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화. 에필로그 (4)
국민의회에는 말 그대로 폭풍이 휘몰아쳤다.
며칠에 걸쳐 난장판의 토론이 이어졌고, 나는 어떻게든 에리스를 설득해달라는 중앙당 의원들의 성토에 시달리느라 고생 좀 해야 했다.
그러나 에리스는 이 사안에 대해 타협은 없다는 듯이 강경하게 밀어붙였고, 솔직히 나도 저럴 때의 에리스는 설득이 힘들다는 걸 알아서 반쯤은 손을 놓고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국민의회에서는 에리스의 안건을 통과시켰다.
그 이유가 제각각인 것이 좀 웃겼지만.
혁명당은 어쨌든 니콜라 브리소가 대통령이라고 명명한 국가수반에게 권력을 몰아준다는 에리스의 개혁안이 혁명의 전복은 아니라는 점에서 비교적 안심했다.
그들은 연이은 전쟁과 그 승리로 중앙당의 위세가 커진 상황에 여왕이 재차 8년의 임기를 연장하게 되면 그때야말로 혁명의 역행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가 우려해왔으니까.
자유당은 혁명당이나 중앙당과는 달리 집권을 꿈꾸기는 어렵겠지만, 혁명당과 마찬가지로 혁명의 전복이 아니라는 점과 이 개혁안을 위해 여왕이 자문을 구한 사람이 니콜라 브리소라는 이유로 찬성했다.
그들은 어쨌든 다가올 선거에서 극적인 지각변동이 없는 한 주도적인 역할을 기대하기 힘들다.
그런 상황에 국민의 사랑을 받는 여왕이 중앙당의 정신적 지주와 뜻을 같이 한다는 정통성을 얻을 기회를 거부하기는 어렵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앙당.
귀족 중심이니만큼, 이들은 에리스의 개혁안에 가장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에리스를 옹립한 장본인이자 근왕파를 자처해왔기에, 여왕의 의지에 직접적으로 거스르기가 가장 어려웠다.
에리스가 아예 허수아비 여왕이고 이들이 구체제의 귀족 마인드를 완전히 버리지 못했다면 또 모르겠으나, 에리스는 그야말로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여왕이고 이들도 나름대로 국민의회와 혁명 이후 변한 사회에서 10년 가까이 적응한 자들이니까.
결국 에리스의 뜻을 꺾지 못하리라는 것이 확실해지자, 중앙당은 이 사태에서 자신들이 가져갈 수 있는 이득으로 눈을 돌렸다.
결국 선거에서 이기면 오히려 그동안 분열되어 지지부진하던 프랑지아를 이끌어, 중앙당의 기준에서 과격한 정책들을 좀 더 그들의 기준에서 온건하게 바꿀만한 추진력이 생기게 된다.
그러면 오히려 통제가 안 되고 권한도 부족한 급진적인 여왕을 섬길 때보다 좀 더 용이하게 프랑지아를 통치할 수 있게 된다고 볼 수도 있는 거다.
그렇게 모두가 반발했지만 또 모두가 마지못해 긍정적인 면을 찾아내서라도 수긍하게 만든 여왕은 내 앞에 앉아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아주 거하게 일을 치셨군요, 여왕 폐하.”
“먼저 말씀드리지 않은 건 미안해요, 후작님. 하지만 후작님은 어떤 면에선 급진적이지만, 어떤 면에선 보수적이시라서요.”
에리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능청스럽게 답했다.
……내가 왜 그러는지 빤히 다 알고 있을 거면서.
내가 급진적으로라도 개혁을 추진하는 경우는 그걸 방치했을 때 크리스틴이나 내 사람들에게 위협이 되거나, 개혁안이 더 나은 결과를 가져다준다는 확신이 있을 때.
반대로 크리스틴이나 내 사람들에게 별 영향이 없을 사안에 대해서는 가급적 현상유지를 선호한다.
