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심연의 성전 – 최후의 저항 (2)
피에르 드 라파예트가 떠나고 난 뒤.
“우욱…….”
침대에 누워 있던 에리스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몸을 비틀었다.
고통 속에서 한참을 바르작거리다가, 천천히 입에서 손을 뗀 에리스는 멍한 눈으로 손을 물들인 검붉은 피를 들여다보았다.
아마도 악마들의 수장일 바엘이 검으로 날려 보냈을 오라, 그것은 오라이되 단순한 오라가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것은 에리스의 신성력을 깨부수고 기운이 다한 것처럼 흩어졌다.
적어도 피에르나 다른 군사들은 그렇게 생각했을 거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신성력을 부숴버린 검격은 그대로 시전자를 추적해 에리스의 속을 난자해놓았다.
만약 깨닫는 것이 조금만 늦었으면 에리스는 피에르의 눈앞에서 갈기갈기 찢겼을지도 모른다.
마치 영혼이 베이는 것 같은 섬뜩한 감각을 떠올린 에리스는 저도 모르게 덜덜 떨리는 몸을 손으로 감쌌다.
다시 그 공포에 맞서야한다고 생각하면, 공포스럽기 그지없다.
“흐윽, 흑…….”
아프고, 무서워서.
에리스는 뺨을 타고 내리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냈다.
누군가는 그녀가 두려움 따위 모르고, 자신의 생명이 아까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에리스도 고통을 느끼면 똑같이 괴롭고, 자신이 위험에 처한 전장에 설 때면 언제나 떨리는 가슴을 가라앉히려고 애써야 한다.
“……폐하.”
에리스는 흠칫, 했다가 보몽 경이 건네주는 물에 적신 수건을 받아들며 웃었다.
“고마워요, 프랑크 아저씨.”
“괜찮으십니까?”
에리스는 대답하지 않은은 채 수건을 받아들어 눈가를 닦고, 지저분해진 손을 닦아 냈다.
보몽 경은 더 묻는 대신, 다른 소리를 했다.
“아무래도 저도 많이 늙은 모양입니다. 명색이 근위기사인데 매번 라파예트 후작보다 늦으니 원. 역시 젊음이 좋긴 하군요. 하하. 슬슬 은퇴해야 하려나?”
에리스는 눈을 흘기며 답했다.
“와아, 저만 여왕으로 남겨둔 채 혼자 도망가시려고요? 우리가 같이 고생한 시간이 얼만데 어쩜.”
“허허, 그동안 무임노동 했으니 여왕 폐하께서 내탕금으로 좀 보상해주시면 생각을 바꿔 볼 수도 있죠.”
에리스는 앓는 소리를 냈다.
“자선에 쓴다고 얼마 남지도 않는 거 다 아시면서. 으으, 그래도 쥐어짜내면 조금 정도는?”
“이것 참 검소한 여왕을 섬기느라 저도 손해 보는군요. 신하된 몸으로서 감히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악덕 상사인 여왕 폐하께서 후작을 사기꾼이라고 비난하는 건 문제가 있는 것-”
“악! 그, 그건 농담이라고요!”
결국 참지 못한 에리스가 빽 소리 지르자, 보몽 경은 픽 웃으며 물었다.
“……기분은 조금 나아지셨습니까?”
에리스는 그제야 조금 웃을 수 있었다.
“고마워요.”
보몽 경은 미소로 답해주었다.
잠시동안 불편하지 않은 침묵이 흐르고.
아주 오래 전, 궁에서부터 어머니와 그녀를 지켜준 기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번 전투동안은 쉬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그러고 싶어요.
속으로만 답한 에리스는 미소 지었다.
그러나 지금도 밖에서는 전투가 이어지고 있다.
포화가 뿜어져 나오는 소리, 그리고 다급하게 달려 달리는 전령들의 발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이미 한 번 전의를 잃었던 저들이 저렇게 싸우고 있는데, 정작 그렇게 만든 자신이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아마 보몽 경, 프랑크 아저씨도 모르진 않을 거다.
