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심연의 성전 – 속박
파둔 참호에 뛰어들어 시체로 벽을 쌓아 넘으려던 드론들은 미리 준비해둔 폭약에 거하게 폭파당했다.
그 뒤엔 불길 때문에 제대로 건너지 못하는 드론들을 건너편에서 일방적인 산탄 포격과 사격으로 쏘고 또 쏠 뿐.
연합군의 모든 군사들이 쉴 새 없이 쏘아대는 포화의 비는 엄폐고 뭐고 할 줄 모른 채 멀뚱히 서 있는 드론들을 그대로 제물로 삼아 집어삼켰다.
총성과 포성이 쉴 새 없이 터지고, 보랏빛 안개가 물러나 조금이나마 밝아졌던 하늘이 매캐한 초연으로 뒤덮일 즈음.
“놈들이 도망칩니다!”
군사들은 피로도 모르고 공포도 모르는 드론들이 등을 돌려 달아나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이, 이겼다!”
“와아아아-!”
단번에 환성이 터져 나와 진영을 뒤덮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연합군이 이 악마들의 섬에 발을 들이고 처음으로 치른 전면전이다.
각국 수뇌부의 전의가 있고 에리스의 설득 덕분에 어떻게든 전선에 서기는 했지만, 이번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기라도 했으면 단번에 사기가 꺾였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과는 깔끔한 승리.
드론들은 우리 진영에 뛰어들지도 못했고, 100만이나 되는 드론들이 밀집대형으로 들이박다가 연합군의 포화에 엄청난 피해를 입고 패퇴했다.
파이몬은 진심으로 싸울 작정이었지만, 드론의 우위를 지나치게 과신했다.
무수한 숫자에 지치지 않고 공포도 모르는 병기?
그러나 대신 자율판단도 할 수 없고 접근해서 백병전을 벌이는 방법에만 의존하고 있다.
일단 뛰어들어서 백병전만 벌이면 인간의 군대 정도는 압도할 수 있고 지금까지는 그걸로도 잘 먹혔으니까 똑같은 전술을 썼겠지.
전장과 전술은 쉬지 않고 진화하는데, 파이몬은 그걸 간과했다.
상륙 후 문을 방어할 때야 우리가 교대 돌리면서 휴식 취하기도 빠듯한 병력이었으니 교전지역 전체를 참호선으로 가른다는 방법 따위 쓸 수 없었지만, 이젠 인력은 충분하거든.
지금은 그보다도…….
“고생하셨습니다, 여왕 폐하.”
내가 에리스에게 다가가 작게 말하자, 에리스는 후드를 젖히더니 거칠어진 숨을 골랐다.
“후우, 후우. 힘드네요.”
에리스의 이마를 따라 땀이 뚝뚝 흘러서, 나는 손수건을 꺼내서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서큐버스들을 쫓아내는 가호를 건 채로 로켓까지 막아주셨으니 무리도 아니죠.”
결국 에리스의 가호가 없었다면 무기력증에 빠진 군사들을 동원해서 미리 이런 준비를 한다는 것도 불가능했을 테고, 설사 어떻게 한다해도 로켓 포격에 노출되어 진형이 흐트러지면 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어려워진다.
자칫하다간 우리가 파둔 함정에 우리 군사들이 빠지는 대참사가 발생할 수도 있었겠지.
요컨대 이건 최전방에서 저 움직임을 지휘하는 데미앙 드 미르보와 다른 연합군의 지휘관들, 그리고 에리스를 믿었기에 가능했던 작전이다.
“하지만 덕분에 대승입니다. 감사드립니다, 여왕 폐하.”
에리스는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내곤 씩 웃으며 활기차게 답했다.
“앞으로도 맡겨주세요!”
“라---파예트 후작 각하!”
아, 이 경박한…….
