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화. 심연의 성전 – 최후의 저항 (4)
좌익, 제국군 방어선.
“제길, 제국군보다 더한 인해전술을 볼 줄이야.”
질 폰 레온하르트는 질릴 정도로 밀려드는 드론들의 파도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화포들이 쉴 새 없이 포성을 울리며 포탄을 날려도, 군사들이 제아무리 사격을 가해도 적들은 도무지 줄어드는 것 같지 않다.
눈앞에서 질릴 정도로 밀려드는 적들을 맞이하고 있는 군사들만 해도 그런데, 고지대에서 적진을 살피는 질의 눈에는 지금 그 뒤로도 끝도 없이 밀려드는 적의 파도를 실시간으로 보고 있다.
“사령관 각하, 우리가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겠습니까?”
걱정스러워하는 부하장군의 물음에, 질은 픽 웃었다.
난들 그걸 알까?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그걸 모를 거다.
그러나 확신 없는 싸움을 해온 것이 처음은 아니다.
오히려, 왜 싸워야하는지조차 모른 채 싸워왔지.
혁명이 터졌을 때, 서부의 농민 봉기를 유발하자는 가문 원로들과 아버지의 생각에 반대하던 순간.
그는 그것이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것이라도 하지 않으면 가문에게 어떠한 방법도 없으며, 어떤 수를 써서라도 가문을 지키고자 하는 그들의 동기를 이해했다.
영지를 떠나 용병생활을 전전하면서 한 일들은 말할 것도 없다. 용병에게 정의는 없고, 돈이 곧 정의였다. 그러나 그가 일평생 배워온 기사도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고, 언제나 그에게 꺼림칙함을 안겼다.
마침내 크라프테의 첩자로서 혁명군과 함께 싸우던 순간. 그는 매 순간을 고뇌했다. 루이스 다키텐의 선의를 이용하는 자신을 조소했고, 누구보다 위험을 무릅쓰며 최전선에서 싸우는 라파예트를 보며 매 순간 갈등해야 했다.
그 모든 것을 지나, 지금 이곳에 있다.
다름 아닌 황태후 체칠리아 개인의 의사에 의해.
-송구하오나, 황태후 폐하. 저는 외국 출신의 이방인입니다. 제국을 섬긴 지 불과 몇 년 되지도 않은 저에게는 과분한 자리입니다.
-바로 그래서입니다, 질 드 리오넬.
-송구하나 신이 불민하여 황태후 폐하의 뜻을…….
-제국군은 부패한 영주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대와 부하들이 도입한 개혁이 어느 정도 성과를 발휘하기는 했으나, 아직 그 영향력은 미미하지요.
황태후는 결코 낭만을 꿈꾸며 그들을 보내지 않았다.
-그대들이 갈 곳은 두말할 나위 없는 사지이며, 그대들이 개혁한 제국군도 소위 중앙 대륙의 강군이라는 크라프테나 혁명군에 비하면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나는 그럼에도 그대들에게 저 사지에 가서 살아남을 것을 명합니다.
이 자리에 있는 자들은 대부분 제국에서 별다른 기반이 없는 자들이다. 하급 귀족 출신이거나, 외국인 출신 장교들이니까.
-그렇게 함으로써 제국이 아직 완전히 지지 않았다는 것을, 저 위협에 맞선 대성전에서 중앙 대륙 최강의 군대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는 것을 보여주세요. 그 영광을 거머쥐고 이방인이 아닌 제국의 영웅이 되어, 황제를 보필해주세요.
-……분부를 따르겠습니다, 황태후 폐하.
-그대에게 폰 레온하르트의 성을 내립니다. 부디 제국과 신의 가호가 그대에게 함께 하기를.
세월의 무게에 잔주름이 많아진 황태후가 지었던 미소는, 아직도 질의 뇌리에 박혀있다.
질은 그를 바라보는, 불안감에 찬 장군들을 보았다.
승리의 확신은 없다.
하지만, 이곳은 싸워야만 하는 전장이다.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전장이다.
질 폰 레온하르트는 적어도 그 사실만은 확신하고 있다.
그것이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가?
“이봐들, 그래서 여기서 도망치면 뭐할 텐가? 시골구석에 짱 박힌 영지로 다시 내려갈 건가? 우리가 뭘 할 수 있겠냐고 비웃던 배 나오고 거드름 피우는 귀족들의 조롱을 받으며?”
