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250화 (250/258)

250화. 심연의 성전 – 종막 (2)

“와아아아아아아!”

“돌격하라!”

드워프들과 혁명군의 갑작스러운 증원에 드론들의 공세가 가로막혔다.

어떻게든 연합군을 압도하고는 있었으나, 손실이 적지도 않았다.

긴 전투 동안 무수한 드론들이 파괴당했고, 이제 그의 정신에 연결된 드론은 처음 병력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 전혀 상정하지 못한 적의 증원이 쌩쌩한 채로 등장하자, 다 무너져 가던 연합군은 태세를 정비할 시간을 벌었다.

“이럴, 수는.”

파이몬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신음했다.

이해할 수가 없다.

연합군은 이미 정예병이란 정예 병력은 다 차출해서 보낸 뒤다.

적어도 서큐버스들이 마지막으로 확인한 순간까지, 혁명군이 추가 증원을 요청하는 기미도 없었다.

요청받은 것도 아닌데, 문도 열린 상황에 프랑지아 본국에서 본토 방위 병력조차 남기지 않고 추가 증원을 보냈다고?

드워프들까지 보태서?

그에게 연결된 드론들의 숫자가 빠른 속도로 줄어든다.

파이몬은 그 허망한 느낌에 휘청거리며 물러났다.

그리고 마력이 뒤틀리는 느낌을 받곤 망연히 시선을 들어 올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그를 머리 위에서부터 덮어버릴 듯한 거대한 푸른 마력의 구체를.

“이렇게, 허무하게.”

400년을 기다려온 해방이, 바엘에 반기를 든 야망이.

바엘도 아니고, 피에르 드 라파예트도 아니고, 이해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 열등 종족들 때문에 이렇게 사그라 든다고?

“허무하지? 내가 바로 방금 겪어봐서 아는데 기분 참 개 같을 거야.”

파이몬은 비아냥거리는 소리에 시선을 내렸다.

검 하나 제대로 들 힘도 없는 주제에, 피에르 드 라파예트는 그를 보며 웃고 있다.

파이몬의 가슴에 불길이 피어올랐다.

교만. 질투. 분노. 색욕. 탐욕. 탐식. 갈망. 태만.

그 질척질척하고 검은 죄악들로.

애증인지, 소유욕인지, 뭔지도 모를 모든 감정들이 엉망진창으로 뒤섞인 채.

“피에르-!”

파이몬은 그에게 달려들었다.

어차피 실패한다면, 그라도 영원히 소유하기 위해.

“크헉?!”

그러나 파이몬은 뜻을 이루기도 전에, 그대로 가슴을 부여잡으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쿨럭, 크헉...!”

마력이 급속도로 그의 몸에서 빠져나간다.

“이게, 대체.”

적의 대마법의 영향?

벌써?

아니, 그게 아니다.

이건.

“크윽?!”

“읏?!”

파이몬은 마력의 폭풍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하고, 바엘에게 맞서던 자들이 그 돌풍에 휩쓸려 밀려나고서야 어떻게 된 일인지를 깨달았다.

판데모니움에서 전송되는 마력.

꿈속에 잠겨든 예비 드론들에게서 추출해, 그의 뿔을 거쳐 각 드론들에게 전송되어야 할 마력이 끊겼다.

아니, 가로채였다.

파이몬은 눈에 핏대를 세우며, 바엘의 뿔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마력 문자를 보았다.

저, 빌어먹을 개자식이!

미리 깨달아야 했다.

파이몬에게 주도권이 있지만, 드론의 제어권은 저 자에게도 있다.

바꿔 말하면, 판데모니움에서 전송될 마력을 저자도 받을 수 있다.

마력의 통제라면 저자가 그보다 몇 수는 위니, 가로채려면 얼마든지 가로챌 수 있는 거다.

파이몬은 그 순간에도 무수한 드론들이 그의 마력을 순식간에 빨아들이는 것을 느끼며 울분을 토했다.

“빌어먹을! 무슨 짓이냐, 바엘! 여기서 드론들을 다 잃기라도 할 셈이야!”

저 드론들이 파이몬의 마력을 전부 빨아내고 나면 결국 유지할 힘을 잃고 먼지로 바스라질 뿐인데!

그러나 바엘은 오만하게 답했다.

“예비 드론들은 판데모니움에도 있지 않나. 여기서 다 같이 죽어서야 아무 의미 없지.”

넘치는 마력으로 그의 등에 났던 치명적인 상처가 급속도로 아무는 가운데, 바엘은 두 손을 하늘로 들어-

그대로 지면으로 낙하하던 거대한 푸른 마력구를 받쳐 들었다.

“우오오오오오……!”

