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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자동보상-20화 (20/248)

# 20

#20.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나머지가 다 그랬다. 모두 귀에서 피를 흘리며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었다.

이윽고 소리가 잦아들자 주변에는 스무 마리나 되는 휴거들이 가득했다.

‘아…….’

도훈은 절망했다. 더 이상 총을 쥐어도 소용이 없다. 이 순간 정적을 깨고 누구라도 움직인다면…….

“으악!”

결국 소대원 중 한 사람이 겁을 집어먹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스무 마리나 되는 휴거들이 도망가는 소대원에게 닥치는 대로 달려들었다. 뛰고 있던 소대원의 머리, 팔, 다리를 모두 베고 물어뜯었다.

‘맙소사…….’

이를 부딪칠 정도로 덜덜 떠는 도훈에게 여자 산행객이 다가와 말했다.

“제가, 제가 유인할게요.”

“네?”

“제가 유인하면 다른 분들 모시고 뛰세요……!”

그 순간 마주한 그 여자의 얼굴엔 결연함이 가득했다. 대체, 이런 용기는 어디서 나는 거지? 라고 생각한 그 사이, 산행객 여자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누구도 여자가 유인한 동안 다른 쪽으로 뛰지 못했다. 모두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굳어 버린 것이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무서워서 못 가겠어요.’

도훈이 줄줄 눈물을 흘리며 차마, 여자가 죽는 걸 못 보겠다고 생각해 고개를 돌린 그 순간.

퍼엉!

하늘이 울었다.

아니, 거대한 바람이 그들의 위로 불어오고 있었다.

‘저, 저게 뭐야?’

도훈은 날아드는 풍압 때문에 한 손으로 눈을 반쯤 가린 채 희미한 시선으로 착지하기 시작한 물체를 올려다봤다.

숲 사이로 스며든 햇빛을 등에 진 채 착지하기 시작한 그 물체는…….

은빛 기체였다.

그 은빛 기체가 나타나자 풍압에 의해 숲의 나뭇잎들이 회오리치며 흩날렸다.

휴거들이 은빛 기체의 등장에 키에엑, 울며 날아올랐다.

바닥을 향해 내려앉는 기체와 솟구치는 휴거들.

십수 마리의 휴거가 은빛 기체를 향해 쇄도했다.

‘안 돼!’

저 기체는 단숨에 산산조각 날 것이다.

도훈은 그대로 고개를 옆으로 돌려 버렸다.

희망이 사라질 게 두려웠다.

하지만 결과는 도훈의 예상을 한참 벗어났다.

은빛 기체의 날개가 마치 배의 돛이 방향을 바꾸듯, 한 데 모여 위로 솟아오르자 가뜩이나 빨랐던 은빛 기체가 가속을 시작했다.

전광석화 같은 가속이었다.

전투기가 휴머노이드의 차림새로 나타난 것 같다.

부앙!

기체가 섬광처럼 날아가 십수 마리의 휴거를 스쳐갔다.

아니, 스쳐간 게 아니었다.

기체에 접근한 휴거들이 전부 베이고 있었다.

기체에서 뻗어진 묵빛의 철권이 날아가는 속도 그대로, 팔중 칼날을 휘두른 것이다.

휴거들은 반항했다. 날아가는 방향을 바꿔 사각지대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은빛 기체는 매끈한 기체를 움직여 세 개의 날개로 호선을 그리며 방향을 바꿔 갔다.

휴거들의 톱니바퀴같이 매섭게 돌아가는 양손이 좌우, 동서남북 날아다니는 은빛 기체를 감히 손도 대지 못했다.

오히려 베이고 찢겨 나가고 묵빛의 철권에서 뻗어져 나간 극광極光에 날개가 통째로 날아갔다.

후두두둑.

그리고 추풍낙엽이 되었다.

그토록 섬뜩하던 휴거들이 위압적인 은빛 기체에 힘도 못 쓰고 추락하고 있었다.

쾅! 쾅! 쾅!

도망치던 산행객 여자의 등 뒤로 휴거들이 하나둘씩 땅에 처박힌다.

그제야 이상한 걸 깨달은 산행객 여자가 뒤를 돌아봤다.

그녀의 눈에 놀라움이 서렸다.

“아…….”

너무 무서웠던 그녀가 털썩 주저앉았다.

동시에 서서히 속도를 줄이며 하늘 아래에서 내려오는, 태양빛이 반사되어 번쩍이는 은빛 기체에 그녀는 눈이 부셔, 눈을 감아 버렸다.

