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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239화 (239/258)

239화. 심연의 성전 – 심연을 들여다보면

“피에르, 피에르, 피에르……!”

파이몬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피에르 드 라파예트에게 맞이한 패배가 처음은 아니었다.

이베리카에서 패배하여 뿔이 잘렸고, 저들이 문을 건설하기 직전에도 예기치 못한 증원으로 패배했다.

그래도 그때는 방심했거나, 손에 다른 패가 남아있었다.

다음에 상대한다면 이길 자신이 있었다.

애초부터 위협으로 보지도 않았던 이베리카는 물론이고, 결국 문의 건설을 허용하게 된 순간에도 압도적인 숫자의 드론이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 피에르에게 당한 패배는 결과적으로 파이몬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그러나 지금의 패배는.

진심으로 한 번에 저들을 말살시킬 작정으로 한 공세였다.

결코 패배해서는 안 될 전투였고, 질 리도 없다고 생각했다.

저들이 섬에 상륙하고 수도 없이 싸웠다.

적의 전술은 이미 충분히 파악했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피에르 드 라파예트와 연합군은 그의 의도대로 시달리며 패배 직전까지 내몰렸었으니까.

그런데 성녀를 이용해서 서큐버스들을 쫓아내자마자 저런 수를 쓸 줄이야.

그렇게 생각하던 파이몬은 멈칫했다.

섬에 상륙한 이후, 모든 것이 그의 의도대로 돌아갔다고 생각했다.

서큐버스들을 통해 적의 동향을 속속 파악하며 연합군을 농락하고, 몰아붙여 압도해냈다고.

그러나…….

파이몬이 서큐버스들의 도움 없이 피에르에게 승리한 적이 있었던가?

이베리카에서의 예기치 못한 협공.

정찰부대 습격을 도리어 읽힌 것.

문의 건설 직전에 붕괴시킬 수 있다고 믿다가 증원군에게 허를 찔린 것.

그리고 그동안 연합군의 모든 걸 보았다고 생각했다가 패배한 이번 전투까지.

이건 마치, 피에르가 그를 압도하는 것 같은-

파이몬은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생각을 멈췄다.

아니, 지나친 생각이다. 그럴 리가 없다.

이건 어디까지나 상황적 특수성에 의한 문제였을 뿐이다.

100만의 드론을 가동해서 싸우는 전투다.

하찮은 열등 종족들의 마력으로는 유지가 가능할 리가 없고, 이미 숙청당한 마족들의 마력을 뽑아내서 유지하고 있는 상황.

이런 대규모 드론의 운용을 몇 번만 반복하면 드론이 전멸하는 것보다 마력을 제공하는 마족들이 말라 죽는 것이 훨씬 빠르다.

그래서 속전속결이 필요했다.

어차피 연합군의 전력은 충분히 파악했으니 그대로 몰아붙이면 이길 거라 생각하고 별다른 준비 없이 즉시 투입했다.

그래야만 연합군을 쓸어버리거나, 하다못해 적절한 마력 추출 재료를 확보하면서 휴전으로 전쟁을 끝내버리고 바엘에게 적대해서 승리할 가망이 있었으니까.

피에르와 연합군도 거세게 저항해서 드론의 손실이 커지는 것까지는 예상 범위 내였으나, 어차피 그렇게 잃는 드론보다 마력을 절감하는 것이 더 중요했던 거다.

그렇게 조급함에 시달린 결과가, 마력만 잔뜩 소모한 채로 변변한 전과조차 없는 대패.

이렇게 되면 그도 철저히 준비해서 재차 싸워야 한다. 그 준비도 드론들로 할 테니, 마력은 또 소모하겠지.

제아무리 무수한 드론이 있다 한들, 마력이 공급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육신에서 생물적인 기능을 대부분 파내버리고 대신 마력으로 운용할 회로를 박아 넣은 덕분에, 드론들은 마력 공급이 끊기거나 마력을 통해 신체를 유지하며 명령을 수신할 머리가 없어지면 얼마 가지 않아 그 형태를 잃어버리니까.

이 한 번의 패배로, 파이몬은 설사 피에르에게 승리를 거둔다 한들 바엘에게 맞서 승리할 가능성이 크게 낮아진 셈이다.

파이몬은 뿌드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갈았다.

잘려 나간 지 오래된 뿔에서 열기가 피어오르는 듯한 환상통이 스며든다.

이건 집착인가? 증오인가? 그도 아니라면.

“실례합니다, 파이몬 님.”

