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253화 (253/258)

253화. 에필로그 (1)

구 어비스 코퍼레이션.

연합군정에 들어간 어비스 제도, 수도 판데모니움.

무너져 폐허가 되어버린 어비스 코퍼레이션 본사의 잔해더미에는 마족 노동자들과 연합군의 군사들이 가득했다.

무너져버린 건물에서 그래도 뭐라도 건져서 연구하고 싶은 마탑과, 아무튼 그들에게서 콩고물을 받아먹어야 하는 연합군, 그리고 그들에게 뭐라도 가치 있는 걸 주고 자비를 받아야만 하는 마족의 사정 덕분에 구성된 기묘한 연합의 사이.

“찾았다고?”

“네에, 수감된 위치는 알고 있었으니까요. 찾을 수 있었습니다.”

크라프테 국왕 하인리히 1세는 허공에 뜬 채 날갯짓을 하고 있는 서큐버스 레아의 답을 듣고, 잔해 발굴 현장으로 발을 들였다.

“국왕 폐하.”

“국왕 폐하!”

“크라프테에 영광을!”

하인리히는 그를 알아보고 경례하는 군사들에게 적당히 손을 내저어주고, 목적지로 향했다.

그리고 목적지에서 다른 이들을 모두 물린 끝에, 도저히 알아보기가 힘들 정도로 엉망진창이 된 시체와 마주했다.

무너지는 건물의 잔해 더미에 깔리며 무참하게 뭉개진 상태지만, 대충만 봐도 이미 그러기도 전에 최후를 맞았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팔다리도 없는 데다, 미라라도 되는 양 비쩍 말라 뼈만 남은 상태였으니까.

“그리드 사의 전 대표이사 바싸고입니다. 바엘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숙청당한 이후, 드론들의 에너지를 공급하기 위한 생체 마력 추출기로 활용되고 있었습니다.”

레아는 담담한 어조로 말하더니, 작게 덧붙였다.

“한때 유스틴 폰 비텐펠트라는 이름으로 크라프테 왕국에서 공작원으로 활동하기도 했죠.”

“……그래.”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엉망진창으로 찌그러지고 알도 깨져나갔지만, 바싸고의 시체가 쓰고 있는 안경은 하인리히에게도 익숙한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하인리히는 바싸고, 아니 비텐펠트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복수를 해야 할까, 만나면 뭐라고 해줄까 꽤 고민을 했었는데…….”

-비텐펠트는, 편히 갔던가?

크라프테의 대왕, 위대한 전쟁광 카를 2세.

그에게 후회 같은 건 어울리지 않는다.

그에게 배신감 같은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하여, 하인리히는 침묵했다.

그 대신 의혹을 품었다.

그의 나라가 애초부터 악마들의 필요에 의해, 악마들의 도움에 의해 끌어올려졌을지도 모른다는 의혹.

비텐펠트의 과거 행적과 크라프테의 행보를 토대로 조사를 해보면 할수록 의혹은 확신에 가까워졌고-

그것은 이내 불타는 복수심으로 변했다.

그들의 오만과 기만이 창조해낸 군사 국가, 대왕과 그의 크라프테 왕국은 저들에게 총 끝을 돌렸다.

악마들의 국가는 연합군 앞에 무너져 내렸고, 감히 크라프테를 농락한 악마는 그 악행에 걸맞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아니, 비참함을 넘어서.

“……시덥잖군.”

하인리히는 작게 중얼거리고,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비텐펠트를 찾아낸다면 검으로 직접 난도질해주려고 했는데, 이 비참한 시체를 상대로 검을 뽑아들 기분조차 들지 않았다.

만약, 대왕이 비텐펠트의 배신을 알았다면, 그리고 최후를 맞이한 비텐펠트의 시체를 마주했다면.

아마도 그 또한, 이 시덥잖은 시체에게 감흥을 잃고 다른 적수에게로 눈을 돌렸으리라.