이건 철저히 경험에 의한 일이지.
“사람이라면 대개 자신에게 좋은 건 받아들이고, 자신과 아무래도 좋은 일은 그대로 가기를 원합니다. 폐하께서 이상하신 거죠.”
에리스는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제가 계속 왕위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으셨죠?”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에리스는 책임감이 투철하다.
숱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내 손까지 빌려가며 후사를 보라고 닦달하는 중앙당 의원들의 압박을 버틴 장본인인데, 언제고 끊어져버릴 왕실을 이어가려고 들리는 없겠지.
결국, 어떤 식으로든 왕정의 종결은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한창 전쟁을 승리로 이끈 에리스의 인기가 최고조일 때, 이런 식일 줄은 몰랐지.
에리스는 조용히 차를 마시더니,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보았다.
……얘가 이럴 땐 보통 곤란한 소릴 하던데.
그렇게 생각하기가 무섭게, 에리스가 입을 열었다.
“후작님. 대통령 후보 자리, 고사해주셨으면 해요.”
……역시나.
나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건데, 중앙당에서 에리스의 개혁안을 내키지 않아 하면서도 결국 통과시킨 이유 중 하나는 나다.
나는 혁명군을 이끌고 구 프랑지아 왕국, 게르마니아 제국, 크라프테 왕국, 어비스 코퍼레이션과 연전을 벌여서 그걸 전부 꺾었다.
그 결과 나는 이미 프랑지아 최강이었던 청기사를 넘어서 인류 역사상 최고의 명장으로 칭송받고 있는 데다, 지금은 마침 악마들에 맞서 승리한 여운이 남아있는 시점이지.
그러니 중앙당은 내가 대통령 후보로 나선다면 무조건 이긴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나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제게 그런 부탁을 하시는 이유를 여쭤보고 싶군요, 폐하.”
“간단해요. 저는 중앙당이 집권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이거야 원.
앙쥬 백작과 중앙당 의원들이 들으면 여왕께서 어찌 우리에게 이러시냐고 통곡을 하겠군.
“하지만 여왕 폐하. 중앙당의 구성원들이 좀 딱딱하고 고루하긴 해도, 그들도 나름대로 여왕 폐하께 충성하고 혁명 이후의 프랑지아에서 나름대로 적응한 사람들입니다. 제가 여왕 폐하의 부탁을 들어드리려면 조금 더 납득할 만한 이유가 필요하겠군요.”
에리스는 슬며시 웃었다.
“후작님, 중앙당이 집권하면 아마도 이 프랑지아에서 더 이상의 개혁은 힘들 거예요. 아니, 오히려 역행할 가능성이 높죠. 왜냐하면 아직도 다른 나라들은 전부 왕정 국가들이니까요. 그런 상황에 왕정 국가에 익숙한 이들이 자리 잡으면 결국 제가 한 일은 프랑지아를 왕 없는 왕국으로 돌려놓는 것일 뿐이에요.”
“글쎄요, 여왕 폐하.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저는 그게 과연 문제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혁명의 혼란을 겪고도 다시 한 번 같은 형태로 돌아간다면, 결국 그게 맞는 것 아닐까요.”
무엇보다, 우리는 최악을 피하기 위해 차악을 고른 사람들이다.
중앙당의 의원들은 어쨌든 구체제를 버리고 혁명과 함께 하기 위해 타협을 택한 이들이고, 우리는 최소한 최악의 구체제와는 다르다.
“당장 저와 크리스틴이 프랑지아의 실권을 잡았고, 폐하께서도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프랑지아는 혁명의 정신을 완전히 잃어버리지도 않았고, 오히려 혁명 당시의 혼란보다 더 잘 운영되어 왔죠.”
에리스는 씁쓸하게 웃었다.
“저는 지금 프랑지아의 상황을 기적과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기적?”