그사이 착지를 마친 은빛 기체가 저벅 소리를 내며 가까이 다가왔다.

다가온 은빛 기체가 눈부신 빛을 가려주자 비로소 다시 눈을 뜬 그녀의 눈동자에 헬멧이 분리된 찬영의 모습이 비쳤다.

그 눈동자를 보자 그녀는 왈칵 눈물이 흘러나왔다.

꾸역꾸역 참았던 게 터져 버린 것이다.

조각난 휴거의 시체 사이로 여자의 울음소리만 넓게 퍼졌다. 그동안 찬영은 그녀가 괜찮은지 확인만 하고 다시 허공을 응시했다.

찬영에게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마침 등 뒤에서 붉은 갑주를 입은 이규복이 다가왔다.

“여자를 울리면 못 씁니다.”

이규복이 우두커니 서 있던 찬영 대신 훌쩍이는 여자 산행객을 부축해 일으켰다.

“괜찮을 겁니다, 이제.”

이규복의 따뜻한 말에 여자 산행객이 어렵게 일어나며 고개를 숙였다.

“흑, 고맙습니다.”

여자는 그러면서 찬영을 힐끗 쳐다봤다.

찬영이 다른 곳을 바라보는 통에 눈이 마주치진 않았지만 그녀는 찬영의 방금 전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죽음 끝에 찾은 희망은 그만큼 강렬했고 나락 속에서 지푸라기를 잡은 기분이었다.

너무 고마웠다.

그래서 묵묵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됐다. 그녀가 그 생각을 하는 사이 이규복이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저기……?”

“아, 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곧 거울이 나타날 거예요. 그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네?”

거울이라니? 무슨 소리인지 몰라 눈을 크게 뜬 그녀에게 이규복이 설명 대신 누군가를 불렀다.

“수향 씨!”

마침 숲 속에서 무표정한 오수향이 나타났다.

비행이 가능한 찬영과 다수의 사람을 곧장 이송시킬 수 있는 오수향, 그리고 데스크를 맡은 오 중령과 직접 교신하는 팀장 이규복까지.

이렇게 세 사람이 험난한 산에 고립된 생존자들을 구출하는 임무에 급파된 것이다.

이규복의 나머지 팀은 저지선 바깥으로 이동해 북한산 바깥으로 이동하려는 휴거들을 제압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조용하게 팀에 적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더 이상 독설로 분란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독설을 고친 건 아니었다, 단지 말 수가 급격히 줄었을 뿐.

그러면서 괜히 찬영의 눈치를 보기 일쑤였다.

삼촌인 오 중령에게 팀 해체에 일조하지 말고 경거망동 말라는 주의를 단단히 들은 탓이다.

이번에도 힐끗 찬영의 동향을 살핀 그녀가 공터 위에 미러 마법을 펼쳤다.

-미러 텔레포트

오망성을 그린 수인과 함께 익숙한 거울이 나타났다.

거울은 용마 부대가 지키고 있는 저지선 바깥으로 연결되었다. 안전한 구획으로 향하는 지름길이었다.

이규복이 생존자들을 친절히 안내했다.

“자, 이리로 들어가세요. 예. 자, 다치신 분들부터…….”

모두들 하도 겁을 먹어 기진맥진해했다.

들어가는 사람의 태도는 천차만별이었다.

끊임없이 고마워하는 사람도, 동료를 잃어 넋이 나가 있거나, 믿기지 않는 현실을 부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그들을 잠시 안타깝게 보던 찬영도 자기 일을 도맡았다.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휴거의 동태를 살핀 것이다.

찬영이 우두커니 서서 주위를 돌아봤다. 눈을 돌리자 처음에는 휴거의 시신이 보였다. 시신 위엔 어김없이 놈의 이름이 보였다.

한데 달라진 게 있었다.

-베트킬

-가치 : 1,020

‘음?’

싱거운 녀석들이었다고 생각할 때쯤 가치라는 글씨가 함께 들어왔다.

가치 측정이 별을 대신하게 된 것이다.

거기다 이젠 휴거 녀석들 뿐 아니라 사람들의 가치 측정까지 가능해졌다.

오수향은 북한산에서 합류할 때 본 그대로 1,900선이었고 평범한 사람들의 수준은 120 언저리를 웃돌았다.

그중 여자 생존자가 평균치보다 400이 더 높아서 조금 놀라긴 했다.

그 외 여러 사람을 지나 이규복을 쳐다봤다. 처음 그의 차를 타고 갈 때부터 본 가치 수준은.

‘3,300.’

