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심연의 성전 - 대륙의 방벽 (4)
끊이지 않고 벌어지는 전투의 소음 때문에 깊이 잠들지 못했거나 깨어있는 자들은 내 외침에 늦게나마 반응했으나, 긴 전투의 피로로 기절하듯 잠든 이들은 그러지 못했다.
“으아아악!”
“내 다리, 다리가아아-!”
난데없이 땅바닥에서 솟아오른 드론들의 앙상하지만 비정상적으로 강한 팔이 영문도 모르고 있던 군사들의 다리를 꺾어버린다.
“저리 가, 빌어먹을!”
“사, 살려줘! 살려줘!”
전혀 대비되지 않은 후방, 그것도 땅속이라는 상상도 해보지 못한 곳에서의 갑작스러운 기습에 진영은 삽시간에 혼란에 빠져들었다.
“제길! 가스통, 기병대 전부 소집해서 맞서 싸워!”
“아, 알겠습니다, 후작 각하!”
이건 최악이다.
인간을 압도하는 힘과 민첩성을 가진 드론들을 상대로 우리가 맞서 싸울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인간 특유의 집단전을 해왔기 때문이다.
부족한 신체능력은 화기로 메우고 아니라도 서로 협동하며 맞서 싸워서 대항이 가능했는데, 이렇게 진영 한복판에서 갑자기 나타난 적들을 상대로는 그런 게 될 리가 없다.
“아아아악!”
“도, 도망, 도망쳐…… 으악!”
각개전투 양상이 되자, 머리 말곤 약점도 없는 드론들은 아군을 학살하다시피 하고 있다.
“히, 히이, 헉!”
내가 검으로 바닥에 쓰러진 병사를 노리던 드론의 목을 날려버리자, 눈물을 줄줄 흘리던 병사가 연신 고개를 숙여 보였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후작 각하!”
“미르보 사령관에게 가서 전해! 혁명 수호대를 후방에 투입하라고!”
“예, 예?”
나는 패닉에 빠진 나머지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하는 병사를 보고는 인상을 써야 했다.
젠장, 이럴 때-
“라파예트 후작 각하!”
꼭 필요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셰! 미르보에게 가서 전해! 혁명 수호대를 후방에 투입하고, 남은 예비대가 있으면 같이 보내라고! 전선에서 전투 중인 부대가 동요하지 않도록 하되, 예비대가 줄었으니 방어선을 안쪽으로 좁히면서 물러나는 걸 허락한다!”
“아, 알겠습니다 후작 각하!”
“후, 후작 각하!”
바닥에 쓰러진 군사의 다급한 외침을 들은 나는 바로 검부터 휘둘러 나에게 뻗던 팔을 잘라내고, 다시 내려베서 목을 날려버렸다.
목을 잃은 드론은 천천히 바닥에 쓰러진다.
“정신 차리고 네 몸은 네가 지켜!”
“으아아…… 알겠습니다!”
나는 바로 달리기 시작했다.
후방의 혼란에 우왕좌왕하면서 전열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그대로 끝장이다.
후방에서 쉬던 병력도 적진 않았지만 이런 상황에선 속수무책인데 혁명 수호대와 가스통이 제압해 줄 수 있을까?
아니, 제압해줄 것이라 믿는 수밖에 없다.
지금은 그보다도 중요한 것이 있으니까, 나는 거기로 가야 한다!
나는 눈에 보이는 드론마다 전부 베어내며 정신없이 달린 끝에 문에 도착했고-
“으악!”
루이스에게 팔을 찔러 넣으려던 드론의 목을 냅다 날려버렸다.
“헉, 헉, 가, 감사합니다, 후작 각하.”
제길, 하마터면 크리스틴이 피눈물을 쏟는 꼴을 볼 뻔했네.
나는 바로 단도를 뽑아 다른 마도사에게 달려들던 드론의 뒤통수를 뚫어버리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마도사단 피해는? 막심 단장은?”
내가 듣기에도 목소리에 짜증과 초조가 가득해서 흠칫했지만, 이건 심각한 문제다.
자칫 잘못하면 여기서 더-
“으아앗, 이것들 대체 어떻게 움직이는 거야! 뜯어보고 싶네!”
다행히 드론의 머리를 번개 마법으로 뚫어버린 막심 단장이 멀쩡하게 떠들어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보다 지금 저런 소리 할 때인가?
루이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답했다.
“여섯 명이 당했습니다. 송구합니다…… 문 건설에 마력을 거의 다 쓴 터라 제대로 대항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가장 안전하게 보호되고 있다고 믿었던 후방에서의 기습이니 마도사들이 당할 수도 있지.
하지만 선발대에 따라온 마도사들이 20명. 그중에 6명이 죽었다고.
나는 막심 단장에게 가서 물었다.
“단장님, 문의 건설은 어떻게…….”
“아니이, 지금 문이나 건설하고 있게 생겼습니까? 우릴 안전하게 지켜줘야 뭘 짓든 말든 할 거 아니요! 갑자기 왜 드론들이 여기 나타난 겁니까? 6명이나 당해서야 못해도 삼일은 더-”
하늘이 노랗게 변한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알 것 같다.