“대---승입니다! 그것도 압도적인 대승! 보셨습니까? 으하하하! 이 데미앙 드 미르보의 역작, 새로운 미르보선의 힘을! 드론 놈들이 붙지도 못하고 죄다 터져죽는 광경을 보니 아주…… 캬아아아! 속 시원하다아아!”
헐레벌떡 뛰어온 데미앙은 아주 호들갑을 떨며 입에서 침을 튀겼다.
아, 그래…….
좋냐…….
“수고했네, 미르보 사령관. 훌륭한 전과였어. 그대의 역할도 컸지.”
연합군 수뇌부가 머리 맞대고 끙끙댄 끝에 떠올린 건데 은근슬쩍 자기 역작이라고 갖다 붙이기는.
사실 저 작전에서 데미앙이 꺼낸 제안은 참호로 드론들의 돌격을 저지하자는 것뿐이었다고.
내 표정이 떨떠름하거나 말거나 데미앙은 세상 신난 얼굴로 떠들다가, 옆에서 에리스가 방긋방긋 웃고 있는 걸 보곤 화들짝 놀랐다.
“허어어억! 소, 송구합니다, 여왕 폐하! 폐하께서도 계셨군요!”
“네에, 있었답니다. 라파예트 후작님에 비해 존재감은 없긴 하지만요.”
“그, 그, 그게 아니라…….”
에리스가 은근하게 말하자 데미앙은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아직도 공포증에 시달리나.
명색이 선봉대 사령관이란 놈이…….
그러나 에리스는 이내 밝게 웃으며 말했다.
“수고하셨어요, 미르보 백작. 멋진 전투였답니다.”
데미앙의 동공에 지진이 났다.
뭔데, 저거, 좋게 말해줘도 왜 저래.
한참 말을 잇지 못하던 데미앙은 느리게 말했다.
“가, 감사, 감사합니다. 여왕 폐하. 폐하께 이런 말을 듣는 날이 올 줄은 몰랐습니다.”
잠시의 정적이 흐르고.
에리스가 슬며시 내게 고개를 돌리더니 물었다.
“혹시, 제가 그렇게 칭찬에 인색한 사람인가요?”
“아니, 그건 아닙니다만.”
에리스가 어디 가서 인성으로 무슨 소리 들을 사람은 아니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 지젤 다비가 와서 경례하고 입을 열었다.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여왕 폐하! 그리고 라파예트 후작 각하! 각 부대 탄약 소모 보고- 으앗?!”
만, 우리는 그 다비가 보고하다 말고 당황하는 진풍경을 봤다.
“다비! 네 말이 맞았어! 여왕 폐하께서 칭찬을 해주셨다고!”
흥분한 데미앙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는 열심히 흔들며 침을 튀겨댔으니까.
“그! 여왕 폐하가! 이 데미앙 드 미르보에게! 채찍질이 아니라 칭찬을 해주셨다고! 이게 믿어져?”
근처에 있는 사람들 전부에게 다 들릴 정도로 큰 소리로.
단번에 쏠린 시선에 지젤이 당황하며 미르보를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미, 미르보 사령관 각하. 조금 진정-”
“……미르보, 백작님?”
그녀가 말리는 것보다, 에리스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이 더 빨랐다.
“어, 어, 어, 여왕 폐하. 그게, 제가. 너무 기쁜 나머지 실언을…….”
데미앙이 삐걱거리는 고개를 돌리자, 에리스는 어느새 손에 들려있는 금빛의 채찍을 쫙- 잡아당기더니 생글생글 웃으며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그리워하시는 것 같아서, 오랜만에 맛보여드릴까요?”
“아, 아니. 그, 그게 아니라……!”
나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슬며시 시선을 돌렸다.
하여간, 멍청한 데미앙 놈.
“승전 축하드립니다. 후작 각하, 여왕 폐……. 저건 또 뭡니까?”
뒤늦게 나타난 루이 드제가 당황한 얼굴을 해서,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신경 쓸 필요 없어. 그보다, 전투 결과 보고인가?”
