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심연의 성전 – 절망의 파도 (2)
문이 건설된 언덕 아래의 평야.
에리스의 존재와 연결된 문에서 흘러나오는 중앙 대륙의 대기 덕분에 짙은 보랏빛 안개는 눈에 띄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우리 연합군은 평야를 가득 메운 드론들의 군세와 대치중이었다.
샤쇠르들의 보고는 사실이다.
끝도 없이 이어진, 100만에 달해 보이는 드론들이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몸을 수그리고 도열해 있으니까.
굳이 둘러보지 않아도 그 위압적이고 공포스러운 광경에 군사들 모두 기가 질린 것이 공기로 느껴진다.
나는 그 광경을 흘긋 보며, 준비된 회담장으로 향했다.
우리가 건설한 문에 장난질을 해서 닫지도 못하게 만들어두고, 중앙 대륙으로의 교두보를 확보한 상황에 나온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평화 협상 제안.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태였고 또 무언가 꿍꿍이가 있을 것이 뻔했지만 그럼에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저들이 먼저 제안한 평화협상을 듣지도 않고 차버린다면, 당장 저 기가 질린 군사들의 공포는 수뇌부에 대한 원망으로 돌변할 테니까.
연합국 특유의 많은 수뇌부가 자리하고 잠시 뒤.
우리는 저들의 사절로 온 악마와 마주할 수 있었다.
묘하게 깃털 같은 옷을 입고 있는 것이, 어째 거슬리는군.
어딘가의 비둘기 악마 놈이 생각나.
내가 생각하는 사이, 악마가 짐짓 고상한 태도로 인사하며 입을 열었다.
“어비스 코퍼레이션, ‘슬로스’사의 스톨라스라고 합니다. 고명하신 대륙 연합군의 일원들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악마 놈의 입에서 저런 소리를 다 듣게 될 줄이야.
실소가 나오는데.
“저는 어비스 코퍼레이션 드론군 사령관 파이몬님의 의견을 전하고자 찾아왔습니다.”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바엘이 아니라, 파이몬?
“또 그 간악한 혀로 기만을 일삼으러 온 것이겠지. 말해봐라.”
하인리히 1세는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지만, 스톨라스는 오히려 미소 지으며 답했다.
“오, 인류 최강의 군사국가 크라프테의 국왕 폐하께 어찌 기만을 속삭이겠습니까?”
하인리히 1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답했다.
“이 군대가 연합군이 아니라 내 군대였다면 그대는 몸 성히 돌아갈 수 있을지를 걱정해야 했을 거다.”
“같은 의견이다, 크라프테의 국왕! 나도 저 비열한 악마놈의 낯짝을 부수고 싶어서 근질근질하거든!”
크록스까지 나서자 스톨라스는 그제야 곤란하다는 듯이 두 손을 들어보였다.
“어이쿠, 그건 실례했습니다. 허면, 간략하게 우리의 제안만을 전해드리도록 하죠. 우리는 중앙 대륙 국가들과의 평화를 원합니다,”
“허.”
“이제 와서 평화라…….”
“저런 병력을 가지고 와서 정말로?”
일단 말로는 평화협상이라고 했지만, 설마 저놈들의 입에서 정말로 나올 줄은 몰랐던 단어에 모두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스톨라스는 우리들 사이에 동요가 번지는 것을 느긋하게 지켜보고 있었고, 결국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조건은?”
그냥 전쟁을 없던 일로 할 수도 없고, 저들이 실제로 평화를 원한다고 해도 조건이 문제지.
스톨라스는 미소지은 채 말했다.
“연합군은 어비스 코퍼레이션에서 철수해주십시오. 우리는 딱 하나면 됩니다. 어비스 코퍼레이션으로 연결된, 프랑지아의 문과 그 인근 지역을 조차지로 하겠습니다.”
“하.”
조차지. 땅을 빌리겠다.
말이 빌리는 거지, 그냥 중앙 대륙으로 통하는 문을 통째로 넘겨라?
“미친 소리를 하고 있군. 우리가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데, 그 결과물을 그대로 내놓으라. 심지어 프랑지아의 국토 일부까지 함께?”
절로 날카로운 목소리가 나왔다.
그러나 스톨라스는 여유작작한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러면 우리는 연합국 모두가 문을 통해 안전하게 이 땅을 떠나는 것을 방해하지 않음은 물론, 평화까지 보장해드리겠습니다.”
“정말 일고의 가치도 없는 개소리군.”