“네, 기적이요. 국민에게 권력을 돌려줘야한다고 생각하는 여왕, 체제를 전복시키기에 충분한 힘을 가지고도 체제에 협조하는 군사령관, 국가 경제를 전부 먹어치우고 독주할 능력을 가지고도 선을 지키는 사업가. 지금 프랑지아의 상황은 이들 모두가 공교롭게 그 능력을 좋은 쪽으로 쓰고 있기에 가능한 거니까요.”
에리스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입을 열었다.
“지금은 괜찮은 것처럼 보일지 몰라요.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이 계속 된다면 어떨까요? 만약, 만약에 후작님의 후계자가 마음을 달리 먹으면요? 만약에 크리스틴 언니의 후계자가 언니와 다르게 경제권으로 프랑지아를 마음껏 쥐고 흔드려고 한다면요? 그땐 누가 막을 수 있을까요?”
“…….”
“당장 괜찮은 것처럼 보인다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에요. 후작님과 크리스틴 언니에게, 그리고 중앙당에게 기대서 우리가 위기를 극복해올 수 있었죠. 하지만 그만한 후유증도 남았어요.”
에리스는 조금 뜸을 들이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후작님도 아시잖아요 저도, 후작님도, 크리스틴 언니도. 결국은 있을 수 없는 경험을 통해 지금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는 거라는 거.”
에리스의 말을 들은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확실히, 알고 있다.
회귀의 경험이 없었더라면, 나는 애초에 공화국을 이해하고 타협하려고 시도하지도 않았겠지.
에리스가 여왕이 되는 일도 없었을 테고, 크리스틴도 순전히 나를 위해 프랑지아에 좋은 쪽으로 최선을 다해왔다.
결국, 나는 에리스가 말한 기적과 같은 상황이라는 표현을 긍정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저는 지금은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에리스는 간청하듯이 말한다.
“첫 선거부터 후작님과 중앙당이 집권해버리면 혁명으로 이뤄낸 것들이 전부 수포로 돌아갈 지도 모르죠. 그러면 지금도 반쯤 자포자기하고 있을 다른 이들이 개혁의 의지 자체를 잃어버릴 위험이 커요.”
에리스가 말하는 취지는 알겠다.
하지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확실히, 내게 단순히 차악에 불과했던 혁명과 그 이후의 프랑지아는 많은 것을 바꿨다.
나 혼자서는, 내 사람들만 데리고서는 불가능했던 어비스 코퍼레이션에 맞선 승리도 결국 국민의회의 도움으로 힘겹게 거머쥐었다.
그러나 그렇다고는 해도.
“결국 가장 개혁을 부르짖던 자들이 만든 혁명은 지옥이었습니다. 그 꼴을 보고 돌아와, 어떻게든 그들을 조금이라도 정상적인 궤도로 틀어놓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 했죠.”
굳이 회귀 전이 아니라도 내 머릿속에는 아직도 피투성이로 축 늘어진 크리스틴의 모습이 남아 있다.
물론 모리스 탈레랑은 충분히 유능하고, 혁명당도 그때와 다르다.
니콜라 브리소와 자유당은 내 헌신에 믿음으로 보답해주었다.
그럼에도…….
“국민의회나, 다른 이들의 가능성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저들을 믿고 맡기느니, 차라리 제 손으로 이끄는 것이 더 나은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떠나질 않습니다.”
“그래요. 하지만 저들에게 기회를 줄 수 있고, 혹시나 엇나가면 바로잡을 수 있는 것도 후작님뿐이에요. 그렇지 않나요? 후작님이 아니면 누가 그게 가능하겠어요? 모든 우환거리를 해결해둔 지금이 아니면 언제 이런 모험을 해보겠나요?”
“일단 맡겨보고 정 아니다 싶으면 엎어버리란 소리를 그렇게 무책임하게 하셔도 됩니까?”
내가 어이가 없어서 묻자, 에리스는 쿡쿡 웃었다.
