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에필로그 (6)
프랑지아의 수도, 뤼미에르.
대통령궁(구 프랑지아 왕궁)
“어서 오시죠, 아키텐 백작. 하하, 바쁘신 중에 초대에 응해주어서 고맙습니다.”
프랑지아 대통령 모리스 탈레랑은 살갑게 맞이해왔다.
크리스틴은 우아하게 부채를 팔랑이다가 착- 소리나게 접고는 그에게 까닥 목례하곤 답했다.
“환대 감사드려요, 대통령님.”
“자, 이쪽으로. 역시나 커피로 하시겠습니까?”
“사양하지 않도록 하죠. 대통령님이 구비해두신 물건이라면 더더욱 품질이 좋을 테고.”
“흠, 흠. 너무 사치라고 생각하지는 말아주십시오. 혀가 즐거워지면 기분이 좋아지고, 기분이 좋아지면 부드러워지는 것이 사람 아니겠습니까. 업무상 특성이지요, 하하.”
탈레랑의 너스레에, 크리스틴은 자리에 앉더니 슬며시 미소 지으며 답했다.
“그런 의도로 말씀드린 것은 아니었는데요.”
탈레랑은 쓴웃음을 지으며 두 손을 들어올렸다.
“아이고, 조금만 봐주십시오, 백작님. 죽겠습니다. 비교 대상이 검소의 영역을 넘어선 여왕 폐하시다보니 워낙 물어 뜯겨서 반사적으로 방어부터 나가는군요.”
“흐음.”
“그 중에서도 가장 두려운 상대는 백작님과 후작님 아니겠습니까. 너그러이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크리스틴은 픽 웃으며 반박하지 않은 채, 준비된 질 좋은 커피의 향을 음미했다.
잠시 커피를 즐기는 시간이 흐른 후, 탈레랑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최근 아키텐 백작님께서 담당하시던 일부 영역을 매각이나 분리해주신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별 말씀을. 저로서도 과도하게 집중된 업무가 부담이어서 한 조치인 걸요.”
크리스틴은 여상하게 답했지만, 탈레랑은 그게 그저 예의상의 답이라는 것을 알았다.
무엇보다도, 눈앞에 있는 여자는 국민의회 의원이자 프랑지아의 금권의 지배자이면서, 국가정보국과 해군을 전부 빈틈없이 관리해온 괴물같은 역량의 보유자니까.
탈레랑은 헛기침을 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단순히 빈말이 아닙니다. 전시에 불가피하게 집중되었던 부분을 자진해서 분리시켜 주셔서 그동안 우려하고 있던 의원들도 마음을 놓았으니까요.”
최근 크리스틴은 해군 제독 직책과 국가정보국 수장 자리에서 사임했다.
프랑지아 내의 군수와 물류를 전부 책임지던 아키텐 상단을 여러 가지 사업부로 쪼갠 뒤 일부는 국영기업으로 매각하기도 했다.
국민의회나 정치인들이 보기에 그전에 아키텐 백작이라는 개인이 가지던 영향력은 우려를 넘어 공포의 영역에 달하고 있었으니 크게 안도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사실상 혁명군을 지배하다시피 하는 라파예트 후작의 영향력보다도, 아키텐 백작이 프랑지아를 쥐고 흔들 수 있는 영향력이 더 큰 위협이라고 평가될 정도였으니까.
“그렇군요. 딱히 딴 마음을 품은 적은 없었는데요.”
느긋하게 커피를 음미한 크리스틴은 작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러나 탈레랑은 그것만으로도 등줄기가 쭈뼛 곤두서는 것 같았다.
“물론 우리도 아키텐 백작님을 그런 쪽으로 의심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개인의 호의에 기대어야만 유지되는 상황이 정상은 아니다 보니 우려한 것뿐이지요.”
“흐음, 그렇죠.”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칠흑 같은 여인의 모습에, 탈레랑은 속으로 울상을 지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대통령에겐 달아날 곳이 없었다. 그가 정부 수반이고, 감히 아키텐 백작을 건드릴 수 있는 것도 당연히 그밖에 없으니까.
