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251화 (251/258)

251화. 심연의 성전 – 종막 (3)

“고맙네, 바셰.”

나는 조제 바셰가 뻗은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그의 손을 잡고 일어서는 것만으로도 팔이 후들후들 떨리는 걸 보니, 정말 한계까지 싸웠군.

마력이 고갈된 건 물론이거니와 몸 안에서 계속 도는 것이 느껴졌던 신성력도 없다.

전신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다.

……그래도.

바로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에게 악착같이 달려들던 악마가 축 늘어져 바닥에 누워 있다.

파이몬.

흉측하게 말라비틀어져, 미라처럼 변해버린 이 시체가 그 악마가 맞나?

어째 실감이 잘 안 나서 멍하니 시체를 바라보고 있는데-

“보라! 이 위대한 마도의 힘을! 이 위업을! 마탑의 역사에 기록될 또 하나의 찬란한 영광이로다!”

경박하기 그지없는 노인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와아아아!”

“사, 살았어! 살았다고!”

그제야 진영 전체에서 환성이 터져 나오고, 나도 주변을 둘러보고서야 안도할 수 있었다.

바로 방금까지만 해도 우리 모두를 전멸시킬 것처럼 몰아붙이던 드론들도 전부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축 늘어져 있다.

중앙 대륙에서도 무위로는 손꼽히는 셋을 동시에 상대하고, 대마법마저 두 팔로 받치고 버티던 바엘조차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마탑주의 대마법은 확실하게 마족과 드론들을 통째로 쓸어버렸다.

“하, 이걸.”

진짜로 이겼네?

정말로, 이긴 거구나.

모두가 기쁨의 환성을 울리는 가운데-

나를 일으켜준 조제 바셰는 아직도 파이몬의 시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못 박힌 듯 서있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잡아주었다.

“……수고했네, 바셰.”

동생의 원수를 갚은 남자가 멍하니 내게 시선을 돌려서, 나는 그에게 작게나마 웃어주며 덧붙였다.

“어때, 내가 그대를 다시 기용한 게 그냥 선처는 아니었지?”

-저는 무능한 놈입니다. 하찮은 감정에 휘둘려서 수많은 부하들을 잃고, 굴욕적으로 포로로 잡힌 놈입니다. 저따위에게 선처를 베푸시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후작 각하.

크라프테군에 포로로 잡혔을 때, 그는 그렇게 물었었다.

동생을 자기 손으로 베고는 원치 않은 전쟁에 끌려 들어가, 함정에 빠져 자책감에 사로잡혔던 남자.

그는 그제야 현실감을 찾은 듯, 그 자리에 무릎 꿇고 앉더니 눈물을 흘렸다.

“감사합니다, 후작 각하. ……감사합니다.”

“……내가 감사할 일이지. 덕분에 살았으니.”

나는 흘긋, 두 번 다시 움직이지 못할 파이몬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저 악마는 끝까지 나만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결국 저 악마에게 최후를 선사한 건 저자의 눈에는 들어오지도 않던 존재, 저 자가 세운 큰 계획의 틀조차 되지 못한 자.

“잭…….”

나는 눈물 흘리는 바셰가 혼자 있을 수 있도록 등을 돌려, 멀찍이에 털썩 주저앉아 있는 크록스에게로 다가갔다.

“괜찮나, 크록스?”

“으하하하하, 물론 괜찮지, 형제! 하! 강적이었구만!”

말과는 달리, 전신이 상처투성이인 것이 한눈에 보기에도 심하다.

에리스의 가호가 있긴 했지만 지금쯤 효과도 다했을 거고…….

“일단 치료라도 좀 받지. 이대로 두면 흉터가 배로 늘겠어.”

그러지 않아도 근육질 거구에 흉터까지 그득해서 험악하기 그지없는데…….

“아니, 필요 없다!”

“뭐?”

“강적에 맞서며 얻은 영광스러운 상처다! 마땅히 훈장으로 남겨야 하지 않겠나! 으하하하하!”

“그, 그런, 가…….”