알면서도, 해야만 하는 말을 한 거겠지.
에리스는 가만히 보몽 경을 바라보더니 웃었다.
“프랑크 아저씨.”
“예?”
“고마워요.”
“……제가 하는 말은 안 들으시면서 말로만 고맙다고 하시지 마십시오, 폐하.”
에리스는 웃어 보이기만 했다.
그는 분명, 에리스 자신이 아니라 어머니를 보고 있다.
머리와 눈 색을 제외하면 자신의 외모가 어머니를 쏙 빼닮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가 없었더라면 자신이 지금처럼 웃을 수는 없었을 거라는 것을 안다.
그리 행복하다고 할 수는 없던 이전 생조차, 그가 있어주었기에 거기까지라도 갈 수 있었다.
에리스는 천천히 눈을 감고 쉬다가, 아주 특징적이어서 익숙한 발소리를 듣고는 눈을 떴다.
“실례합니다. 여왕 폐하, 보몽 경.”
막사에 들어선 크리스틴 다키텐은 정중히 예를 갖추었다.
드레스 차림으로 하는 레이디의 예법이 아니라, 제독의 복장으로 하는 군례도 마치 원래 자연스럽게 그녀의 것이었다는 듯이 자연스러워 에리스는 새삼스럽게 감탄했다.
“어서 오세요, 백작님. 후방과 보급 관리로 바쁘실 텐데…….”
“제 업무이기도 하니까요.”
크리스틴은 간단하게 답하며 가까이 다가와, 들고 온 상자를 에리스의 머리맡에 놓았다.
“신성력 증폭 수정입니다. 최대한 확보해봤지만 마탑의 핵심 전력이 전부 출진한 통에 4개가 한계더군요.”
“고마워요. 확보하시느라 애쓰셨을 거 알아요.”
에리스의 말은 들은 크리스틴은 가볍게 미소 지었지만, 이내 그것을 지우고 입을 열었다.
“직접 쓰시는 분이시니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만, 여왕 폐하. 몸의 그릇을 넘어서는 힘은 독이 됩니다. 신성력이라고 해도 마력을 기반으로 운용하는 이상 다를 건 없습니다.”
신성력은 마력을 매개로 신의 힘을 빌려, 사람을 돕는 힘이다. 하지만 받는 이들에게 이로운 힘이라고 해도 결국 마력을 소모하는 장본인에게는 부담이 된다.
하물며 증폭 수정이라는 건 결국 본인이 다룰 수 없는 힘을 끌어 쓰기 위한 수단이다. 사용 시에 몸이 느끼는 미칠듯한 고양감이 마약의 그것과 같다는 걸 에리스도 자각하고 있다.
정신은 황홀하지만, 결국 수명을 깎는 짓과 다를 것이 없다.
“……알아요.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백작님.”
크리스틴 다키텐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쓰는 것을 자제하라느니,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말해도 에리스는 쓸 거고, 크리스틴도 그걸 알면서 구해다 주었다. 아니, 아마도 이걸 써서라도 피에르 드 라파예트를 도와줄 것을 바라니까 구해다 주었다는 쪽이 더 맞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경고를 하고야 마는 것이 크리스틴의 성격을 드러내주어서, 에리스는 빙긋 웃으며 손을 뻗어 크리스틴의 손을 잡았다.
“……폐하.”
흠칫하긴 했어도 내치지 않은 손은 따뜻하다.
아니, 오히려 자신의 손이 훨씬 차갑다는 걸 깨달아버려서, 에리스는 멋쩍게 웃었다.
“고맙다는 건 진심이에요. 이걸로 분명, 더 많은 이들을 구할 수 있겠죠.”
“폐하께서는 언제나 신념에 차 있으시군요.”
크리스틴은 그렇게 말했지만, 에리스는 웃기만 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녀를 믿어주는 많은 이들이 아니었다면 에리스는 진작에, 아니 이미 한 번 꺾였다.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어서 소극적으로 굴면서도 차마 완전히 외면하지는 못한 결과가 단두대에서 마녀로서 맞이한 최후였으니까.
