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234화 (234/258)

234화. 심연의 성전 – 절망의 파도 (3)

연합군과 대치 중인 어비스 코퍼레이션 본대.

“훌륭합니다, 파이몬 님. 저들의 사기는 이미 꺾인 것 같습니다. 싸우지도 않고 인간들을 굴복시킬 생각을 하시다니, 실로 놀랍습니다!”

파이몬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는 악마들 중에서도 누구보다도 인간을 이해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다름 아니라 게르마니아 제국군을 붕괴시킨 라파예트 후작의 행적을 집요하게 관찰하고 캐내며 배운 수법이다.

적들의 마음을 흔들고, 사기를 꺾고, 무너트려 승리를 쟁취하는 법.

그러나 그들에게는 서큐버스라는 패가 있고, 그렇기에 오히려 인간들보다도 더 효과적으로 이런 방법을 써먹을 수 있다.

처음에 서큐버스들을 부대에 편입시키고 지휘권을 받아내는데 그레모리가 영 비협조적이라 짜증이 좀 나긴 했지만, 바엘의 위세를 빌려서라도 받아내길 잘했지.

“당연하지. 수고했어, 스톨라스. 협상도 맡기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스톨라스가 물러가고, 파이몬은 여유작작한 태도로 의자에 누운 채 와인을 음미하고 있었다.

지금쯤 피에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무척이나 궁금한데.

그의 표정을 상상하자니, 어떤 안주보다도 더한 지고의 맛이 와인과 함께 섞여 혀를 감미롭게 애무하는 것만 같다.

그의 심정은 지금 어떨까?

자신이 했던 수법을 더욱 지독하고 악랄하게 돌려받은 기분은 어떤 걸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다.

솔직히 문이 열리기 전에 끝장내고 그를 손에 넣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도 못 한 선전과 추가 증원으로 그를 놀라게 했지만 결국은 그의 한계도 여기까지.

사령관 혼자서 제아무리 날고 기어봐야, 결국 인간이라는 열등한 종족 집단에 속해 있어서야 그의 가치도 빛을 잃는 거다.

파이몬은 즐겁게 와인잔을 돌리고, 다시 음미하며 생각했다.

승리는 확실하지만, 중요한 산이 하나 남아 있지.

그렇게 생각하기가 무섭게.

쾅-

그의 막사 바로 앞에서 요란한 소음이 났다.

“아아, 납셨군.”

그러지 않아도 슬슬 올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지.

그리고 이내, 그가 있는 막사의 가림막이 거칠게 젖혀졌다.

파이몬은 의자에 누운 채 시선을 돌려,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아아, 바엘님. 이 누추한 전선에 다 와주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막사에 들어선 바엘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파이몬을 노려보았다.

“파이몬.”

“예, 말씀하시지요, 저의 마왕이시여.”

짐짓 예의 바른 말투이나, 여전히 의자에 누워서 답하는 모습.

바엘은 그런 파이몬의 모습에 눈썹을 틀어 올리며 물었다.

“네놈에게 붙인 내 수하들은 어디에 있지?”

파이몬은 천천히 와인잔을 내려놓고는 몸을 일으키며 답했다.

“송구합니다, 바엘님. 작전 중 불의한 사고-”

파이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바엘의 억센 손이 파이몬의 목을 틀어쥐었다.

“저 미개한 인간 놈들에게, 내 심복들이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있는가.”

“전장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란 건 없는 법이지요, 바엘 님. 아시지 않습니까? 다름 아닌 400년 전의 전쟁을 겪으신 분이.”

물론 그들은 전선에 서지도 않았고, 그런 자들이 적들에게 불의의 사고를 당할 일이란 없다. 애초에 바엘도 파이몬도 그걸 알고 있다.

그럼에도 바엘은 파이몬을 쏘아보더니 씹어뱉듯이 말했다.

“공세는 왜 멈췄지?”

“평화협상을 제안했습니다.”

“평화, 협상? 나는 보고받은 것이 없다. 해명하라, 파이몬.”

바엘이 파이몬의 목을 놓아주자, 파이몬은 테이블에 있는 서류를 들어 그에게 건네주었다.

“간단합니다. 저 나약한 자들에게 분열의 씨앗을 뿌리고, 자멸을 기다리고 있지요. 잘만 먹혀들어 간다면 전투 손실 없이 ‘문’을 확보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러고 나면 동방 제국을 여유롭게 확보하고, 중앙 대륙-”

그러나 파이몬의 말이 끝나는 것보다, 서류를 훑어본 바엘이 다시 파이몬의 목을 틀어쥐는 것이 빨랐다.

“네놈이 드론을 온존하며 저들을 몰아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파이몬은 목이 잡힌 채로, 웃었다.

과연 썩어도 마족의 용사.