그게 그녀의 독주를 제재한다기보다,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뽑는 건 아닌지 노심초사하며 협조를 간청해야만 하는 처지라는 것이 문제지.
애초에 전쟁 때부터 아키텐 백작에게 진 빚은 여왕 에실리스테가 물러나고 그가 대통령으로서 2번째 임기를 수행 중인 지금까지도 다 갚지 못했다.
아키텐 백작이 압박하면 정부가 파산선언을 걱정해야할 판에 누가 그녀에게 함부로 대할 수 있겠나.
탈레랑은 위장약이 필요하다고 느끼며 입을 열었다.
“오늘 이렇게 모신 것은 한가지 더, 아키텐 백작님의 협조가 필요한 사안이 있어서입니다.”
“뭔가요?”
“……크흠, 크흠.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마족들에게 지운 노역의 부담을 점진적으로 완화해 나갈 필요성이 있습니다.”
탈레랑은 말하면서도 불안했다.
연합국은 어비스 코퍼레이션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 어비스 제도에 군정을 세우고 그들을 노역에 동원해왔다.
말이 좋아 노역이지, 사실상 마족들을 전부 노예화 시킨 거다.
개중에서도 특히 성전에 가장 크게 기여한 아키텐 상단은 엄청난 지분을 받았고, 당연히 사업장에 소유한 마족 노예들도 가장 많다.
크리스틴은 아무 말 없이 커피만 음미하고 있었고, 탈레랑은 입이 바싹 마르는 기분을 느끼며 말을 이어 나갔다.
“물론 악마들은 큰 죄를 저질렀고, 그에 따른 노역을 이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고급 인력인 악마들을 헐값에 착취하고 있는 상황은 오히려 프랑지아의 경제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지요.”
“왜 그렇게 되나요? 아키텐에서는 프랑지아의 내수경제 붕괴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어비스 제도에서의 생산품도 자국 내 동급 상품과 비슷한 금액으로 판매하고, 남는 부분은 수출하며 풀리는 수량도 조절하고 있는데요. 조약에 따른 근로환경도 준수하고 있고.”
대신, 노예 악마들을 써서 엄청나게 낮은 원가로 인한 이득은 그대로 아키텐 상단으로 들어간다.
괜히 사업가들이 어비스 제도에서의 사업장을 매입하려고 혈안인 것이 아니며, 그중에서도 독보적인 지분을 차지한 아키텐의 자본 총액은 이미 프랑지아 전체 총생산에 준하는 것이 아니냐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다른 사업가들은 불만이 나오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야말로 규격 외의 거대 기업에게 견제가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물론 그걸 명분으로 내걸어서야, 아키텐에서는 그럼 당장 차관을 다 갚으라고 할 테니 그런 이야기로는 씨알도 먹히지 않겠지.
“크흠, 크흠. 아시겠지만,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들은 이미 다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종족 전체에게 과도하게 무거운 짐을 지운 것이 부당하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실제로도 당장은 생존을 위해 동의했다지만, 계속 이런 사태를 이어가다간 언젠가 다시 분쟁의 소지가 될 위험도 있지요.”
실제로 전쟁의 참상이 지나가고, 드론의 공포가 어느덧 이야깃거리가 되어가자 슬슬 저런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나 어비스 제도에 파견된 연합군정의 소속원들이나, 어비스 제도에서 사업장을 운영하며 악마들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며 교류를 가진 이들 사이에서.
개중에서 가장 목소리를 키우고 있는 것이…….
“……데미앙 드 미르보 총독도 강력하게 처우 개선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크리스틴은 픽 웃었다.
지젤 다비에게 고백했다가 차였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후, 데미앙은 서큐버스들의 수장인 레아에게 위로를 받은 모양이다.
그러더니…….
-역시 현실 여자는 위험해! 꿈속의 여자가 최고야! 서큐버스가 최고라고!
……라는 기괴한 소리를 하기 시작했지.
