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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252화 (252/258)

252화. 심연의 성전 – 종막 (4)

연합군과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전쟁은 끝났다.

우리가 부상병을 수습하고 사망자들의 시신을 수습하는 사이 레아라는 서큐버스가 찾아와,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잔존 세력을 대표하여 항복을 선언했다.

우리는 병력을 재정비하자마자 저들의 수도 판데모니움으로 향했고, 한때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본사였던 탑이 완전히 무너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안 돼!!! 마탑의 자산이! 저것들이 얼마나 귀중한 건데!!

……마탑주의 절규는 누가 들으면 세상 다 끝난 것 같았지.

그보다 언제부터 마탑의 자산이었다고.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잔존 세력에 대한 처우는 의견이 분분했다.

개중에는 차라리 깔끔하게 처리해서 후환을 영원히 없애자는 의견도 적지 않았고, 솔직히 나도 내심 그렇게 생각했다.

모두가 저들을 믿을 수가 없으니까.

그러나 결정을 내리기 전, 서큐버스 레아가 나에게 독대를 청했다.

레아는 그레모리가 드론들에 대한 마력 공급을 끊은 뒤 어비스 코퍼레이션 본사를 붕괴시켰으며, 전쟁을 그만두고 나에게 자비를 청하라 명했다고 전해주었다.

……결국, 그게 마지막 대면이었던가.

나는 끝까지 그레모리의 동기나 본심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최소한, 내 숱한 의심에도 불구하고 그 서큐버스는 마지막까지 배신하거나 나를 이용하려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레모리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죽어있을지도 모를 일이겠지.

그리고 그렇다면, 나 또한 그녀에게 최소한의 의리는 지켜줘야 맞다.

일단 결정을 내리자 연합군을 설득하는 것 자체는 생각보다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차피 살아남은 마족들 자체가 서큐버스들이나 사무직처럼 그리 위협적이지 않은 자들인데다, 숫자도 적어서 우리가 충분히 통제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으니까.

게다가 레아를 비롯한 마족의 생존자들은 생각보다 훨씬 협조적으로 나왔다.

물론 저들 딴에는 살고 싶어서 그런 것이기도 하겠지만, 마족들도 바엘과 파이몬의 미친 짓이 딱히 좋아서 따른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지.

연합군도 마족들마저 대부분 드론의 재료로 갈려 나가, 살아남은 마족들 자체가 서큐버스들이나 사무직처럼 그리 위협적이지 않은 자들이고 숫자도 적다는 사실을 안 뒤로는 조금이나마 누그러졌다.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핵심 정보가 모여 있던 본사가 완전히 붕괴되어버린 시점에,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남은 기술을 해석하기 위해서라도 살아남은 마족들의 협조는 필요하다.

특히나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기술을 해석해야 할 장본인 마탑주가 환영했고, 그 마탑주에게서 기술을 받아서 각국에게 판매하기로 한 크리스틴도 지지해 주자 국민의회와 타국의 지도자들도 금방 수긍했다.

결국 숱한 피를 흘려가며 마족들에게 승리를 거두고 나름의 복수를 성취한 이상, 모두가 당장의 증오를 푸는 것보단 이 승리로 얻어 갈 이득으로 눈을 돌릴 수 있게 된 거다.

문도 연결되었겠다, 우리는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잔존세력을 무장해제 시킨 후 연합군의 관리감독하에 존속시키는 것으로 결정했다.

* * *

결정 회의가 끝난 뒤,

판데모니움에서 배정받은 숙소.

나름 전 세계를 상대로 무역을 해오던 어비스 코퍼레이션답다고 할까, 귀빈을 위한 숙소는 굉장히 호사스럽게 준비되어 있었다.

한때는 이곳을 가득 채워 시중을 들었을 다른 종족들과 마족은 거의 다 사라졌고, 우리 연합군이 자리하고 있지만.

나는 크리스틴을 소파에 앉히고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크리스틴.”

크리스틴은 나에게 살며시 미소 지어주었다.

