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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244화 (244/258)

244화. 심연의 성전 – 최후의 저항 (3)

보랏빛의 마력으로 번뜩이는 오라가 날아든다.

검으로 빚어낸, 날아드는 죽음 그 자체.

아군 진영으로 달려들던 드론들마저 무처럼 갈라버리며 아군 진영으로 쇄도하는 섬뜩한 검격을 본 순간, 모두가 그것에 닿는 순간 맞이할 운명을 직감했다.

그러나 그 섬뜩한 공포가 연합군의 진영을 덮치기 직전, 빛의 장벽이 그것을 가로막았다.

모든 것을 갈라버릴 듯한 예리한 오라의 파도 앞에 버티던 빛의 장벽은 끝내 무너져버렸으나, 오라의 파도 또한 사라졌다.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이내 성녀왕에 대한 칭송으로 환희에 차는 순간.

“음……!”

언덕 위에서 그 광경을 보던 바엘은 그의 손에 전해지는 감각에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오라는 성녀왕의 장벽을 무너트렸다.

거기까지는 방금 전에 했던 것과 같다.

그러나 장벽을 쪼개고 술자에게 파고들어, 마력을 헤집어놓는 그 감각이 없다.

가로막혔다.

그것을 자각한 순간, 바엘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걸렸다.

“감히, 인간 따위가.”

열등하기 짝이 없는 종족이었다.

바엘과 추종자들이 배후에서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저들은 마왕군을 밀어붙이는 건 고사하고 생존조차 급급했을 터다.

바엘이 마왕을 친 건 그들의 힘이 중앙 대륙을 정복하기에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 과정 중에 죽어나갈 동포들의 목숨을 바칠만한 가치가 당시의 마왕에게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물며, 인간의 항전에서 구심점이 되었던 성녀.

저들이 그토록 칭송하던 성녀부터가, 신이 저들에게 내려준 구원이 아니었다. 그가 보내준 자비였다.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마왕을 몰아붙이고 그를 권좌에서 끌어내기 위한 도구로서 인간을 이용하고자 보내준 거다.

신은 저들을 돌보지 않는다.

애초부터 신이 정녕 저들을 보살폈더라면, 서큐버스인 그레모리에게 그런 힘을 줬을 리가 없다.

신성 교국의 성직자 중 적지 않은 수가 어비스 코퍼레이션과 뒤에서 거래를 하고, 악마들에 대한 공포를 이용해 배를 불리는 적대적 공생관계를 이어왔다는 것이 그 증거다.

그런데, 지금.

이제 와서?

신이 저들을 보살피는가?

고고한 악마들을, 그들을.

어비스 코퍼레이션을, 그걸 설립한 바엘 그 자신을 정벌하라고 저들을 가호하는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의 자비와 거짓된 성녀에게 기대어 살아남은 종족의 후예들이, 저 버러지들이 감히 이 땅에 발을 들여 악마들에게 이빨을 드러내고 그를 가로막아?

바엘이 입을 일그러트렸다.

“저들의 성녀를 눈앞에서 짓이겨주면 저 버러지들이 주제 파악을 하나?”

* * *

섬뜩한 파멸의 파도가 날아드는 것을 보며 얼어붙었던 것도 무색하게 빛의 장벽이 그것을 가로막는다.

그러나 이내 끝까지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는 빛의 장벽을 본 순간, 싸늘한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내달렸다.

방심했다고는 해도 완전한 상태에서 단 한 번의 공격을 막아내고 그런 상태가 되었다.

그때부터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길어야 2시간?

그 사이에 에리스가 몸을 얼마나 회복할 수 있었을까?

“폐하!”

정신없이 달려가서 본 에리스는 다행히 두 다리로 제대로 서 있었다.

에리스가 쓰러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서야, 그녀의 손에서 빛을 잃은 수정을 볼 수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에리스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태생적으로 창백하던 에리스의 얼굴은 어째 조금 붉게 물들어 있다.

엄청나게 흥분해서 피가 빠르게 돌기라도 하는 양.

“완전 괜찮아요!”

“……어, 예?”

“몸에 힘이 넘치는 기분이고, 수정도 있어요. 명령을 주세요, 후작님!”