이 보고를 받은 크리스틴은 진지하게 데미앙이 마족에게 홀려 타락한 것을 의심하여 에리스를 불렀으나, 친애하는 성녀께선 굉장히 한심하다는 얼굴을 하고선 그의 정신에는 어떤 종류의 간섭도 가해지지 않았다고 인증해주셨다.
그러니까, 마음에 담은 여자에게 차이더니 서큐버스에게 위로받고 진심으로 홀딱 반한 나머지 적극적으로 마족들의 처우 개선을 외치기 시작한 거다.
이번만큼은 크리스틴도 피에르의 평가에 지극히 동의했다.
‘저런 걸 프랑지아의 대표 명장이라고…….’
크리스틴은 느긋하게 커피를 음미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마족이 독립전쟁이라도 터트리면 큰일이니, 안건으로 올리시면 도와드리도록 하죠.”
“저, 정말이십니까?”
반색하는 탈레랑에게, 크리스틴은 슬며시 입가를 비틀며 덧붙였다.
“대신 한시적인 면세 혜택을 받도록 하죠.”
탈레랑은 바로 우거지상이 되었다.
“아니, 솔직히 톡 까놓고 말해봅시다, 백작! 지금 가진 재산만 해도 프랑지아 전체를 살만큼 있잖습니까, 예? 무슨 돈이 더 필요해서 그러시는 겁니까?”
“상인은 손해 보는 장사는 하지 않아요. 이것도 단기적으로나 이득이지, 장기적으로는 손해인 걸 봐드리는 겁니다. 제가 왜 봐드리는 건지는 아시리라 믿어요.”
“크흑…….”
결국 또 라파예트 후작이나 성녀가 부탁해놔서 들어주는 거겠지.
하지만 아키텐 백작의 말대로, 이 상태를 방치해뒀다간 언젠가 문제가 터지고 말 일이다.
이렇게 상대가 말이 통할 때 바로잡지 않으면, 나중에는 손 쓸 수조차 없게 될.
그러나 그 부담을 자신의 임기에 전부 져야 한다니.
심지어 전임자는 누구보다 국민에게 사랑받는데도 군말 없이 권력을 내려놓고 가 칭송받은 성녀왕이고, 그의 감시자는 이름만 들어도 살벌한 그 피에르 드 라파예트다.
탈레랑은 다시 한번 간절하게 위장약을 찾았다.
* * *
잠시 뒤.
크리스틴은 하루의 일정을 끝마치고, 마차를 타고 저택에 당도했다.
“어서 오십시오, 마님.”
후덕하게 배가 나온 늙은 집사, 듀몬트가 정중히 인사하고-
“어서 오세요, 어머니.”
“엄마!”
크리스틴은 허리를 숙여 그녀에게 달려드는 레온과 플레르를 안아주었다.
“아이고, 플레르 아가씨. 예법이…….”
“그치만 집에선 편한 게 좋은 걸. 엄마는 엄마야, 그렇죠 엄마?”
천진난만한 천방지축 딸아이의 칭얼거림에, 크리스틴은 쿡쿡 웃어주기만 했다.
“어머니, 오늘도 업무 고생하셨습니다.”
“고마워, 레온. 수업은 잘 받고 있니?”
“네, 오늘은 역사와 수학을 배웠습니다.”
나이에 비해 얌전하고 책이나 실내를 좋아하는 장남 레온.
“엄마, 나 가스통 아저씨한테 검술 배우면 안 돼? 가르쳐달라고 졸랐는데 부모님 허락 받아야 된대!”
반면에 아주 활기가 넘치다 못해 기사의 피를 물려받은 듯한 딸 플레르.
크리스틴은 매번 적응이 안 되는 대조적인 남매에게 어색하게 웃어주었다.
“으음, 아버지한테 허락 받으렴.”
“그럼 엄마는 허락한 거야?”
“……어?”
“아빠한테만 허락받으면 엄마는 허락해주는 거야?”
크리스틴은 당황했지만, 아이가 말간 눈망울 가득 기대감을 불태우며 얼굴을 들이미는 통에 저도 모르게 끄덕여버렸다.