판데모니움을 통해 전송되는 막대한 마력을 쓰고 있는 바엘조차 발이 땅에 파고들며 버거워하지만, 푸른 재앙은 그 압도적인 힘 앞에 낙하를 멈췄다.

“뭐, 뭐!”

“미친!”

파이몬에겐 적들의 경악 따위를 느긋하게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크헉!”

그는 푸른 피를 토했다.

몸 안의 마력이란 마력은 전부 빨려나가는 통에 장기고 뭐고 엉망진창이 되고 있다.

그는 죽어가고 있다.

다름 아닌 그의 발명품들에 의해.

바엘 저 병신 새끼는 대마법을 언제까지 버티려고? 버티는 내내 판데모니움의 마력을 쪽쪽 빨아먹고 드론들과 그는 먼지로 만들 셈인가?

차라리 여기서 연결을 차단하고, 드론들을 전부 포기해야 하나?

이렇게 허무하게?

그러나 그것은 곧 파이몬의 패배다.

여기서 살아남는다 한들 바엘에게 반기를 든 그가 드론들을 포기하면 나중에 숙청당할 뿐이다.

파이몬은 이를 갈며 판데모니움으로 명령을 전송했다.

그는 이런 식으로 죽을 수 없다.

한계를 넘어선 마력 추출로 본국에 남은 예비 드론들을 전부 망치는 한이 있더라도, 우선 살아야 한다.

저 뇌까지 근육으로 찬 병신이 대마법은 막아줄 테니, 그의 생명과 드론을 지켜야 한다.

파이몬의 명령이 전송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판데모니움에서 추가로 쥐어 짜여진 마력이 그의 뿔로 전송되기 시작했다.

그 가혹한 추출에 행복한 꿈의 환상마저 깨진 듯.

절망과 고통이 한껏 배어 뒤틀린 마력의 감각이 파이몬을 환희에 차게 해주고, 다시 드론들에게로 분배된다.

“하아아, 살 것 같군.”

파이몬은 간신히 한숨을 돌리고 고개를 들었다.

마탑주의 대마법과 판데모니움에서 전송되는 마력까지 끌어모은 바엘의 격돌로 몰아치는 마력의 폭풍 때문에, 마력도 적은 열등한 종족들은 감히 이쪽으로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일단 대마법은 바엘이 어떻게든 중화시켜 낼 거다.

저 빌어먹을 개자식도 저만한 대마법을 상쇄시키고 나면 기진맥진할 테니, 여기서 처리해야 하나?

제길, 판데모니움의 예비 드론들은 이런 마력 추출을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지?

다음 승리의 수는-

파이몬의 영민한 두뇌가 빠르게 회전하다가-

턱, 멈췄다.

“크헉?”

마력의 전송이 멈췄다.

“으, 으오오오오오!?”

그의 몸 주변에 휘몰아치던 마력의 폭풍이 멈춰 바엘마저 경악하는 가운데, 파이몬은 멍하니 의문을 품었다.

왜?

판데모니움의 예비 드론들이 동시에 죄다 죽기라도 했나?

아무리 가혹하게 추출했다고 해도 그 잠깐이다.

지금 판데모니움에 남은 예비 드론 대부분이 마족들인데, 열등 종족도 아닌 그들이 이렇게 잠깐을 못 버틸 리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파이몬은 다급하게 명령을 전송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거부.

침묵도, 무엇도 아닌, 거부.

드론의 개발 단계부터 관여한 그의 권한을 대체 누가 거부할 수 있지?

파이몬의 입에서 투둑- 푸른 피가 떨어졌다.

……있다.

나중에 삽입된 관리 권한 따위 무시할 수 있던 파이몬의 관리 권한처럼.

예비 드론이 꿈속에 잠겨 행복한 환상을 보며 에너지를 추출당하는 과정의 설계에 참여한 악마가.

“그레, 모리…… 크헉!”

파이몬은 푸른 핏덩이를 토해냈다.

마력이 급속도로 고갈된다.

드론들은 그저 입력된 대로, 자신들의 유지에 필요한 마나를 가차 없이 뽑아간다.

그의 몸을 망치고도 부족해서.

“아, 아아, 아아아…….”

아름답고 선명하던 핏빛의 머리칼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새어버린다.

수십 년만 살면 비참하게 노쇠하는 인간마냥 피부가 쭈글쭈글해지기 시작한다.

“안 돼, 안 돼, 안 돼!”

파이몬은 그의 마지막 생명마저 뽑혀나가기 전에 대지를 박차-

피에르 드 라파예트에게 달려들었다.

“크윽?!”

“치워, 치워, 치워!”

파이몬은 정신없이 주먹을 내리쳐, 피에르의 검을 두들겼다.

죄악도, 애증도, 감정도, 무엇도 없다.