나름 문화적 차이에 대한 관용은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조차 자만이었나.

크록스의 몸에 가득한 흉터는 이베리카의 왕으로서 온갖 고난과 역경을 지나온 증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이런 마초적인 이유로 방치되어서 생긴 거라고 생각하니 환상이 다 깨지는 기분인데.

“그래, 좀 쉬게.”

“으하하하, 그러지!”

나는 착잡한 얼굴로 시선을 돌려, 가스통과 보몽 경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그래도 크록스보다는 상태가 낫다.

아무래도 크록스가 보다 더 공격적이고 위협적으로 굴어서 공격을 집중적으로 받아준 덕도 있겠지.

“수고하셨습니다. 보몽 경.”

보몽 경은 내 말을 듣자마자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끌끌, 아쉽군요. 10년만 더 젊었더라면 더 그럴싸하게 싸웠을 텐데…….”

그러게. 이미 50이 넘은 중년의 몸으로 그 괴물 같은 자를 상대했으니.

왕년의 근위 기사, 그것도 황제가 총애하는 여자를 믿고 맡길 정도였으니까.

“그럼 전 여왕 폐하께 가보겠습니다.”

“그러시죠.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그래도 치료는 받고 가십쇼. 여왕 폐하께선 아무래도 한동안 일어나지 못하실 테니까요.”

보몽 경이 손을 휙휙 흔들며 걸어가고서야, 나는 주저앉아 있는 가스통에게 가서 손을 뻗었다.

“수고했네, 가스통.”

가스통은 씩 웃으며 내 손을 잡았고-

“으억.”

나는 그를 일으켜주다 어이없이 휘청거릴 뻔했다.

아, 이거 참 민망하게. 내가 정말 너덜너덜하군.

“헛, 죄, 죄송합니다, 후작 각하.”

“아니. 내가 미안하지, 뭘. 그래도…….”

나는 여기저기 상처가 난 가스통을 보며 씩 웃었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마왕도 상대해 봤으니 이젠 정말 기사의 꿈으로 이룰 건 다 이룬 것 같은데?”

가스통은 머리를 긁적이더니 이내 밝게 웃었다.

“저는 행복한 놈입니다.”

그러기가 무섭게 샨드라가 뛰어와서 그에게 덥썩 안겼다.

“란!”

……마왕에 맞선 최강의 기사와 그의 레이디라.

둘 다 피칠갑을 하고 있지만, 저런 것도 나름 맛이겠지.

나는 조금 민망해하는 가스통에게 픽 웃어주고 등을 돌렸다.

이긴 건 기쁘지만 사상자가 많을 테니 수습도 해야 하고, 대체 어떻게 증원군이 온 건지도 파악해 봐야겠는데 데미앙은…….

“으하하하! 살았어, 난 또 살았다고! 봐라! 이 방어의 명장께선 불사신이시다!”

“오오오오-!”

아주 개판들 나셨어…….

나는 아주 난장판이 된 혁명군 진영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행히 이럴 때에도 할 일을 찾아 하는 사람은 있는 법.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후작 각하!”

후방에서 총지휘를 맡았던 루이 드제가 말을 몰아 달려와, 나에게 경례했다.

“본대 지휘, 수고했네. 총사령관 대행.”

드제는 싱긋 웃으며 답했다.

“영광이었습니다.”

“다들 기뻐하지만 사상자가 극심하니 수습 좀 할 수 있게 해주고……. 그래서 저 증원군은 어떻게 온 거지?”

나는 한창 환호성을 지르고 있는 드워프들과 국민의회의 3당 문장을 같이 달고 있는 혁명군을 보며 물었고-

“그건 답해주실 분이 직접 오셨습니다.”

“음?”

드제의 답에 내가 의아해하고 있자 이 전장에는 어울리지 않는, 연륜과 침착함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에 뵙는 것 같소, 후작.”

“브리소 총재?”

자유당 총재 니콜라 브리소.