“앗싸, 신난다! 아빠는 어떻게 꼬시지……. 으히히”
“……귀여움을 무기로 삼다니, 기사를 꿈꾸는 것치곤 너무 비겁하잖아, 플레르.”
“이런 건 융통성이라고 하는 거야, 애늙은이 오빠.”
“뭐, 뭐? 야! 너 말 다했어!?”
크리스틴은 순식간에 점잖음이 증발해버리고 금새 애들처럼 투닥대기 시작하는 두 아이의 모양새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미소지어 버렸다.
피에르가 옳았다.
아이들은 그녀가 아키텐의 검은 마녀라고 불리든, 뭐라고 불리든 신경 쓰지 않는다.
아무런 편견 없는 순수한 아이들은 자신들이 보는 것만으로 어머니를 판단했고, 기꺼이 그녀를 사랑했다.
“헛. 어이쿠, 내 정신 좀 봐. 마님, 그러고 보니 손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바로 방금 전에 도착하셨죠.”
나이 지긋한 집사의 말에, 크리스틴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답했다.
“손님?”
* * *
크리스틴이 응접실에 들어서자, 뻣뻣하게 앉아있던 지젤 다비가 벌떡 일어났다.
“실례합니다, 아키텐 백작 각하! 사전에 약속을 잡지도 않고 찾아뵌 무례에 용서를 청합니다.”
“편히 앉아 있어도 돼요, 다비 소장.”
크리스틴은 적당히 앉으라고 손짓한 후, 지젤 다비와 마주 앉았다.
“소장이니까, 불필요한 일로 저를 방해하진 않으셨겠죠. 무슨 일인가요?”
지젤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이내 크리스틴에게 깊이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키텐 백작 각하. 제가 실수했습니다.”
크리스틴은 눈을 깜빡였다.
“실수? 뭘요?”
“……루이스 도련님이 저를 마음에 품으셨습니다.”
자못 비장한 말투에, 크리스틴은 살짝 맥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와서 뭘 새삼?
크리스틴의 반응에는 오히려 지젤이 더 당황했다.
“제가 사심을 품은 건 결단코 아닙니다. ……어린 동생이 흔히 품는 동경 같은 거라고 생각해서 확실히 거부하지 않았는데, 그게, 그래서…… 결국.”
크리스틴은 꽤 흥미롭다는 얼굴로 지젤을 바라보았다.
사실 지젤 다비가 정말로 그랬다는 건 크리스틴도 알고 있었다.
전쟁이 다 끝난 후 마침내 루이스가 지젤에게 고백했을 때, 지젤은 5년이 지나도 마음이 변하지 않으면 그때 가서 생각해본다는 식으로 답했다.
루이스가 그걸 크리스틴에게 알리며 각오를 다졌다는 걸 지젤이 듣는다면 기절하겠지만.
아마도 당시 이미 20대 이미 중반을 넘어선 지젤은 루이스의 마음이 으레 부잣집 도련님이 잠시 앓는 사랑 열병처럼 곧 사그라들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무려 10대 때부터 키워온 사랑인 줄은 몰랐나보지.
“루이스가 청혼이라도 했나 보네요.”
다 알고 있던 크리스틴의 여상한 말에 지젤은 다급하게 답했다.
“죄송합니다, 아키텐 백작 각하. 은혜를 원수로 갚으려던 것은 정말로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 냉철하던 참모장교가 완전히 혼비백산한 모습을 보던 크리스틴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루이스가 마음에 안 차나요?”
“아니, 그게 아닙니다! 저는-”
“그럼 문제 없네요.”
“네?”
“루이스는 당신이 좋다고 하고 당신도 루이스가 싫지는 않은가본데, 그럼 일단 만나 봐요.”
지젤은 한동안 입만 뻐끔거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평민 출신입니다.”
“최초의 여성 장군이죠.”
“……식구도 많은데 가난해, 백작 각하의 후원을 받아 살아온 집안의 가장이고요.”
“문제 있나요? 루이스도 돈 잘 버는 마도사고, 아키텐에도 돈은 넘치도록 많아요.”