……아무리 전시라지만 죽다 살아나서 나오자마자 사령관에게 명령을 달라고 보채는 여왕이라니.

어째 기묘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는데.

그보다, 괜찮은 것 맞나?

내가 미심쩍다는 시선을 보내다가 옆에 서 있는 보몽 경에게 시선을 돌리자,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것 참 천방지축 여왕 덕분에 고생이 많으시군, 보모역의 근위기사님...

에리스도 자신이 상황에 맞지 않게 격앙되었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뒤늦게 헛기침을 했다.

“정말로 괜찮아요. 아키텐 백작님이 여분의 수정을 구해다 주셨고, 충분히 쉬었어요. 컨디션도 괜찮으니, 제 역할을 할 수 있어요.”

하긴, 그녀가 아니었다면 당장 방금 대참사가 터졌겠지.

“……하게 해주세요.”

우리 모두가 여기에 뭘 위해 와 있는지, 어디까지 자신을 내걸었는지를 잘 알고 있다.

흔들림 없는 에리스의 눈빛을 본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따라와 주십시오, 폐하.”

“네!”

에리스는 신이 나서 답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분위기가 갑자기 일변하셨군요. 무언가 계시라도 받으신 겁니까?”

반 농담이지만, 반 진담이기도 하다.

저래 보여도 명색이 성녀잖아.

정말 신에게 계시라도 받은 건지 누가 알겠어?

에리스는 쿡, 하고 웃더니 답했다.

“제 신은 아니고요.”

“음?”

그럼 누구 신?

의문이 들긴 했지만, 한가하게 잡담할 상황이 아니다.

이러고 있는 사이에도 포격은 계속 이어지고, 당장 저 아래에서 머스켓이 일제히 불을 뿜으며 드론들을 쓰러트리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바엘이 아군 방어선을 몰살시키겠다고 날린 일격이 선두의 드론들만 초토화시키고 정작 에리스의 방어막에 막힌 덕분에 한숨 돌리긴 했지만, 저대로 두면 결국 드론들과의 백병전에 들어가는 것도 시간문제다.

최초에 혁명 수호대 척탄병 연대의 충격으로 한번 와해시키긴 했지만, 그렇다고 마족병들이 아주 전멸해버린 것도 아니고 저들의 장비 우위가 어디 가는 것도 아니지.

우리에겐 아직 여유가 없다.

에리스와 함께 걸음을 서둘러 도착하기가 무섭게 걸걸한 노인네의 일갈이 터져 나왔다.

“에에잉, 기다리다 눈 빠지는 줄 알았네! 대체 언제 하면 되는 거요, 후작!”

“늦어서 미안합니다, 마탑주님. 준비는 다 끝나셨습니까?”

키도 별로 안 커서 내 가슴팍 정도밖에 안 오는 마탑주는 내 말을 듣기가 무섭게 가슴을 탕탕 치며 소리쳤다.

“이를 말인가! 3분 전에 끝냈지!”

……3분이면 별로 안 기다린 거 아닌가?

“쯧, 무슨 생각하는지 빤히 보이는구만! 이 나와 3분간 대화할 기회를 얻으면 가문의 영광으로 여기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나는 절로 손으로 내 얼굴을 매만졌다.

그렇게 티가 났나?

하여간 나이 헛 먹은 건 아니군.

“오해십니다, 마탑주님. 여왕 폐하께서도 오셨습니다. 대마법을 준비하는 동안 폐하께서 마탑주님을 지켜드릴 겁니다.”

“오, 그래. 어서오시오, 성녀왕!”

에리스가 쓰러져 있느라 사전 논의는 없었지만...

“반가워요, 마탑주님!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드릴게요! 저만 믿으세요!”

한창 활력이 넘치는 에리스가 기운 넘치게 외치자, 마탑주가 눈을 깜빡이더니 말했다.

“오, 살가우시구려. 혹시 성녀 그만두고 마탑에서 일할 생각 없나?”

“네, 네?”

하지만 마탑주는 그 에리스조차 당황시키는 위엄을 발휘했다.

……성녀는 에리스가 그만두려고 해도 그만둘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애초에 마탑에서 일하려면 문제 되는 건 여왕 신분 아닌가?

