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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257화 (257/258)

257화. 에필로그 (5)

프랑지아의 수도, 뤼미에르.

화창한 햇살이 내리쬐는 하늘 아래.

에리스는 이미 몇 번이고 걸었던 중앙광장을 걸었다.

마녀라고 매도당하며, 비난 속에 이 길을 걸었다.

성녀라고 칭송받으며, 경외 속에 이 길을 걸었다.

여왕으로 경배받으며, 존경 속에 이 길을 걸었다.

에리스는 천천히 연단에 올라, 그녀를 바라보는 이들과 마주했다.

무수히 많은, 프랑지아의 국민들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존경하는 프랑지아의 국민 여러분. 저 에실리스테 릴리안느 드 프랑지아는 프랑지아인의 여왕으로서 8년이라는 시간 동안 여러분과 함께 했습니다.”

그녀가 왜 여왕의 자리에서 내려오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아직도 많다.

“그동안 우리에겐 숱한 고난이 있었고, 적지 않은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그녀의 뒤를 잇게 될 대통령이 과연 전 대륙에서 성녀왕으로 칭송받던 여왕을 대신할 수 있을지를 의심하는 이들도 많다.

“누군가는 여러분의 혁명이 잠시 일어난 폭동에 불과하다고 여겼습니다.”

이 자리에는 그녀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이들이 있다.

“누군가는 국민의 정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우리가 곧 무너질 거라 여겼습니다.”

오랫동안 그를 지켜준, 아버지 같은 기사. 답답한 걸 싫어하고 고집만 센 그녀를 뒷바라지 해주느라 고생만 한 시녀.

“그럼에도 우리는 끝내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지금 이 자리에 서있습니다.”

그녀가 생각지도 못했던 여왕의 자리에 그녀를 올려놓은 사람. 그리고 여기까지 그녀가 올 수 있도록 도와주고, 마지막까지 그녀의 고집에 어울려준 사람.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우리가 이룩해낸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주신 덕분입니다.”

그녀를 경계하고 또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써가며 도와준 사람.

“저는 금일 부로 여왕으로서의 모든 업무를 끝마치게 됩니다. 이제 저는 국민 여러분께 받은 권한을 내려놓겠지만…….”

혁명의 정당성을 정면에서 위협하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믿고 도와준 국민의회의 사람들까지.

“프랑지아의 국민 여러분이 저와 함께 해주신 것처럼, 앞으로도 단결하여 새로운 정부와 함께 하며 많은 것을 이뤄내실 것이라 믿습니다.”

저들의 헌신으로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니, 마땅히 헌신해야 한다고 배웠다.

시작은 분명히 의무감이었다.

그러나…….

“여러분과 함께 한 지난 8년간은 제게 큰 기쁨이었고, 영광이었습니다.”

어느새 그것이 그녀의 행복이 되었다.

옛 성녀의 호의로 그녀의 노력이 구원이 되리라는 것을 알아버린 지금, 에리스는 진심으로 말할 수 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부디 프랑지아와 여러분께 신의 가호가 있기를.”

그녀에게 감사하며 박수를 치는 이들의 얼굴에도 같은 미소가 걸려있어, 에리스는 베일 속에서 남몰래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여왕 폐, 아니, 성녀님.”

초대 프랑지아 대통령 모리스 탈레랑의 말에, 에리스는 슬며시 웃고는 그녀가 두르고 있던 붉은 색의 띠를 벗었다.

수수한 백색의 로브 일색인 그녀의 몸에서, 유일하게 허락된 사치라도 되는 양 화려한 금실로 수놓아진 천.

앙쥬 백작이 억지로라도 만들어주었지만 정작 본인은 예식 때나 두르고 내던지고 다닌, 프랑지아의 지도자로서 권위의 상징.

에리스는 손을 뻗어, 탈레랑에게 그 띠를 둘러주었다.

“흠, 이거. 조금 떨리는 군요.”

너스레를 떠는 탈레랑에게, 에리스는 쿡쿡 웃으며 말했다.

“떠셔야죠. 이건 속박인데요. 민중에게 사랑받은 여왕이 민중을 위해 물러나며 떠넘기는 권위인 걸요. 게다가, 누구보다 위대한 기사가 여러분을 지켜보고 있어요, 대통령님.”

자유, 평등, 박애의 이름으로 일어난 대의를 다름 아닌 구체제의 잔재가 지켜내, 국민을 위해 봉사하라고 다시 돌려주고 있다.

민중의 이름으로 혁명을 일으킨 자들이 그렇게 위임받은 권력을 더럽힌다면, 그것은 결코 용납 받을 수 없다고 전 프랑지아에 보여준 것과 다를 바 없다.

