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심연의 성전 – 심연도 그대를
바싸고가 기억하는 그레모리는 경박하고 종잡을 수 없는, 서큐버스치고도 과하게 발랄한 악마였다.
그러나 지금 그의 앞에 있는 그레모리는.
말로만 전해 들은 모습과 닮아있다.
인간들의 성녀로서 활동하다가, 바엘이 마왕을 처치한 후 데려온 그레모리는 지독하게 우울해했었다 한다.
그렇다고 들었을 뿐, 바엘과 함께 마왕과 그 수족들을 처단하고 뒷수습하느라 바쁘던 바싸고가 반쪽짜리 서큐버스 따위에게 신경 쓸 여유는 없었지만.
나중에 직접 대면했을 때는 워낙 경박하게 군 탓에, 다 헛소리였다고 치부했지.
……바엘과 함께.
바싸고는 절로 자조 섞인 미소를 흘렸다.
한때는 그랬지. 지금은 이러고 있고.
눈앞의 그레모리는 그 서큐버스가 맞냐 싶을 정도로 차가운 얼굴이지만, 어쨌든 바싸고는 최소한 그 미친 파이몬 개자식이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안도했다.
……그리고 희망을 품었다.
“……클클, 그래서 이 사지가 다 잘려나간 비참한 악마에게 무슨 용건이 있어서 오셨나, 그레모리?”
그레모리는 잠시동안 바싸고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별로, 아무것도. 아직 살아있는지 확인하러 왔을 뿐이에요.”
지극히 차갑고, 무미건조한 음성.
그레모리가 어떤 거래를 제안할지,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해야 이 빌어먹을 신세에서 탈출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바쁘게 머리를 굴리던 바싸고는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무, 뭐?”
“당신의 마력은 드론을 유지하는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니까. 혹시라도 당신이 죽어버렸으면 추출량에 조정이 필요하거든요. 그럼 이만.”
그레모리는 정말로 아무 미련도 없이 등을 돌려버렸다.
당황한 바싸고는 손을 뻗어 그레모리를 잡으려다가, 그에게 손은커녕 팔조차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규하듯 소리쳤다.
“멈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런 거라면 수하를 시켜도 되는 거잖아! 대표이사가 고작 내가 죽었는지 확인하려고 직접 여기까지 왔다고?”
그레모리는 천천히, 무감각한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파이몬이 그것도 알려주지 않았나요? 어비스 코퍼레이션은 본국에 상륙한 중앙 대륙 연합군에 맞서 전쟁 중이에요. 악마란 악마는 전부 차출되어 전장에 나가 있고요. 제 자매들까지 전부.”
바싸고는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잠깐. 그러면 지금 본국이 공격받고 있다고?”
“맞아요. 중앙 대륙의 국가란 국가는 거의 다 참전했고, 저들이 중앙 대륙과 통하는 ‘문’을 열고 공격 중이죠. 당신의 마력이 심각하게 빨려나가는 걸 느꼈을 텐데, 그 정도도 예상하지 못했다니 당신답지 않네요.”
네년도 사지 잘려나가고 갇혀서 마력을 빨리느라 고통만 받고 있는데 그딴 걸 예상할 수 있는지 한 번 해보던가!
그렇게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바싸고는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한탄했다.
“빌어먹을, 결국 바엘과 파이몬 두 미치광이가 일을 쳤군. 대체 얼마나 많은 마족들이 죽은 거지? 이길 순 있나? 동방 제국도 모자라 중앙 대륙과의 전면전이라니, 어비스 코퍼레이션을 멸망시키기라도 할 셈인가?”
그레모리는 별로 동조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바싸고는 재빠르게 덧붙였다.
절박함은 굳이 연출할 필요도 없었다. 정말로 더는 없을 정도로 절박하니까.
“그레모리, 네 생각은 다르지 않나? 너도 분명 전쟁에 반대했었지. 이 미쳐 돌아가는 꼴을 보고만 있을 참인가?”
갇혀있던 파이몬을 바엘이 풀어주고 그 미치광이를 이용해 반대파를 숙청했다.
그렇다면 그 반대가 안 될 것은 무엇인가?
“나를 풀어줘! 내 수하들을 규합해서 도울 테니! 이 미친 짓거리를 멈춰야겠어!”
그러나 그레모리의 눈초리는 여전히 차게 식어 있었다.
바싸고는 직감적으로 실패했다는 걸 느꼈지만, 그레모리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의 상상조차 넘어서는 것이었다.
“당신의 수하들은 이미 전부 드론이 되었거나, 될 신세에요. 관 속에서 마력이나 빨리고 있죠. 그나마 당신은 깨어나 있기라도 한 걸 다행으로 아세요.”
“뭐라고?”
그 많던 수하들이 전부?
그리드 사에, 그와 동참한 회사들까지 수도 없는데 그게 다?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족의 반을 드론으로 갈아버렸다니. 농담 질이 많이 낮아졌어, 그레모리.”