아, 잠깐.

나까지 페이스에 휘말렸네.

“……마탑주님. 아무리 그래도 공동 전쟁 중에 인력을 빼가려고 드는 건 좀 심하신 것 아닙니까? 기본적인 동맹 간의 도의라는게…….”

여기서 여왕을 빼가려고 들다니 무슨 헛소리냐!

같은 소릴 해봐야 마탑주의 상식에는 안 먹힐 것 같아서 마탑주 식으로 말해봤는데, 마탑주는 한술 더 떴다.

“도의가 연구비 주나? 마법사에게 도의 같은 건 필요 없다네! 에잉, 이래서 마도를 모르는 머저리들이란.”

“아, 하하하…….”

에리스는 헛웃음을 흘리고, 나는 뒷목을 잡고 싶은 심정을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제가 마도를 모르긴 합니다만, 최소한 아키텐 백작이 마탑에 후원하는 연구비 지원을 반토막 낼 능력은 있습니다.”

……억누르지 못했다.

마탑주의 양심이고 인성이고 실종된 성격을 생각하면 이건 망한 건가?

말을 뱉어놓고 뒤늦게 후회하고 있는데, 마탑주는 내 생각보다 더 대단한 인간이었다.

“헛. 어흠, 어흠, 노, 노, 농담이지. 그럼! 농담이고말고. 이게 요즘 마탑에서 유행하는 최신식 농담이라네! 그, 그러고 보니 라파예트 후작이 아키텐 백작과 부부였지? 으하하하, 어쩐지 남다른 유능함을 자랑하더니, 그 아내의 그 남편이란 말이 괜한 것이 아니구려! 하하하하!”

그동안은 잊고 있어서 그런 식으로 군 거냐?

……진작에 크리스틴을 팔았어야 했나.

“……과찬이시군요.”

나는 정신이 혼미해진 나머지 적당히 답하곤 시선을 돌려, 땅에 그려진 거대한 마법진을 보았다.

어째 안 좋은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데.

마법에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술식의 구조는 내 기억에 있던 것과 생판 다르지만, 어쨌든 수많은 마법사들이 마력을 들이붓고 온갖 재료를 써서 구축한 마법진.

대마법을 구현하기 위한 술식이다.

“제가 마도에 식견이 있는 건 아닙니다만, 확실히 대단해 보이는군요.”

대충 빈말 던져본 건데, 마탑주는 바로 부활했다.

“대단? 대애단? 현자 중의 현자인 이 몸의 역작을 보고 고작 대단이라니! 이건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마도의 정수이자 역사 속의 전설, 한없이 신화에 근접한 역작이라네! 연합군은 이걸 직접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영광으로 알아야 해!”

……그 대단한 현자 중의 현자가 왜 이런 인간이야.

하여간 현자라는 것 중 정상인은 없는 건가.

그래도 술식 구축에 참여한 다른 마법사들은 기진맥진한 채로 물약을 마시며 마력을 보충하고 있는데, 마탑주는 쌩쌩하다 못해 기운이 흘러넘치는 꼴을 보자니 실력 하난 확실해 보이고...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좋습니다. 여왕 폐하와 연합군 전 병력이 무슨 일이 일어나도 마탑주님을 지켜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시작하시죠.”

“흠, 흠. 좋아, 그러면…….”

마탑주가 손짓을 하자 마법사들이 모여들었다.

루이스를 비롯해 단독 전력으로도 충분한 힘을 발휘하는 마탑주의 직계제자들 수준은 아니지만, 그래도 마탑에서 선별하고 선별한 정예 마도사들이 마력 증폭 수정을 든 채 마법진의 각 모서리에 서고-

마탑주가 마찬가지로 마력 증폭 수정을 든 채로 마법진의 중앙에 서더니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 뭐.

“크흠, 크흠.”

마탑주는 헛기침을 하더니 다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거 설마…….

지금 인류와 중앙 대륙의 명운을 건 싸움을 하고 있는데, 인류 최고의 지성이라는 작자가.

나는 매우 떨떠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만약 마탑주님의 대마법 덕분에 승리하면 후원금은 조금 더 늘릴 수 있도록 힘써보지요.”

