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심연의 성전 – 해방된 굴레
증원군이 합류하고 전투의 뒷수습이 끝날 때까지 적들의 추가적인 공세는 없었다.
덕분에 지휘부도 교대를 돌려가며 잠깐씩이나마 눈을 붙이며 쉴 수 있었고, 그렇게 다시 모인 지휘관들의 표정은 꽤 좋았다.
“적들도 피해가 심각한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물론, 하인리히 폐하와 성녀왕 폐하의 적절한 증원 덕분이었지요.”
그렇게 말하는 크라프테의 샤른호르스트 장군의 얼굴에는 지울 수 없는 기쁨이 묻어 나오고 있다.
아군 전열이 거의 무너져가는 가운데서도 끝까지 악착같이 버텨내며 다른 연합군을 지원한 건 크라프테군이었다.
탄약을 미친 듯이 소모해가며 사격전을 벌여온 덕분에 최후까지 그나마 전력을 온존한 부대였기 때문이다.
물론 탄약 마음껏 쓰라고 한다고 우리도 저걸 할 수 있냐면 그건 글쎄……. 싶으니 할 말은 없다만.
가뜩이나 승리의 핵심 카드였던 증원군도 크라프테군이 가장 많은 5만, 그것도 국왕 하인리히 본인이 끌고 온 덕분에 그러지 않아도 높던 크라프테군의 자부심은 더욱 높아졌다.
“하하, 덕분에 살았습니다. 그리고 성녀왕 폐하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의 표정이 더 편 것을 보니 그 경이적인 존재감에 경탄을 금할 수가 없군요.”
제국군 사령관 질 폰 레온하르트의 말을 들은 에리스는 머쓱하게 웃었다.
분명 좋은 상황인데도 에리스의 표정이 그렇게 밝지만은 않은 건, 성기사단의 대부분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는 것에 그녀가 책임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겠지.
“별로 그렇게까지 대단하진 않은데요…….”
본인이야 저렇게 말해도, 실제 선발대가 받아들이는 에리스의 존재감은 엄청나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에리스가 전장에 등장한 것만으로도 우리를 지긋지긋하게 괴롭히던 안개가 상당히 옅어지고 멀어진 데다, 몸을 짓누르는 듯하던 피로도 상당히 줄어들었다.
병사 하나하나가 그걸 몸으로 체감하니, 에리스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군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이 올랐다.
이게 불과 어제만 해도 절망에 사로잡혀있던 그 군세가 맞긴 한가 싶을 정도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 에리스가 슥 눈을 돌려서 나를 보며 물었다.
“라파예트 후작님은 어찌 생각하시나요? 문이 열리기 전까지 적들과 교전이 다시 벌어지겠죠?”
나는 잠시 생각한 뒤 답했다.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공세에서 파이몬은 전력을 끌고 나왔다고 봐야 한다.
동원한 드론의 수만 해도 압도적이었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가루가 되어버려 시체도 남지 않는 드론의 특성상 정확한 병력은 가늠하기 어렵지만, 못해도 20만은 넘어 보였다.
“드론은 그저 찍혀 나오는 병기가 아니라, 재료를 필요로 하는 병기입니다. 저들이 중앙 대륙의 종족들을 얻을 수 있는 경로가 전부 막힌 지금, 수급처는 아마도 지금 침공이 진행 중인 동방 제국 정도가 전부일 겁니다.”
상륙 후 우리가 처리한 드론의 숫자만 다 합쳐도 어마어마할 거다.
동방 제국에서도 전투가 계속 벌어지고 있으니, 어비스 코퍼레이션이 양면 전선을 감당하며 잃고 있는 드론의 숫자는 결코 가볍지 않을 터.
“실제로 지난 전투 막바지에, 적들은 드론을 철수시키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게 무엇보다도 큰 증거다.
지금까지 적들은 드론을 소모품처럼 다뤘다.
적진에 돌격시켜 적 병력을 조금이라도 더 죽이면 이득이라는 것마냥, 던지듯이 운용해온 거다.
그런데 그러던 파이몬이 지난 전투에서는 승산이 없어졌다고 생각하자 드론들을 후퇴시키려고 했다.
