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255화 (255/258)

255화. 에필로그 (3)

어비스 코퍼레이션과의 전쟁이 끝난 뒤 어비스 제도에 군정이 세워지고, 나와 에리스는 연합국의 구성국들을 전부 한 번씩 방문했다.

이베리카 형제국, 게르마니아 제국, 크라프테 왕국, 동방 제국, 마도 왕국과 노던 연합 왕국까지.

나나 에리스나 이미 중앙대륙 전역에 명성이 퍼져 있었고, 악마들에 맞선 성전 승리의 주역이라는 평을 받아 어딜 가나 환영받을 수 있었다.

지난 전쟁의 후유증이 남아 있을 것이 뻔한 게르마니아 제국과 동방 제국이 성대한 승전 행사를 열곤, 기를 써가며 경쟁적으로 우리를 환영해주는  건 좀 웃겼지만.

어쨌거나, 어비스 코퍼레이션과의 전쟁이 끝나고 연합 구성국 간의 우호를 다지고 경제적인 협력체계를 구축하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어비스 제도에서의 사업지분을 각자가 서로 나눠 가진 데다 그걸 가장 직접적으로 관리하는 곳이 프랑지아니까.

크리스틴의 아키텐 상단은 프랑지아의 어비스 제도에서의 사업 및 연합국간의 공동무역 등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전쟁기간 동안 감당해야 했던 막대한 지출을 보상받을 수 있었다.

살아남은 악마들에게 관용을 베풀고 그들을 수용하면서 군정 감시 하의 노동력으로 활용할 수 있었고, 또 그들이 마탑의 어비스 코퍼레이션 기술 분석에 큰 도움이 되어주면서 기대보다 빠른 성과를 낼 수 있던 것도 한 몫을 했고.

한때 서로 전쟁을 치렀던 중앙 대륙 국가들 간의 연합이었으니 공통의 이해가 사라지자마자 분쟁이 재발하지 않을까 우려했는데, 적어도 당분간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중앙 대륙은 성전을 승리로 장식하고, 데탕트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에리스가 원하던 대로.

* * *

프랑지아의 수도, 뤼미에르.

국민의회.

외부적으로는 어비스 코퍼레이션에 맞서 싸웠던 국가들이 어비스 제도에서 얻어낸 이권을 공유하며 평화와 번영을 만끽하고 있었으나…….

전쟁이 끝나고 당면한 국난이 사라진 프랑지아의 내부는 폭풍전야의 분위기 속에 오히려 혼란스러워지고 있었다.

“혁명당은 이번 회기에 평등선거법을 제출하겠습니다. 전쟁동안 국민들이 보여준 헌신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이 법안은 반드시 통과되어야 합니다.”

모든 프랑지아의 성인은 재산과 무관하게 동등한 투표권을 가져야만 한다. 혁명 초기 막시밀리앙 이지도르가 주장했던 염원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혁명당 총재 모리스 탈레랑은 이번에야말로 그것을 이루겠다고 결심한 모양이나, 반응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흥. 촌구석의 무지렁이들과 오랫동안 프랑지아를 위해 봉사해온, 자격 있는 이들이 같은 한 표를 행사하게 만들자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귀족들을 중심으로 군부와 보수적인 인사들이 결집한 중앙당은 언제나 그랬듯, 덮어놓고 반대를 표했다.

“제기랄, 언제까지 그놈의 특권의식을 쥐고 있을 셈이요? 우린 혁명을 처음 터트릴 때부터 평등을 기치로 내걸었는데, 혁명이 일어나고 10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구시대의 낡아빠진 사고를 버리질 못하다니.”

혁명을 일으킨 프랑지아 공화국이 혁명 프랑지아 왕국이 된 이후, 국민의회 의원을 선출하기 위한 투표는 한 번 더 이루어졌다.

그 선거가 있던 때는 한창 연이은 전쟁을 치르고 어비스 코퍼레이션에 맞선 성전까지 준비 중인 상황이었기에, 중앙당에게 상당히 유리한 상황이었다.

자연스럽게 전장을 휩쓸며 프랑지아의 영웅이 된 나와 내가 소속된 중앙당이 옹립한 성녀왕 에리스의 영향력은 지배적이었고, 중앙당은 한때 3개 당 중 가장 약소한 당이었던 시절이 무색하게 비대해져 1당을 차지했다.