“제가 뭘 했나요. 당신이 고생했죠.”

말은 저래도, 연합군이 이 전쟁의 전리품으로 가장 크게 기대하고 있는 건 마탑을 통해 분석될 악마들의 기술이었다.

배상금도 받기야 하겠지만, 솔직히 생존자도 얼마 안 되는 마족들에게 받아내 봐야 얼마나 받겠어.

그러니 그 마탑의 최대 후원자인 그녀의 입김이 마족들의 처우를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을 거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

“무슨 그런 말을. 당신이 아니었다면 전 마탑주 그 노인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화병 나서 죽었을지 모릅니다.”

현자는 무슨 얼어 죽을 놈의 현자. 돈에 미친 노인네 같으니.

내 말을 들은 크리스틴은 부정하지 않은 채 쿡쿡 웃기만 했다.

그러는 사이 나는 대야에 물을 받아와서 크리스틴의 앞에 내려놓고, 그녀의 부츠를 잡았다.

“아, 그. 제가 해도 되는데.”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니, 가만히 있어 주세요.”

“읏…….”

부츠를 벗기자 크리스틴의 발에는 여기저기 붕대가 감겨 있어, 나는 그녀를 올려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숨기려고 노력은 한 것 같지만, 티가 나더군요.”

크리스틴은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고, 나는 조심스럽게 크리스틴의 스타킹을 잡아당겨 벗기고 그녀의 발에 감긴 붕대를 풀어주었다.

드러난 발은 자잘한 상처로 가득 덮여 있다.

그녀가 평범한 귀족 레이디처럼 얌전한 성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험한 전장에서 구르던 사람도 아니다.

도시나 함선 위에서 돌아다니는 정도는 몰라도, 서로 포격을 주고받으며 엉망진창이 된 전장을 뛰어다니는 건 그녀에겐 상당히 거친 일이었겠지.

“……수고하셨어요. 정말로.”

“읏.”

내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발을 씻어주자, 크리스틴은 통증 때문인지 조금 움찔하더니 입을 열었다.

“……한심하죠? 기껏 여기까지 와서, 제 목숨까지 들먹이며 당신을 협박해서 남았는데, 막상 별 도움은 못 되고.”

나는 크리스틴의 발을 씻어준 후, 수건을 가져와 그녀의 발을 꼼꼼하게 닦아준 후 다시 붕대를 감아주며 입을 열었다.

“꽤 기쁘네요.”

“네?”

“당신이 오랜만에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크리스틴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이 되었고, 그녀의 발등에 입을 맞췄다.

“앗, 더러워요!”

“바로 방금 씻겨드렸는데. 제가 대충 씻겨드릴 정도로 당신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의미인가요, 부인?”

“그, 그런 말이…….”

나는 당황하는 크리스틴의 모습에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

“꼭 최전선에서 직접적으로 위험에 노출되어 있어야 도움이 되는 건 아니죠. 후방에 있다고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나는 조금 고개를 들어, 그녀의 발목에 다시 입을 맞추었다.

“제가 혹시라도 무모한 짓을 할까 봐 같이 목숨을 걸고, 고생한 끝에 다친 사람을 한심하게 여긴다니.”

사랑스러움을 담아서, 그녀의 다리에 입을 맞추며 천천히 타고 올라가-

무릎에 입을 맞춘 후 고개를 들어 올리자 크리스틴의 얼굴은 이 이상은 없을 정도로 새빨갛게 되어 있었다.

“당신이 이 전쟁에서 해준 그 엄청난 역할을 저평가할 정도로 제가 무능하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아니면 제가 당신의 그 모든 노고에도 감사하는 법을 모를 정도로 못된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걸까요?”

“미안해요. 그런 뜻이 아니었- 앗!”

그녀의 다리를 슬며시 들어 올린 나는 일부러 쿡쿡 웃으며 말했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제복치고 치마가 좀 짧아요. 겨우 무릎까지 온다니.”