핏발 선 파이몬은 그저 본능적으로 이 자리에서 가장 강력한 마력과 생명력의 근원을 가진 자에게 달려들었을 뿐이다.

“마력, 마력을 내놔!”

충분한 마력이 없는 그의 뇌는 이미 짐승의 그것처럼 전락하여, 드론과의 연결을 끊는다는 발상조차 떠올리지 못했다.

그리고 그 순간.

촤악-

마력이 고갈되어 쇠약해진 그의 두 손이 잘려나갔다.

“아?”

파이몬은 푸른 피가 뿜어져 나오는 그의 두 팔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의 손을 자른 자를 바라보았다.

“잭의, 동생의 복수다. 악마.”

뭐라는 거지?

완전히 마력이 고갈되어 제대로 된 사고조차 하지 못하는 파이몬은 조제 바셰를 알아보지 못했다.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있었다고 해도, 알아보지 못했을 테고.

“너라도 마력…….”

이미 생존 본능만이 남아, 그것만을 갈구하는 파이몬이 잘려나간 팔을 뻗는 순간.

"크아아아아악!"

결국 버티지 못한 바엘이 무너지고 푸른 태양이 떨어져-

악마와 그의 꼭두각시들을 광기에서 해방시켰다.

푸른 태양이 떨어져-

악마와 그의 꼭두각시들을 광기에서 해방시켰다.

영원히.

* * *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수도, 판데모니움.

어비스 코퍼레이션 본사 지하.

톡- 토독- 톡-

섬세하고 가는 손가락이 패널을 두드린다.

그러자 모니터에 글씨가 출력된다.

아주, 아주 오래전에 입력해두었으나, 그녀가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될 줄은 몰랐던 문구가.

-관리자 권한 확인.

-생명 유지 시스템 종료.

-마력 추출 시스템 종료.

철컹-

시스템 종료를 확인하고, 레버를 당겨 마력 공급을 끊어버린다.

그 단순한 절차만으로, 이미 생물로서의 기능 대부분이 거세되어 유지관리 없이는 살 수 없는 수천의 생명이 단번에 절명해버린다.

그레모리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려, 옆 패널에 가서 똑같이 패널을 두드렸다.

다시 모니터에 출력되는 문구를 확인하고.

철컹-

마지막 레버가 내려졌다.

그녀의 손가락에 닿는 차갑고, 가벼운 감촉 몇 번 만에 셀 수도 없이 많은 생명이 지워진다.

어처구니없을 만큼 간단하게.

말도 안 될 정도로 쉽게.

……그저 허무하고, 허무하고, 또 허무하게.

그레모리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겨우 이걸 못 해서, 수백 년을.

그리고 그 순간.

“그레모리----!”

증오와 분노로 채워진, 짐승의 울부짖음이 복도에 울려 퍼졌다.

그레모리는 천천히 몸을 돌려, 차갑게 식은 금빛의 눈동자를 짐승에게로 향했다.

“……심한 꼴이시네요, 바엘.”

한때 위대했던 마족의 용사.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지배자이자 마족의 긍지였던 남자는 처참한 몰골이었다.

온몸에서 푸른 피를 질질 흘리고 있고, 두 팔은 뒤틀리고 꺾여 제 기능을 잃었다.

바엘은 분노와 광기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그들의 옆에 있는 ‘관’을 보았다.

원래라면 회로를 타고 보랏빛의 마력이 흐르며 마력을 추출해 보내고 있어야 할 유리관은 모든 빛을 잃은 채 희생자들을 담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인간들이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시체를 매장하기 전에 넣는 그 관처럼.

바엘은 흉포한 기세를 뿜어내며 그레모리에게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레모리는 겁을 먹지 않았다.

애초에, 알고 있었다.

바엘, 그에게만은 유사시를 위한 긴급귀환 시스템이 연동되어 있었다는 것.

다만.

진작에 패배를 인정하고 그냥 물러났다면 저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그런 작은 안타까움을 느낄 뿐.

쾅!

“윽…….”

바엘에게 밀쳐진 그레모리는 벽에 어깨를 박으며 작게 신음했다.

그의 팔이 조금만 더 멀쩡했더라면, 그는 그레모리의 목을 틀어쥐었겠지.

“네년이, 네년이 결국, 결국은…….”

그레모리는 바엘의 얼굴이 그리는 감정을 보고 있었다.

꺾인 자긍심.

패배감.

혐오감, 그리고…… 배신감.

그레모리는 바엘이 그녀에게 배신감을 느낀다는 것에 위안을 얻었고-

“결국은 마족을 배신하고 인간의 성녀 놀음에 빠져들어!”

“인간의 성녀?!”

격노하며 바엘을 밀쳐냈다.