내가 대꾸하자, 스톨라스는 내가 아니라 타국의 수뇌부를 보며 말했다.
“이 제안은 꼭 연합국 전체에게만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어비스 코퍼레이션은 개별 국가와의 휴전도 기꺼이 받아들일 용의가 있습니다.”
이것들이 대놓고?
“생각해보십시오. 이 전쟁이 어비스 코퍼레이션에서 일으킨 전쟁입니까? 아닙니다. 프랑지아가 일으켰습니다. 우리가 중앙 대륙을 위협하고 있다는, 근거 없는 선동과 날조를 통해서 성전을 부르짖었죠.”
“지금 뭐하자는…….”
“수많은 인류의 군대가 이 땅에서 피 흘리며 쓰러졌습니다. 슬픈 일이지요, 여러분의 분개도 이해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 또한 많은 형제들을 잃었습니다. 모두에게 슬픈 일인데, 이런 일을 굳이 계속 해야 할까요? 기실 이 자리에 있는 대부분의 국가들은 동방 제국과는 별 관련도 없지 않습니까? 딱 하나, 오직 프랑지아만이 이 전쟁을 주장했습니다.”
회의장 안에는 침묵만이 흐른다.
“우리가 힘이 없어서 여러분에게 평화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겐 충분히 많은 병력이 있습니다. 바로 여러분의 앞에 있는 드론의 군세요. 뭐, 우리와 맞서 싸워서 이길 자신이 있으시다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만, 피할 수 있는 전쟁을 굳이 계속 치러서 뭘 얻으실 수 있겠습니까? 군사들의 피? 가족들의 비탄?”
하.
나는 바로 검을 뽑고 싶은 기분을 억누르느라 애써야 했다.
명색이 평화협상 사절이다.
차라리 이곳이 프랑지아군 단독 군영이면 모를까, 다국가 연합인 이상 내 기분대로 베어버렸다간 문제가 커진다.
스톨라스는 두 팔을 벌려 보이며 웃었다.
“여러분의 착각과 달리 우리 또한 중앙 대륙과 긴 시간 긍정적인 사업 관계를 이어온, 말이 통하는 나라입니다. 굳이 이런 식으로 원한과 증오를 부추기지 않고도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요. 그리고 우리는, 여러분께서도 우리처럼 합리적으로 생각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스톨라스는 시선을 천천히 나와 에리스, 그리고-
성기사단의 생존자를 이끌고 있는 에라모 경에게로 향하곤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뭐, 지나친 증오심이나 광신에 매몰된 몇 분만 제외하면 말입니다.”
“닥쳐라, 악마!”
에라모는 참지 못했고, 바로 검을 뽑아들었다가 내 손짓에 멈칫했다.
나는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수뇌부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멀리 갈 것도 없다.
크리스틴.
에리스.
크록스.
하인리히 1세.
질 폰 레온하르트.
모두가 어비스 코퍼레이션에 대한 확고한 적의를 가진 이들이다.
휘하 지휘관들이야 조금 고민할지 몰라도, 중심이 확실히 잡혀있다면 어떻게든 싸울 수 있다.
“너 이 개떡같은 악마노무 새끼가 뭔 개소리를 지껄이고 앉았어! 문은 우리 마탑꺼야! 우리 보물을 니들이 뭔데 내놔라 말라야!?”
……마탑주까지.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유감이지만 그런 말도 안 되는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다.”
“오, 이런. 너무 서둘러 결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어차피 시간은 많고, 관대한 파이몬님께는 여러분의 고뇌를 기다려줄 정도의 인내심이 있으니까요.”
“그딴 건 필요 없다. 파이몬에게 가서 전해. 전투할 준비나 하라고.”
“하하하. 역시 라파예트 후작님. 악마들에겐 가차 없으시군요. 그러면 이만 물러가도록 하지요.”
빌어먹을 악마 놈, 빨리 꺼져라. 짜증나네.
대체 뭣 때문에 쓸데없는 제안으로 시간 낭비를…….
그렇게 생각한 순간, 스톨라스가 웃으며 덧붙였다.
“하나 여러분께서는 곧 다시 협상을 원하시게 될 겁니다. ……3일 뒤에 다시 찾아뵙도록 하죠.”
스톨라스는 말을 마치자마자 그대로 부엉이로 변하더니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무슨 개소리야?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 것도 잠시.
“허허, 거참. 대체 왜 왔는지 모르겠구려.”
“악마 놈들의 생각을 어찌 알겠소?”