어차피 도망치지 못한다고 판단되니 꼬리 자르듯 후방의 드론들로 발목 잡도록 시키고 내뺐지만, 우리는 처음으로 기병으로 적의 드론을 추격하는 경험을 해봤다.
이건 무척 고무적이지.
“이제 이긴 거죠? 우린 역시 해냈습니다! 과연 라파예트 후작 각하! 보십시오! 후작 각하만 따르면 기적처럼 승리하지 않습니까?”
데미앙 드 미르보가 갑자기 기세등등하게 소리친 바람에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졌다.
아니, 에리스가 드제와 하인리히를 데려오지 않았으면 우린 그대로 다 죽었을걸?
“……아직 전쟁 중인데 지나친 낙관은 금물이네, 미르보 사령관.”
“소, 송구합니다, 후작 각하. 너무 기뻐서 그만…….”
데미앙은 또 쭈그러들었다.
하여간, 이 하찮은 놈이 어떻게 방어의 명장이 된 건지 이해가 안 되네.
그래도 뭐…….
“크게 낙관할 수는 없다고 해도, 적들의 병력도 무한은 아니라는 증거를 본 셈입니다. 설사 예비 병력이 있다고 해도 지금 당장 투입할 수는 없는 거겠죠.”
그런 전력이 있었다면 진작에 투입했을 테니까.
“오오…….”
모든 지휘관들의 얼굴에 희망이 꽃 피었다.
지금까지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피로도 없고 끝도 없는 무한한 드론의 파도였다.
우리는 계속해서 사상자가 쌓이고 안개로 둘러싸인 불온한 섬에 지쳐 가는데, 적들은 마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소모전을 거듭해왔으니까.
그러나 우리의 병력이 유한하듯, 적들의 병력도 유한하다는 가시적인 증거가 나왔다.
우리가 승기를 잡아가고 있다는 것만큼 사기를 뒷받침해 주는 사실은 없지.
“문의 건설까지는 얼마나 남았소?”
그때까지 조용히 듣고 있던 크라프테 국왕 하인리히가 입을 열자, 막심 단장이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앉은 얼굴로 답했다.
“이제 하루면 될 겁니다.”
저런.
에리스가 나름 신성력으로 거들어주기도 한 모양인데도 피로에 절어있는 모습을 보자니 조금은 안타깝지만, 아무튼 마도사들은 역할을 다했다.
내가 요구한 무리한 기일에 어떻게든 맞춰주는데 성공한 거다.
그동안 나를 짓누르던 중압감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크리스틴이 이 자리에 나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 판단을 더는 의심하지 않게 된다.
어떤 상황에서든 희망을 찾아줄 것만 같은 에리스도 와있고, 군사적으로 내가 실책을 저지르더라도 보좌해 줄 드제도 있다.
“지난 총공세가 허무하게 실패한 이상 적은 재수습을 하느라 움직이지 못하거나, 움직이더라도 지난 전투만큼 준비된 공세를 벌이지 못할 겁니다. 이제 마지막입니다. 각 부대는 더욱 철저히 경계하며 문의 완성까지 버티도록 하죠.”
“하하, 이거야 원, 헐레벌떡 준비하고 상륙하자마자 뛰어왔더니 조금 피곤한데……. 문이 열리면 쉴 수는 있는 거겠죠?”
루이 드제가 농담을 던져서 나도 피식 웃으며 답했다.
“뭐, 본대가 문을 건너오는 동안 지키고 나면 적극 고려해 보지.”
내 답에 다들 웃음을 흘렸다.
이 섬에 발을 들이고 벌여온 기나긴 싸움의 끝이 보인다.
그것만으로도 이렇게 여유를 되찾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각자 위치로!”
“옛!”
* * *
“결국 공세에 실패했군, 파이몬.”
파이몬은 붉고 긴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 넘기며, 그를 추궁하듯이 말하는 악마에게 조소를 흘렸다.
“애초부터 드론들을 전부 가동했으면 진작에 저들을 쓸어버리고 문을 장악할 수 있었을 텐데.”
피에르 드 라파예트의 예상은 맞기는 했지만, 틀리기도 했다.
확실히, 파이몬이 가용할 수 있는 드론의 숫자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악마들의 병력이 바닥난 것은 아니다.
애초에 중앙 대륙의 인간들은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중앙 대륙으로의 접근을 차단했다고 어비스 코퍼레이션이 드론의 재료를 구할 수 없다는 크나큰 착각을 하고 있다.
