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심연의 성전 – 격돌 (2)
파이몬은 입술을 짓씹었다.
“저게, 무슨.”
성녀의 힘에 의해 서큐버스들이 꿈에서 추방당했다.
100만의 군세를 단숨에 뒤덮는 강력한 가호는 마족들의 예상을 넘어선 수준이었으나, 성녀가 대륙의 전쟁에서 신성력 강화 수정을 사용했다는 첩보는 받았으니 납득할 수 있었다.
서큐버스들의 개입이 막힌 것은 아쉬운 일이긴 했으나, 그런다고 이미 흔들린 사기가 단번에 회복될 리는 없다고 여겼으니까.
그러나, 지금.
파이몬의 명석한 두뇌는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떠나갈 듯한 함성이 평야를 뒤덮는다.
불과 전날까지만 해도, 아니 아침까지만 해도 사그라들어 찾아볼 수 없던 열의가 단숨에 다시 피어오르고 있다.
언제 도망쳐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던 인간들이 전의를 불태우며 전투를 준비하고 있다.
“파, 파이몬 님.”
스톨라스의 당황하는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파이몬의 시선은 인간들의 성녀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에실리스테 릴리안느 드 프랑지아.
코르티잔의 소생인 반쪽짜리 왕족이자, 도망치고 잊혔던 왕녀.
원래라면 왕위에 오를 리 없을 존재다.
하물며, 혁명으로 왕국이 불타버리고 무너진 프랑지아에서는 더더욱 용납될 수 없어야 했던 여자.
성녀라고?
파이몬은 차갑게 웃었다.
저런 신분으로 혁명 프랑지아에서 성녀 행세를 했다면, 개죽음으로 끝나는 결말뿐이었겠지.
그런 여자가 지금, 이 섬에 와서 자신의 안위만을 알고 분열하기 일쑤인 열등한 종자들을 단번에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건.
파이몬의 이글거리는 시선은 말을 몰아 이쪽으로 달려오는 인간에게로 향했다.
피에르 드 라파예트.
그가 어비스 코퍼레이션조차 파악하지 못한 성녀를 먼저 찾아내고 할파스를 잡아 신성 교국의 인정을 받아내고, 왕국을 붕괴시킨 혁명 공화국에서 여왕으로 올렸다.
행보는 알고 있다. 그러나 인과가 이해되지 않는다.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지?
어떻게, 진작에 죽었어야 했을 성녀를 살려 여왕으로 삼고.
이 섬에서 그의 모든 예상을 산산조각 내버린 거지?
파이몬은 말을 달려 접근한 피에르가 활에 화살을 거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내 화살이 날아들고, 파이몬은 느릿느릿하게 포물선으로 떨어지는 화살을 손으로 잡아챘다.
피에르는 그걸로 할 일을 했다는 듯, 말머리를 돌려 유유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파이몬은 화살에 둘둘 말린 종이를 신경질적으로 풀어냈다.
“그, 그건…….”
스톨라스의 목소리를 들은 파이몬은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 하하하…….”
화살에 묶어 쏘아 보낸 것은 협정서였다.
스톨라스가 전달한,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평화 협정 제안.
그 협정서에 아주 간결한 답변이 휘갈겨져 있다.
-엿이나 먹도록.
파이몬은 더는 유쾌하게 웃지 못했다.
“어, 어찌하시겠습니까, 파이몬 니…… 컥!”
스톨라스는 말을 미처 끝마치지도 못하고 파이몬의 손에 목이 잡혀 꺽꺽거렸다.
“자, 잠시만, 잠시만, 제 말을……!”
“이 중요한 협정에 실패한 죄는 갚아야지.”
우두둑-
섬뜩한 소리와 함께 목이 꺾여버린 마족의 몸이 천천히 쓰러진다.
그럼에도 파이몬의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하하, 하하하…….”
변수 따위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번만큼은, 결단코 방심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피에르 드 라파예트를 몰아붙였다.
그가 가동할 수 있는 모든 드론을 동원해서 압박하고, 바엘을 이용해 그레모리에게서 동원해온 서큐버스들까지 전부.
그의 손에 있는 패를 전부 쏟아부었다.
실패할 리 없는 상황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드디어, 바엘에게까지 이빨을 드러냈는데.
그토록 긴 세월을 기다려온 순간인데 저따위 하찮은 존재들 때문에, 한갓 열등한 미물들 따위로 인해 여기서 이렇게 어이없게 틀어질 줄이야.
백만의 드론.
가공할 군사력이지만, 이들을 유지하고 움직이기 위해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마력이 든다.
신대륙의 인간이든 아인종이든 뭐든 쓸어오다시피 했음에도, 이미 드론이 된 저들을 유지하는 것은 남은 인간이나 아인종 정도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지금 드론의 마력을 공급하는 것은 대부분이 인간이나 아인종 따위와는 격이 다른 마력을 자랑하는 종족, 마족들이다.
바엘의 통치에 반기를 들었다가 숙청된 자들로 저 대군을 유지하고 있는 거다.