할 말을 잃은 지젤의 앞에서, 크리스틴은 살랑이던 부채를 착- 소리나게 접더니 내려놓았다.
“물론, 제가 한 짓 때문에 싫은 거라면 루이스를 단념시킬-”
“그건 아닙니다!”
다급하게 답한 지젤에게, 크리스틴은 가볍게 미소지었다.
“지젤 다비.”
“……네, 백작님.”
“고마워요. 제 동생이 저를 원망하지 않고 당당하게 홀로 설 수 있게 된 건, 분명 당신의 덕이 클 테니까요. 그러니 더더욱, 그 아이의 마음을 한낱 어린아이의 감정으로 보지 말고, 대등한 사람으로서 봐준다면 고맙겠어요.”
지젤은 멍하니 있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크리스틴에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송구합니다, 아키텐 백작님. 실례를 범했습니다.”
크리스틴은 픽 웃으며 답했다.
“괜찮아요. 가족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인데, 그 정도는 기꺼이 눈감아주죠. 대신, 제 부탁은 들어주셨으면 해요.”
지젤은 그제야 미소 지을 수 있었다.
“네, 꼭.”
지젤은 그것만으로 모든 고민이 해결되었다는 듯이 홀가분해 보였다.
크리스틴은 그녀의 행동이 루이스에게 도움이 되었기를 바랬다.
어머니의 원수인 그녀를 용서하고 이해해준 동생이 원한 단 하나뿐인 소망에 도움이 되기를.
간절하게.
* * *
지젤 다비가 돌아간 뒤.
겨울의 서늘한 바람이 불어 그녀의 뺨을 발갛게 물들였다.
한때, 크리스틴은 겨울을 싫어했다.
추위 속에 새하얀 눈발이 흩날리고, 생명이 사그라들 때면.
싫어도 18세의 겨울, 하얀 눈 위에 흩뿌려진 피를 떠올리게 했으니까.
그러나 지금 크리스틴은 발코니에 앉아, 느긋하게 와인을 음미하고 있을 뿐이다.
아직은 이렇게 여유로운 시간에 잘 적응이 되지 않는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분 단위로 짜맞추어진 시간표로 움직이며 하루하루를 기계처럼 움직여야만 했고, 그게 당연하다고 여겼으니까.
해군 제독 직책은 리브레의 선장이었던 뤼도빅 뒤헝에게 맡겼다.
한때 크리스틴의 시녀였던 리나는 국가정보국의 수장이 되어 아키텐에서 완전히 독립했다.
그녀가 관리하던 거미줄처럼 얽혀있던 사업들도 그동안 충성을 다하며 헌신해온 이들 중 눈여겨 봐온 자격 있는 이들에게 분배하고 맡겼다.
그들 중 상당수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아키텐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겠지만, 그거야말로 크리스틴이 바라는 일이었다.
피에르가 바라던 모든 일들을 이뤄낸 지금, 불필요한 힘을 계속 쥔 채 적을 만들 이유가 없다.
크리스틴은 그녀의 아이들에게 지키는 것만도 버거운 짐을 쥐어주느니, 차라리 그들의 손에 쥘 수 있는 것을 얻어내는 법을 가르치길 원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런 시간을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크리스틴은 와인의 향을 느끼며 석양이 저물어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조금은 따분하고, 또 조금은 설레는 기다림의 시간을 보낸 끝에.
그림자가 발코니로 뛰어올랐다.
크리스틴은 두 눈을 깜빡이곤,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자기 집 현관 놔두고 2층 발코니로 뛰어오르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을 거예요, 피에르.”
피에르는 슬며시 웃으며 다가왔다.
“빨리 보고 싶어서요. 게다가, 정답 아닙니까?”
크리스틴은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앞에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는 기사를 바라보았다.
“매년 오늘은 이게 약속인 줄 알았는데.”
크리스틴은 미소 지었다.
루이스에게 용서받고, 해방감과 함께 막막한 심정에 젖어 있을 때.
마치 그녀의 마음을 알기라도 했다는 양 찾아와준 남자.
발코니로 뛰어올라 그녀를 당황시킨 약혼자에게 먼저 청혼한 건 분명 술기운이었겠지.