중앙 대륙으로의 접근이 전부 차단된 후, 어비스 코퍼레이션은 신대륙에서의 대대적인 ‘재료 수급’을 시작했다.
크기만으로는 중앙 대륙보다도 거대하고, 문명 수준은 중앙 대륙보다도 못한 미개한 족속들의 소굴.
그곳에서 어비스 코퍼레이션이 확보한 드론의 숫자는 저들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다.
심지어 신대륙에서의 드론뿐만이 아니라, 어비스 코퍼레이션에서 진행된 대숙청으로 희생된 마족들마저 대다수가 드론으로 개조되었다.
그러니 예비된 병력은 충분히 많다. 여차하면 중앙 대륙 전체와 교전을 벌이기에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이몬이 고작해야 수십만 단위의 병력만을 운용해온 이유는 따로 있다.
“위대한 바엘께서는 네놈이 충성하지 않음을 알고 계신다.”
감시역의 악마가 오만하게 내뱉었다.
파이몬은 그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조소를 흘리는 것으로 답했다.
위대한 마족의 용사, 교만 그 자체. 바엘.
그를 떠받드는 자칭 충신이라는 작자들은 마치 그들이 바엘이라도 되는 양 굴고 있다.
애초부터 바엘이 파이몬을 살려두고 끌어들인 것은 ‘드론’만큼 반발하는 자들을 쉽게 숙청하고 또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바엘도, 파이몬도 서로를 신뢰하지 않는다.
억울해 할 필요도 없다.
파이몬 본인부터가 언제라도 바엘의 뒤통수를 칠 생각이 가득한 것을.
“아아, 그래. 위대한 마족의 용사께서는 모든 것을 통찰하시지. 그래서 문이 열려야 드론들을 가동하겠다는 거고. 어차피 문이 열리면, 그때부터는 닫을 수 없으니까.”
중앙 대륙의 선발대, 라파예트 후작이 이끄는 부대는 유사시 문을 폐쇄해버릴 생각으로 넘어왔겠지.
그러나 어비스 코퍼레이션도 그간 놀고 있지 않았다.
마도공학에 가장 뛰어난 것은 어비스 코퍼레이션이며, 마탑의 광기에 가까운 지식욕을 가장 잘 이해하는 것 또한 악마들이다.
저 소위 ‘연합국’이라는 자들은 지금 문을 건설 중인 마도사 중에 그들에게 이미 매수된 자가 있음을 알고는 있을까?
알고 있었다면 진작에 문 건설 따위 때려치웠겠지.
저들의 착각과 달리, 중앙 대륙과 어비스 코퍼레이션을 잇는 문은 한번 열리면 저들 마음대로 닫지 못할 거다.
저들이 당초 계획한 회로와는 조금 다르게 설계되어 제작되고 있으니까.
바엘의 입장에서 가장 좋은 건 미리 라파예트 후작의 선발대를 전멸시키고 협조자들을 통해 문을 완성시킨 후, 완성되자마자 무방비한 중앙 대륙에 기습적으로 침공하는 거였지만…….
“자, 우리 위대한 마족의 용사와 그 충성스러운 가신들이 원하던 A안은 유감스럽게도 실패하였군.”
파이몬은 웃으며 물었다.
“이제 슬슬 문이 완성된다. 그러니, 지금이야말로 남아있는 모든 드론들을 기동할 때가 아닐까?”
파이몬의 감시역으로 붙은 소위 ‘바엘의 충신’은 오만상을 다 찌푸리더니 으르렁대며 답했다.
“때가 되면, 바엘께서 명하실 것이다. 허나 명심하라, 파이몬. 네놈의 목숨도, 네놈의 자리도 바엘께서 예비해주신 것이다.”
파이몬은 아주 느긋하게, 이용 가치가 다 하면 이놈의 목을 어떻게 장식하면 좋을까 생각했다.
“드론의 통제와 지휘권은 분명히 네놈에게 있다. 허나 위대한 바엘께서 아무런 대책 없이 네놈에게 그런 힘을 선사하실 것이라 생각하지 말라.”
파이몬은 픽 웃으며 답했다.