어비스 코퍼레이션과의 전쟁에서 우리가 위험에 빠졌을 때 국민의회에서 본토를 비워가면서까지 증원군을 파견해준 것이 괜한 것이 아니다.

모리스 탈레랑과 니콜라 브리소의 결단 덕도 있지만, 귀족과 군부 중심으로 이루어진 원정에 대한 혁명당과 자유당의 불안도 작용했던 셈이다.

그래도 전시에는 어쨌든 국론을 통일해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중요하고, 국민의회가 추가파병을 해주는 등 긍정적으로 작용하기도 해서 그리 큰 문제로 여겨지진 않았다.

그러나 어비스 코퍼레이션과의 전쟁이 끝난 상황에 비대해진 중앙당은 사실상 국민의회의 모든 개혁 시도에 제동을 걸게 되었고, 프랑지아의 개혁은 대부분 멈추었거나 혹은 현상유지에 그치고 있었다.

급기야 가장 급진적인 개혁파들의 혁명당에서는 결국 귀족들과 손을 잡은 끝에 혁명이 변질되고 말았다는 비관론이 나올 정도로.

“우린 혁명을 완전히 완수해야만 했어…….”

“크흠, 크흠. 말조심하시오, 의원.”

그러나 그런 상황이라고 해도 급진적이고 과격한 행동의 결과가 얼마나 파멸적이었는지는 크리스틴에 대한 암살기도 사건이나, 라파엘 발리앙의 반혁명 사건이 말해준다.

그렇기에 가장 급진적인 혁명당조차도 무력을 통한 개혁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지는 고려조차 할 수 없다.

무엇보다 군부의 수장인 내가 개인의 무력으로도, 프랑지아 민중들에 대한 인기로도 너무나 지배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으니까.

혁명당 입장에서 그나마 희망을 걸어볼 만한 파트너는 자유당이었으나…….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내건 혁명의 기치는 지켜야하지 않을지…….”

“크흠, 아직은 시기상조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농촌의 무지렁이들이 뤼미에르에서 고액의 세금을 성실히 납세하는 시민들과 같은 권리를 행사한다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그걸 위해 도입한 그랑제콜 과정 아니었소? 기껏 농민들의 반발을 억눌러가며 도입한 의무교육입니다. 그 배움을 마친 첫 졸업자들이 이제 막 사회에 나오기 시작한 시점인데, 그동안 그들이 배운 자유와 평등이 허울뿐이어서야 이 나라에 발전이 있겠소?”

“그렇다고 그들이 바로 도시의 시민들만한 지성을 갖추었다고 검증된 것이 아니잖습니까. 자기가 가진 권리가 뭔지 이해도 못한 채 쉽사리 선동될 어리석은 자들이 동등한 권리를 누린다면, 누가 힘들여 일하며 비싼 세금을 내려고 들겠습니까? 결국 프랑지아를 움직이는 것은 부유한 이들의 세금입니다.”

정작 그 자유당도 부유층과 중산층을 핵심지지층으로 가지고 있어 의견이 분분하며 미온적이다.

전쟁이 끝난 뒤 국민의회의 분위기는 대개 이런 식으로 흘러왔다.

불안정한 혁명기에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3당이 상호 견제하며 정국을 이끈다. 말은 좋지만, 결국 머리가 3개인 나라인 것과 다름이 없다.

3당 총재가 제각각 이끄는 이 나라에 에리스라는 구심점이라도 없었더라면 아마 지금보다 더한 혼란이 일어났겠지.

그렇게 생각하자니 조금 따분한 기분이 들어, 나는 가볍게 어깨를 풀다가 탈레랑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꽤 간절한 시선을 보내왔다.

저 콧대 높은 사람이 이러는 것도 흔한 일은 아니다.

그래도 나름 중앙당에서는 저들에게 호의적인 편인 나니까 도움을 청하는 거겠지만...

나는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보통선거라니,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선을 넘어섰다.

당장 중앙당의 구심점은 나를 포함한 구 귀족들이고, 국가를 위해 피 흘리며 헌신해온 군대가 핵심 지지층이다.