“허허, 그것 참 무시무시하군요. 그래도 이건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성녀님.”

“네?”

“프랑지아의 왕녀 전하께서 하필이면 성녀님이셨다는 것, 그리고 그 왕녀 전하를 옹립한 것이 하필이면 라파예트 후작이었다는 것. ……그 모두가 신의 가호라고 생각합니다. 그간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에리스는 쿡, 웃으며 물러났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뭘 하실 겁니까?”

프랑지아를 위해 쉴 새 없이 달려온 성녀는, 이제부터 무얼 할까?

순수한 의문을 담아 던진 탈레랑의 질문에, 에리스는 베시시 웃으며 답했다.

“일단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하고 침대에 뒹굴면서, 맛있는 거 잔뜩 먹을 거예요.”

“오. 그것참, 신성하기도 하시지.”

탈레랑은 농담조로 말하곤, 최초의 대통령으로서 연단에 올랐다.

에리스는 슬며시 미소 지으며 그대로 등을 돌려, 베일 너머로 따스한 햇살을 보며 웃었다.

당당하게 말씀드리건데.

저는 최선을 다했어요.

* * *

수년이 지난 뒤.

게르마니아 제국의 수도, 게르만부르크.

에리스는 시종의 안내를 따라 복도를 걸었다.

이미 몇 차례 방문한 적이 있는 제국의 황성은 화려했으나, 그 빛은 단풍이 휘날리는 가을의 을씨년스러움과 어두운 분위기를 전부 감추지는 못했다.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렇게 먼 길을 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성녀왕 폐- 아, 실례. 성녀님.”

고의인지 실수인지 모를 제국군 총사령관 질 폰 레온하르트 원수의 언사에, 에리스는 슬며시 웃어주며 답했다.

“오랜만이네요, 원수님.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별로 잘 지내진 못했습니다만, 그렇다고 아주 못 지낸 건 아니군요! 어쨌거나 옛 전우를 뵙게 되어 기쁩니다. 그 성전 이후 벌써 여러 해가 지났군요. 정작 그 전우분 덕분에 제국에는 아주 파란이 일었지만요.”

에리스는 가볍게 미소 짓기만 했다.

“하하, 그럼 모시겠습니다.”

질은 이내 그녀를 안내해, 커다란 방문 앞에 도착해서 시종에게 고했다.

“에실리스테 릴리안느 드 프랑지아 성녀님께서 오셨다. 안으로 고하도록.”

시종이 안으로 들어가 고하는 사이, 질은 다시 입을 열었다.

“알고 계시겠지만, 황제 폐하께서도 성녀님을 뵙고자 청하셨습니다.”

“네, 알겠어요. 황태후 마마를 뵙고 나서 찾아뵐게요.”

질은 에리스와 잠시 눈을 마주치더니, 이내 허리를 숙여 보이며 답한다.

“허면 저는 이곳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에리스는 고개를 끄덕여보이고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프랑지아의 왕녀 세실리아.

그리고 카이제린 체칠리아.

이제는 황태후라 불리는 여인은 침대에 앉아서도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앉아, 그린듯한 미소를 입가에 걸고 있었다.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해 주름이 깊은 얼굴을 하고 있음에도, 그 기품과 위엄만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에리스는 그녀에게 다가서는 걸음마다 죽음의 냄새를 느꼈다.

“그간 격조하였습니다, 황태후 폐하.”

에리스가 예를 갖추어 인사하자, 체칠리아는 가볍게 미소지은 채 답했다.

“어서 오세요, 성녀님. 먼 길을 이리 와주어서 무척 기쁘답니다.”

체칠리아는 말하면서 자연스러운 손짓으로 시종들을 물렸다.

모든 이들이 물러가고 에리스가 침대 앞에 준비된 의자에 앉자, 체칠리아는 잠시 조용히 있다가 물었다.

“내가 아직 그대를 자매로 대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언니.”

에리스가 찰나의 주저도 없이 답하자, 체칠리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고맙구나.”

그 말을 마친 체칠리아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그 거동이 불편해 보였으나, 에리스는 체칠리아를 도와주려고 들어 그녀를 상처 입히는 대신 가만히 기다렸다.

“……살펴볼게요.”

“아니, 그럴 필요 없다. 신성 교국에서도 여럿 다녀갔고, 내 몸은 내가 잘 알겠으니...”

체칠리아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갈 때가 된 거야.”

에리스는 부정하지 않았고, 체칠리아는 천천히 눈을 감으며 덧붙였다.

“……폐하께서 천금을 주고서라도 나를 조금 더 살려두라고 할 것을 안다. 네게 그럴 힘이 아직도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신경 쓰지 말거라.”