크리스틴이 입을 헤 벌린 채 멍하니 있는 모양새가 제법 귀엽게 느껴진다.

“당신이 아름답긴 하지만, 그런 자태는 나만 보고 싶은데.”

“……제복 차림의 저를 소파에 앉혀놓고 이런 식으로 감상할 수 있는 건 당신밖에 없는걸요.”

항변이라고 나온 말이 꽤 웃겨서,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크리스틴이 샐쭉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나는 그녀의 머리칼을 손으로 잡아 가볍게 입을 맞추고 말했다.

“여유로워서 좋네요. ……이제야 진짜로 모든 것이 끝났다는 실감이 나.”

크리스틴은 슬며시 웃었다.

“아직 멀었어요, 피에르. 마탑의 조사와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관리도 해야 하고, 승전 기념식도 해야 하고, 사상자들을 위한 추모도 해야 하니까. 게다가, 게르마니아 제국과 동방 제국에서 당신과 여왕 폐하를 초대하고 싶어 해요.”

“끄응…….”

나는 앓는 소리를 냈다.

안 그래도 연합군의 중심이었던 프랑지아나, 국왕이 친정한 크라프테는 상관이 없다.

하지만 게르마니아 제국의 황실 입장에선 이 승리를 저들도 연합군의 주축이었다는 인정을 받고, 불안정한 내부 상황을 잠재우는 데 이용하고 싶어 하는 거겠지.

동방 제국이야 말할 것도 없이, 본국에서 방어하기도 급급했는데 우리가 본국을 점령해 버렸으니 우리가 함께 싸운 거라는 인식을 심고 싶을 거고.

둘 다 명색이 제국인데 주역이 못 되었으니, 하다못해 대등한 관계라도 되어서 위신을 세우고 싶은 모양이다.

“이제야 간신히 끝난 참인데 눈치도 없이 부르기는. 게다가 여왕 폐하께서는 아직 의식도 없으신데 벌써부터.”

에리스는 그 전투 이후 아직까지 긴 잠을 자고 있다.

내심 철렁했는데 사제와 의사들이 진료한 바로는 오히려 전투 이후 에리스의 신성력이 훨씬 강력해졌다면서, 생명에 지장은 없고 힘을 갈무리하는 중이라고 한다.

“필요한 일이니까요. 이 전쟁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고, 그건 우리뿐 아니라 모든 나라가 다 그렇죠. 공공의 적이 사라진 상황에 아직 우호 관계가 남아 있을 때 서로의 생각을 확인하고, 또 상호이익이 관계를 정립해두면 적어도 당분간은 평화의 시대를 맞을 수 있을 거예요.”

크리스틴은 그렇게 말하곤 슬며시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또, 아시잖아요? 피에르. 크록스 왕의 형제국은 이번 기회가 아니면 중앙 대륙의 인간 국가들과 우호 관계를 수립하기가 어려울 거예요. 모처럼 투자해서 만든 맹방인데, 기왕 할 거면 제대로 끝까지 밀어줘야죠.”

“하하, 못 당하겠군요. 당신 같은 참모를 둔 나는 행운이지만, 가끔은 너무 유능해서 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칭찬으로 들을게요, 피에르.”

바로 방금까지만 해도 얼굴을 붉힌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 귀여웠는데.

“이것 참, 여왕 폐하께서 깨어나시는 대로 다시 바빠지겠군요. 레온과 플레르가 제 얼굴을 까먹는 거 아닌가 걱정이군요. 제가 돌아다니는 동안은 천상 당신에게 부탁해야겠어요.”

“아…….”

지금도 저택에서 듀몬트와 유모가 보살피고 있을 아이들의 이야기에, 크리스틴은 허를 찔린 얼굴을 했다.

“왜 그러시죠, 크리스틴?”

“……당신이 해외를 도는 동안, 저는 이곳에 남아 어비스 코퍼레이션을 관리하고 마탑을 지원할까 봐요.”

“음?”