그러나 그들의 마력도 무한하지는 않다. 여기서 중앙 대륙과의 소모전이 길어지면, 드론들이 전부 파괴되는 것보다 마력이 다 빨린 나머지 공급이 멈추는 게 빠르겠지.
그렇게 드론을 크게 잃거나 마력이 고갈되면, 기껏 이겨놓고 바엘에게 대항하지 못한 채 숙청당할지도 모른다.
“하. 여기까지 와서.”
뇌를 절여버릴 듯한 해방감을, 쾌락을 맛 보여줘놓고.
그걸 바로 다시 빼앗긴다고?
파이몬은 눈을 번뜩이며 시선을 돌려, 연합군의 진영으로 돌아가고 있는 피에르 드 라파예트의 등을 쏘아보았다.
이 모든 사태의 원흉.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계획을 조금씩 틀어놓더니, 마침내 판 자체를 흔들어버린 존재.
원래라면 가능할 리 없을, 산업혁명 이전에 그에 미리 대비한 인간.
압도적인 열세를 딛고 내전에서 승리한 자.
귀족을 증오해 일어난 공화국과 손을 잡고.
현자와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혁명 공화국에서 성녀왕을 추대했으며.
제국을 뒤흔들고 이베리카를 승리로 이끈 끝에, 마침내 크라프테마저 꺾은 자.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적으로 싸웠던 자들을 규합하여 어비스 코퍼레이션에 맞선 원정에 이르기까지.
어비스 코퍼레이션은 언제나 피에르 드 라파예트로 인해 일어난 사태에 대응해왔다.
아니, 대응해왔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이번에는 저자를 무너트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준비를 했으나, 무너지는 것만을 반복했다.
실상은 피에르 드 라파예트로 인해 일어난 변화에 대응하는 것에 급급했던 거다.
심지어 피에르 드 라파예트를 이용하여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균열과 붕괴를 유도했다고 생각한 파이몬, 그 자신마저도.
“아아, 이게 무슨 감정이지.”
기나긴 세월 동안 그가 해내지 못한 것을 우습게 해내버린 존재에 대한 질투.
파이몬이 그토록 갈구해온 해방의 기회를 선사해 준 존재에 대한 사랑.
그리고 마침내, 파이몬이 그토록 기다려온 기회마저 눈앞에서 부숴버린 존재에 대한-
들끓는 증오.
“하하, 하하하! 아하하하하!”
파이몬은 광소를 터트렸다.
저것은 인간이되 인간이 아니다.
마치 인과관계 그 자체를 틀어놓는 듯한, 불합리에 가까울 정도의 이레귤러.
피에르 드 라파예트는 사랑스럽게 탐하며 고통을 감상할 만큼 나약한 존재가 아니다.
마침내, 마침내 알았다.
인간 치고 우수한 자, 인간 치고 놀라운 자가 아니라.
파이몬이 그토록 갈구해온 자유조차 산산조각 내버릴 정도의, 위협.
이제야 비로소, 피에르 드 라파예트는 파이몬의 적이 되었다.
“이보다 한참 더 전에 했어야 했는데.”
저 괴물 같은 존재를, 저 불합리한 존재를.
감히 가볍게 보고 내버려 두면 안 되는 거였다.
저자가 저렇게 되기 전에, 잘 쳐줘 봐야 인간치고 눈에 띄는 자였을 때.
진작에,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몸으로 만들어서.
“완벽하게 소유해버렸어야 했는데.”
파이몬은 애증이 흘러넘치는 눈으로 손을 뻗어, 저 멀리에 있는 피에르 드 라파예트의 모습을 부여잡았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저자는 이미 숱한 희생을 내고,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땅에서 성녀왕에 의존하고서야 결속을 유지할 수 있는 열등한 종족들의 군대를 이끌고 있을 뿐이다.
“피에르, 드, 라파예트.”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양, 파이몬의 하나 남은 뿔이 번쩍이며 회로를 기동했다.
이내 저 멀리, 판데모니움에서부터 전해진 마력이 파이몬의 뿔에 새겨진 회로를 타고 흐르며 전율감을 안겨주었다.
그 어떤 인간이나 악마, 아니.
악마의 용사마저도 감히 넘볼 수 없을 압도적인 힘.
영혼마저 절여버릴 것만 같은 고양감이 전신을 타고 내달리고, 뇌를 태워버릴 것만 같은 고통이 정신을 뒤흔든다.
그 한없이 괴리되어 있으나 한없이 맞닿아 있는 감각의 폭포 속에, 파이몬은 전율하며 팔을 움직였다.
그에 맞추어 무수한 꼭두각시들이 몸을 일으킨다.
“당신이 아껴온 부하들을 모조리 죽이고.”
척-
영혼 없는 인형들이 발을 내딛고.
“사지를 자르고, 혀를 뽑고.”
척-
파이몬의 살의에 응답해, 전진한다.
“당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을 눈앞에서 갈가리 찢어주겠어.”
파이몬은 저주에 가까운 망집을 담아, 고했다.
“증오스러운 나의 사랑.”
* * *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수도, 판데모니움.
어비스 코퍼레이션 본사 지하.