머리를 장식으로 달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저들을 멸할 것을 명했다, 파이몬. 네놈의 병력을 온존하겠다고 잔머리를 굴리라고 한 것이 아니다.”

바엘이 얼굴을 들이대며 말하는데도, 파이몬의 웃음은 가시지 않았다.

“그러십니까? 하오나 이 막대한 드론들을 유지하기 위한 마력은 무한하지 않습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받은 임무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고자 했을 뿐인데 이런 오해를 사다니. 실로 유감입니다, 저의 마왕이시여. 하나, 지금 저를 처리하셨다간 당장 저들을 막지 못하게 되실 텐데요?”

바엘은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드론의 통제권이 네놈에게만 있는 줄 아나? 그걸 믿고 이리 교만하게 구는 것인가? 네놈의 앞에 있는 것이 누구인지를 기억하라. 주제를 알라, 파이몬.”

그럼에도 파이몬은 도리어 미소 지으며 말했다.

“하오시면. 해보시지요, 마왕이시여.”

바엘은 눈동자 없는 그의 눈을 일그러트렸으나, 이내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그제야 본래라면 회수할 수 있어야 할 드론의 통제권이 완벽하게 파이몬에게 귀속된 것을 깨닫고-

다음 순간 격노했다.

“파이몬, 네놈!”

파이몬은 격노한 마왕의 앞에서 히죽히죽 웃었다.

바엘의 심복들도 이런 반응을 보이며 그에게 죽어갔다.

파이몬이 이빨을 드러내도 언제든지 자신들이 제압할 수 있을 거라 믿으며, 마치 바엘의 위세가 그들의 것인 양 굴던 버러지들이 충격 속에 죽어가던 모습은 정말이지…….

“황홀하군요. 실로 훌륭한 표정이십니다, 저의 마왕이시여.”

바엘은 손을 부들부들 떨며 힘을 주었다.

파이몬은 어지간한 검으로도 자를 수 없는 그의 목이 종잇장처럼 찌그러질 것 같은 압력을 받으며, 목이 졸리는 고통이 주는 쾌락에 몸을 떨었다.

그리고, 이내.

바엘은 파이몬의 예상대로, 그를 내던졌다.

“콜록, 아하, 콜록, 아하하하하…….”

“지금 당장에라도 네놈을 처단할 수 있다!”

격노한 바엘의 고함에, 파이몬은 비척대며 몸을 일으키곤 웃음을 터트리며 답했다.

“컥, 아하하하하…… 물론, 물론이죠. 용맹무쌍한 마족의 용사, 위대한 마왕이시여! 저 같은 미천한 악마 따위, 얼마든지 죽이실 수 있고 말고요!”

그러나 그가 혼자서 파이몬이 이끄는 100만의 드론을 당해낼 수 있을까?

그를 따르던 그 무수한 마족들이 타락하고 변질되었다며 제 손으로 숙청해버리고, 한 줌 남은 친위대만 데리고 저 연합군을 맞이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확신하며, 자신의 힘과 교만에 취한 용사.

그의 일그러진 얼굴이 그 어떤 희극보다도 유쾌하여, 파이몬은 그저 웃음을 터트렸다.

바엘은 까드득- 소리 나게 이를 갈고, 파이몬에게서 등을 돌렸다.

“네놈이 원하는 대로 해보아라, 파이몬. ……일단은 말이지.”

파이몬은 이 희극의 배우답게, 아주 과장되고 정중하게 예를 갖추며 허리를 숙여 보였다.

“관대한 결정에 감사드립니다, 저의 마왕이시여.”

바엘은 그대로 사라져 버렸고, 파이몬은 참지 못하고 광소를 터트렸다.

“하. 아하, 하하하. 아하하하하!”

그는 더 이상 가면을 쓸 필요가 없다.

어비스 코퍼레이션이라는 족쇄를 차고 보내온 400년.

그 긴 시간 동안 기다려온 해방감과 희열이 그의 정신을 마비시킬 것만 같은 쾌락을 선사했다.

바엘은 이제 파이몬이 그에게 이빨을 드러낼 것을 대비하기 위해 얼마 남지 않은 친위세력을 끌어모으겠지.

상관없다.

어차피 이제 와서 그걸 끌어모은다 한들, 연합군이 철수하고 전력을 온존한 파이몬의 앞에서는 무의미한 저항이 될 뿐이다.

파이몬은 그가 감히 넘볼 수 없을 강대한 마족의 용사를 처치하고, 끝내 모든 마족을 손에 넣을 상상에 몸을 떨며 희열을 만끽했다.

“아, 아아, 아아아…….”

이 지고의 쾌락을.

이 미쳐버릴 것만 같은 해방감을.

그 모든 것을 선물해 준 남자가 지금 저 앞에 있는데.

피에르.

지금쯤 고뇌하고, 울분을 터트리고 있을까?