그녀가 해주면 그야 든든하겠지만, 전쟁도 다 끝난 마당에 굳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 크리스틴은 이내 쓴웃음을 짓더니 입을 열었다.

“……저는 멋대로 여기 따라와서, 제 목숨을 들먹이며 당신을 협박하다시피 했죠.”

“아직도 그 소리를. 당신이 증원군을 제때 내려준 것이 아니었다면 우린 결국 무너졌을 테고, 당신이 이곳에 와있다는 것만으로도 저는 절망에서 벗어났습니다. 보급관리가 완벽하기도 했고, 당신이 승리에 핵심적인 기여를 했다는 건 빈말이 아니에요.”

나는 진심으로 한 말이었지만, 크리스틴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게 아니에요, 피에르. 저는, 당신이 죽어버리면 저도 차라리 함께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무작정 달려왔죠. ……그 판단을 내리는 순간에 레온도, 플레르도 떠오르지 않았어요.”

“…….”

“아이를 가진다면 좋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저를 자랑스러워하며 자랄 수 있게 해주고 싶다고. ……그렇게 말해놓고.”

크리스틴은 짙은 자괴감을 드러내고 있다.

“정작 가장 급한 순간에는 아이들은 아무래도 좋고, 저 자신만을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저도 결국, 아버지의 딸인 거죠.”

죽어버린 아내를 그리워하느라, 정작 딸인 크리스틴은 돌보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로 눈을 돌려버려…….

결국 그녀의 죽음마저 묵인하려고 했던 사람.

그는 죽었지만, 그 그림자는 아직까지 크리스틴에게 남아있는 건가.

“……미안해요, 피에르. 저는 결국, 좋은 어머니는 될 수 없어요. 아이들은 차라리 좋은 선생님께 배우며 자라게-”

크리스틴의 말은 내가 그녀를 끌어안으며 끊겼다.

“당신은 선대 백작과는 달라요. 당신이 한 일이 아이들에게 미안한 일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고, 그 아이들에게 뭐가 더 좋을지를 고민할 수 있잖아요.”

“……하지만. 저는 냉혹하고, 이기적인 사람이에요. 제게 소중한 이들만 잘 되면 나머지는 아무래도 좋은, 그런. ……마녀라고 불려도 솔직히 할 말 없죠. 저 같은 사람이 아이들을…….”

크리스틴은 차마 그 이상은 말하지 못했다.

뭐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아이들을 사랑할 자격이 있느냐고,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당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제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런 말은 넘치도록 해준 것 같은데…….”

그럼에도 크리스틴에게는 그리 와닿지 않았던 걸까.

그것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크리스틴의 평생, 그녀는 자유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어머니가 죽은 후 사랑하는 아버지를 돕고자 최선을 다한 결과, 그녀는 오히려 아버지의 의심과 경계를 샀다.

슬픔에 잠겨 무기력해진 아버지 대신 헌신적으로 상단을 운영하며 가문의 번영을 이끌었는데도, 그녀의 운명은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나와의 정략혼으로 엮였다.

크리스틴은 그래도 정략혼에 순응하여 얌전히 상단을 넘기고 가문을 나가려고 했지만, 새 백작부인이 된 이본느에게 공격받아 원하지도 않던 골육상쟁을 벌여야 했지.

고작 18세의 나이에 그렇게 가문 내의 싸움에서 이기고도, 죄 없는 루이스에게 원래 돌아갈 자리를 빼앗았다는 죄책감으로 스스로를 얽매어 그에게 부채 의식을 가지고 보낸 시간이 10년이다.

그 길을 지나며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냉혹한 수단을 자연스럽게 익히게 된 것은 그녀의 탓이 아니다.

오히려 그 길을 지나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법을 배웠는데도 오히려 그에 상처받기도 하는 그녀는 평범한 삶을 살았다면 분명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이 되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내가 아무리 그녀를 높이 평가하고, 그녀를 사랑해준다 한들. 크리스틴이 자기 자신을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을 고쳐줄 수는 없겠지.