하인리히 1세는 혹시나 엉뚱한 곳에 분노를 풀까, 노심초사하고 있는 서큐버스를 보며 픽 웃었다.

“……그래, 협조 고맙다, 악마. 이 시체는 너희들 마음대로 처분해도 좋다.”

“감사합니다, 크라프테의 국왕 폐하!”

하인리히 1세는 꾸벅 고개를 숙이는 레아에게서 등을 돌렸다.

다시 길을 빠져나가는 하인리히 1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는 그의 복수를 이뤘다.

그러나 이것은 공표될 수 없는 승리다.

악마들에게 이용당한 왕국이라는 꼬리표는 크라프테의 근간 자체를 뒤흔드는 불명예다.

결국 그만이 알고, 그마저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이루지도 못한 복수 속에 통쾌함 같은 것은 없다.

오직 짙은 허무감만이 남았다.

하인리히 1세는 잔해 사이를 걷다가, 멈춰 섰다.

“안녕하세요.”

이제는 너무도 익숙한 하얀색 로브에, 햇빛이 거의 들지 않는 안개 아래에서도 신비하게 빛나는 은빛의 머리칼과 자색의 눈동자.

성녀왕 에실리스테 릴리안느 드 프랑지아.

하인리히 1세는 그녀에게 가볍게 목례했다.

“깨어났다고 들었습니다. 건강은 괜찮으신지.”

에리스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이제 괜찮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하인리히는 에리스를 가늠하듯 마주 보았으나, 그녀가 그를 찾아올만한 마땅한 이유를 떠올릴 수 없었다.

연합군으로서 함께 싸우기는 했으나, 공식적으로 그것은 대왕이 체결한 조약에 의거한 의무를 다했을 뿐이다.

그나마도 크라프테가 전쟁에서 크게 기여한 부분에 대한 보상은 이미 합의가 되어 있으니, 더는 이야기할 거리도 없다.

애초에 프랑지아와 크라프테는 우방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적대관계에 가까우니까.

하인리히의 생각을 읽은 건지, 아니면 그저 별생각이 없는 건지, 백색의 여왕은 가볍게 미소지으며 입을 열었다.

“군정을 실시하기로 결정되었고, 이제 나머지 연합국은 모두 철수 단계를 밟겠네요.”

“그렇지요.”

당연하게도, 어비스 제도에서 군정을 직접 관리할 총독 자리는 프랑지아에게로 돌아갔다. 개전부터 기여도까지 따질 것도 없는 데다, 애초에 문이 건설된 곳이 프랑지아니까.

“바로 크라프테로 돌아가시나요?”

“그렇습니다. 목적은, 이미 달성했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하인리히의 입가에는 쓴맛이 감돌았고, 에리스는 미소지은 채 그런 그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게르마니아 제국과 동방 제국에서 저와 라파예트 후작을 초대했답니다.”

“……흠. 아무래도 그쪽은 주역도 아니었고 군주가 친정을 한 것도 아니었으니, 정통성 확보 차원이겠죠.”

“각자의 목적이야 있겠지만, 연합국이 앞으로도 우호관계를 이어가기 위해 좋은 시작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그걸 나한테 말하는 이유가?

하인리히가 그런 시선을 던지자, 에리스는 슬며시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허락해 주신다면, 크라프테와도 우호적인 교류를 이어나가고 싶어요. 우리는 이베리카 형제국과 알프스 왕국처럼 희소한 물품을 가진 나라들과 교역하고 있기도 하고, 라파예트 후작님께서 크라프테와 프랑지아 간의 장교 교환 프로그램 같은 걸 진행하면 서로 얻는 것이 많을 거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에리스는 슬며시 하인리히의 눈치를 살피다가 덧붙였다.

“물론, 본격적인 추진은 크라프테에서 긍정적으로 답해주셔야 가능할 테고, 국민의회에도 상정해야 하겠지만요.”