장교들이 픽 웃자, 질도 웃었다.
“최소한 지금 우리는 제국의 이단아들이 아니라, 인류의 방벽이라는 끝내주게 폼나는 역할을 하고 있지.”
질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
“솔직히, 이길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싸울 가치는 있어. 최소한, 뭘 위해 싸우는지는 아니까. 그리고 우리가 이겨서 돌아가면 황태후 폐하께서 귀족들 엿 먹이기 위해서라도 후하게 포상해주실 거라네!”
“하하하하!”
장교들과 장성들이 웃음을 터트렸고, 질도 웃으며 다시 전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동기가 있고, 미소가 있다.
그러면 승산도 있다.
그렇게 믿으며.
* * *
우익, 크라프테군 방어선.
“Feuer!”
“크라프테군의 압도적인 화력을 보여줘라!”
샤른호르스트 장군의 명령 아래 크라프테의 포대들이 쉴 새 없이 불을 뿜고, 경보병대와 슛첸이 형성한 화망이 접근하는 드론마다 족족 쓰러트린다.
혁명군이 형성한 화망 방어선은 애초부터 가장 우월한 사격전을 자랑하는 크라프테가 고안한 것이다.
혁명군보다도 더 치밀하게 고안된 구조의 방어선은 마치 살아 숨쉬는 요새처럼 대응하며 접근하는 적 모두를 요격하고 있었다.
간간히 후장식 소총으로 무장한 적 병력들이 공격해왔지만, 미리 모래주머니를 가져다 두고 요새화한 군사들이 그에 기대어 교전하고 있으면 이내 포병들의 집중포화가 마족들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물러서지 마라!”
“크라프테에 승리를!”
“이 자리에서 인류 최강의 영광을 되찾자!”
압도적인 규율의 크라프테군 전열보병대는 드론들과의 백병전에서도 한치의 물러섬이 없다.
크라프테 국왕 하인리히 1세는 검을 바닥에 짚은 채 굳건히 서서 그 전장의 혼란상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대왕과는 다르다.
저 전장의 혼란 속에서 영광을 찾을 수는 있어도, 대왕이 느꼈던 선율과 유희는 느낄 수 없다.
“폐하, 이곳은 위험합니다. 조금 후방에 계심이…….”
샤른호르스트의 말을 들은 하인리히 1세는 픽 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하나는 대왕에게 본받아야 마땅하지.
“대왕께서 전선을 벗어나셨던가?”
“아, 아닙니다.”
그는 대왕과 다르다. 그에게 전쟁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그러나 그 대왕조차 최후까지 전장에서 자리를 지키며, 전쟁을 일으킨 자로서의 책임을 지고 나서야 죽음을 허락했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 또한 그래야만 한다.
“나는 전쟁이 끝나는 순간까지 그대들과 함께한다.”
“……영광입니다, 국왕 폐하!”
샤른호르스트 장군이 다시 물러나자 하인리히 1세는 다시 시선을 돌려, 중앙 대륙의 국가들이 무너졌으리라 여겼던 긍지와 규율을 품고 악마들에게 맞서는 크라프테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보라, 악마들이여.
그대들이 수단으로 여긴 군대가, 그대들이 피를 불러일으키게 하려고 키워낸 군대가 그대들의 피로 목을 축이고 있노라.
* * *
중군, 혁명군 방어선.
악마들의 군세는 파도와 같이 밀려 들었다.
언덕을 이용하여 2중, 3중으로 펼쳐져 교차사격을 가하는 보병대로도, 쉴 새 없이 폭발탄과 산탄을 쏟아부은 집중 포격으로도, 결국은 미처 다 막아내지 못한 드론들이 질주해 온다.
“대기, 대기!”
“대기! 쏘지 마!”
니콜라 네 장군의 우렁찬 고함을 장교들이 복창하고, 군사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최후의 한발을 최대한 아꼈다.
이내 드론들이 거의 지근거리에 도달했을 때, 니콜라 네가 부르짖었다.
“1열, 발사!”
무릎 꿇고 앉아 있던 보병대가 머리를 겨눈 채 일제히 발사하자 달려들던 드론들이 우수수 쓰러진다.
그러나 드론들은 동료들이 쓰러지든 말든 아무 두려움도, 공포도 없이 그저 전진할 뿐.