“아, 예. 라파예트 후작 각하.”
드제는 나에게 보고서를 내밀면서 덧붙였다.
“압도적인 대승입니다. 드론들이 여전히 백병전을 고수하느라 가능한 일이겠죠.”
“그건 드론의 근본적인 설계 한계에 가까울 거라고 생각하는 중이야.”
드론이 어떤 식으로 살아있는 인간들보다 우월한 근력과 민첩성을 자랑하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일단 그런 신체능력을 가진 이상 맨손으로도 충분한 살상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니까 파이몬도 굳이 무기까지 들려줄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겠지.
“그렇습니까? 저렇게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놈들이 사격까지 하면 골치가 아플 것 같습니다만.”
“그건 쉽지 않을 걸. 맨손 백병전은 비교적 간단한 움직임만으로도 효율적으로 구사할 수 있지만, 사격을 하는 건 이야기가 많이 다르거든.”
맨손 백병전이면 그냥 팔을 들어 후려치거나, 손으로 깊이 찌르는 것으로 끝난다.
하지만 머스켓 같은 건 겉보기엔 간단해 보여도 의외로 발사하는 방식이 꽤 까다로운 병기다.
화약과 함께 포장된 총알을 꺼내서 화약을 쏟아 넣고, 총탄을 밀어 넣고, 조준하고, 발사한다는 행동 자체가 단체로 원격 조종되는 드론을 통해서 하기엔 너무 복잡하니까.
“휴. 그건 다행이군요. 그래도 문제는 있습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탄약 소비량이 엄청납니다. 북부군만 집계한 건데도 이 지경이니, 연합군 전체로 하면 더 심각하겠죠.”
드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다시 보고를 하고 있자, 뒤늦게 지젤 다비가 다가와서 다시 경레했다.
“보, 보고 중에 실례합니다, 라파예트 후작 각하, 드제 사령관 각하. 남부군도 탄약 소모량이 심각합니다.”
“아, 아니야. 사령관이 멍청한 게 참모장 문제는 아니지.”
지젤은 대놓고 멍청하다고 말하는 나를 조금 심란한 얼굴로 봤지만, 지체 없이 나에게 보고서를 넘겨주었다.
하여간, 드제나 다비나 기뻐서 미쳐 날뛰다가 또 헛소리해서 에리스에게 채찍질 당하는 중인 데미앙 놈과는 다르단 말이지.
보통은 전면전이 이루어지더라도 포병 간 대포병 사격이 이루어지고, 전열보병들은 앞 열만 사격하거나 순차적으로 사격한다.
자연히 조준하고 재장전하고 해봐야 몇 차례 발포하면 그대로 교전이 끝나거나, 이후 백병전에 들어서게 되는게 보통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번 전투에서 무려 100만의 대군이 늘어서서 자유사격을 가할 정도의 참호선을 파놓고, 실제로 100만의 드론을 상대로 자유사격을 실시했다.
에리스 덕분에 적의 포격은 다 막아내니, 엄폐고 회피고 방어고 없이 죽어라고 쏘기만 할 수 있었지.
바글바글한 드론을 상대로 어떻게 쏘든 아무튼 맞으니, 조준이고 뭐고 없이 역대 최대 인원이 역대 최고 속도로 있는대로 퍼부은 셈이다.
그 결과 드론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줄 수 있었지만, 그 대가는 두 사람의 보고서만으로도 아주 자명하게 알 수 있었다.
“이야, 이거 고작 몇 시간 치른 전투로 며칠간 싸운 바후아 시가전보다 더 썼네?”
이거…….
혁명군 소모량만 봐도 아득해지는데, 연합군 전체면 탄약 문제가 어떨지 상상만 해도 무서운데?
원정군의 첫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사기 문제를 해결했는데, 탄약에서 발목이 잡힐 줄이야.