그의 얼굴을 직접 보고, 그 괴로움을 핥으며 맛보고 싶건만.

그 피에르라면 외교적 문제고 뭐고 파이몬을 죽여서 드론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순간을 놓치지 않겠지.

“아쉽군, 아쉬워…….”

그의 절망을 당장 탐식할 수 없는 것은 무척이나 아쉽지만, 오히려 그가 끝내 문을 사수해냈기에 이 해방감을 선물 받은 것이라고 하면.

그렇다고 한다면 그를 위해서 조금쯤 더 기다려주는 것은 문제도 아니지.

본래 뒤로 미룰수록 간절함과 기대감은 더욱 커지는 법.

그러니까.

감히 이 어비스 코퍼레이션에 발을 들인 열등한 종자들에게, 평화라는 짧고도 거짓된 신기루를 안겨주고.

피에르를 일단은, 돌려보내 주자.

그가 소중히 여기는 이들과 마지막 안식을 즐기게 해주어, 그 모든 것이 무너진 순간 그가 품을 절망과 슬픔을 더욱 키워주자.

그리고 바엘을 처단해, 그가 진정한 마왕이 된 뒤.

자격을 갖추고, 피에르를 맞이하러 가야지.

파이몬은 그 순간의 쾌락을 기대하며 몸을 떨었다.

* * *

고작 이틀.

이틀 만에 수뇌부의 여론은 뒤집혔다.

“저들이 이베리카에서 한 짓을 보지 않았나? 기만책일 것이 뻔하다!”

“우리도 모르는 것이 아니오. 그러나 여건이 안 되니 어쩔 수 없잖소.”

“일단은 물러나 힘을 비축하며 후일을 기다리는 것이…….”

“하, 후일? 언제 말입니까? 저들이 끝내 동방 제국을 멸하고, 백만이 아니라 수백만의 드론을 끌고 중앙 대륙으로 침공할 때를 말하는 겁니까?”

“제기랄! 누가 그걸 모르오? 군사들의 사기가 도저히 싸울 수 없는 지경에 달한 것을 어쩌란 말인가!”

“애초에 싸운다고 해서 지금 이길 수는 있소? 백만이오! 수천의 드론 상대로 십만이 고전을 했는데, 백만의 드론을 상대로 싸워서 이길 수는 있냔 말이오! 고작 문 하나 뺏기기 싫다고 다 같이 죽자는 건가!”

“고작 문 하나? 저 문 하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피가-”

“제길, 그 피 흘리자고 선동한 게 당신네 프랑지아인들 아니야! 그래서 결과가 뭐요! 친히 악마들이 중앙 대륙으로 올 길을 열어줬잖소! 애초부터 이 무모한 원정을 오질 말았어야 했어!”

“아무튼 협상해봅시다, 제길! 전부 개죽음당하느니 일단 살아서 고국으로 돌아가기나 하면 감지덕지한 것 아니오!”

그 긴 시간의 사투 끝에.

결실은커녕 길을 잃었다.

눈앞에 빤히 파멸이 보이는데, 그게 군사들에게 전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

충분히 절망했다.

충분히 좌절했다.

제아무리 최악의 상황이라 해도, 결국 어떻게든 헤쳐 나왔다.

여기까지 와서 그 숱한 피를 흘리고, 그걸 무효로 돌릴 수는 없다.

이제 한 발.

최종 목표까지 겨우 한 발 남았는데.

크리스틴이 목숨을 걸고 여기까지 와서 나를 믿어줬는데, 방법이 없다며 포기한다는 결말을 낼 수는 없다.

“아니요.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기서 싸워야 합니다.”

내가 낸 단호한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으나, 이내 노성이 터져 나왔다.

“아니, 군사들의 사기가 엉망진창인데, 이런 상황에 어떻게 싸웁니까? 승산이 있어야 싸우지!”

“누군 싸우기 싫어서 협상하자는 줄 아시오? 그렇게 죽고 싶으면 후작 혼자 죽으-!”

“아니!”

마력까지 실은 외침은 넘치던 아우성을 끊어버렸다.

“우린 지금 우리의 상황만 보고 있습니다. 저들이 왜 저런 제안을 했는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놓치는 것이 있습니다.”

악마들은 여기까지 침공해온 중앙 대륙의 주력군 전부를 살려 보내주겠다는, 일견 ‘당장은’ 관대한 제안을 내걸었다.

그러나 악마들이 저런 조건을 내걸었다는 건, 저들도 우리와의 충돌을 피해야만 할 이유가 있다는 소리다.

“드론은 위험한 적입니다. 지치지도 않고, 사기가 꺾이지도 않는 위협적인 군세. 그러나 모든 생물이든, 뭐든, 움직이는 데는 동력이 필요합니다. 에너지든, 마력이든, 뭐든. 100만에 달하는 드론들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많은 마력이 필요하겠죠! 그렇지 않습니까, 마탑주님?”