스톨라스가 물러가고 수뇌부가 헛웃음을 흘리며 대화하고 있자, 얼마 지나지도 않아 지젤 다비가 다급하게 들어왔다.
“실례합니다! 긴급히 보고드릴 사안이 있습니다!”
“다비 중령, 무슨 일이지?”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자, 지젤 다비는 마른침을 삼키더니 답했다.
“……군사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꿈’에 대해 호소하고 있습니다.”
뭐?
* * *
워낙 갑작스러운 일이어서 상황을 파악하기까지는 다소의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상황이 전부 파악되고 나자, 연합군 수뇌부는 더 이상 악마들의 저 어처구니없는 제안을 웃어넘길 수 없게 되었다.
-하나 여러분께서는 곧 다시 협상을 원하시게 될 겁니다. ……3일 뒤에 다시 찾아뵙도록 하죠.
스톨라스, 그 빌어먹을 악마.
파이몬이 보낸 전령이 한 말은 이런 의미였나.
연합군의 거의 모든 군사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꿈을 꾸기 시작했다.
이것은 할 필요가 없는 싸움이며, 심지어 악마들마저 평화를 원한다는 내용의 꿈을.
서큐버스들이 군사들의 꿈속에 나타나 이런 전쟁을 이제는 그만둬야 한다는 호소를 흘리고 있다.
어비스 코퍼레이션도 말이 통하는, 그저 종족이 다를 뿐인 나라이고 오랜 시간 중앙 대륙과 적게나마 교류하며 살아왔을 뿐이라고.
원한과 증오를 부추기고 싶지 않으며, 동방 제국과의 전쟁은 그저 오랜 시간 극동에서 이어져온 분쟁으로 촉발되었을 뿐 자신들은 중앙 대륙까지 적대할 생각이 없었다고.
파이몬은 지금 이 순간에도 평야에 무수한 드론들을 과시하듯 내보이고, 대치중이다.
그걸로 저들에게 우리 모두를 멸하기에 충분한 힘이 있다고 경고하며-
동시에 그들 모두를 동결시켜둔 채 공격하지 않으며, 우리 군사들의 꿈속에서 저들은 더 이상의 피를 원하지 않기에 평화 협상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노라고 속삭인다.
이 전쟁은 인류의 위협에 맞선 성전이 아니라, 그저 프랑지아가 대륙을 선동해서 일으켰을 뿐인 전쟁이라고.
그러니 더는 왕과 의회가 결정한 전쟁을 위해 피 흘리지 말고, 평화롭게 이 섬을 떠나라고.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으로, 고향에 두고 온 연인의 모습으로, 또는 가족의 모습으로 나타나 애원하듯 간청한다.
적어도 수뇌부는 이것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지금 이곳에서 악마들에 맞서야만 한다는 판단을 명백하게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일선의 병사들은 그렇지 않다.
선발대는 이미 많은 피를 흘렸고, 숱한 동료들을 잃었다.
처리해도, 처리해도 지치지도 않고 굴하지도 않으며 압도적으로 밀려드는 드론 군세의 공포가 그들의 뇌리에 새겨져 있다.
그리고 이제 막 대륙에서 건너온 연합군 본대 중 상당수는 그저 국가나 상관의 명에 따라서 이 자리에 나왔을 뿐이다.
그런 그들에게, 자신들은 싸움을 원하지 않으며 왕이 원하는 전쟁으로 그들이 죽음을 맞이할 뿐이라는 속삭임이 뱀처럼 파고든다.
죽음을 각오하고 고립무원인 악마들의 섬에 발을 들여,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각오를 다져가며 벌여온 사투의 시간은 너무도 쉽게 흐려져 간다.
교묘하고, 간악하게.
연합군 군사들의 마음속에 이게 사실은 인류를 지키기 위한 성전이 아니라, 프랑지아의 선동으로 인해 벌어진 전쟁이라는 인식이 파고든다.
그렇게 이것이 필요 없는 전쟁이라고 착각하면, 프랑지아에게 책임을 전가해 버리고 나면.
지금 눈앞에 도사린 저 무수한 드론들이 정말로 평화를 원해서 가만히 있는 거라고 납득해 버리고 나면.
최소한 자신은 이 지옥 같은 섬에서 무사히 고국으로, 가족들에게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그런 거짓된 희망이 군사들을 잠식하고, 군사들의 사기가 밑바닥까지 추락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스톨라스가 말한 3일.
그중에서 고작 이틀이 지났을 때, 각국 수뇌부가 진지하게 평화협상에 대해 논의해보자고 요청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