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
내부 발현의 중심은 인체다. 마나도 인체에 흐르고, 마나 배열을 통해 내부 발현이 시작되는 것도 인체였다. 고로 인체만 마나의 영향을 받는 게 아니라 마나도 인체의 영향을 받는 것이다.
그러니 외부의 물질을 결합해 활용해야 하는 외부 발현과 달리 내부 발현은, 가진 바 인체 역량만 따라 준다면 얼마든지 타인의 기술을 습득할 수 있다. 기술을 가르쳐 주는 이가 동작을 이렇게 잘게 끊어서 성심성의껏 알려 준다면야 더더욱.
이규복은 동작을 하나하나 세세하게 직접 시연하며 찬영이 따라올 수 있게 도와줬다.
“첫 걸음은 이렇게.”
어느새 땀으로 흠뻑 젖은 얼굴.
그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성심성의껏 이네이트를 전수해 주려는지 알 수 있었다.
정말로 고마웠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따라 했다.
근육이 터져나갈 것 같아도 그의 동작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그대로 배우고자 했다.
그게 찬영이 보일 수 있는 최선의 예의였다.
이규복이 길을 열어 주면 찬영은 필사적으로 그 걸음을 쫓기 위해 따라갔다.
한발, 한발.
느려 보여도 차분히 따라갔다.
그렇게 그들의 시간이 깊어갔다.
* * *
다섯 시간쯤 흐르고.
“이만 가 봐야겠네요. 스텝뿐 아니라 마나 배열에 대해서도 말씀드렸으니, 장비 소환 마나 배열도 이제 더 쉽게 이해가 되실…….”
이규복은 잔뜩 지친 기색으로 중얼거리다 말고 입을 닫았다. 들려오는 대답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럴 만도 했다.
“사람 참…… 독하네.”
이규복은 그리 중얼거리며 대답은커녕 한쪽에서 아까 연습했던 동작들을 되새기고 또 되새기며 움직이고 있는 찬영을 빤히 쳐다봤다. 저렇게 훈련에 몰입하고 있는 데 가겠다는 말을 들을 리가 있나?
이미 찬영은 무아지경이다. 하지만 이건 심해도 너무 심했다. 알려 준 동작들은 결코 하루 만에 완벽히 습득하기 힘들다. 유연성, 반응속도 등 각성자라 해도 한계를 뛰어넘기 고통스러운 과정들을 한가득 채운 동작들이었기 때문이다. 이 기술을 직접 쓰고 있는 자신만 하더라도 세 시간쯤 극성으로 펼치고 나면 그대로 뻗어 버린다. 하지만 찬영은 지쳐서 몸이 굼떠지긴 했어도 쉬지 않고 계속 움직이고 있다.
‘한 다섯 시간 됐나?’
벌써 밖은 깜깜한 밤이 되었다.
슬슬 찜질방이나 들렀다가 회사에 출근해야 할 시간이었다.
시간을 확인한 이규복이 무거워진 엉덩이를 일으켰다.
“읏차!”
가는 길에 같이 저녁이나 먹으려 했더니 괜한 생각이었던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찬영과 밥 한 끼 먹으려면 뉴 게이트가 세상에서 싹 다 지워지고 나서야 가능할 것 같다.
‘참, 찬영답다.’
결국 이규복은 잘 가란 인사 한마디 못 받고 조용히 문 밖으로 나섰다.
“수고해요.”
하지만 마지막 말을 남기면서도 웃음이 났다.
그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려나.
* * *
반면 찬영은 이규복이 간 줄도 모르고 그가 전수해 준 동작들을 되새기고 또 되새겼다. 그러다보니 훈련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 동작 하나만……. 저 동작 하나만…….’ 하면서 계속 그가 알려 준 동작들을 되새기고 또 되새겼다.
그의 말에 따르자면 동작이 원활히 완성되다보면, 어느 순간 마나 배열이 동작을 쫓아오며 내부 발현이 시작된다고 했다.
내부 발현이 시작되면 신체의 유연성이 상승하며 지금 펼치는 스텝이 훨씬 더 완벽에 가까운 모습이 될 것이다.
그때를 위해서라도 지금 이 한 발을 내딛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동안 찬영의 눈앞엔 근력 상승의 창이 계속 상승하는 중이었다.
-근력 가치가 +1 상승하였습니다.
……상승. 상승. 또 상승.
이것만 보더라도 찬영의 신체가 이미 한계점 이상에 도달했다는 걸 반증했다.
하지만 찬영은 그럼에도 계속 움직였다.
뚝, 뚝.
비 오듯 떨어지는 땀방울이 발끝에 스쳐 가던 그때 찬영은 샌드백의 주위를 스치듯 지난 후, 벽을 차고 앞으로 단번에 쏘아졌다.
계속 실패한 동작이었다.
돌진하다 급히 옆으로 방향 전환하는 스텝이기에 계속 앞으로 고꾸라지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실패한다고 계속 놔두진 않는다.