“2열, 3열 발사!”
머스켓을 겨눈 2열과, 그들의 어깨에 총을 얹고 조준한 3열이 단번에 발포.
그것만으로, 접근하던 드론들의 1파는 거의 반 이상이 쓰러져 버렸다.
“프랑지아를 위하여!”
“충격에 대비하라!”
“연합군 만세!”
니콜라 네 장군이 검을 뽑아 들며 부르짖고, 장교들이 그를 따라 검을 뽑아 들며 제각각 외친다.
보병대가 번쩍이는 총검을 앞으로 들이밀자 그건 그대로 창날의 벽이 되었고, 드론들의 1파가 그 날카로운 창벽에 들이받으며 백병전이 시작되었다.
니콜라 네 장군의 바로 뒤, 가장 치열한 돌출부의 방어선 지휘부,
“계속 포격해! 어차피 뒤에도 적들은 바글바글하게 많으니 아군 오사 나지 않게 쉴 새 없이 퍼부어!”
“옛!!”
언덕을 낀 방어선이어서 직사포로도 아군의 머리 위를 넘어 적진을 타격하는 것이 가능하다.
포병대는 이미 수 시간 교전을 이어왔지만, 교대인원을 넉넉히 둔 덕분에 아직까지는 버틸 만하다.
돌출부를 맡은 데미앙 드 미르보는 드넓은 전장을 관측하며 주먹을 쥐었다.
그들은 수도 없이 많은 드론을 처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론들은 끝도 없이 꾸역꾸역 몰려들고 있다.
절로 질리는 기색에, 데미앙은 저도 모르게 내뱉었다.
“망할 라파예트.”
그 망할 놈 때문에 이번에도 이런 사지라니.
하지만…….
데미앙은 하늘에서 천천히 하강하고 있는 푸른 마력 덩어리를 흘긋 보고는 다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이번엔 확실한 시간제한이 있고, 그건 자신이 아니라 적의 것이다.
아무튼 버티면 된다, 버티면.
열세에서 버티는 거라면, 그는 수도 없이 많은 사선을 넘어왔다.
“해보자고.”
중얼거린 데미앙은 전황과 작전지도를 대조해보며 미간을 구겼다.
“망할, 어떻게 저걸 보고 핀포인트 저격 지시를 할 수 있다는 거야?”
역시 그 여자가 장군을 해야 한다니까.
그리고, ‘그 여자’는 언덕 위의 고지대에서 루이스 다키텐과 마도사단, 그리고 소수의 전령을 데리고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저쪽! 기관총좌입니다!”
지젤 다비가 가리킨 방향을 시선으로 따라간 루이스가 정신을 집중하고, 이내 하늘에서 번개가 내리쳐 이제 막 거치하고 사격을 준비 중인 기관총병들을 강타했다.
백만에 달하는 드론과 마족들로 바글거리는 전장에서, 적들은 조금이라도 고지대가 있으면 기습적으로 기관총을 가져다 두고 사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단체로 밀집방진을 이루고 드론들에게 저항 중인 연합군이 일거에 쓸리는 재앙을 낳겠지.
루이스는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돌렸고-
“이쪽입니다! 제거를!”
지젤 다비가 그새 하나를 더 찾아내서 다른 마법사에게 지시하는 모습을 보았다.
루이스는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전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100만과 100만의 격돌.
거대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아비규환과 혼란의 전장은 시야를 정신없이 어지럽힌다.
그런데 이 거대한 전장에서, 그 혼란 속에서.
“미르보 사령관께 전달! 24연대 쪽에 공격이 집중되고 있으니 보강하라고 해! 아, 저쪽! 기관총!”
“예, 옛!”
그 혼란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전황을 정확히 읽어내는 건 물론, 매 순간마다 적들의 움직임을 세세히 살피며 마법으로 저격할 타겟을 놓치지 않고 찾아낸다.
그야말로 천재적인 재능이라고 해야 할지, 괴물같은 집중력이라고 해야 할지.
그래도.
“적 마법, 옵니다!”
경고가 들리자마자, 루이스는 다른 마법사들과 함께 하늘로 손을 뻗어 정신을 집중했다.
이내 마력의 장벽이 펼쳐지고, 마족 진영의 마법사들이 날린 불덩이들이 그대로 장벽에 격돌해 허공에서 비산하며 흩어진다.