“설마. 유폐된 나를 꺼내주고 권력을 돌려주신 위대한 용사님의 은혜를 잊기야 했을까?”
애초부터 그것마저 계획대로였지만, 쌍방기만이야말로 가장 악마다운 신뢰가 아니겠는가?
파이몬은 그렇게 생각하며 아주 겸손한 얼굴로 웃었다.
“……그렇게 계속 주제를 파악하고 있는 것이 좋아, 파이몬. 그대의 요청은 위대한 용사께 전해질 것이다.”
말을 마친 악마는 날개를 펼쳐 그대로 날아올랐다.
오, 통신도 가능할 텐데 충성을 증명하겠답시고 굳이 직접 날아가서 전하겠다니 비효율적이기도 하지.
파이몬은 웃음을 흘리곤 느긋하게 다리를 꼬며 웃었다.
“후후, 하하하……. 아하하하하…….”
이 일을 어쩌면 좋지.
결국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나 싶었던 피에르가 뿌린 씨앗이, 끝내 그 모든 예상을 뛰어넘어 모든 것에 대비한다는 용사의 교만함마저 넘어섰다.
말도 안 된다는 외침은 진심이었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으니까.
파이몬도 진심을 아주 내지 않은 건 아니었다. 바엘의 눈이 있으니까.
그럼에도 결국은 해냈다.
“아아, 피에르. 너무 사랑스러워서 미쳐버릴 것 같아.”
설마하니.
정말로.
이걸 해낼 줄이야.
파이몬은 패배했으나 승리했다.
왜냐하면.
파이몬을 통제하며 드론을 이용해 차근차근 중앙 대륙과 전쟁을 벌여나간다는 바엘의 계획이 끝내 파탄 나버렸으니까.
만약 파이몬이 승리했다면, 바엘은 프랑지아에 대한 기습으로 시작된 중앙 대륙 침공 계획을 차근차근 진행했을 거다.
드론의 군세는 분명히 지치지 않는 불굴의 군대지만, 결국은 소모품이다.
중앙 대륙과 끊임없는 전쟁을 벌이면서 그에 필요한 병력만 조금씩 기동시킨다면 파이몬을 통제 가능한 수준의 병력만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제 저들이 완성시킨 문이 열리고, 준비된 연합군이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섬으로 들이닥칠 거다.
그들을 상대하는 데 드론을 적당히 깨우는 정도로는 가능할 리 없다.
그들이 준비된 모든 드론을 기동하게 될 거고.
그건 바엘이 통제 가능한 선을 넘어선다.
연합군을 쓸어내 버리면, 파이몬은 끝내 용사마저 처단 가능한 무력을 손에 넣게 된다.
-드론의 통제와 지휘권은 분명히 네놈에게 있다. 허나 위대한 바엘께서 아무런 대책 없이 네놈에게 그런 힘을 선사하실 것이라 생각하지 말라.
바엘도 생각이 없지는 않지. 드론의 공정 과정에 바엘이 파이몬으로부터 통제권을 회수해오는 권한을 설정한 것도 알고는 있다.
그러나 드론의 설계자가 파이몬이다.
드론은 설계 단계에서부터 파이몬이 자신의 굴레를 깨기 위해, 어비스 코퍼레이션을 파탄 내겠다는 계획의 일환으로 만든 제품이다.
그런 드론들은 기본 공정에서부터 추후에 부여된 기능 따위 무위로 돌릴 수 있는, 최우선 권한이 삽입되어 있다.
마치 드론의 유지와 운용을 위해 필요한 필수 기능인 것처럼 위장해서, 슬로스 사에서도 오직 파이몬만이 구동 원리를 이해하고 있지.
그 어느 누구도 그런 것을 알 수 없다. 그 오만하고 위대한 마족의 용사조차.
그러니 드론들이 모두 기동되는 순간, 바엘은 눈앞의 적을 막기 위해 자신 최대의 적을 깨우는 셈이다.
“하하, 하하하…….”
드디어. 파이몬이 그토록 염원하던 모든 굴레에서의 해방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해준 건 단 한 명의 이레귤러.
“피에르, 당신이, 오직 당신만이 나를 완벽하게 만들어줘…….”
그에게 한없는 사랑을, 집착을, 감사를 담아 보답을 선물해 주어야지.
“이 세상 모든 것을 불태울 성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