베트킬 정도는 단숨에 압살해 버릴 정도였다.

‘역시, 높다.’

가치 측정으로 봐도 여전히 그의 실력은 뛰어났다.

그러나 이젠 조금씩 그를 따라가고 있다.

‘현재 내 가치는 3,046. 그와의 차이는 254인건가?’

그 생각을 하자 눈앞에 가치 상세 데이터가 나타났다.

그렇다.

다른 사람들을 볼 땐 총 합산 가치만 보이지만 자신은 다르다. 스스로의 가치 상세 데이터까지 열람할 수 있는 것이다.

-근력 가치 : 22 + 66(F)

-마나 가치 : 400(F)

두 가지 데이터의 개방을 보며 찬영은 눈을 빛냈다.

근력과 마나를 제외한 다른 부분은 전부 미개방 상태였기 때문이다.

F 수준까지 상승해야 개방하는 게 틀림없었다.

아직은 추측이 섞인 생각이지만 근력과 마나가 각각 착용한 장비와 습득한 섬뢰보의 영향을 받은 상태인 걸 고려하면 추측이 사실이 될 확률이 높다.

그러니 이번 전투 혹은 다음 전투를 통해 얻을 장비가 아직 미개방 상태인 다른 능력을 상승시키는 장비라면? 그리고 그로 인해 또 다른 데이터가 개방된다면?

비로소 이 추측은 더 이상 추측이 아닌 확신이 될 것이다.

그럼 다른 미개방 데이터를 개방시키기 위해서라도 다양한 장비들을 착용하거나 능력 상승에 필요한 아이템들을 찾는 것도 생각해 볼 일이었다.

정말…….

‘할 일이 많다.’

절구 제작부터 시작해, 미개방 데이터까지……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수두룩하다는 게 눈앞에 선했다.

하긴, 두 달 전만 해도 겨우 겨우 살아남았던 걸 생각하면 지금의 일은 복에 겨웠다.

이젠 별 네 개짜리 휴거를 눈 깜짝할 새 해치울 만큼 성장한 것이다.

그동안의 노력이 빛을 보는 중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탄탄대로가 되진 않으리라. 찬영에게 삶이 쉬웠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 착실히 준비해야 한다.’

앞에 뭐가 있든 대비하기 위해서, 준비할 기회를 놓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 무기력해지긴 누구라도 싫을 테니…….

찬영은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 * *

그새 생존자 안내를 마친 이규복이 찬영의 곁으로 왔다.

“……새삼 직접 보고도 안 믿기네요.”

찬영이 예상한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렇기에 잠자코 있었다. 칭찬을 받는다고 의기양양해질 나이는 아니었다.

짧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이규복은 경이롭다는 눈빛으로 찬영을 바라봤다.

“혹시 매번 싸울 때마다 이네이트가 하나씩 추가되는 겁니까? 그러지 않고서야 설명하기 힘든 발전이네요.”

“설명드리기엔 상황도, 사정도 여의치 않네요.”

실제로도 그랬다. 생존자들을 무사히 대피시키고 나면 그들의 힘이 필요한 곳으로 한 시라도 급히 이동해야 했다. 이규복도 동의하는 바였다.

“……그럼 됐습니다. 그냥 그런가보다 할게요.”

이규복의 대답이 찬영에겐 의외였다.

‘더 궁금해 할 줄 알았는데?’

그래서 물었다.

“왜, 더 묻지 않으세요?”

“어떻게 갑자기 못 보던 비행체가 생겼는지……?”

“네.”

“이제껏 본 찬영 씨는 무작정 캐묻는다고 자질구레하게 설명할 사람도 아니고……. 딱히, 그런 설명이 필요한 것도 아니죠. 설명 없이도 어차피 찬영 씨나, 나나…….”

이규복이 널브러진 휴거들의 시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같은 목표니까. 아마 그건 다른 사람들도 비슷할 겁니다.”

그렇다. 이규복의 말이 맞다. 어차피 목표야 뻔하다. 인류의 생존. 그리고 뉴게이트의 발생 원인을 밝히고 끝내는 것.

“슬슬 다 끝나 가나 보네요.”

모두를 텔레포트 안으로 들여보내는 걸 본 이규복이 말했다.

동시에 그가 통신을 취했다.

-대피 완료했습니다. 그리고 술 취한 산행객이 하나 있는데요. 아, 네. 그 사람이요. 고립됐던 소대원들 진술 들어 보니 공무집행 방해 맞습니다. 그리고……

중령에게 이야기를 전하고 있던 이규복에게 찬영이 넌지시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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