분노에 차 있던 파이몬은 휙- 시선을 돌렸고, 날갯짓을 하며 허공에 떠 있는 서큐버스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창백한 안색은 성녀가 펼친 가호가 연합군의 정신에서 강제로 튕겨내는 과정에서 그들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를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이제 자매들이 대부분 정신을 차렸습니다.”

이 서큐버스 이름이 뭐였더라?

레아였던가?

굳이 기억할 가치 같은 건 없다.

열등한 종족의 감정이나 열망 따위에 기생해 사는, 마족답지 못하게 비효율적이고 저열한 것들 따위.

“파이몬 님께서 요청하신 목적은 이미 어느 정도 달성했지만, 더 이상의 임무 수행은 어려워 보입니다. 그래서, 서큐버스 부대는 이대로 판데모니움으로 복귀하여 대기하는 것을 허락받고자 합니다만.”

파이몬은 슬며시 미간을 구겼다.

그러고 보면 이것들의 수장인 그레모리가 이베리카에서 수작질을 부린 탓에 자신이 이 고생 중이지 않나?

그때야 심증에 불과했고 결과적으로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체제를 붕괴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으니 넘어갔지만, 지금은…….

“……파이몬 님?”

그의 표정을 본 레아가 움찔하는 모양새에, 그렇지 않아도 저조하던 파이몬의 기분은 더욱 저조해졌다.

어차피 신체 능력도 열등하고 겁만 많은데, 열등 종족들 없이는 살아갈 수도 없는 존재들이다.

조금 더 효율적으로 기여할 수 있게 해주는 건 어떨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파이몬의 손은 그가 자각도 하기 전에 레아의 목을 틀어쥐고 있었다.

“으윽, 파, 파이몬 님?”

“생각을 해봤는데, 어차피 전쟁에 쓸모도 없다면 너희도 마력 공급이라도 하는 쪽이 어비스 코퍼레이션에 기여하는 것이 아닐까?”

“그레모리 님께서 그런 짓을 허락하실 리가!”

“무언가 착각하는데, 서큐버스. 그레모리가 너희를 보호해줄 권력이 있어 보이나?”

결국 이 상황에 와서까지 전쟁에 찬성표를 던지기를 거부하고, 바엘의 자비에 기대서 대표이사직을 지키고 있을 뿐인 허수아비가?

레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그걸 본 파이몬이 잔인하게 미소 지은 순간.

“네놈이야말로 착각하는군, 파이몬. 누가 네놈에게 그런 결정을 내릴 권한을 줬지?”

오만하고, 단호한 음성이 들려왔다.

파이몬은 얼굴을 구기며 레아의 목을 놓아주었고, 서큐버스는 콜록거리며 공중에서 한 바퀴 돌더니 바엘에게 고했다.

“위대한 ‘프라이드’사의 대표이사시여. 저와 자매들은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명령대로 임무를 수행했으나, 더는 임무를 수행할 여력이 없습니다. 청컨대 복귀를 허가해주십시오.”

바엘은 무심한 눈으로 레아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하지. 그레모리에게 돌아가라.”

“……관대한 자비에 감사를.”

레아는 바로 날아가 버렸고, 파이몬은 쯧- 하고 혀를 찼다.

“하, 아주 관대하십니다. 마왕이시여. 아니, 그레모리에게만 관대하신가?”

파이몬이 이죽거렸으나, 바엘은 피식 웃었다.

“그레모리는 나에게 반기를 들지 않았으며, 감히 나에게 도전할 힘도 없다. 그런 자에게 가혹해질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이 노골적인 비웃음이라는 것을 깨달은 파이몬은 이를 갈았으나, 바엘은 느긋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마찬가지로, 파이몬. 나는 네놈의 형편없는 패전에도 네놈을 벌하지 않는다.”

네놈은 아직 나에게 반기를 들지 않았고, 감히 나에게 위협이 될 힘도 가지지 못한다.

단언에 가까운 말에 파이몬의 얼굴이 있는 대로 일그러졌다.

그러나 반박할 수 없다.

애초에 송곳니를 너무 일찍 드러냈고, 빌어먹을 피에르는 성녀를 끌어다 쓰면서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지금은 숙여야 할 때다.

결론을 내렸음에도, 파이몬은 치를 떨었다.

그 긴 기다림이, 피에르와 연합군의 전의를 오판해서 틀어지다니.

지금 굴복하면 다음 기회는 언제지?

아니, 오기는 하나?

“……어리석은 저를 조롱하러 오셨습니까, 위대한 마왕이시여?”

결국 그의 심기를 다 감추지 못한 파이몬의 물음에, 바엘은 지극히 오만한 어조로 답했다.

“이 전쟁을 끝내러 왔다.”