크리스틴은 쿡쿡 웃곤 맞은편에 준비해둔 잔에 와인을 채워주었다.
“그래요, 정답이에요, 피에르.”
“하하, 다행이군요. 올해도 사랑하는 아내를 실망시키지 않아서.”
크리스틴은 곱게 눈을 흘겼다.
그와 결혼하고 벌써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가슴이 간질거리는 건, 기다려 달란다고 우직하게 기다려준 순진한 동생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겠지.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크리스틴?”
크리스틴은 피에르가 내민 잔에 건배하며 슬며시 고개를 기울이며 답했다.
“음, 꽤 오래?”
“으음, 그건 무척 잘못한 것 같군요. 이럴 줄 알았으면 드제에게 다 떠넘기고 바로 도망나오는 건데.”
크리스틴은 쿡, 하고 웃었다.
매번 피에르가 자리 비울 때마다 고생하는 사람에게 그건 못할 짓이지.
그리고…….
“하지만 괜찮아요.”
18세의, 고향에서 맞이한 영원할 것만 같던 겨울.
그것은 무척이나 길고도, 길어서.
-흑장미의 꽃말을 아시나요?
얼어붙은 마음을 깎아내며 걷는 순간마다 괴로워,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았다.
-이별이에요.
너무나 괴롭고, 괴로워.
-흑장미의 꽃말은 다른 것도 있었죠.
스스로를 속여 가며 깎아내려던 마음을.
-당신은 영원한 나의 것.
억지로 파내어, 그가 껴안기 전까지.
“끝이 있는 기다림이니까요.”
그토록 영원할 것만 같던 아키텐의 겨울은 그녀가 28세의 나이일 때 완전히 끝이 났다.
“제 청혼을 받아주신 기사님께 건배.”
“……일생일대의 실수를 매년 상기시켜주는 걸 보면 당신도 취미가 나쁘다니까요.”
장난스럽게 말하며 건배하는 피에르의 행동에, 크리스틴은 웃음을 터트렸다.
청혼을 그녀가 한 것이 그토록 억울한 걸까, 그는.
-저는 이미 당신의 것이니.
정작 그녀는 그보다 훨씬 더 전에.
-당신도 제 것이 되어주시겠습니까, 레이디?
그가 그렇게 청한 순간, 몸도, 마음도, 영혼까지도 그에게 전부 사로잡히고 말았는 걸.
크리스틴은 피에르에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조금 춥네요. 충분히 기다렸으니, 이제 들어갈까요?”
“하하, 그러죠.”
피에르가 자연스럽게 일어나서 그녀를 안아든 순간, 크리스틴은 차가운 것이 얼굴을 적시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오. 첫눈인가요?”
크리스틴은 멈칫하며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는 피에르의 말을 듣고 웃었다.
이제 크리스틴은 겨울을 좋아한다.
그녀를 죄책감과 책임감 속에 가두었던 계절이었으나.
그녀가 자유롭고, 사랑받는다는 걸 알려준 계절이기도 하니까.
“예쁘네요. 근데, 저 감기 걸리겠어요. 피에르.”
“아, 미안합니다.”
피에르가 냅다 방안으로 들어가서 침대에 눕혀놓고 일어나려고 해서, 크리스틴은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끌어안았다.
“크, 크리스틴. 저 아직 씻지도 못했-”
“하지만 추운 걸요. 따뜻하게 해줘요, 피에르.”
“……당신이 원한다면.”
이제 더는 겨울이 찾아오는 날이면 그 추위에 떨 필요가 없다.
아무리 추워도 겨울은 결국 지나갈 거라 믿고, 즐겁게 봄을 기다릴 수 있다.
당신은 언제나, 언제까지나 나를 찾아올 테니까.
겨울이 지나가고, 다시 피어날 흑장미가.
당신이 영원토록 나의 것이라고, 나는 영원토록 당신의 것이라고 속삭여줄 테니.
“사랑해요, 나의 피에르.”
“사랑합니다, 나의 크리스틴.”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