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
#18.
-박스 동시 개봉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그로 인해 박스 조합이 가능해집니다. 박스 조합은 박스 다섯 개까지 가능합니다. 박스 조합 시, 박스 개수는 상위 박스 획득 확률을 상승시킵니다(상위 박스 획득 시 박스의 획득 등급은 조합하는 박스들의 최고 등급보다 세 단계 높은 등급으로 책정됩니다).
새로 뜬 창을 읽은 찬영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맙소사, 이건……!’
보상을 정리하는 선에서 끝날 줄 알았건만 한 단계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인 게 틀림없었다.
입을 작게 벌린 찬영이 조용히 눈만 끔뻑였다.
수십 마리의 레드비를 학살한 사람치고는 꽤 순수한 눈망울이었다.
* * *
그렇게 찬영이 박스 보상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던 찰나. 갑자기 병실 문 밖에서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음?’
박스에 집중하던 시선이 자연스레 문 밖으로 향했다.
중요한 순간이라 머릿속이 복잡해 조금 예민해지긴 했지만 내색 않고 문을 주시했다.
‘누구지?’
조용히 문 열리기를 기다리자 곧 ‘드르륵’ 하며 낯익은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찬영의 입에서 흘러나온 의아한 외마디.
“어?”
상대도 찬영의 반응을 예상한 걸까?
멋쩍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또각, 또각.
힐을 신은 여자는 과일 바구니를 든 채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문과 문턱 사이에 오도카니 서 있었다.
들어오기도 안 들어가기도 애매한 그런 위치.
그녀의 마음 상태가 그녀의 의지와 무관하게 자연히 흘러나온 것이기도 했다.
‘가지가지 하는군.’
보다 못한 찬영이 운을 뗐다.
“괜찮으니, 들어오세요.”
오수향은 그제야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였다.
또각, 또각.
오수향은 안으로 들어와 가져온 과일 바구니를 탁자에 올려놨다.
“깨어났단 소식 들었어요.”
찬영은 그 말에 꽤 놀랐다.
‘깨어난 지 얼마 안 됐는데 어떻게…….’
그러면서 시계를 보자, 시계 초침은 저녁 여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것저것 하다 보니 금세 두어 시간이 지나 버린 것이다.
깨어났다는 소식이 충분히 들어갈 법한 시간이기는 하다.
물론 그렇다고는 해도…….
‘조금 빠른 것 같은데…….’
깨어나길 주의 깊게 기다린 사람이 아니라면 이렇게 빠르게 면회를 온 게 좀 의외였다. 아님 주의 깊게 기다렸거나…….
“혹시 깨어나길 기다린 겁니까?”
긴가민가하며 묻자 오수향이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제대로 정곡을 찌른 모양이었다.
“그래요, 기다렸어요. 그럼 안 돼요?”
찬영은 당당한 그녀의 대답에 빤히 그녀를 쳐다봤다.
사실 안 될 건 없다. 다만 피차 다정히 앉아 얘기할 일이 뭐가 있을까 궁금할 뿐…….
말도 꺼내지 않고 어정쩡하게 서 있는 그녀에게 찬영이 먼저 물었다.
“그럼, 무슨 용건으로?”
“빚도 갚을 겸……. 할 말도 있고…….”
“빚이라면……?”
아아, 저번의 버스 안에서 떨어질 때를 얘기하는 모양이었다. 그거라면 빚 진 게 아니라고 자기 입으로 얘기했을 텐데?
‘설마…….’
“계속 마음에 담아 두고 있던 겁니까?”
그리고 그 추측이 맞았다. 오수향은 이곳에 올 때까지도 그날의 일이 빚처럼 느껴진 것이다.
“그러게, 왜 남의 일에 신경을 써요? 거슬리게.”
찬영은 한숨을 푹 쉬었다.
이 사람은 기본적인 대화 예절 상식이 없는 것 같았다.
‘그냥 고맙다고 하면 될 걸, 굳이 아픈 사람 앞에 두고 뭘 하자는 건지…….’