하인리히는 에리스를 빤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 관계를 모르시지는 않을 텐데요.”

하인리히는 아직도 대왕과 함께 마주했을 때 성녀 왕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성녀왕이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성정이지만, 그런 그녀조차 대왕의 폭거에 가까운 언행에는 분노를 감추지 않았지.

하인리히는 그녀가 크라프테에 대한 증오심이나 복수심을 품는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더더욱 그녀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한 번 힘을 합쳐 싸웠다고 해서 친구가 되었다는 생각을 하시는 건 아니시겠죠. 공통의 이해는 이미 끝났습니다.”

에리스는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그건 아니에요. 하지만, 앞으로 하기에 따라서는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

“우리는 전쟁을 치뤘고, 많은 피를 흘렸죠. 오히려 그래서 더더욱, 저는 양국 관계를 개선해야만 한다고 생각해요.”

“숭고한 의도라고 생각하나, 국가 간에 영원한 평화란 없습니다. 은원관계가 있다면 더더욱.”

“그럴지도요.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언젠가 다가올 파국을 기다리느니, 언젠가 끝날 평화를 조금이라도 길게 가도록 노력하고 싶은 거예요. 아니라면 혹시, 우리에게 복수하고 싶으신 건가요?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지만...”

하인리히는 악한 의도는커녕 뭔가를 숨길 생각조차 전혀 없다는 듯이 말간 에리스의 얼굴을 보곤 헛웃음을 흘렸다.

복수, 복수라.

크라프테는 분명히 프랑지아에게 패배했고, 적지 않은 것을 잃었다.

복수하려면 복수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명백한 악의를 가지고 그를 기망한 악마에게 정당하게 벌인 복수조차 허무했을 진데.

악의를 가져도 될 상황에 저렇게 구는 상대에게 복수심을 품을 수 있다면 그건 인간이 아니라 차라리 악마가 아닐까.

결국 하인리히는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양국 모두 연달아 피를 흘렸는데, 평화 좋지요.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면 거부할 이유는 없군요.”

“고마워요!”

그저 순수하게 기뻐하는 에리스의 모습에, 하인리히도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는 그녀에게는 하지 못할 말을 속으로 되뇌기만 했다.

바라건대, 서로의 생이 다할 때까지 적으로 만날 일이 없기를.

* * *

프랑지아의 수도, 뤼미에르.

국립 묘지.

무수히 많은 묘비들로 가득한 장소.

키가 크고 잘 생긴 남자는 멋들어진 기병 제복을 입은 채, 한눈에 보기에도 무거워 보이는 짐을 짊어진 채 묘비들 사이를 걸었다.

무수한 묘비들 사이로 한참을 걸어간 남자는 이내 짐에서 맥주병을 꺼내, 그대로 따더니 그것을 기울여 흘러나온 맥주를 묘비 위로 쏟았다.

남자는 그 상태로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술을 쏟아내 묘비를 적시고, 술이 다 떨어지면 다른 병을 꺼내 또 쏟아내며 계속 걷는다.

“자, 술 들어간다.”

얼핏 보면 고인모독이라도 하는듯한 모양새인데도, 남자의 표정에는 일말의 부끄러움도 불순함도 없다.

“시원하냐? 존나 남자 새끼들.”

그저 호쾌하게 걸음을 옮기며 술을 쏟을 뿐이다.

“너무 억울해하지 마라. 염병, 이 몸은 존나 쩔게 용맹하고 말을 잘 타서 살아버린 거니까.”

제롬 모렐은 그렇게 마치 대화라도 하듯, 함께 묻힌 그의 부하들의 묘비에 술을 적신 뒤 그대로 등을 돌렸다.

“또 온다, 자식들아. 편히들 쉬고 있으라고.”

그리고는 익숙한 길을 따라가, 두 묘비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여, 안녕하냐. 친구들.”

답은 없다.

그러나 답을 듣기라도 한 양, 제롬 모렐은 짐에서 마지막 술병을 꺼내들었다.