에리스는 가만히 그런 체칠리아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저를 원망하지는 않으시나요.”

“원망, 원망이라…….”

체칠리아는 픽 웃으며 덧붙였다.

“그래, 제 손으로 버릴 왕위였다면 왜 기어코 뺏어갔는지, 원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에리스는 결국 임기를 마치고는 멋대로 대통령이라는 걸 만들어놓고 물러났다.

모리스 탈레랑이라는 한낱 평민이 프랑지아의 새로운 군주가 되었고, 체칠리아는 이에 어떤 식으로든 대응하고 싶었으나 실패했다.

대부분의 국가들은 어비스 코퍼레이션과의 전쟁이 끝난 상처를 보듬기도 전에 다시 긴장을 올리는 일에 지극히 회의적이었으니까.

게다가 아키텐 상단을 통해 연결된 각국 간의 거미줄 같은 이해관계는 더더욱 섣부른 전쟁을 일으키기 어렵게 만들었다.

에리스가 왕위를 내던지기 직전에 각국을 순방하며 협력체계를 다진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기에 더더욱.

체칠리아는 한탄하듯 말했다.

“그래, 생각해보면 내 삶은 온통 프랑지아에게 시달리는 과정의 연속이었구나.”

“…….”

“너무 그런 표정 짓지 마라. 그게 네 책임이겠느냐. 다 내가 기구하고 과욕을 가져 이리된 것을.”

기실 당당하게 원망하노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오히려 그녀가 아니라 저 성녀인 것을.

“그래도 나는 최선을 다했다.”

체칠리아는 프랑지아의 왕위를 차지하겠다고 일으킨 전쟁에서 참패하고, 사분오열된 제국의 내전을 어떻게든 수습해냈다.

크라프테가 프랑지아에게 패배하는 상황을 이용하여, 아들의 제위도 계승도 성공시켰다.

이미 썩을 대로 썩어버린 제국군을 어떻게든 개혁하기 위해 질 폰 레온하르트를 비롯한 새로운 인사들을 기용했다.

어비스 코퍼레이션과의 전쟁에서 그들이 활약할 기회를 주고, 공을 세운 그들에게 가해지는 온갖 공격을 무마해가며 제국 정계에서 황제의 편이 되어줄 세력을 구축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잘 되지는 않더구나.”

내전에서 패배하기는 했으나 이미 한번 흔들린 제국의 권위를 되살리기는 어려워, 체칠리아는 늘 제후들의 불만을 통제하고 내부를 관리하느라 고생해야 했다.

그런 와중에 공화국이 되어 온갖 급진적인 개혁을 통과시키고 있는 프랑지아의 영향력은 각국 간의 긴밀한 무역과 협력 탓에 자연스럽게 퍼지고 있다.

제정 아래의 제국민들이 그 영향력을 받아 바로 혁명을 터트리지는 않았으나,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느릴지언정 확실하게 번지고 있다.

체칠리아는 느슨한 개혁을 일부 실시해 불만을 줄이고, 과도하게 급진적인 요구는 짓밟아 으깨는 것으로 상황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그것도 영원할 수는 없다.

체칠리아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에리스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 대부분의 잎이 떨어져 내려 앙상해진 나무를 바라보았다.

“……결국 내 생은 저물고, 제국은 가을을 맞이하고 있구나.”

어려서부터 최악의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체칠리아는 자신을 혹독하게 채찍질해야 했다.

그렇게 쌓아올린 위업만큼 몸은 망가졌다.

그러나 그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본래부터 유약했던 아들은 끝내 위대한 황제가 될 수 없었다.

황제는 체칠리아가 분투하는 만큼 그녀에게 의지했고, 체칠리아가 공들여 키운 신군부조차 황제보다는 그녀를 신뢰했다.

오죽하면 신성 교국에서 그녀의 수명을 더는 늘릴 수 없다고 손사래를 치니까, 프랑지아에 간청해서 성녀를 불러와서 애걸하고 있을까.

“폐하께는 너무 무거운 짐이었을까.”

제국의 모두가 그녀의 아들과 크라프테의 국왕 하인리히 1세를 비교하는 것을 알고 있다.

하다못해 일개 평민인 프랑지아의 대통령도 지나치게 급진적이라는 평을 듣지만, 능력적인 부분에서는 그녀의 아들보다는 평이 좋다는 것도.

그녀가 죽는 순간 제국은 다시 겨울을 맞이할 것임을 모두가 알고 있다.

“나는 결국 사리사욕만 부리고 자식을 가르치지 못해 제국을 망친, 어리석은 여자로 남을 모양이구나.”