전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나이 든 정치인은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고생 많으셨소, 후작. ……나는 늦게 왔지만, 이 전장을 본 것만으로도 얼마나 치열한 격전이었는지 잘 알겠구려.”

“총재님이 여기까지 와 계셨을 줄은…….”

브리소는 허허로이 웃으며 답했다.

“여왕 폐하께서 남은 군대를 이끌고 멋대로 상륙해버린 후, 국민의회는 발칵 뒤집혔었지.”

“그, 그랬죠…….”

격전을 벌이느라 잊고 있었는데, 나와 에리스는 물론 크리스틴까지 청문회에 출두하라고 했었지?

“헌데, 문득 깨닫게 되더군. 국민의회는 언제나 후작과 여왕 폐하께 전쟁을 떠맡겨놓았었다는 걸. ……예산 같은 문제로 방해나 안 하면 다행인 수준이었지.”

브리소는 느릿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심지어 우리의 혁명이 터진 이유가 바로 이 악마들 때문인데 말이오. 하여, 우리는 처음으로 모든 걸 다 동원해서 그대와 여왕 폐하를 돕기로 결정했소. 뭐, 말이 이렇고 혁명의 근간이 된 전쟁인데 귀족과 여왕만 나서서야 되겠냐는 마음도 있었소만.”

“하하…….”

“탈레랑은 알프스 왕국을 설득했고, 앙쥬 백작은 사관학교의 생도들과 예비군을 동원하고, 우리는 전비를 구했지. 다급했지만, 국민의회가 언제 이렇게 한마음 한뜻으로 일해봤나 싶소. 이 섬에 내가 직접 발을 들인 건 어차피 은퇴할 예정이었고 살만큼 살아서였지만…….”

브리소는 어디까지나 천천히-

“이 말을 직접 해주고 싶어 서기도 했소.”

담담하고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후작은 이 노인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도록 해주었소. ……하여, 이번에는 내가 지금까지 프랑지아를 수호하며 전장을 전전해온 그대가 후회하지 않게 해주려고 왔소.”

-이 어리석은 노인의 독단을.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도록 해주시겠소?

크라프테와의 전쟁에서, 나를 몰아낼 수 있는 정보를 가지고도 눈을 돌린 사람.

한때는 그저 최악을 피하기 위한 차악으로 택한 조직의 구성원이자, 우유부단하여 손잡기 편하다고 여겼을 뿐이었던 이.

“감사합니다. ……그리고, 축하드립니다.”

“음?”

“저 악마들을 꺾는데 제힘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결국 최종적인 승리를 거둔 건 여러분입니다.”

니콜라 브리소는 잠깐 멍한 표정을 하더니, 이내 미소 지으며 답했다.

“그래, 혁명이 승리했소. 하지만 그대야말로 우리의 가장 자랑스러운 일원이니, 축하는 같이 누려야 하지 않겠소?”

* * *

에리스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이 어두운 복도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둡고, 퀴퀴한, 감옥의 복도.

아아-

또 그 꿈이구나.

철컹.

끼이이이익-

녹슨 경첩이 내는 소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에리스는 담담한 얼굴로 그 문으로 간수가 들어서는 것을 기다리다가, 고개를 슬며시 기울였다.

들어선 자는 간수가 아니었다.

긴 금발의 머리칼에, 수녀복을 입은 여성.

수녀복이라기엔 상당히 불순한 차림이지만, 아무튼 간수가 아니다.

이런 꿈을 꾼 적이 있던가?

에리스는 그렇게 생각하고, 슬며시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성녀님?”

“진짜 성녀에게 성녀라고 불려보는 신기한 경험을 다 해보네요.”

최초의 성녀가 그렇게 말하며 쿡쿡 웃어서, 에리스는 나직하게 물었다.

“제가 죽은 건가요?”

최초의 성녀는 어둠 속에서도 금빛으로 빛나는 눈을 휘며 웃고, 에리스에게 손짓을 했다.

에리스는 고분고분하게 시키는 대로 그녀에게 걸어갔지만, 입으로는 한탄했다.