“지금 말씀드리기엔 적절하지 않겠지만, 저는 그런 폐하를…….”
크리스틴 다키텐은 무어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폐하. 실언했습니다.”
크리스틴은 말하지 않았으나…….
-질투했다.
듣지 않아도 알고 있는 에리스는 크리스틴을 덥썩 끌어안았다.
“읏, 폐하?”
“저는 크리스틴 언니가 무척 좋아요.”
크리스틴은 한참동안 굳어 있다가 아주 짧은 의문을 던졌다.
“어째서요?”
누군가는 마치 에리스가 고결하고 무욕한, 완전무결한 성녀라는 것처럼 칭송한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녀도 달콤한 과일을 좋아하고, 맛있는 식사를 즐기고, 가끔은 그림처럼 아름답고 호사스러운 드레스 차림의 자신을 상상하곤 한다.
성녀이자 여왕의 신분이라기엔 썩 화려하지 않은 하얀 로브차림만을 고집하고 다니는 건 어디까지나, 그녀 자신의 마음가짐을 되새기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크리스틴 다키텐이 에리스를 꺼려하고 질투한 것처럼, 에리스도 크리스틴을 꽤나 부러워했다.
누가 봐도 감탄할법한 레이디이자 유능한 사람이면서도 자신의 감정에 솔직할 수 있고,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이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사람.
에리스와 완전한 대척점에 있는 이.
크리스틴은 에리스의 이상에 공감하지 못하고, 오히려 경계한다. 혹시라도 피에르가 에리스로 인해 크리스틴을 환멸하게 될까 봐.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틴은 언제나 에리스를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지원해주었다. 피에르 드 라파예트가 그걸 원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것만으로도 자신의 모든 감정을 억누른 채 최선을 다해서 도와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는, 크리스틴은 에리스와 지독히 닮아있기도 하다.
“……그리고 많이 미안해요. 두 분 모두에게.”
“…….”
크리스틴은 영문을 모를 터이나, 에리스는 순수하게 그렇게 여겼다.
피에르 드 라파에트는 아마도, 아니 확실하게.
에리스의 기원에 의해 돌아온 사람이다.
그것은 피에르 드 라파예트를 위해 올린 기원이 아니었다.
그저 이런 결말을 바꾸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여도 상관없었을, 심지어 에리스 자신조차 이루어질 거라는 기대 없이 올린 기원.
그러나 기원은 이루어졌고, 에리스가 기억하는 그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거의 모든 역사가 바뀌었다.
겨우 한 사람의 분투와, 그 분투로 생겨난 변화로 인해.
피에르 드 라파예트는 에리스 자신이 자각조차 없던 순간에 그녀를 찾아내 무수한 것들을 바꿨다.
지금까지 쉬지 않고 싸워 왔다. 아마도 그가 죽음을 맞이했던 삶보다도 더 많은 싸움을 더 가혹하고, 더 치열하게.
이전 삶에는 만나보지도 못한 사람이다.
서로 이름이나 한두 번 들어봤을 정도의, 아무 것도 아닌 사이였던 그녀 때문에.
그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자신의 억울함과 슬픔을 담아 올린 기원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이 이토록 처절하게.
지금 이 순간에도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고 있다는 것을 알면.
크리스틴은 에리스를 뭐라고 비난할까.
에리스는 자조했다.
뭐가 사기꾼이야. 사실은 알고 있다.
기억을 되찾기 전에 자신이 장난조로 그에게 던지던 비난이, 실상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주객이 전도되어 있다는 것.
자신은 순수한 의미로 올린 기원이라 한들, 그 때문에 그가 저렇게까지 사투를 벌이게 되었다면.
그걸 알게 된 지금에조차, 그의 사투에 기대어 조금이라도 나은 미래를 희망하고 있는 자신은.
성녀라기보다 차라리, 기사를 조종하는 마녀에 가깝지 않은가.