그렇다고 저 무수한 드론들을 상대로 백병전을 거는 건 미친 짓이다.
“아무래도, 재보급까지 전투는 무리겠군.”
“그건 어쩔 수 없지요.”
드제도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는데,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요, 괜찮아요.”
저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크리스틴!”
“승전 축하해요, 피에르. 드제 사령관, 다비 중령.”
크리스틴은 검은 눈동자를 휘더니 가볍게 미소지은 채 말했다.
“전투는 바로 준비하셔도 될 거예요.”
“예?”
내가 당황하자, 오히려 크리스틴 쪽이 오히려 당황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뭔가 문제라도 있나요?”
“아니, 지금 탄약 소모량이…….”
내가 크리스틴에게 보고서를 건네주자, 크리스틴은 그걸 받아들고 보기도 전에 답부터 했다.
“엄청나겠죠. 전투는 저도 봤어요. 그래도 탄약 문제는 걱정하지 마세요. 아마 지금쯤 뤼미에르에서 이쪽으로 운송 중일 테니까.”
뭐? 그게 가능해?
내가 얼떨떨해하자, 크리스틴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말했다.
“뭐에요, 피에르. 저를 믿는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러면, 전투 중의 보급은 믿겠습니다, 제독님.
-저도 당신을 믿어요, 사령관님. 탄약이든, 포탄이든, 식량이든, 뭐든. 아낌없이 쓰셔도 돼요.
……그야, 그런 대화를 하긴 했지.
하지만 이미 오고 있다는 건 전투 치르기도 전에 준비했다는 소린데?
내 생각을 읽었는지, 크리스틴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2차 상륙을 시작하기 전에, 알프스 왕국을 통해 주문해뒀어요. 당신이 반드시 문을 건설할 거고, 승리할 거라고 믿고- 앗!”
나도 모르게 끌어안아 버렸다.
크리스틴은 조금 당황한 듯 했지만, 작게 웃으며 말했다.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어, 다비 중령. 우린 수습하러 가볼까?”
“예, 옛! 드제 사령관 각하!”
두 사람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제 없네요.”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크리스틴이 내게 입을 맞추고 떨어져, 나는 쓴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어쩝니까, 아내님이 재산을 너무 물처럼 쓰시는 거 같은데. 이거 만약 내가 실패라도 해서 대금 못 받으면 그대로 파산할 정도 아닙니까?”
크리스틴은 빙긋 웃더니 가슴께에 손을 얹으며 답했다.
“어차피 루이스 주려고 했던 건데요. 아키텐 백작이 아니어도, 상단이 없어도 저 하나가 더 가치 있다고 했죠?”
-라파예트의 위신을 바닥에 처박기라도 하실 생각이신가요? 아니면 저를 놀리시는 건가요? 어느 쪽이어도, 저는-
-제게는 라파예트의 위신보다, 아키텐 상단의 영향력보다 당신 한 사람이 더 가치 있습니다.
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크리스틴에게 다시 약혼을 청하며 했던 말을, 그녀가 지금까지 기억해주고 있었다.
“저도 그래요. 재산이든 뭐든, 제가 가진 그 모든 것보다 당신이 제게 더 가치 있어요. 그러니까…….”
크리스틴은 간절하면서도 잔인하게 말했다.
“당신의 곁에서, 제 모든 걸 걸고 도울게요.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겨요. 당신이 실패하면 재산 따위가 아니라, 제 목숨도 함께 잃게 될 테니까.”
애정과 신뢰로 엮어낸 속박이 몸을 얽어매서-
나는 웃으면서 그녀에게 속삭였다.
“아무래도 악마 놈들이 당신에게 협박하는 법을 배워야 하겠군요.”
크리스틴은 그 어떤 악마보다도 매혹적으로 웃더니 그대로 나에게 입을 맞추었다.
결코 헤어 나올 수 없을 정도로 진하게 빠져들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