“신께서도 그렇고, 그냥 좀 순순히 답해주시면 안 되나요…….”

성녀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쿡쿡 웃고는 입을 열었다.

“아쉽네요.”

“뭐가요?”

“당신의 꿈에는 도저히 접근할 수 없어서 직접 만나보진 못했는데…….”

성녀는 에리스의 손을 잡아 이끌며 덧붙였다.

“우리가 만약 만났더라면, 꽤 잘 맞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성녀는 그렇게 말하며 문을 열었고-

갑작스럽게 번지는 빛에 에리스가 눈을 깜빡였을 때는 장소가 변해 있었다.

에리스는 이번 장소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녀가 지난 삶을 마감한 광장.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꿈속에서 본 장소.

그녀가 처형당했을 때와 같이, 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에리스를 야유하지 않는다.

에리스는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려, 하늘로 향했다.

그녀의 시력을 앗아가, 그녀를 비난하던 자들을 알아볼 수 없게 만들었던 태양은 없다.

다만 푸르른 밤하늘과, 광장을 은은하게 비추는 별빛만이 가득하다.

에리스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그녀를 인도해온 금빛의 성녀를 바라보았다.

성녀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나름의 속죄에요.”

“속죄요?”

“혹은 보답이거나.”

에리스는 그녀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고 있자 한 기사가 다가와, 성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성녀는 에리스도 깜짝 놀랄 만큼 화사하게 미소 짓더니 에리스의 가슴께에 손을 얹었다.

“당신은 괜찮을 거예요.”

에리스가 미처 반응도 하기 전에, 가슴으로 따뜻하고 부드러운 기운이 흘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신성력이라는 걸 에리스가 깨달았을 즈음, 성녀의 몸은 반쯤 희미해지고 있었다.

“자, 잠시만요!”

성녀는 그저 웃기만 하고, 그녀의 앞에 무릎 꿇고 있던 기사의 손을 잡았고-

그대로 함께 빛으로 흩어져, 연기처럼 하늘로 피어올랐다.

“……결국, 끝까지 자기 할 말만 하고 사라지긴.”

에리스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렇게 읊조렸지만, 어째서인지 뭘 해야 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거니까.

에리스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광장의 중앙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이전 생처럼, 언제나의 꿈처럼, 목조로 만들어진 섬뜩한 구조물이 있다.

그녀의 목을 자르고, 수도 없이 많은 이들을 죽인 단두대.

그 단상 위에, 막시밀리앙 이지도르가 서 있다.

그러나 에리스는 그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지도르 또한 그녀에게 사형을 청구하라고 날카롭게 외치는 대신, 그녀에게 정중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에리스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단두대가 있는 단상에 올랐다.

섬뜩한 칼날은 그대로이나, 영혼까지 물들여 버릴듯한 피비린내는 없다.

이곳은 에리스가 살해당한 과거와, 개변된 미래의 경계선.

단상에 오른 에리스는 천천히 등을 돌려, 광장에 가만히 서서 그녀를 보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무수한 이들이 있다.

누군가는 에리스도 아는 얼굴이지만, 대부분은 모르는 이들이다.

숱하게 많은, 이 광장을 거쳐 간 이들.

나름의 속죄.

혹은 보답.

그들의 얼굴을 본 에리스는 그제야 성녀가 말한 의미를 확실히 깨달았다.

그들은 에리스를 죽인 이들이다.

동시에, 그들 스스로를 죽인 이들이다.

자유, 평등, 박애의 기치를 걸고 혁명을 일으켰으나, 서로를 의심하고 증오한 끝에 그들 스스로를 파멸로 몰아간 이들.

그녀의 기원으로 피에르가 바꾼 역사에서는 구원받은 이들.

구할 힘이 있었음에도, 에리스가 구하지 못한 이들.

에리스를 짓눌러온 책임감의 근간.

성녀가 주고 간 신성력이 가슴에서부터 몸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끼며, 에리스는 천천히 단상에 걸터앉았다.

