영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렸다. 단단히 각오하고 진입한 길이었으나 돌아갈 길이 사라질 줄이야!
입술을 콱 깨문 채 뉴 게이트가 사라진 장소를 가만히 응시했다. 진입과 함께 보이기 시작한 잿빛의 낯선 장소부터 사라져 버린 뉴 게이트까지…….
제대로 정신을 붙잡고 있는 스스로가 용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찬영은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이곳에 온 건 자신의 선택, 그리고 선택엔 그에 마땅한 책임이 따른다. 그러니 정신 차리고 상황을 똑바로 마주 봐야 했다.
‘후우.’
심호흡과 함께 마음을 다스린 찬영이 인벤토리 창에 보관하고 있던 알 수 없는 마정석을 꺼내들었다.
손 안 가득 잡힌 둥글고 푸른빛의 보석.
첫 현상 수배 창이 나타났을 때 알 수 없는 마정석과 놈이 관련 있다는 문구를 보았다.
그래서 꺼내든 것이다.
‘마정석이 놈을 찾을 단서인 게 확실하다.’
쿠쿠쿵!
그 순간, 성벽 아래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뭐지!’
마정석을 쥔 손의 반대편 손을 뻗어 툭 튀어나온 돌출 벽을 부여잡았다. 빠르게 지탱할 곳을 부여잡았는데도 몸이 당장 튀어오를 만큼 큰 진동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동시에 나타나는 창.
-……알폰 지방의 오디가 알 수 없는 마정석을 소유한 이의 냄새를 맡았습니다. 그로 인해 돌발 현상 수배 ‘오디를 잡아라.’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디 제거 시 알폰 지방의 최초 진입 보상 획득이 가능합니다.
-오디 제거 시 2차 로그인 캘린더 개방이 시작됩니다.
놈이 깨어났다.
시작부터 요란했다.
빙 둘러져 있는 성벽 일부에서 20m짜리 방망이가 쿠쿵 소리를 내며 솟아올랐다. 하나 그건 시작일 뿐이었다. 방망이를 필두로 성벽의 십분의 일을 단숨에 파괴하며 일어나기 시작한 거대한 물체가 보였다. 성벽의 두 배 크기는 되어 보이는 녀석이 그 큰 입을 쩍 벌리며 포효했다.
-크오오오오!
마주한 것만으로도 압도적이다.
이제껏 아무 훈련도 거치지 않고 놈을 만났더라면? 아마, 백이면 백. 저 거대한 방망이에 짓눌려 터져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다르다.
찬영은 놈을 직면하고도 충분히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쾅! 쾅! 쾅!
그새 찬영을 발견한 놈이 더욱 크게 포효를 지르며 자신의 몸을 가로 막는 성벽을 방망이를 휘둘러 블록들을 부수듯 부수고 무너트리며 두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쿵! 쾅! 쿵!
놈이 한 발씩 내딛으며 다가올 때마다 지축이 흔들렸다.
‘온다!’
넉 달 간 놈을 잡기 위해 기다려 왔다.
이건 두려워할 게 아니라 또 하나의 기회였다. 흔들림을 감수하고 일어난 찬영은 재빨리 은빛 기체를 소환했다. 홀로그램이 찬영의 몸에 스며들 듯 장착되더니 다섯 개의 날개가 만개했다.
쐐액!
곧이어 지체 없이 허공으로 솟아오른 은빛 기체, 그 은빛 기체에서 공기 소용돌이를 일으킨 극광이 뻗어졌다.
콰아!
‘단번에 죽이지 못해도 큰 데미지 정도야 입힐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했다, 극광이 놈과 부딪치기 전까지는.
펑!
저 멀리 놈과 극광이 부딪치기 직전에 놈이 방망이를 휘둘렀다.
부웅! 쾅!
놈은 쏘아낸 극광을 방망이로 튕겨내며 오히려 받아쳤다.
찬영이 둥실 떠 있는 곳으로 극광이 다시 되돌아왔다.
‘피해야 해!’
다시 고도를 높여 날아올랐다.