“크흠, 거, 뭐, 기사치곤 합리적인 추론이구려. 그렇지. 아무 동력도 없이 움직일 수 있는 물질은 세상에 없소. 하물며 저건 생물을 개조해서 만든 병기 아니오? 당연히 유지할 마력이 없으면 그냥 고깃덩이에 불과하지.”

나는 회의장 밖, 저 맞은편에 있는 드론들이 있을 방향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지금도 미동도 하지 않고 휴면 중인 저 드론들이 그 증거입니다! 저 상태가 저들이 평화를 원한다는 증거라고? 말로는 그럴싸하게 포장했을 뿐, 저들이 진정으로 군사들을 공포에 질리게 하려면 무력시위 쪽이 더 효과적이었겠죠. 안 그렇습니까?”

“그렇, 기는, 하지…….”

“그, 그런가? 하지만 추론뿐이지 않소?”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저는 이베리카에서 파이몬의 뿔을 베어냈을 때, 드론들에서 뽑혀 나온 방대한 동력으로 일어난 마력 폭풍을 직접 겪어봤습니다. 혁명군은 물론, 이베리카 형제국의 군사들 중에서도 그 현상을 겪어본 자들이 남아 있을 겁니다. 제아무리 어비스 코퍼레이션이라 한들, 그런 마력을 무한히 뽑아낼 순 없습니다.”

파이몬은 분명히 말했다.

저 산업혁명은 인간에게서 에너지를 뽑아내, 드론을 운용하고.

에너지를 다 뽑아낸 인간의 육체는 다시 드론으로 개조하여 활용하는 기술이라고.

얼핏 들으면 무한 동력 같지만, 그렇지 않다.

끊임없이 인간을 수급하지 못하면 결국 드론만 가득 남고, 그 가득 남은 드론에게 마력을 채워 넣기 위해 필요한 인간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100만의 드론을 만들어낸 건 확실히 우리의 상상 이상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말하면 저걸 유지하기 위해 그만큼 많은 마력을 필요로 한다는 소리다.

그때야 이렇게 될 줄 모르고 흘린 정보겠지.

그러나 지금은 그게 유일한 승리의 희망이 되었다.

설사 확신이 없다고 하더라도, 나는 이들에게 확신을 주어야 한다.

“저들의 군세는 엄청나지만, 지금 우리와 동방 제국 양면에서 싸우고 있는 저들이 마력을 뽑아내기 위한 영장류를 추가로 확보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저들에게 장기전을 강요한다면 확실하게 이길 수 있습니다.”

“크음…….”

수뇌부는 침음성을 흘렸지만, 그래도 분위기는 확실히 기울었다.

“그래야지! 싸워야지! 지금이 아니면 언제 우리가 연합군을 구성하고 다시 이 섬에 발을 들일 수 있단 말인가!”

크록스가 호응한다.

“나도 동의하오. 크라프테의 국왕으로서, 크라프테인의 피만을 흩뿌리고 돌아갈 순 없소.”

하인리히 1세도.

“……확실히, 승산이 있다면 피해서는 안 되는 싸움입니다. 그러나 군사들의 사기 문제는 어찌합니까? 군사들이 전투를 거부하면 우리로서도 방법이 없습니다.”

질의 말.

지당한 의견이지만, 나에겐 불가능한 일이다.

그 어떤 군 사령관도 이미 무너진 군사들의 사기를 되돌려놓을 수는 없다.

기껏 수습되던 분위기가 천천히, 그러나 확연히 흐려져 간다.

나는 모두가 다시 체념에 휩싸이기 전에 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에리스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여왕 폐하.”

에리스는 그것만으로도 그녀가 해야만 하는 일을 이해했다.

“……승산은 확실히 있는 거죠, 후작님?”

필요에 의해 접근했던 성녀이자, 귀족인 나와 공화국의 간극을 메워줄 왕녀로서.

내가 패로서 끌어들인 소녀.

이제는 완연한 여왕이 된 나의 주군에게, 고개를 숙이며 답한다.

“있습니다. 여왕 폐하.”

오직 그녀만이 가능하다.

살아 있는 신의 증거이자, 중앙 대륙 전체에서 사랑받는 성녀왕.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던 그녀에게, 여왕이 되고 싶지 않았다던 그녀에게.

다시 한번 저들에게, 당신을 믿고 피 흘려 달라고.

저들의 피가 헛되지 않을 거라고 말해 달라고.

“저희를 이끌어주십시오.”

간절함을 담아 청한다.

“그리하면 제 모든 것을 걸고. 반드시 여왕 폐하와, 저들 모두의 피가 헛되지 않게 만들겠습니다.”

에리스는 찰나도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믿겠어요, 라파예트 후작님. 이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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