‘둥지’ 구역.
뚜벅-
뚜벅-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은 어두운 복도에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엘은 등에 쌍검을 찬 채, 마왕의 관을 쓰고 아무도 없는 복도를 거닐었다.
그가 지나는 복도의 양옆으로 무수히 많은 관이 놓여 있었지만, 바엘은 그쪽으로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한참을 걸은 끝에, 바엘은 비로소 그가 가치를 두는 존재를 찾아냈다.
긴 금발을 흐드러뜨리고, 수녀복을 입은 서큐버스.
그레모리는 소파 위에서 무릎을 두 팔로 끌어안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뚜벅-
뚜벅-
거대하기 그지없는 공간에서 유일했던 소리가 멈춰서고.
마족의 용사가 입을 열었다.
“그레모리.”
반쪽짜리 마족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흐릿한 금빛의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바엘.”
천천히, 흐릿하던 금빛의 눈동자에 초점이 잡힌다.
바엘은 가만히 그 눈동자에 어떤 빛이 서리는지를 들여다보았다.
그동안 그레모리도 바엘의 눈을 마주 보았으나, 눈동자가 없는 그의 눈에서는 어떤 것도 읽어내지 못했다.
“평화 협상은 실패했다.”
“……그렇군요.”
그레모리는 느릿하게 답했다.
서큐버스들의 의식이 신성력에 의해 일제히 추방당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레모리는 현장을 보고 있지 않았지만, 그래도 피에르 드 라파예트의 어린 성녀가 무언가 했다는 건 짐작했다.
아니, 어린 성녀라니.
이제는 그녀보다 강력해졌을 성녀에게 붙이기에 그리 적당한 호칭은 아니다.
그레모리는 그렇게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저들은 전쟁을 택했다.”
바엘의 말을 들은 그레모리는 잠시 피에르 드 라파예트를 떠올렸다.
그보다 먼저, 그녀의 기사를 떠올려보려고 했지만 잘되지 않았으니까.
“……그렇네요. 당신에겐 잘된 일이네요.”
파이몬에게는 안 된 일이고.
연합군에게 승산이 있을까?
어렵겠지.
저들은 언제나 어려울 거라고 생각한 일들을 해내왔지만, 파이몬이 준비한 것이나 바엘의 힘을 아는 그레모리로서는 지극히 회의적이었다.
애초에, 여기서 패배하면 어비스 코퍼레이션이 끝장이다.
그러니 패배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그레모리는 자신이 어떤 결과를 바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레모리는 여전히 눈동자조차 없어, 무기질적인 바엘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저 눈의 무엇을 보고 희망을 품고, 기대를 걸었던 것일까.
만약, 그때.
성녀의 역할을 끝내고 어비스 코퍼레이션으로 귀환하는 것을 거부했더라면.
-제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아니 그 이후라도 영원토록 성녀님께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그녀의 기사와, 그녀를 따르던 이들과 함께 남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어땠을까.
그레모리는 이내 자조적으로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릴 적부터 사이좋게 지낸 친구들도, 친절하게 대해주던 이웃들이 어떻게 변해갔는지를 기억하는데.
그녀의 정체를 흘려들은 교국에게 불태워지는 최후였겠지.
“그 말을 전하러 친히 여기까지 와주신 건가요? 어차피 서큐버스 아이들은 다 데려가셨다가 성녀에게 얻어맞고 빈사 상태일 거고, 신성력만 쓸 줄 아는 반쪽짜리 마족은 이미 당신을 위해 해드릴 수 있는 일이 없는데요.”
그레모리는 바엘의 눈을 들여다보며, 일부러 느릿하게 덧붙였다.
“마왕님.”
바엘은 잠시 그레모리를 내려다보더니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글쎄, 왜일까.”
그레모리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바엘은 가만히 그레모리를 내려다보더니 등을 돌려, 다시 이곳에 올 때처럼 뚜벅뚜벅 소리를 내며 멀어져 갔다.
그레모리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바엘!”
부른 것은 거의 충동적이었으나, 바엘은 걸음을 멈췄다.
그레모리는 그런 바엘의 태도에 미약한 희망을 걸고 물었다.
“……당신은 이들을 위해 싸운 것 아니었나요?”
바엘은 그레모리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동자가 없는 무기질적인 눈동자는 실험관 안에 들어있는 무수한 이들을 바라보았다.
언제까지고 행복한 환상 속에 잠겨, 서서히 죽어가며 마력을 추출당하고 있는 마족들.
한때는 바엘을 마족의 용사로 추앙하며 마왕에 맞서 싸웠으나, 바엘에게 반기를 들고 대숙청에 휘말린 자들을.
그러나 바엘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지극히 무미건조했다.
“지금은 전쟁 중이다, 그레모리. 선문답할 때가 아니라, 싸울 때지.”
잠시의 침묵 후, 그레모리는 천천히 바엘에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부디 승리하시길, 마왕님.”
“당연한 걸 기원할 필요는 없다, 성녀.”
바엘은 다시 등을 돌리며 답하고, 고요한 복도로 멀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