“으하하하, 역시 아키텐 백작이 남자 보는 눈이 있어!”

마탑주와 마법사들이 손에 쥔 마력 증폭 수정이 빛을 발했다.

이미 알고 있는 감각. 온몸의 마나가 경고하는 섬뜩한 느낌에 신경이 쭈뼛 곤두선다.

마법진이 번쩍이며 빛나고 마력 증폭 수정에서 뿜어져 나온 마나로도 모자라, 대기 중의 모든 마나를 탐닉하듯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여든 마력이 폭풍처럼 소용돌이치는 정 가운데, 폭풍의 눈에 선 마탑주가 먼 하늘로 손을 뻗자-

보랏빛의 안개로 뒤덮인 하늘이 그대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폭풍의 마녀가 사용했던 대마법은 기상을 조종해, 인위적인 대폭풍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마탑주의 그것은.

“오, 오오오……!”

“우와앗……!”

갈라져버린 하늘에서, 마치 태양처럼 푸른색으로 일렁이는 불타는 구체가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한다.

“저거, 운석이에요?”

에리스가 반쯤 질린 얼굴로 물었고,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그런 걸 떨어트리면 마족들뿐 아니라 우리도 다 같이 죽죠.”

나도 정확하게 뭔지는 모른다만.

마탑주의 설명에 따르면, 일종의 마력 구조를 뒤틀어놓는 대마법이라고 한다.

-종족들마다 마력의 파장이 다르다네. 같은 마력을 써도 생명을 유지하고 능력을 발휘하는데 쓰는 배열이 다른 셈이지. 그리고 이 몸의 위대한 대마법은 일대를 강력한 마력의 파장으로 뒤덮어, 특정한 배열만 뒤죽박죽으로 틀어놓을 수 있지! 가히 천재적인 발상이야! 역시 난 대단해! ……그렇지 않나, 후작?

-솔직히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래서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거, 인간의 내장을 꺼낸 다음 돼지의 내장 배열로 대충 모양새만 맞춰서 다시 뱃속에 구겨 넣으면 어떻게 되겠나?

-예시가 굉장히…… 뭣합니다만, 그러면 보통 죽겠죠.

-그렇게 되네.

“……아무튼 저게 떨어지는 순간 이 일대의 드론과 마족들은 전부 망합니다.”

에리스는 애매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아무튼 마탑주님을 지키면 이긴다는 거죠?”

“바로 그겁니다.”

픽 웃으며 답한 나는 적진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력 증폭 수정과 마도사들의 마력을 갈아 넣은 대마법.

폭풍의 마녀와의 전투를 재현해놓은 듯한 전장.

그러나 조건은 정반대다.

이번엔 우리가 방어하고, 저들이 공격해야 한다.

여기서 일부 병력을 희생시키더라도 후퇴한다는 선택지도 있기는 하겠지.

대마법을 시전하는 순간 느껴지는 섬뜩한 감각은 마족들도 명백히 느꼈을 터다.

그러나 100만의 드론을 움직이는 것이 벌써 이번이 두 번째.

바엘의 마족 군대도 선제 투입되었다가 패퇴했다.

저 숱한 희생을 수포로 돌리고 물러나면, 파이몬에게 저 무수한 드론들을 다시 움직일 마력은 충분한가?

설사 그게 가능하다고 한들.

프라이드. ‘교만’의 바엘은.

여기까지 와서야 느지막하게 나선 악마의 자존심은.

인간의 이지를 몰아넣은 발악 앞에서, 꼬리를 말고 내뺄 수 있는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마치 인간의 비명소리와 같이 섬뜩한 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저건 일종의, 나팔……인가.

그리고 동시에, 마족의 군세가 일제히 진군해오기 시작했다.

우리의 방어선이 선제 투입된 마족들을 격퇴하고, 필사적으로 드론들을 저지하는 사이 뒤에 남아 구경만 하고 있던, 아마도 최정예일 마족의 부대와 예비대 드론까지 전부.

그래, 그렇지.

마족의 오만함이, 그 자부심이.

여기서 그냥 물러나는 것을 허락할 리 없지.

우리도, 저들도.

여기서 물러날 수 없다.

승리가 아니면 죽음뿐.

이제야 조금 공평해졌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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