바엘은 그레모리에게 밀쳐진 것만으로도 비틀거리며 밀려났다.

그게 우습고, 화나고, 또 서글퍼서.

그레모리는 그들의 옆을 가득 메운 관을 손으로 가리키며 웃었다.

“여기에 인간이 어디 있죠? 바엘. 마족의 용사님. 자, 봐요. 인간이 어디에 있어요?”

그레모리의 미소가 아름답고도 서글퍼, 머리끝까지 분노가 차오른 바엘조차 움찔했다.

인간? 이곳엔 이미 없다.

마력에서 열등한 인간들은 진작에 그 근간까지 다 추출당한 뒤, 드론이 되어 전장에 나갔으니까.

그렇게 쌓인 백만이 넘는 드론을 유지할 수 있는 건 오직 마족들뿐이니까.

“이 꼴 안 보이시나요? 여긴 마족들 밖에 없어요, 바엘. 네, 전부 마족들이요. 한때 당신이 이들을 구하기 위해 마왕을 처단했죠. 한때 이들은 당신을 용사라 칭송하며 당신을 위해 싸웠고!”

“저들은 나에게 반기를 들었다! 반역자들이야!”

그레모리는 차갑게 웃으며 답했다.

“당신이 목을 벤 마왕이 우리에게 그렇게 말했죠, 바엘.”

-감히 짐에게 반기를 들다니, 반역자놈들!

400년이 지나고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음성.

그것을 떠올린 바엘은 답하지 못했다.

그런 바엘의 앞에서.

“인간의 성녀라고 하셨나요? 틀렸어요, 바엘.”

그레모리는 두 팔을 벌리며 웃었다.

“구할 수 있던 인간들은 진작에 다 포기했고, 이미 늦었어요. 저는 지금, 마족들을 구한 거에요, 바엘. 우리 마족의 손에 고통 받으며 서서히 죽어가던 이들에게, 안식을 준 거라고요.”

그와 동시에.

건물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네 짓인가?”

“네, 제가 한 짓이랍니다, 바엘. 지켜야 할 마족들은 죄다 죽어버렸고, 여기 남은 건 용사도 성녀도 되지 못한 반쪽짜리 둘이니, 기왕이면 건물 채로 묻혀버리는 최후도 괜찮을 것 같아서요.”

선선이 답한 그레모리는 생긋 웃으며 덧붙였다.

“아, 걱정하지 마세요. 돌아온 서큐버스 아이들과 행정직은 제 권한으로 죄다 탈출시켰으니까.”

피싯-

바엘의 다리에서 푸른 피가 뿜어져 나와, 그의 몸이 차가운 복도에 쓰러졌다.

건물이 흔들린다.

뒤집힌 시야로, 바엘은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힘을 잃었다.

자긍심이 꺾였다.

“...나의 어비스 코퍼레이션은 마왕의 판데모니움과는 달라야 했다.”

분노조차 갈 곳을 잃었다.

그러고서야.

“그것보다는 위대해야 했어.”

끝까지 그를 따른 부하들을 전부 잃고.

뒤집힌 시야로 보고서야.

“...그러다보니 어느새, 내가 죽인 괴물이 되어 있었군.”

바엘은 조용히 인정했다.

그레모리는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와, 그의 옆에 무릎 꿇고 앉았다.

바엘은 천천히 그녀의 금빛 눈동자를 들여다보더니 물었다.

“……성녀. 그대의 신은 나로 인해 죽은 동족들을 품어줄까.”

그레모리는 눈물 흘리며 웃었다.

“몰라요. 저도 모르겠어요.”

신이 이 비참한 마족들의 운명을 끝내라고 힘을 준 건지.

아니면 그저 반쪽짜리.

인간의 성녀도, 마족도 되지 못한 그녀를 조롱하라고 힘을 준 건지.

그레모리는 알 수 없다.

그래도 그녀가 알 수 있는 것이 하나는 있었다.

그녀의 뒤를 이은 성녀와 연결된 남자의 꿈에서 본 장면.

그레모리가 성녀로서 한 모든 것이 거짓으로 점철된 가짜라고 해도.

그것이 누군가에겐 의미가 있었다는 것만큼은.

그러니.

건물이 더욱 흔들리고, 파편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가운데.

그레모리는 천천히 두 팔을 뻗어, 엉망진창이 된 바엘의 몸을 일으켜 안으며 속삭였다.

“이들을, 당신을. 신의 곁으로 데려가는 것 정도는 그분께서도 허락해주시겠죠.”

바엘은 흐릿한 눈에 금빛의 악마를 담았다.

절망 위에 세워진 거짓된 번영의 탑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

바엘은 픽 웃으며 말했다.

“그거 무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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