* * *

크리스틴이 장담한 보급은 기대 이상이었다.

불과 이틀 뒤부터 막대한 양의 보급품이 도착하기 시작했고, 상상했던 것 이상의 양에 연합군 지휘관들은 즐거운 비명을 내질렀다.

“흠, 흠. 이거 탄약값 우리에게 청구 안 하는 것 맞소?”

지금까지 뻔뻔하게도 탄약을 물 쓰듯이 쓰던 크라프테의 국왕 하인리히 1세조차 놀라서 이렇게 확인을 구할 정도니 말 다했지.

“별도로 청구하지는 않을 거랍니다, 국왕 폐하. 대신 크라프테 왕국과 아키텐 상단의 거래에서 다소의 편의를 봐주시는 정도는 기대해보고 싶네요.”

“……좋소. 긍정적으로 검토해보도록 하지. 한데, 정말 괜찮겠소? 이만한 탄약을 준비하다니…….”

“탄약을 아끼겠다고 드론들과 백병전을 많이 벌일수록 군사들의 희생이 커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번 사기가 꺾이기라도 하면 돌이킬 수 없겠죠.”

내가 답하고.

“크라프테군이 쓰는 탄약도 결국은 프랑지아의 희생을 줄이기 위한 거니, 저로서도 일종의 투자를 하는 셈이랍니다.”

크리스틴이 덧붙이자 하인리히 1세는 약간 떨떠름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제길. 우리가 프랑지아와의 전쟁에서 질 수밖에 없던 이유를 알 것 같군.”

크리스틴은 우아하게 미소 짓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고, 나도 피식 웃었다.

확실히 우리가 크게 쓰고 있지만, 연합군이 마도 왕국에 넘길 마도 공학 기술은 우리가 우선해서 받게 된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크리스틴이니 아주 손해 보는 짓은 하지 않는다.

그에 비해…….

“저도 혁명군 총사령관으로서, 국왕 폐하께는 감사드리고 싶군요.”

“최소한 그대들 앞에서 부끄러울 일은 없도록 준비하고 왔지.”

하인리히 1세의 말대로, 크라프테군은 게르마니아 제국에 거의 맞먹는 병력을 끌고 왔다.

샤른호르스트 장군이 이끈 선발대와 하인리히 1세가 지휘하여 2차로 상륙한 부대도 모자라 문이 열리고 합류한 본대까지.

실제 국토 크기나 인구수로 생각하면 크라프테도 어마어마한 투자를 한 셈이다.

“선왕 폐하께서 하신 약조이시기는 하나, 이 정도로 적극 참여해주실 줄은 몰랐으니까요.”

한창 프랑지아와 전쟁을 벌이던 와중에, 우리가 이기면 어비스 코퍼레이션에 맞선 전쟁을 지원해주겠다던 대왕의 말도 안 되는 약속.

약속이라기보다는 허세에 가까운 짓이었지만 대왕은 자신이 한 말을 지켰고, 실제로 평화협상 조약에도 명시되었으니 입을 싹 닦긴 어려웠겠지.

하지만 전쟁 당시 저들이 입은 손실을 감안하면 크라프테는 가용병력을 거의 다 끌고 온 셈이다.

심지어 국왕 본인이 친정하기까지.

에리스야 원래 성격이 그렇고 성녀왕이라는 상징성도 있으며, 이베리카 형제국의 크록스는 전사 문화라서 그렇다지만, 크라프테는 정말 기대 이상으로 적극 호응해준 셈이다.

하인리히 1세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대들의 나라는 악마들로 인해 고통받았지.”

“그렇습니다, 국왕 폐하.”

하인리히 1세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판데모니움 방향을 바라보며 답했다.

“우리 또한 악마들로 인해 고통받았다. ……그 악마가 저곳에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 * *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수도, 판데모니움.

어비스 코퍼레이션 본사 첨탑의 지하감옥.

“……프흐흐흐.”

몸뚱이만 남은 채 결박당해, 비쩍 말라비틀어진 악마가 쉰 목소리로 웃었다.

이곳에 올 리 없다고 생각했던 악마가 눈앞에 있고, 그 방문이 굉장히 반갑다고 생각하는 그 자신이 우스워서 사지가 잘려 나간 악마는 한참을 웃더니 물었다.

“이렇게 누추한 곳까지 직접 행차하시다니, 나를 조롱하려고 온 건가?”

상대는 잠시 침묵하더니, 느릿느릿하게 그를 불렀다.

“바싸고.”

“내 이름이 이렇게 감미롭게 들리는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바싸고는 마치 곱씹듯 생각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어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그레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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