“휴, 잘해주셨습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지젤 다비를 보며, 루이스도 슬며시 웃었다.
확실히, 도움이 되고 있다.
루이스도 지금은 그거면 되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헉!”
“저, 저건-!”
보랏빛 마력으로 뒤덮인 거대한 오라의 파도가 덮쳐오는 것을 본 루이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 압도적인 마력에서 느껴지는 구성의 질적, 양적인 격차가 마법사들에게 무력감을 안겼다.
이건 인간 따위가 감히 따라갈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난 재앙, 마력으로는 절대 막을 수 없다고 싫어도 자각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절망은 하지 않는다.
이내 전장 전역을 뒤덮는 섬광과 함께 금빛의 장벽이 쳐졌기 때문에.
루이스는 그 눈이 멀 것처럼 밝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눈을 편안하게 해주는 신비한 빛을 보며 감탄했고-
인간으로는 도저히 막아낼 수 없을 것 같던 압도적인 보랏빛 죽음이 그에 부딪혀, 장벽과 함께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며 희망에 찼다.
이길 수 있다.
해일과 같은 기세의 악마들에 맞서면서도, 이 전장에 있는 모두가 그 희망을 공유했다.
* * *
바엘은 격노했다.
벌써 3번, 3번이나 가로막혔다.
그가 살아온 세월, 그 긴 시간 동안 쌓아올린 압도적인 무예와 마력.
그 어느 것도 인간 따위가 범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수를 담은 검격이 계속 해서 가로막힌다는 것은 곧.
신이 저들과 함께한다는 것과 같다.
그것이 바엘을 진노하게 했다.
어째서인가?
400년 전, 프랑지아를 파멸의 위기로 몰아넣은 전쟁에서.
중앙 대륙의 인간들이 나름대로 힘을 합쳐 맞서보았지만 악마들을 밀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무능하고 탐욕스럽기만 한 마왕의 아래에서조차 그들은 전 인류에 맞서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100년간 이어진 전쟁에서 어느 때보다 많은 지역이 마족들에게 통치 받고 있었어도, 셀 수도 없이 많은 인간들이 죽음을 맞이했어도 신은 침묵했다.
그 순간 가장 신의 기적에 가까웠던 존재가 반인반마의 서큐버스 그레모리였다.
당시에 이미 마왕에게 반기를 들 준비 중이던 바엘은 그것이 전쟁을 끝내라는 신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이제 와서 그의 앞을 가로막는 거지?
바엘은 이를 갈며 시선을 들어올려, 하늘에서 천천히 하강 중인 푸른 색의 구체를 바라보았다.
바엘 정도의 대악마는 저 마법의 구조를 보는 것만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저것은 문자 그대로 악마들의 마력 구조 그 자체를 비틀고 변질시켜, 마족이라 할 수 없는 열등인자로 바꿔놓을 끔찍한 마법.
그야말로 마족들의 파멸 그 자체다.
마족조차도 단일의 힘으로는 저런 대마법을 구현해낼 수 없다.
그러나 저 열등한 인간들이, 태생적으로 마족보다 열악한 마력을 보유한 자들이.
갖은 편법을 동원해서나마 마족들의 마법조차 넘어설 대마법을 구현해냈다.
신이 저들을 지키고, 인간들이 마족을 넘어설 마법을 구현해냈다.
바엘은 저들에게 위협을 느끼고 있는 자신, 그 부조리에 분노했다.
“어쩌시겠습니까, 마왕이여?”
바엘은 옆에서 들려온 파이몬의 물음에 이를 악물었다.
그의 고고한 자존심에도 불구하고, 그저 이 자리에 고고하게 서서 검격을 날려 보내는 것만으로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이 현실이다.
바엘은 양손으로 등에 메고 있던 검을 잡고-
마족 용사의 상징을 뽑아내었다.
“직접 치겠다.”
이곳은 그들의 땅.
그는 마족의 긍지 그 자체.
그렇기에, 이곳에서 물러난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없다.
“따르라.”
그가 마왕의 근위대를 전부 베어내고 끝내는 마왕까지 참한 두 자루의 검을 든 채 명하자, 그의 뒤에서 그림자처럼 부복하고 있던 마족들도 바로 몸을 일으켰다.
“저들이 최후의 성전을 원하니, 들어주도록 하지.”
저들 모두에게 압도적인 파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