“하지만 정말로,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 걸요. 이미 나쁘다고 검증된 길과 더 나을지도 모를 길이 있는데, 불안하니까 검증된 길을 고르고 보는 건 너무하잖아요.”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솔직히, 전 저들이 말하는 평등이 그렇게까지 와 닿지는 않습니다. 각자의 전문분야가 다르니 마력을 다루는 기사나 마법사가 더 우월하다고는 하지 않아도...”
그래, 누군가는 나보다 행정에서 유능할 수 있고 기술에서 우위에 설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정말 모두가 평등한가?
“당장 저만 해도 일반병사 백 명 정도는 능히 처치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틴 개인의 가치는 그만한 수의 관료보다 우수하죠. 그런데 왜 모두에게 공평하게 한 표를 주는 개혁이 필요하다는 걸까요?”
에리스는 슬며시 웃으며 답했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한 표만 줘도 영향력이 균등하진 않겠죠. 후작님을 존경하는 무수한 이들은 후작님이 굳이 개입하지 않아도 후작님을 따라 표를 던질 테고, 크리스틴 언니에게 은혜를 입은 이들도 그렇겠죠.”
“그럼 애초에 표가 평등해도 의미가 없는 것 아닙니까?”
“아니요, 있죠. 애초부터 평등하지 않게 줘버리면, 힘을 가진 사람들은 나머지를 신경조차 쓸 필요가 없어지니까요. 그러면 결국 힘을 가진 사람만 계속 가지게 되고, 부패할 수밖에 없게 되요. 이미 무너진 구체제처럼.”
“흠.”
“하지만 권리라도 평등하게 주어지면 최소한 힘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 영향력을 조금이라도 다른 이들을 위해 쓰려고 하겠죠. 그렇게 해야 다른 이들이 가진 권리를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행사하게 할 수 있으니까요.”
에리스는 찻잔을 손으로 매만지며 말했다.
“저는 누군가의 호의에 기대어서 이루어지는 선의를 기도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모두가 선의를 베풀 만한 이유를 만들어주고 싶은 거예요.”
나는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폈다.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섬에서 한창 싸울 때 느껴졌던 강한 신성력은 이제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어비스 코퍼레이션과의 마지막 전투에서 승리하고, 며칠간 의식이 없다가 깨어난 뒤.
에리스는 나에게 그레모리가 그녀의 몸을 치료해줬다는 것을 말해주었지만, 그럼에도 신성력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둘 모두 사명을 다해서 사라진 건지, 아니면 너무 무리하게 사용해서 고갈된 건지는 모른다.
에리스는 오히려 그렇게 된 것을 일종의 해방이자 구원으로 여기며 기뻐하는 것 같았지만…….
“만약 이번에도 실패한다면 우리에겐 더 이상 기회가 없다는 것은 아시겠지요, 폐하.”
그건 본능적인 깨달음에 가깝다.
그러나 에리스는 웃으며 답했다.
“알고 있어요, 후작님. 하지만 저는 맡겨보고 싶어요. 우리가 기억하는 실패는, 결국 외부 개입 때문이잖아요?”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의도적인 혁명의 격화.
“우린 최선을 다해서, 많은 걸 바꿨어요. 그렇다면 우리가 선택한 길이 맞는 길인지 확인하기 위해 한발 물러서 주는 것도, 한 번쯤은 해볼 만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말한 에리스는 이내 슬며시 웃으며 나에게 손을 뻗었다.
“우리가 그렇게 애써서 지킨 나라인데, 우리가 잠깐 손 뗐다고 바로 무너져버릴 정도로 허술한 건 아니겠죠. 그렇죠?”
나는 결국 쓴웃음을 흘리며 에리스의 손을 마주잡았다.
그래, 내가 네가 원하지 않은 여왕 자리에 올라 달라고 청했으니…….
“제가 선택한 여왕 폐하시니, 이번은 따라드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