자신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의 넝마 같은 옷이 아니라, 언제나 즐겨 입고 다니던 로브 차림이라는 것을 깨달은 에리스는 작게 미소 지었다.

원하는 것만으로, 하프가 그녀의 품에 안겨 있었다.

에리스는 천천히, 익숙한 하프의 현에 손을 가져다 대어-

연주를 시작했다.

저들을 마땅히 도와야 한다고 배웠다.

그러나 제대로 돕지 못했다.

저들을 원망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라도, 행복하게 살고 싶다.

그러나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저 작은 기적. 마지막 순간의 기원 하나만으로도 더 나은 결과를 줄 수 있었는데도.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채 끝나버린 과거의 비극.

그렇게 에리스를 희생시키고, 희생당한 이들에게 바치는 진혼곡.

마음과 기원을 담아 연주하는 노래가, 별빛 아래의 광장에 울려 퍼지고-

하나, 둘.

광장을 가득 메운 이들이 빛으로 흩어져 하늘로 오르기 시작했다.

우울함과 간절함을 담은 얼굴을 하고 있던 이들이, 빛으로 화하는 순간만큼은 편안한 얼굴이 되어 사그라든다.

이건 구원일까?

그녀는 알 수 없다.

그저 위안일까?

그것도 알 수 없다.

다만 언젠가.

언젠가, 그녀도 저들처럼 하늘로 올랐을 때.

저들이 지금 빛으로 화하는 순간처럼 웃어주기를 바라며 노래한다.

전생에서는 그녀에게 가혹한 처사를 내렸던 막시밀리앙 이지도르.

현생에서 그녀가 달려갔을 때는 이미 차갑게 식어있던 남자도 그녀에게 정중히 인사하고, 그대로 빛으로 화해서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본 얼굴에서, 미약하나마 미소를 본 것 같았다.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던 이들이 점점 빛으로 화해 사라져 가는 가운데-

에리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의 앞에 있는 남자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래도 기도는 해드릴게요. 오라버니께 증오와 복수심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해질 수 있기를, 오라버니께서 신의 품 안에서는 조금이라도 평안할 수 있기를. ……저 같은 애한테도 계속 힘을 주시는 신이라면, 생각보다 관대하실 수도 있으니까요.

오라버니.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제가 오라버니 대신 이 나라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고 선행을 할게요. 그걸로 오라버니가 질 죄의 무게가 조금이라도 가벼워질 수 있게.

고해성사를 청했다가, 단두대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하고 죽은 남자는.

부드럽게 미소 지은 채 천천히 빛으로 흩어졌다.

에리스가 그에게 마주 웃어주자, 그는 사라져가는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켰고-

에리스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눈물을 쏟을 뻔했다.

떨리려는 손을 어떻게든 움직이며, 연주를 이어 나갔다.

왜냐하면.

에리스와 똑 닮은 여성이.

그녀의 어머니가, 에리스를 보고 있었으니까.

이렇게 열심히 하면.

이렇게 발버둥 치면.

그러면 하늘에 올라 신을 뵈었을 때, 대신 어머니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그렇게 빌던 어머니의 얼굴은 고통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지옥에서 괴로워하고 있지도 않았다.

어머니는 그저, 에리스가 아주 어린 시절 보았던 것처럼 상냥하게 미소지어 주었다.

에리스는 그것만으로도 구원받았다.

마침내 어머니마저 빛으로 화하여 하늘로 오르고.

에리스는 텅 빈 광장에서 시선을 들어 올려, 반짝이는 별로 가득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눈물이 흐를 것만 같다.

사실은 연주 따위 당장 그만두고, 어머니에게 안기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니까.

언젠가, 언젠가.

저 하늘에 올랐을 때, 찾아뵙고 말씀드리자.

저는 최선을 다했어요.

그리고.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누구보다 밝게, 누구보다 행복하게 웃으면서, 그렇게 말할 수 있게.

그러니까, 지금은.

이 기적을 보여준 신께, 성녀에게 감사드리자.

에리스는 천천히 눈을 감고, 경계에서 깨어났다.

그녀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돌아가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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