답을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니었다.

“……미안하구나. 오랜만에 만나서는 신세한탄 뿐이라니. 네게 할 짓이 아닌데.”

“아니요, 제가 관련이 없다고 말할 순 없으니까요.”

에리스가 직접적으로 체칠리아를 적대하지는 않았으나, 에리스의 행동은 결과적으로 대부분이 체칠리아에게 치명타를 입혔다.

“언니가 후대에 어떤 식으로 불릴지 저는 몰라요.”

그래서 할 말만을 했다.

“하지만 적어도 언니는 저나 여러 사람들에게 언니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한 사람으로 기억되겠죠.”

적국의 볼모로 팔려온 왕녀가 홀로 이룩해내기엔 버거운 과업이었다.

시대를 잘못 타고 나, 주변국에 너무도 뛰어난 이들이 많았다는 불운마저 겹쳤다.

그래도.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다면, 이후는 뒤에 남은 사람들에게 맡기고, 가슴을 펴셔도 돼요.”

에리스는 잔잔하게 미소 지은 채 덧붙였다.

“지금껏 언니를 믿고 따른 사람들은 그런 모습으로 언니를 기억하고, 또 그만큼 흔들리지 않을 테니까요.”

체칠리아는 조용히 에리스를 바라보더니 헛웃음을 흘렸다.

“제국이 흔들려야 네 나라가 편한 것 아니더냐?”

에리스의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고, 답은 잔잔했다.

“저는 이미 여왕도 아니고, 타인의 불행을 통해 얻어낸 행복은 언젠가 다른 불행으로 돌려받을 뿐인 걸요. 저는 그런 일을 원하지 않아요. 국민들도 원하지 않을 거라 믿어요.”

체칠리아는 에리스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충동적으로 물었다.

“……그래, 너는 변하지 않았구나. 프랑지아의 세계를 돌며 자선활동을 벌인다지. 너는, 그걸로 족하더냐. 끝내 왕위까지 버리고 타인만을 위한 삶을 살고, 자신의 것은 무엇 하나 남기지 않은 삶일진데.”

“저는 타인만을 위해 사는 게 아니에요. 언니. 그들이 기뻐하고 감사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제가 기쁘니까요. 제 행동으로 조금이나마 더 나은 삶을 사는 이들을 볼 때마다 행복하니까요.”

“……그래, 성녀다운 마음가짐이구나. 허나 그렇다고 한들 그것이 네 것은 아니지 않느냐. 그렇게까지 해서 무엇이 남기에?”

“왜 제 것이 남지 않나요? 제 흔적이 남은 그들이, 제게 감사하고 받은 선의를 조금이라도 돌려주고 하는데요. 그때마다 모든 사람들이 저를 찬양하고, 또 감사해요. 어딜 가도 환영받고, 누구나가 귀하게 대접해주려고 안달이 나 있죠. 저도 가끔은 그걸 즐기기도 한답니다!”

에리스는 쿡쿡 웃더니 덧붙였다.

“이런 건 잃어버릴까 봐 전전긍긍할 필요도 없는걸요. 제가 신의 품에 가서 어머니와 만나도 이곳에 남을 유산일 텐데, 오히려 이쪽이 영원한 제 것 아닌가요?”

“하.”

체칠리아는 헛웃음을 흘렸다.

에리스의 투명한 보랏빛 눈동자에는 거짓은커녕 위선 한 점 없어, 그녀가 진심으로 그렇다고 믿는다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내 황제’ ‘내 아들의 제국’에 집착해온 그녀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사고방식.

그랬기에 패배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그 고결한 성녀께선, 한때 네 백성들을 피 흘리게 해준 나를 위해서도 기도해줄 수 있겠느냐?”

에리스는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답했다.

“기꺼이요. 첨언하자면, 신께서는 정말로 자비로우셔서, 진심으로 회개하신다면 자비를 베풀어주실 지도 몰라요.”

체칠리아는 헛웃음을 흘리며, 에리스가 짐짓 경건한 태도로 두 손을 모아 기도하고 은은한 신성력이 빛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체칠리아가 입을 열었다.

딸 뻘의 나이인, 배다른 혈육일 지라도.

“네가 내 자매라서 원망하고, 분하였으며…….”

체칠리아는 나직하게 덧붙였다.

“……자랑스럽다.”

기도를 마치고 천천히 눈을 뜬 에리스가, 미소지으며 답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체칠리아는 픽 웃으며 눈을 감았다.

그러면…….

먼저 간 남편.

가엽고 어리석은, 사랑스러운 나의 황제에게.

당당하게 말할 것이 하나 더 생겼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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