발 끝, 간발의 차이로 반사된 극광이 스쳐 지나갔다.
-크오오!
다시 울부짖는 오디.
동시에 놈의 방망이 끝에서 공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생성되기 시작한 공기의 구체, 그 구체의 지름은 방망이의 팔분의 일은 될 만큼 거대했다. 주변 공기를 삼키는 구체가 방망이 끝에서 빙글빙글 회전하는 순간, 놈이 타자라도 된 양 그 큰 몸의 허리를 틀었다가 방망이를 ‘붕 ’하고 휘둘렀다. 그러자 허공을 향해 거대한 구체가 쏘아졌다.
쐐액!
무시무시한 파공음을 일으키며 쏘아지는 구체의 속도는 굉장히 빨랐다. 하지만 못 피할 정도는 아니다.
빠르게 방향을 전환했다.
쐐액!
저 멀리 스쳐 가는 구체.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눈앞에 구체가 연달아 날아오기 시작했다.
첫 번째, 두 번째 구체까지는 날개의 방향 전환을 통해 무리 없이 피해 냈다. 하지만…….
‘구체가 날 빨아들이고 있다!’
그게 문제였다. 날개 다섯 개가 구체가 스쳐 갈 때마다 좌우로 흔들리면서 갈피를 못 잡았다.
‘젠장, 균형을 못 잡겠어!’
구체의 빨아들이는 장력 때문이었다.
‘좋지 않아. 패턴이 바뀌어야 해!’
하나 이 상태로 계속 피해 다녔다간 끝이 나질 않는다. 아니, 오히려…….
‘내가 당한다!’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현재 상태에 관련된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마나와 체력 어느 것 하나 완벽한 상태가 아니다.
‘그럼……?’
장기전으로 가면 불리하다는 뜻이었다.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이 싸움을 끝내야 했다. 그게 놈을 쓰러트릴 확률을 높일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아직은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부딪치면서 생각해 내야 했다.
쐐액!
그새 또 다시 스쳐 가는 놈의 구체를 본 후, 찬영이 가속도를 일으켜 도리어 놈을 향해 날아갔다.
쐐액!
거대한 구체들이 유성우처럼 고도를 낮춰 날아가는 찬영을 향해 수도 없이 날아왔다.
하지만 찬영은 두 눈을 한 번도 감지 않고 똑바로 떴다.
쐐액! 쐐액!
좌우와 상하의 날개를 폈다 접었다 펴며 체공했다. 구체들이 스쳐 갈 때마다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쐐액!
힘겹게 나아갈수록 점차 놈과의 간극이 줄어들어 가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그러자 더 이상 안 되겠는지 오디 역시 패턴을 바꿔 공격을 시작했다. 좁혀지는 거리를 막으려 방망이를 휘두른 것이다.
쐐액!
놈은 찬영이 접근하는 때를 맞춰 방망이를 휘둘렀다.
그 타이밍이 시기적절했다.
쐐액!
날아온 방망이로 인해 삽시간에 찬영의 눈앞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멈출 수 없다. 멈추면 추락한다. 어떻게든 거대한 방망이 면적을 벗어나 날아서 올라가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대부분의 마나를 사용하면, 잠깐 놈의 공격을 막아 낼 에어실드를 활용할 수 있긴 하지만 지금은…….
‘사용할 수 없어!’
마지막 최후의 방법을 택할 때, 남은 마나를 쏟아부어야 했기 때문이다.
쐐애액!
그렇게 다섯 날개가 당장 꺾일 듯 위태로워 보이던 그때 놈의 방망이가 기어코 찬영의 날개 끝을 스쳐 지나며 애꿎은 허공만 내리 갈랐다.
‘됐다!’
가까스로 놈의 방망이를 피해낸 찬영은 겨우 잡은 마지막 기회를 그냥 날려 버릴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크아앙!
오디가 발악했다. 계속 도망치는 찬영을 못 잡은 게 분한 것이다. 놈이 포효하며 방망이를 성벽 위에 내던졌다.
쐐액!