‘안 되면 될 때까지!’
타닥.
타이밍을 쟀다가 옆으로 빠지는 찬영의 몸이 관성의 법칙을 이겨내지 못 하고 앞으로 고꾸라지려 했다. 하지만 이를 갈았다. 몇 번의 실패로 말미암아 안다. 그냥 근력으로 버텨선 또 다시 무너질 뿐, 흐름을 타야 한다.
‘마치 순풍을 탄 돛단배처럼!’
순간 찬영의 눈동자에 이규복이 보여 줬던 동작이 영상처럼 겹쳐졌다. 몸 안이 뜨거워지고 있다. 뭔가 될 것 같았다.
그 순간, 갑자기 나타난 창이 찬영의 집중도를 흩트렸다.
“흣!”
동시에 찬영의 균형도 덩달아 흩트려졌다.
관성은 어김없이 찬영을 맨 바닥에 고꾸라트렸다.
“후…….”
또 실패였다.
결국 대 자로 뻗은 찬영이 천장을 올려다봤다.
하지만 실패한 찬영의 입가엔 웬일인지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그건 바로 방금 전 나타난 창 때문이었다. 누워 있는 찬영의 눈앞엔 여러 개의 창이 동시에 번쩍거리고 있었다.
-붉은 바람이 습득되었습니다.
-붉은 바람의 습득이 섬뢰보의 숙련도를 상승시킵니다.
-섬뢰보의 숙련도가 붉은 바람의 최초 숙련도에 영향을 미칩니다.
-붉은 바람과 섬뢰보의 습득으로 인해 최초 스킬트리가 개방되었습니다.
-스킬트리로 인해 새로운…….
* * *
네 달 후, 창고는 큰 공사를 거쳐 이젠 보안 설비까지 완벽히 들어서 있었다. 그냥 자물쇠로 잠가두었던 변변찮았던 창고 문이 지문 인식으로 바뀐 것만 봐도 그랬다.
저벅, 저벅.
창고 앞에 도착한 찬영은 지문 인식을 한 뒤 자동으로 열리는 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면서 로그인 캘린더 창을 올려다보았다.
‘오늘도인가……?’
근 네 달이 넘는 시간 동안 2차 로그인 캘린더는 정지되어 버렸다.
대체 이유가 뭘까?
여러 가지를 고민해 보고 갖가지 시도를 해 보았지만 정지된 캘린더는 도무지 되살아날 기미가 안 보였다.
그러던 중, 아직 해결하지 못한 일이 있단 걸 새삼 깨달았다. 바로…….
‘오디!’
시스템이 부여해 알려 준 일들 중 유일하게 해결하지 못한 일은 바로 뉴 게이트 진입과 관련 있는 오디 퀘스트뿐이었던 것이다. 당연히 ‘어쩌면?’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디 퀘스트를 끝내야 2차 로그인 캘린더가 시작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 탓이다.
그래서 진입 허가만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네 달간 이를 갈며 훈련했다. 물론 어젯밤 걸려온 얘기에 따르면 그게 허사가 되긴 했지만…….
* * *
어제.
드르르. 드르르. 웃옷 안에 있던 스마트폰이 크게 울려 퍼졌다. 일반 스마트폰보다 세 배는 큰 것 같았다. 요란한 진동 소리를 들으니 이규복의 얼굴이 절로 떠올랐다.
“스마트폰에 장치들을 추가해서, 일반 진동음보다 네 배는 더 크게 울리게 해 뒀습니다. 전에 보니까 제가 집에 가는 것도 모르시더라고요.”
뒤끝인지 배려인지 모를 그 덕분에 이젠 스마트폰 진동을 안 들으려야 안 들을 수 없게 됐다.
피식 웃은 찬영이 스마트폰을 귀 옆에 가져다댄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규복이다.
-북한산 호출이에요.
찬영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종료 안 됐습니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규복으로부터 짧은 답변이 들려왔다.
-네. 오히려 일이 커졌어요. 저지선에서 만납시다.
“네.”
대답을 마친 후 들고 있던 스마트폰을 내려놨다.
그러고는 그가 미뤄두었던 창 한 개를 띄워 놨다.
-오디
-가치 : 4,400
-알 수 없는 마정석 보유 시 오디가 나타납니다.
-주의사항 : 오디의 방망이가 가진 반탄력은 바람도 튕겨냅니다.
고정 보상: 흔적(1)
네 달간 노려온 목표, 그 목표를 놓치나 했더니 결국 자신의 손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윽고 문 밖으로 걸음을 떼는 찬영의 전신 위로 홀로그램이 덮이기 시작했다.
* * *
서걱!
이규복의 붉은 거인이 강한 절삭력으로 눈앞에 보이는 휴거 하나를 작살냈다. 정면으로 한 번, 사각지대를 밟으며 다시 한 번.