워낙 괄괄한 성격이라는 것을 저번에 충분히 겪었기에 적당히 이해는 해 주고 있었지만, 방금 중요한 일을 미뤄 두고 그녀에게 시간을 할애하는 터라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고맙다는 인사를 바라고 한 것도 아닙니다만, 병실에 누워서까지 타박을 듣고 싶진 않네요. 그러니까…….”
단호함이 깃든 찬영의 눈빛이 어느새 서늘해졌다.
“빚 다 갚았으면 그만 가셔도 좋습니다. 거슬리니까.”
미동 없이 차가워진 찬영의 눈동자는 무척 고요하고 차분했다. 그렇기에 오수향도 막 뭐라 하려다 말고 할 말을 잃어버렸다.
무슨 할 말이 있겠나. 시비도 자신이 걸었고 찬영은 그에 맞게 충분히 정중했다. 근거라도 없으면 좋으련만 찬영은 명확하고 깔끔하게 선을 그었다.
그러니 수향은 멋대로 되지 않아 괜히 화가 났다. 주먹을 불끈 쥔 그녀가 발끈했다.
“누군 오고 싶어서 온 줄 알아요?”
찬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 말은 누가 보냈다는……?”
진짜 이해가 가지 않았다.
‘굳이 왜?’
그리고 그 의문에 대한 대답이 딴 곳에서 들려왔다.
드륵.
곧 병실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찬영의 예상을 뛰어넘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중령 군모를 쓴 175cm의 건장한 체격을 가진 중년 군인이었다.
“오태조 중령입니다. 반갑습니다.”
저벅, 저벅.
군화 소리를 내며 다가온 그는 군모를 벗으며 짧게 목례를 했다.
예상치 못한 손님에 찬영은 어안이 벙벙했다.
‘저 사람은 또 누구지?’
그러는 사이 입술을 고집스레 다물고 있던 오태조가 힐끗 오수향을 쳐다봤다.
“쯧, 분위기나 좀 풀어 두라고 먼저 들여보냈더니…….”
그녀가 투덜댔다.
“난 자신 없다고 했잖아!”
오태조라 밝힌 중령이 도끼눈을 떴다.
“요, 안 하지!”
그녀가 얼굴이 붉어진 채 외쳤다.
“요!”
찬영은 생각보다 말 잘 듣는 그녀의 반응을 보며 의외라고 느꼈다. 사뭇 놀라기도 했다.
‘저 중령이 대체 누구기에 저 여자가 저렇게 온순한 반응인 건지…….’
찬영이 상황 파악하며 조용히 둘을 바라보고 있자 오태조가 다가와 다시 말했다.
“조카가 폐를 좀 많이 끼쳤다고 들었는데…….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찬영은 그제야 이해했다.
수향에게 이 사각턱의 남자는 꽤 엄한 삼촌인 모양이었다.
“아, 삼촌분이십니까?”
“맞습니다.”
“그런데, 제게 무슨 일로……?”
오수향은 그렇다 쳐도 오수향의 가족까지 봐야 하는 이 상황은 대체…….
이해가 안 가는 찬영의 눈빛을 읽은 듯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같이 삭막한 얼굴의 오태조가 히죽 웃었다.
눈이 반달 모양이 되자 차가운 인상과는 정반대의 호감 이미지였다.
“……궁금해 하시니 바로 본론을 들어가야겠군요.”
“네.”
그게 더 낫다. 이런 어색한 상황에선 무슨 말을 해도 이 여백이 쉽게 가시질 않는다.
찬영의 대답에 오태조가 다시 운을 뗐다.
“V.O.의 이규복 대리에게 들으셨겠지만 이번 뉴게이트로 인해, 시작된 도심 테러로 인해 인명 피해가 상당했습니다.”
“예.”
“그래서 펼친 작전 구획 중 서대문구는 서른 번째로 빨리 작전이 완료된 구획 중 한 곳입니다. 해서 저희와 V.O.측에선 그 작전 팀 구성원을 그대로…….”