나는 크리스틴에게서 조금 떨어져서,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쓸어 넘겨주며 입을 열었다.

“크리스틴, 당신이 아이들을 망칠까 두려워요?”

“……제가 저 스스로를 아니까요.”

크리스틴은 자신을 그녀의 아버지에게, 혹은 이본느에게 투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크리스틴. 당신의 아버지는, 그리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죠?”

“…….”

크리스틴은 소리 내어 답을 하지는 못했지만,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나는 그에 슬며시 웃으며 물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아버지를 그리워하지 않았나요?”

크리스틴은 눈을 크게 뜬 채로 굳었다.

“아이들은 지금도 우리를 그리워하고 있을걸요. 그 아이들에게 당신은 아키텐의 검은 마녀가 아니에요. 그냥 엄마, 어머니지.”

“하지만, 만약 아이들이 나중에-”

“쉬이.”

나는 크리스틴의 등을 어르듯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속삭였다.

“당신은 이미 실패한 부모들을 봤고, 당신 자신이 그들처럼 될까 봐 두려워하고 있어요. 그런 당신이 똑같은 실수를 할 정도로 어리석나요?”

“…….”

“게다가 저도 있는데. 당신이 보는 저는, 당신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도록 내버려 둘 만큼 미덥지 못한 남편인가요?”

크리스틴은 내게 안긴 채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고, 나는 그녀에게서 살짝 떨어져 그녀를 마주 보며 웃었다.

“당신은 멋진 사람이에요. 당신을 속박하던 그 모든 사슬과 굴레를 벗어던지고, 저와 함께 여기까지 온 사람. 그러니, 당신은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요.”

나는 흔들리는 크리스틴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내가 가진 모든 신뢰와 사랑을 담아 속삭였다.

“제가 함께 있고, 당신은 이미 자유니까. 당신의 삶을 강제하던 것들은 이미 없는데,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두려워할 이유가 있나요?”

“아……. 아아…….”

크리스틴의 뺨을 따라 눈물이 흘러내려, 나는 그녀의 눈물을 손으로 닦아내 주며 속삭였다.

“울지 말아요, 크리스틴. 이제부터는 웃을 일만 만들어줄 테니까.”

크리스틴은 눈물 흘리며 미소 짓고-

나에게 입을 맞추었다.

눈물 맛이 나는, 부드러운 입맞춤.

그것이 두 번, 세 번째 떨어졌을 때.

슬픔의 눈물 맛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서로를 탐닉하는 열정이 대신 들어찼다.

“자, 그럼. 다 끝났으니-”

조금 길게, 거칠게 즐겨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크리스틴을 안아든 순간.

노크 소리가 났다.

아, 뭔데.

“……무슨 일이지?”

“실례합니다, 후작 각하. 조제 바셰입니다! 여왕 폐하께서 눈을 뜨셨습니다!”

“…….”

나는 천천히 크리스틴을 다시 소파에 내려놓았고, 그녀는 말없이 주섬주섬 다시 스타킹을 신고 부츠를 신기 시작했다.

“……후. 곧 찾아뵌다고 일러.”

“알겠습니다, 후작 각하! ……그, 혹시, 제가 무슨 실수라도 했습니까?”

문도 안 열어준 건데 내 목소리가 심히 불편하다는 걸 깨달은 건가.

실수…….

…….

하긴 했지.

눈치도 없는 부관 놈…….

“……되었고, 가서 고하기나 해.”

“예, 옛!”

불쌍한 바셰가 문 밖에서 물러가고.

눈이 마주친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쿡쿡 웃었다.

“하여간, 왕족들이 문제야. 타이밍하곤.”

크리스틴은 부츠를 마저 신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가실까요, 불경한 남편 씨?”

그리곤 슬며시 미소 지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여왕 폐하를 뵙고, 돌아가야죠. 우리…….”

지금 크리스틴이 짓는 미소는, 분명 죽는 날까지 잊지 못하겠지.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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