오디는 아예 두 손을 쓰며 덤벼 왔다. 하지만 놈의 손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이미 놈의 다리를 지나 비행하기 시작한 찬영은 놈의 상체 위를 나선형으로 휘돌며 날아가는 중이었다.
동시에 찬영의 오른손에 착용한 더블 피니시가 일격을 준비했다.
쐐애애액!
모여든 기압과 함께 마침내.
펑!
극광이 놈의 가죽을 당장 꿰뚫을 듯 쏘아졌다.
콰쾅!
날고 있는 찬영의 저 멀리, 놈의 살가죽이 출렁이며 소용돌이쳤다.
하지만…….
그건 놈의 흥분을 강화시킬 뿐이었다.
-크아아아!
에어펌프의 공격으로도 놈의 겉가죽은 멀쩡했다. 이를 본 찬영이 씹어뱉듯이 중얼거렸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쐈는데!”
상황이 좋지 않았다.
놈의 방어력이 에어펌프를 활용한 공격에도 멀쩡하다는 것은 다른 기술을 써도 마찬가지라는 뜻이었다.
그럼 결국…….
‘이 방법 밖에 없나.’
고개를 들어 포효하는 놈의 출렁이는 턱을 노려봤다.
그새 찬영을 쫓기 위해 턱 아래를 내려다보는 놈의 샛노란 눈동자가 찬영의 눈과 마주쳤다. 찬영 역시 피하지 않았다.
-크앙!
귀가 찢어질 정도의 괴성을 지른 놈이 입을 쩍 벌렸다.
헌데 붕 떠오른 찬영의 자세가 심상찮았다.
피하기보다는 오히려 놈의 입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다섯 개의 날개를 모두 오므린 찬영이 놈의 입 안으로 진입한 것은 그야말로 전광석화와도 같았다. 그의 날갯짓엔 어떤 주저함도 없었다. 그저 앞으로 쇄도할 뿐!
쩌억, 탁!
마침내 입 안에 찬영을 삼킨 놈이 거대한 입을 다물어 버렸다.
쐐액!
한 편 찬영은 오디의 입을 통해 놈의 내부로 서서히 깊이 빨려 들어갔다.
하지만 내부에 들어와서도 상황은 좋지 않았다.
놈의 내부엔 푸른색 곰팡이 같은 것들이 둥둥 떠다녔는데 그게 기체 안으로 스며들기 시작하자 숨 쉬는 것조차 역하게 느껴졌다.
‘독인가?’
아마도 그런 모양이었다. 찬영은 최대한 버텨 볼 요량으로 숨을 짧게 툭툭 쉬었다. 계속 숨을 참을 수 없을 바엔 최대한 숨을 들이키지 않게 짧게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편이 낫다.
그러면서 기다릴 것이다, 놈의 더 깊숙한 내부로 진입할 때까지.
극광이 놈의 가죽도 뚫지 못할 때부터 이미 내부로 진입할 계획을 세웠기 때문이다. 이윽고 흐릿해져 가는 의식을 부여잡으며 착용한 더블 피니시를 더욱 거세게 움켜쥐었다.
* * *
얼마쯤 지났을까? 혼미해져 가는 의식을 억지로 부여잡은 채 놈의 내부를 비행하던 찬영이 동작을 멈췄다.
둥실.
안간힘을 다해 떠오른 찬영의 앞에 밝게 빛나고 있는 커다란 구체가 보였다.
두근, 두근.
심장이 아닌 것 같지만, 밝은 구체는 분명 맥동하고 있었다.
확신할 순 없지만 이제껏 놈의 내부를 지나치며 봐 온 어떤 내부의 장기보다도 환히 빛나며 중요해 보였다. 놈의 주요요 장기일 게 틀림없었다.
‘이거다!’
찬영은 마지막 비행을 일으켜 밝은 빛을 따라 움직였다.
빛을 향해 나아가는 찬영의 묵빛 철권이 마지막 마나를 활용해 서서히 휘돌기 시작했다. 이제껏 아껴두었던 마나는 바로 지금을 위해서였다.
콰지직!
빛을 찢어발기기 시작한 찬영의 몸이 삽시간에 새하얀 빛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