바싸고는 애써 말했으나, 그레모리의 표정은 여전히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측은한 무언가를 보는 눈이어서, 바싸고는 비명처럼 소리 질렀다.
“안 돼, 안 돼, 안 돼! 우리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그 빌어먹을 바엘 놈이 내겠다는 미친 전쟁을 막으려고 든 것뿐인데 다 죽였다고? 심지어 파이몬 놈의 영혼 없는 꼭두각시로 전락시켜?”
그레모리는 침묵하며 바싸고의 절규를 듣고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알았겠죠, 바싸고. 설사 당신을 풀어준다고 해도, 그 몸뚱이 하나만 가진 당신이 할 수 있는 건 없어요.”
“프흐흐, 마족의 용사는 어디로 갔지? 마족의 존엄은? 제기랄, 하다못해 마왕 놈도 이러진 않았어!”
바싸고는 한탄하며 말했고-
“나는, 우리에겐 아무 죄도 없었다고, 빌어먹을. 타락한 용사 놈이 내려는 전쟁을 막으려고 한 것뿐이야.”
그레모리는 그 말에 반응했다.
“타락한 용사만이 전쟁을 내려고 했다, 그렇게 생각해요?”
날카로운 목소리에 바싸고의 말문이 막힌 사이, 그레모리는 쉬지 않고 쏘아붙였다.
“웃기는 소리. 당신이 400년 동안 저 중앙 대륙에 퍼트린 불화의 씨앗이 얼마나 많았죠? 그동안 당신이 벌인 짓이 언젠가 이런 일을 만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요?”
“그게 무슨 상관이야! 저 열등하고 어리석은 놈들은 알아보지도 못할 유희-”
“크라프테 국왕이 비텐펠트를 잡으러 이곳에 와있는데도?”
비텐펠트. 크라프테를 신흥 군사강국으로 만든 크라프테의 재상이자, 바싸고의 ‘유희’ 중 하나였던 이름.
“허, 헛소리.”
“헛소리라고 생각해요? 내가 누군지 잊은 건가요? 바싸고.”
몽마의 여왕.
인간의 꿈속, 무의식에 스며들어 읽어낼 수 있는 존재.
그런 그레모리라면 크라프테 국왕의 심상을 읽어내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다.
“당신만이 아니죠. 프라이드, 슬로스, 라스, 엔비, 글러트니, 그리드. 전부 400년 동안 중앙 대륙에 대고 온갖 협잡질을 하며 재미를 봤으니…….”
그레모리는 슬며시 고개를 기울이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거고요. 중앙 대륙의 종족들 대신 직접 드론이 되어 사용당하면서 대가를 치른다는 건 저도 상상도 못 한 일이긴 하지만.”
그레모리는 거의 숨도 못 쉬고 있는 바싸고를 한껏 차갑게 조소하며 말했다.
“가차 없이 말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단순히 ‘유희’라는 이유로 온갖 배신을 뿌리고 배신당한 이들의 분노를 즐기던 당신이 아무 죄도 없다는 소리가 좀 웃겨서요.”
바싸고는 꽤 긴 침묵이 흐른 뒤에야 가까스로 답했다.
“……열등 종족들을 상대로 한 일일뿐이야.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번영을 위한 길이었고. 파멸이 아니라.”
“그러게요. 그런데 우리 번영을 위한다는 행동에 분노한 중앙 대륙의 국가들이 우리를 파멸시키겠다고 여기 와있네요. 우린 그걸 막겠다고 동족들을 드론으로 갈아서 쓰고 있고…… 솔직히, 이제 와선 누가 우리의 파멸인지 저도 좀 헷갈려요. 멍청이들 같으니.”
바싸고는 울컥한 얼굴이 되었다.
“마치 너는 이 일과 아무 관계도 없다는 듯이 말하는군, 그레모리.”
사지가 잘려나가고 몸뚱이만 남은 무력한 악마가, 금빛의 서큐버스를 규탄한다.
“네년 또한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방침대로 저 대륙에 공작을 벌이고 다녔잖나! 파이몬과 함께 드론 시스템을 구축한 것도 네년이고! 네년만 무고한 방관자라는 듯이 떠들지 마라!”
그 규탄을 받은 그레모리는 웃었다.
어비스 코퍼레이션이 사방간데에 혼란과 분열을 뿌리고 다니니, 그들의 분노와 증오가 쏠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중앙 대륙에서 방해공작을 해야 했다.
결과적으로는 시간을 조금 벌었을 뿐, 의미 없는 짓이었다. 그녀가 아무리 노력해서 덮어도, 어비스 코퍼레이션은 감춰지는 만큼 더, 더 악행을 저질렀으니까.
파이몬이 드론이라는 끔찍하기 그지없는 물건을 만들 때, 확실히 그레모리도 관여했다.
마력을 빨리고 빨린 끝에 말라비틀어져 드론이 될 인간들에게 소위 ‘인도적’이라는 명목으로 최소한 행복한 꿈이나마 꾸게 해주고, 대신 서큐버스들은 그들이 꿈꾸며 죽어가는 동안 마력을 흡수할 수 있으니까.