그렇게 피 흘려온 이들이나 전쟁수행 그 자체를 지탱해온 크리스틴과 수하들이, 이제 갓 제대로 된 교육이란 걸 받을 수 있게 된 이들과 같은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걸 누가 납득할 수 있을까?

……언젠가는 필요할지도 모르겠으나, 나로서는 굳이 지금 이렇게까지 급진적인 개혁이 필요한지 회의적이다.

분명히 전쟁이 끝나고 국민의회가 지리멸렬한 속에 갈등이 쌓여가고 있다는 느낌은 받고 있지만, 나로서는 이 정도도 충분히 예전보다는 낫다고 느끼고 있다.

당장 단두대에서 피비린내가 가실 날이 없던 그 혁명과, 그래도 대화라는 걸 하고 느릿느릿하게라도 뭔가 바뀌긴 하는 지금을 비교하자면 어느 쪽이 더 나은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지.

그렇게 지지부진한 토론 후.

“……찬성 213표, 반대 254표, 기권 33표. 보통선거법은 부결되었습니다.”

역시나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결과에 혁명당의 의원들과 일부 자유당 의원들은 낙담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상황은 아마도, 곧 다가올 차기 선거에서 확실한 지각변동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대로 가겠지.

“그러면, 다음 안건은 여왕 폐하께서 발의하시겠습니다.”

에리스가 천천히 걸어들어오는 가운데, 모두의 시선이 단번에 집중되었다.

사실 모든 전쟁이 끝난 뒤 프랑지아의 내부 정국을 둘러싼 폭풍전야의 핵심은 에리스였다.

왜냐하면.

에리스가 여왕으로 즉위하고 8년이 끝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의회의 의원 선거 뿐 아니라 국왕 선출 선거도 눈앞에 다가온 셈이다.

물론 여기서 에리스를 국왕으로 재신임하겠냐고 투표를 붙이면 아마 무난하게 전 국민적인 찬성으로 통과되겠지.

실제로도 상당수는 그렇게들 생각하고 있다.

애초부터 게르마니아 제국의 황후와 노던 연합 왕국의 왕비가 계승권 포기를 천명한 상황이니 입후보할 사람이 에리스밖에 없고, 그 에리스에게 왕의 자격이 없다고 외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그러나 그런 한편으로는.

혁명당과 자유당은 제아무리 위대한 여왕이라 한들 중앙당으로 이미 기세가 기울어버린 국민의회에서 에리스의 왕권이 절대적으로 재확인되고 나면, 그것이 그대로 혁명의 종말로 이어지는 것은 아닐지 우려하고 있다.

나는, 글쎄…….

크리스틴은 에리스가 자유당 총재에서 물러나고 은퇴한 니콜라 브리소와 몇차례 접촉한 것을 알려주긴 했는데, 저 국민의회보다 더 개혁파인 여왕님이 무슨 생각일지 궁금하긴 하군.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나뿐만은 아닌지, 중앙당 총재 앙쥬 백작을 비롯해 상당수는 굉장히 불안한 얼굴로 에리스를 보고 있었다.

에리스가 연단에 오르는 사이, 나는 시종이 건네주는 종이를 받아 보았다.

에리스가 상정한 안건의 자료인가?

어디 어떤 폭탄일지 궁금해 하며 그것을 읽어본 나는 그대로 굳었다.

“좋은 날입니다, 국민의회의 의원 여러분. 프랑지아인의 여왕 에실리스테 릴리안느 드 프랑지아가 인사드립니다.”

에리스도 차분한 어조로 인사했으나, 국민의회의 반응은 차분하지 못했다.

“이, 이게 대체 뭡니까, 여왕 폐하?”

“혁명 프랑지아 왕국의 정치체제 개혁안, 아니 프랑지아 공화국으로의 전환 안건입니다.”

“어억……!”

“아이고, 앙쥬 백작님!”

앙쥬 백작이 뒷목 잡고 넘어가는 가운데, 나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을 숨기지 못한 채 에리스가 돌린 서류를 보고 있었다.

국왕 선출 투표와 삼당 총재로 대표되는 국민의회가 법률 제정과 집행을 모두 진행하는 상황을 개편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국왕 선출 투표는 그대로 국가 수반 선출 투표로 유지되지만, 임기를 4년으로 줄이고 정당한 왕위계승권자에서 국민의회 의원 10인 이상의 추천을 받은 사람이면 누구라도 후보가 될 수 있게 바꾼다.