“이상하군요.”
에리스의 자조 섞인 상념은 크리스틴의 목소리로 깨졌다.
“네?”
“서로가 서로를 이용한다고 착각하고 미안해하는 관계라니.”
“그게, 무슨.”
에리스가 멍하니 읊조리는 가운데, 크리스틴은 진하게 미소짓더니 에리스의 손을 톡톡 쳐서 풀어내고 한발 물러났다.
“여왕 폐하께서는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후회하시나요?”
“……아니요.”
“그러면, 묻죠. 피에르는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후회할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런 사람이 저렇게 싸울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에리스가 말문이 막힌 사이, 크리스틴은 에리스에게 예를 갖추어 보였다.
처음 왔을 때에 비해서는 조금 적당 적당한, 어떻게 보면 무례한 태도로 인사하곤, 웃었다.
“두 분은 서로에게 미안해 할 것이 아니라, 고마워해야 할 것 같네요. 그럼 저는 할 일이 많아서, 이만 물러가보겠습니다.”
크리스틴은 그대로 등을 돌려 걷다가, 에리스를 흘긋 돌아보며 말했다.
“첨언하자면, 저 또한 피에르를 위해 최선을 다 하는 순간이, 그리고 그가 저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순간이 가장 행복합니다.”
“…….”
“폐하께서 피에르를 위해, 그리고 폐하를 믿고 따르는 모든 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주실 것이라 믿죠.”
크리스틴은 그대로 막사 밖으로 가버렸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서야 보몽 경이 숨을 토해내었다.
“크흠, 크흠. 하여간 부부가 쌍으로 폭풍같긴…….”
“아하핫.”
그리곤 웃음을 터트린 에리스를 보곤 당황해 했다.
“폐하?”
그렇구나.
사실은 성녀라고 불리고 싶지 않다.
모두에게 모범이 되려고 노력하고 싶지도 않다.
가끔은, 그저 즐겁게 놀고 맛있는 걸 먹으며 편하게 인생 즐기며 살고 싶다.
두렵고, 무섭다.
그럼에도 싸워온 것은.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 태어나면서부터 누린 것들은 사람들에게서 비롯된 것이니, 갚아주어야 한다고 배웠으니까.
자신의 기원에 의해 돌아온 사람이 저토록 처절하게 싸우고 있어서, 그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으니까.
원하지 않았다한들 여왕으로서, 사람들을 이끄는 자로서.
그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주기 위해 책임을 다해야만 하니까.
그러나.
-후작님, 행복하세요?
그 질문에, 피에르 드 라파예트는 답을 이미 내주었다.
-행복한 것 같습니다.
피에르 드 라파예트는 싸우고 있다.
크리스틴 다키텐도 싸우고 있다.
에리스 자신으로 인해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을 위해.
다른 이들도 싸우고 있다. 그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거머쥐기 위해.
에리스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신은 들어줄 거라 기대하지 않았던 그녀의 기원을 들어주었다.
그때의 단두대에서 본 풍경을, 그 비극적인 결말을 바꿔주었다.
그렇다면.
-제가 열심히 노력해서, 모두가 조금이라도 더 행복해한다면.
그녀가 품은 그 어린 날의 치기 어린 소망조차도.
-그러면 언젠가 먼저 간 분들의 앞에서. ……어머니의 앞에서, 자랑스러워할 수 있겠죠.
지켜보고 계시겠지.
에리스는 크리스틴이 놓고 간 수정을 그대로 집어들었다.
“프랑크 아저씨.”
“모시겠습니다, 여왕 폐하.”
에리스는 그에게 웃어주며 말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에요.”
“예?”
“지금까지 길러주셔서 고마워요, 아빠.”
에리스는 말문이 막힌 프랑크를 지나쳐, 달려 나갔다.
그리고는 저 편에서 날아드는 거대한 오라를 보자마자 손을 뻗고-
손에 수정을 쥔 채 기원했다.
부디, 미래를 위해 분투하는 모두에게.
당신의 가호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