말이 좋아 인도적이지, 결국 공범자나 다름없다.
-러스트 사는 특이사항 있어요~ 슬로스 사에서 요구하는 인간 수량은 계속 늘어나는데, 인간 수급량은 늘어날 기미가 안 보인다구요~ 조치가 필요합니다!
당장 그녀 자신이 인간 수급량을 늘려달라고 떠들어대지 않았던가.
원래라면 어비스 코퍼레이션에서 살아가며 서큐버스들에게 마력을 나누어주어야 했을 다른 종족들이 죄다 드론으로 갈려버렸으니까.
드론이 되기 위해 마력을 빨리고 있는 이들이 아니면 서큐버스들이 허기를 채울 방법이 없었으니까.
핑계는 그럴듯하여, 그레모리는 냉소적으로 웃었다.
“그래요. 저도 이 빌어먹을 사태에 책임이 있죠. 우리 모두 다 악마들답게 선택해서, 악마들다운 파국을 맞고 있는 거예요.”
“빌어먹을, 그렇게 생각하면 날 풀어줘! 너는 무사할 것 같아? 인간들이 이기든, 바엘이 이기든, 미치광이 파이몬 놈이 이기든! 회색분자 같은 네년도 언젠가 숙청당할 거야!”
바싸고는 몸부림치며 절규했다.
“저 꼴을 그대로 놔두고 다 같이 죽을 셈인가? 그레모리!”
그 절규를 들은 금빛의 서큐버스는 멈칫했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웃음소리에 바싸고가 어안이 벙벙해져 있자, 그레모리는 화사하게 웃으면서 가슴께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는 늘 하고 다니는 십자가 목걸이를 들어올려, 거기에 가볍게 입을 맞추더니 답했다.
“차라리 그게 괜찮을지도 모르겠네요.”
* * *
우리는 바쁘게 보급품을 분배하고 판데모니움을 향한 출정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우리가 출정하고 얼마 지나지도 않아, 제롬 모렐의 경기병대가 보고를 가져왔다.
“전방에 적군 접근 중! 드론에 더해 마족의 군대가 많아 보입니다! 전열보병으로 보이는 부대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게 진짜 최후의 본대 같군.”
지금까지는 드론들이 주력군이고, 마족의 부대는 그리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로켓 포대나 기관총처럼 섬세한 운용이 필요한 병기에만 할당될 뿐이었지.
그러나 정규군으로 보이는 마족들이 나왔다는 건…….
“바엘의 친위대인가?”
그레모리가 말했던 사실상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지도자, ‘프라이드’사의 대표이사 바엘.
그자가 직접 나왔다고 봐야 타당하겠지.
마왕을 직접 처단했다는 자이니, 아마도 바르바토스 이상이지 않을까.
절로 마른침이 넘어간다.
그 빌어먹을 제독 놈도 애먹었는데, 바엘은 대체 어떻게 상대할지 막막하지만...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다.
결국 우리는 준비한 모든 걸 퍼붓고, 이기면 될 일.
“각 부대 전투 대열로.”
“옛, 각 부대 전투 대열로!”
프랑지아, 게르마니아 제국, 크라프테 왕국, 이베리카 형제국, 노던 연합 왕국의 깃발이 제각각 흩어지며 대형을 갖추기 시작했다.
100만에 달하는 연합군이 드넓은 평지를 움직이는 광경은 장관이지만, 이번에는 제대로 된 혈전이 벌어지겠지.
파이몬이 같은 바보짓을 두 번 할리도 없고, 이번엔 마족들의 정규군도 있는 모양이니.
나는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 저 멀리 안개 너머에서 서서히 드러나는 적의 부대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많군.
지난 전투에서 드론을 엄청나게 처리했는데도, 병력은 거의 동등해 보인다.
나는 흘긋, 우리 대열 뒤쪽에서 보급 관리 업무에 한창일 크리스틴 쪽을 바라보았다.
안개 때문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녀는 언제나처럼 나를 믿고 최선을 다하고 있겠지.
나는 가볍게 미소 짓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 부탁드립니다, 여왕 폐하.”
“맡겨주세요!”
에리스는 활짝 웃으며 답했다.
내륙으로 조금 깊숙이 들어온 덕분에 햇빛이 없어, 투영될 듯이 맑은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와 마주하고 있자면 저 탁한 보랏빛 안개로 심란할 것 같은 기분도 날아가 버린다.
“믿지요.”
“전 포병대, 포격 준비!”
“포병 방열!”
포병대가 정신없이 포진하고 포격을 준비하는 사이.
피이이이잉-
피이이이-
익숙한 소음이 들려왔다.
시작이군.
에리스가 바로 손을 들어 올려, 금빛의 장벽이 쳐진 순간.
거대한 보랏빛의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뭐야, 저건.
오라……인가?
미처 깨닫기도 전에 그것이 에리스의 장벽을 덮치고-
유리가 산산이 부서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금빛의 장벽이 무너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