거기다 입법권한은 국민의회에 남겨두지만, 새로운 국가 수반 아래에 행정부를 새로 구성하고 국민의회가 기존에 가졌던 법률 집행 권한을 전부 넘겨, 법에 따라 판결을 내리는 사법부까지 해서 삼권분립을 시행하겠다고.

……은퇴한 정치인인 니콜라 브리소는 왜 그리 만나나 했더니, 변호사 출신이었던 그에게 자문을 구하고 있던 건가.

“이건, 이건 왕정 폐지와 다를 바 없지 않습니까?”

거의 동공지진이 난 중앙당 의원의 말에, 에리스는 산뜻하게 웃으며 답했다.

“맞습니다. 하지만 애초부터 혁명 이후 공화국이지 않았나요? 선거 왕정이라는 편법은 어디까지나 전쟁을 피하기 위해 어울리지 않는 임시방편을 얹은 것 뿐이었죠.”

당황한 건 중앙당만이 아니었다.

“여, 여왕 폐하. 지금 올리신 안건대로 개편이 이루어진다면 왕권…… 아니, 국가수반의 권한이 강화되어 사실상 국가를 운영하게 되며, 국민의회의 권한은 대폭 축소됩니다.”

탈레랑 총재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에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맞아요. 하지만 대부분의 나라가 그렇게 하죠. 국왕과 그를 따르는 행정 관료들이요. 우리는 혁명 과정에서 행정부 자체가 소멸해버렸기 때문에 국민의회가 겸하고 있었지만, 이게 별로 효율적이진 않죠. 실제로 혁명 초기 국민의회가 벌인 정책들은 실패한 경우가 많았으니까요.”

에리스의 말대로, 국민의회는 지금껏 입법과 법집행을 같이 해왔다.

입법만으로도 난해한 머리 셋인 의회가 법집행이라고 잘 되냐면, 솔직히 잘 안 된 것이 사실이다.

이상은 드높았던 혁명 정부의 정책들은 실질적인 전문성이나 인력 부족으로 식량난조차 해소하지 못하는가 하면, 현지 사정과 맞지 않는 정책을 강행하다가 서부에서 반란이 터질 뻔하는 등 갖은 혼선만 빚어대고 있었으니까.

어떻게든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나나 크리스틴이 바쁘게 움직이며 로비를 벌어야 했던 일이 한 두 번이 아니긴 하지.

“하지만 결국 명칭만 왕이 아닐 뿐, 다시 왕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까? 이건, 이건 왕국으로의 역행입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이건 사실상 혁명의 전복이다. 그것도 국민에게 가장 사랑받아, 국민의회 의원들이 결코 막을 수 없는 여왕에 의한.

“외람되나 여왕 폐하. 이건 사실상 국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여왕 폐하의 국가로 회귀하시겠다는 의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국민의회의 의원들의 눈에는, 누구보다 민중을 위한다고 믿었던 여왕에 대한  배신감마저 엿보였다.

솔직히 나로서도 에리스가 이런 결정을 내린 것에 대해 굉장히 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공통의 명백한 적이 사라진 뒤 머리가 셋인데 그중 어느 하나도 과반을 넘지 못한 채 국민의회를 비슷하게 나눠 먹었고, 그 상태로 국민의회가 입법과 집행까지 다 하느라 프랑지아가 완전히 지리멸렬해진 것은 사실이다.

확실한 구심점이 필요하긴 했으나, 정작 구심점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에리스는 혁명의 전복을 두려워한 국민의회의 견제 탓에 애매한 권한만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렇다고는 해도 에리스는 권력을 탐하는 것과는 완전히 거리가 멀어 보였는데, 이런 개편안을 들고 왔다고?

그러나 나에게조차 감쪽같이 비밀로 한 채 이런 대형폭탄을 터트린 여왕은 우리의 상상을 넘어섰다.

“외람되지만, 국민의회의 의원 여러분.”

이제는 나름 나이를 먹었는데도, 에리스는 여전히 소녀 시절의 장난기를 드러내며 웃었다.

“저는 입후보하지 않을 건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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