단 두 번에 잘려나간 휴거는 검붉은 액체를 입 안에서 꾸역꾸역 쏟아내더니 ‘쿵’하고 내려앉았다.
이걸로 열 놈째다. 하지만 열 놈을 베었음에도 저지선은 여전히 혼란 그 자체였다.
그럴 만도 했다. 세종의 휴거가 그간 소멸되지 않은 채 얌전히 있던 뉴 게이트에서 떼를 지어 나타난 것이다. 심지어 이것들은 최근 V.O.의 경쟁 업체로 자리 잡기 시작한 G.N. 소속 현장 실무 2팀을 모두 전멸시켜 버렸다.
G.N.은 V.O.보다 기업 가치를 상승시키기 위해 혈안이 된 기업이다.
그래서일까? 최근 이규복은 북한산 뉴 게이트 현장 지휘권을 G.N.에 양도해야만 했다.
상부에서도 이야기가 끝난 모양인지, 선선히 그러라고 했다. 탐탁찮았지만 어쩔 수 없이 현장을 인계해 주었다.
‘신중하게 접근하라고 귀에 못이 박도록 얘기했건만!’
결국 그들은 실패했고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휴거들은 미친 듯이 저지선 바깥으로 튀어나오는 중이었다.
‘이런!’
욕이 절로 나왔다.
벌써 주파수를 맞춰 놓은 통신기에선 팀원들의 다급한 목소리가 연이어 들리는 중이다.
-팀장님. A-1 뚫렸습니다!
-C-3입니다. 지원 바랍니다!
안다. 다 안다. 하지만 너무 갑자기 진행된 상황이라, 상부에서도 이리저리 지원 병력을 보내 줄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니 그 시간 동안은…….
‘우리가 전부다.’
또 다시 칼을 휘두르며 땅을 쿵, 박차고 뛰어오른 이규복이 허공에서 몸을 회전하며 그 회전력을 통해 휴거의 목 한 개를 갈라 버렸다. 2m에 머리 두 개 달린 기괴한 휴거가 단숨에 바닥에 고꾸라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쓰러졌던 놈이 발목을 붙잡았다.
‘아직 살아 있다?’
목이 잘려도 쉽게 죽지 않는 놈들이다. 재생력이 좋아 목숨 한 번 튼튼한 녀석들. 황급히 발을 빼며 발목을 붙잡은 놈의 팔목을 자른 그때, 팔까지 잘린 놈이 남은 머리로 울음을 터트렸다.
황급히 놈의 남은 목까지 마저 벴지만 그새 이규복의 주변으로 머리 두 개 달린 것들이 슬금슬금 모여들기 시작했다.
마치 스모 선수를 연상케 하는 항아리 체형을 가진 휴거들이 같은 울음소리를 내며 두 발을 뒤뚱이며 달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뒤뚱거리는 건 느낌뿐이었고 체감 속도는 무척 빨랐다.
곧 스쳐 가는 놈의 커다란 방망이. 4m에 달하는 검붉은 방망이는 당장 피를 흠뻑 적실 것같이 휘둘러졌다.
부웅!
정면에서 달려온 놈의 어깨를 한 번 타고 위로 점프한 탄력으로 빙글 회전한 이규복이 회전력을 활용해 대검을 내리찍으려던 그때, 얼굴 위로 그늘이 졌다.
순간 느낌이 싸늘했다.
그건 그간 수많은 전투를 통해 이규복이 쌓아 온 본능적 직감!
‘어서 검을 거두고 피해야……!’
쐐액!
하지만 검을 거두기 전에 이미 몸에 커다란 방망이가 날아들었다.
퍼어억!
갑자기 날아온 7m에 달하는 방망이가 정확히 이규복의 등을 타격했고 이규복이 실 끊어진 인형처럼 힘없이 바닥을 굴렀다.
-크르륵……!
그리고 나타난 휴거 하나.
놈은 뒤뚱거리는 휴거들과 같은 종처럼 보였지만 머리 하나가 더 많았고 방망이도 다른 놈들 것보다 두 배는 컸다. 쓰러져 있는 이규복을 보며 놈이 기괴하게 웃었다.
기분이 좋은 것이다. 이규복은 놈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힘겹게 일어났다.
퉤.
입 안 가득 차오른 핏물을 뱉으며 방금 맞은 부위를 만져 보았다. 죽을 것 같진 않았지만 타격이 상당하다. 그냥 물로 볼 놈은 아니었다. 거기에다 포위하며 다가오는 십여 마리의 같은 종의 휴거들까지…….
‘젠장! 산 넘어 산이군.’
그사이 이규복을 날려 버린 휴거가 성큼 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힐끗 허공을 쳐다본 이규복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절망적인 상황과는 괴리감이 있는 웃음이 들렸다. 곧이어 이규복이 검에 묻은 휴거의 피를 털어내며 웃었다.
“오셨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