찬영이 덧붙여 물었다.
“유지하겠단 말씀이십니까?”
팀을 그대로 유지해서 앞으로의 작전을 수행하는 게 어떻겠냐는 부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찬영의 생각대로 이미 정부 즉, 군에선 V.O.와 긴밀한 협조가 이뤄지고 있는 것 같았다.
“예, 그렇습니다. 그래서 V.O. 측의 양해를 구해 좋은 소기 성과를 거둔 군, V.O. 합동 팀들은 그대로 유지하기로 합의 결정하였습니다. 물론 펌과 군 소속 정규 각성자들에 한해서요. 그 외 프리랜서나 비정규 각성자들은 따로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결국 비정규나 프리랜서처럼 펌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는 각성자들은 당장 제외됐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어딘가에 소속된 각성자가 아니다 보니 행동반경이 자유로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오태조가 찬영의 동의를 받으러 직접 온 것이다. 그 뜻을 헤아렸기에 찬영이 오태조에게 물었다.
“그럼 저만 동의하면……?”
“예, 이규복 팀장의 팀은 전부 그대로 유지됩니다.”
그 말에 찬영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사실 이규복만 생각하면 나쁘진 않았다.
합당한 근거만 있다면 개별 행동까지 가능하다 허락하는 팀장이다. 운신의 폭이 넓어지니 이규복과 움직이는 건 여러모로 찬영에게도 만족스러웠다.
그때 보았던 다른 각성자들도 모두들 이규복을 신뢰하고 움직이는 게 틀림없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그렇게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줄 리 없다. 기본적으로 이규복의 신뢰란 밑거름이 있는 것이다. 다만 걸리는 건…….
‘저 여자.’
“…….”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목숨을 서로 기대려면…….’
신뢰, 그리고 충분한 대화와 교감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
“거절하겠습니다.”
하지만 오태조는 생긴 것 그대로 완고한 사람이었다.
포기를 모른다고 할까?
“그럼 거절 받고 추가 제안하겠습니다. 조항을 살펴보니 프리랜서에게는 V.O.의 최고급 장비에 대한 권한이 누락되어있더군요. 펌 측 일원이 아닌 이상 최고급 지원을 모두 받는다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겠죠.”
“네, 알고 있습니다.”
찬영이 담담히 대답했다.
설립 명분이야 어찌 되었든 V.O. 또한 돈이 되지 않으면 회사가 문을 닫아야 한다. 그러니 계약상 언제든 관둘 수 있는 여지가 있는 프리랜서에게 최고급 지원을 보장해 준다는 것은 그들의 입장에서 큰 손해다. 찬영도 그 부분을 모르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알면서 계약서에 서명했다.
이유?
어차피 자신에겐 자동으로 획득되는 무수히 많은 장비들이 있었다. 굳이 그들의 지원이 필요 없었다. 하지만 그걸 모르는 오태조는 정규 소속 각성자들만 받는다는 최고급 지원을 해 주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만약 찬영에게 자동 획득 아이템들이 없었다면 덥석 물고도 남았을 제안이었다.
하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다. 가만히 듣던 찬영은 고개를 저었다.
“허……!”
무조건 찬영이 받아들일 거라 생각했던 것인지 그의 마음속 탄식이 실제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만큼 방금 제안에 공을 크게 들였단 뜻이리라.
사실 찬영의 활약을 라이브 캠으로 보지 않았다면…….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몇 번을 물어 보지도 않았을 터였다.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었는지 오태조도 빙빙 돌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는 군인. 국가의 득이 되는 건 기필코 얻어 내는 것이 그가 주로 하는 일이었다.
“그럼 대체 뭘 들어드려야 수락하실 겁니까?”
대놓고 물어봤으니, 찬영도 오래 시간 끌고 싶지 않았다.