이번에는 거친 기병 사내들이 대충 전장에서 마실법한 싸구려 맥주가 아니라, 친구의 고급 입맛에 맞춘 와인을.

익숙한 손길로 마개를 따낸 제롬 모렐은 피식 웃으며 와인을 들어 올렸다.

“이제 혼자 심심할 일은 없겠다?”

라파엘 발리앙.

옛 친구의 이름이 적힌 묘비에 와인을 콸콸 쏟아낸 제롬 모렐은 픽 웃으며 병을 옆으로 기울여, 니콜라 네의 묘비에도 와인을 쏟아주었다.

“니콜라, 이 꼴통 새끼. 제일 라파엘 새끼한테만 충성할 것처럼 굴던 놈이 멋지게 자기 몸을 다 내던지고. 덕분에 죽을 각오로 뛰어들었던 나만 웃긴 꼴이 되었잖냐. 모양 빠지게.”

제롬 모렐은 천천히 시선을 돌려, 다시 발리앙의 묘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맛있냐?”

오래전에 처형당하고 묻힌 친구는 답이 없다.

“마지막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잘 안 난다, 야. 30살 처먹고 겁쟁이 되기 전에 뒈질 줄 알았던 내가 여태 살아있고, 그 병신 같던 혁명 정부가 지금까지 잘 굴러가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냐?”

그 대신 제롬 모렐이 떠들었다.

“이 몸의 무용담이 듣고 싶다고? 그야 물론 존나게 존나 쩔지. 로렌 공작 같은 피라미나 잡던 시절하고는 완전히 격이 달라요. 제국군 조지고, 크라프테군 박살내고, 이 몸이 악마들의 섬에서 적진 한가운데 뛰어들어서 무쌍 찍고 살아나오신 개쩌는 기병장군님이시다, 이거야.”

한껏 으스대던 모렐은 픽 웃었다.

“야, 라파엘.”

가난뱅이 용병대장 주제에 쓸데없이 입맛만 고급이어서 좋은 술을 찾던 친구, 그런 용병대장의 동업자 주제에 화려한 기병 제복의 멋진 모습에 홀딱 반해서 제 목숨도 내놓고 말을 달리던 자신.

“……우린 존나 출세하지 않으면, 존나 끝까지 싸우지 않으면 안 될 줄 알았지. 근데. 존나 출세하지 않았는데, 정쟁에서도 졌는데. 적인 줄 알았던 후작 밑에서, 돌만한 전장은 끝까지 다 돌고 이겼다. ……웃기지 않냐?”

한미한 출신을 벗어던지고 영웅으로 남겠다며, 늘 출세와 권력을 갈구하던 친구는 답이 없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더라. 그때는 막 없던 권력을 손에 넣어보니 눈 돌아가서 안 보였는데. 우리 눈에는 병신 같던 놈들도, 막상 시간이 흘러보니 생각보다 병신은 아니더라고.”

만약, 만약에 그와 그의 친구가 쿠데타 같은 걸 꾸미지 않았더라면.

올라온 자리에 만족하고, 조금은 남들을 믿고, 양보하는 법을 알았더라면.

그랬다면 빛나는 재능을 가졌던 그의 친구는, 지금쯤 저 라파예트와 함께 이 나라의 가장 빛나는 영웅으로 남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제롬 모렐은 막연히, 어딘가에 그런 세계도 있었더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럼 가본다. 너 좋다고 따르던 놈 옆에 묻어줬으니 심심하지는 않겠지.”

제롬 모렐은 엉덩이를 툭툭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 친구에게 말했다.

“이왕 여기까지 살아남았으니, 나는 끝까지 볼란다. 네가 이해하지 못한 후작이, 네가 병신이라고 생각한 이 나라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끝까지 보고.”

그리곤 피식 웃으며 등을 돌렸다.

“질리도록 말해줄 테니 기다려,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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