“팀을 유지하는 것은 상관없습니다. 다만 언제든 개별 행동을 할 수 있는 독립권을 부여받길 바랍니다. 또 V.O.와 정부 독점으로 획득하기로 되어 있는 휴거 부산물 중 제가 원하는 품목들을 극소량이라도 얻었으면 합니다.”
찬영은 사실 그들의 최고급 지원이 필요 없었다. 지원보다는 그들이 연구용으로 획득하는 부산물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들이 독점으로 가져간 여러 부산물들 사이로 도안서를 완성할 재료들이 있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원래는 그걸 위해 이규복에게 넌지시 제안해 볼 생각이었지만 이렇게 기회가 왔으니 생각을 바꾼 것이다.
이런 의중을 모르는 오태조는 그냥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왜 최고급 지원을 내버려 두고 굳이 스스로 멍청한 짓을 하겠다는 건지, 원.’
“그 질퍽한 부산물들로 대체 뭘 하려고 하십니까? 연구용이 아닌 이상 비린내만 잔뜩 나는 핏덩이들일 뿐인데.”
“여러 방향으로 준비해 보고 싶습니다. 부산물을 통해 휴거의 구조들을 복습, 혹은 예습 할 수 있으니까요. 말씀해 주신 대로 전 프리랜서라 늘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 하거든요.”
굳이 가진 바 능력을 자랑하듯 떠들어 대기도 싫었고, 아직 스스로 정립되지 않은 능력에 대해 설명하는 것도 원치 않아 한 대답이긴 했지만, 일부는 진심이기도 했다.
찬영의 대답을 들은 오태조가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흐음, 알겠습니다.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보고해 보고 확답을 이 자리에서 드리겠습니다.”
“예.”
오태조는 생각을 마치면 그걸 그대로 행동에 옮기는 행동파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부와 통화가 끝난 오태조가 찬영에게 다가와 말했다.
“상부에서도 O.K.라고 합니다. 거래합시다. 대신 우리도 조건이 있습니다. 가져갈 수 있는 양은 양평 군수창고에 모일 부산물의 0.001% 정도입니다. 물론 이것도 매달에 한 번씩인데, 괜찮겠습니까?”
꽤나 빡빡한 조항이었다. 하지만 세계정세를 놓고 보면 그리 살벌한 조항도 아니었다. 이미 전 세계에 똑똑하다고 하는 학자, 연구원들은 모조리 휴거 연구에 달라붙고 있다.
실제로 V.O. 측에선 휴거와 기계 장치 등의 조합을 통한 여러 고급 장비들의 계획을 세우고 그걸 실행으로 옮기는 중이었다. 점차 커져 가는 휴거 산업체 속에서 정부와 V.O.가 휴거 부산물에 대한 욕심을 내는 건 당연했던 것이다.
오태조 중령이 자신의 제안에 대해 긍정적인 뜻을 내비치자 찬영은 시원하게 승낙했다.
자신이 모든 뉴게이트에 자리 잡고 있을 순 없으니, 정부에서 부산물을 추가로 얻는다면 여러 재료 획득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하루빨리 절구를 완성시키고 싶은 마음이 작용했다.
그리고 그 정도면 오수향과 팀을 이루는 대가로 충분했다.
어차피 개별 행동에 대한 독립권까지 부여 받았으니, 필요에 따르면 언제든 팀과 다른 행동을 해도 여러 귀찮은 일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오태조도 한시름 덜었기에 아까보단 덜 경직된 눈빛으로 말했다.
“……이에 수반되는 계약서는 이규복 대리를 통해 올 겁니다. 서명하시면 됩니다.”
“네.”
“그럼.”
가벼운 눈인사를 건넨 오태조가 찬영을 두고 병실을 빠져나갔다.
뒤이어 쫓아 나가던 오수향이 아직 못 다한 말이 있는 듯 벙긋거리며 뒤돌아보자, 눈이 마주친 찬영의 눈빛은 이렇게 말하는 듯 했다.
-다음 번 면회는 사양합니다.
왠지 면회를 오고도 계속 찜찜해지는 오수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