“이틀, 이틀 드리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안에…….”
“아니, 그게 그런다고 되는 일인가? 애초에 이제부터 안전하긴 한 건가? 댁들 믿고 마나를 다 썼다가 당한 것 아닙니까! 나까지 생각 없이 마나를 다 썼으면 나도 당했다고!”
짜증이 치밀어 올라서 나도 모르게 반박이 터져 나왔다.
“제기랄, 땅속에서 습격해오는 걸 어떻게 예상합니까!”
“아니, 그럼 앞으로도 이럴 수도 있다는 거 아니오? 앞으로 이런 일이 없다는 보장은 있소? 여기 땅 전부 다 파볼 거야?”
“후, 후작 각하!”
발끈한 내가 검을 들어 올리자 루이스가 기겁하고, 막심도 움찔했다.
그러나 나는 막심의 발치에 있는 흙더미를 검으로 헤집으며 소리쳤다.
“보십시오! 땅굴 같은 건 없습니다! 이놈들은 우리가 오기도 전부터 땅 속에 묻혀 있었을 겁니다! 이렇게 기습하려고! 드론들은 굶주리지도 않고 지치지도 않으니까 미리 묻어두면 완벽한 기습이 되었겠죠! 하지만 이건 일회성 기습에 불과합니다!
애초에 우리 진지 밑으로 땅굴을 파면서 왔으면 우리가 아무것도 못 느꼈을 리가 없으니까, 그리고 이런 놈들이 더 있었다면 지금 다 꺼내서 우릴 전멸시켰겠지!”
“아, 알겠, 소. 미안합니다. 그, 놀라서 그만.”
막심이 내 눈빛을 보곤 움찔하며 시선을 돌려서, 나는 한숨 쉬며 말하고 등을 돌렸다.
“방어선도 최대한 좁히고 만일에 대비해서 마도사단의 호위부대도 따로 배정해 드릴 테니, 이틀 안으로 부탁드립니다.”
* * *
연합군은 최선을 다해서 대응했다.
땅 밑에 묻혀있던 드론들이 갑자기 뛰쳐나와 기습한다는 상정조차 해본 적 없는 기습에도 연합군이 동요하지 않도록 예비대와 전선 부대를 철저히 이격시켰고, 혁명 수호대와 흉갑기병대를 비롯한 정예부대로 본진에 난입한 드론들을 전부 격멸해냈다.
그러나 파이몬은 내부에서의 기습과 동시에 총공세를 펼쳤고, 우리는 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사상자가 심각합니다, 라파예트 후작. 제국군만 6,000이 넘고, 연합군을 다 합치면 벌써 2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심각한 얼굴의 질 폰 레온하르트가 말했다.
2만, 2만이라.
선발대 총 병력이 10만인데 그중에서 2만.
이 섬에 발을 들이고 보낸 나날의 사상자를 다 합친 것보다 드론들의 기습과 연계된 파이몬의 총 공세가 입힌 단 하루의 피해가 더 심각하다.
“그…… 후작 각하. 군사들의 피로 문제도 큽니다. 기습 때문에 교대 병력은 물론이고 경계 병력도 쉬지 못하고 밤새도록 싸웠습니다. 이제라도 어떻게든 병력을 쪼개서 교대를 돌리려고 해도 방어선이 뒤로 물러나 소음 문제도 있고, 군사들이 땅 밑을 두려워하느라 제대로 쉬지를 못한다고…….”
“빌어먹을, 말했잖나! 땅속에 드론들이 더 있었으면 다 꺼내서 진작에 우릴 끝장냈겠지!”
데미앙은 나에게 말이 잘리곤 찔끔하며 입을 다물었다.
나도 그게 데미앙의 잘못이 아니라는 건 안다.
군사들 입장에선 그런 전술 개념 따위 알 바 아니니 교대하고 쉬러 간 동료들이 떼죽음 당했다는 현실만 와닿겠지.
“장교들에게…… 더 이상 땅속에서의 기습은 없을 거라고 최대한 군사들을 안심시켜주라고 해.”
“알……겠습니다.”
데미앙은 떨떠름하게 답했다.
나도 이게 무리한 요구라는 것을 안다.
장교들도 몸이 여럿이 아닌데, 당장 방어선 관리하느라 숨넘어갈 지경인 장교들이 교대하면 자기도 쉬기 바쁘지 안심시켜주긴 뭘 안심시켜줘.
하지만 문제가 있는데 총사령관이 아무 답도 주지 못한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인정할 수도 없잖은가.
이렇게 절망적이고 어두운 시간에.
내가 피로하고 뻑뻑한 눈을 손으로 문지르고 있자, 크라프테의 샤른호르스트 장군이 입을 열었다.
“탄약 비축분은 괜찮겠소?”
“……문의 건설이 지연되며 전투가 예정보다 길어지게 생겼으니, 크라프테군이 소모량을 조금은 줄여주셨으면 합니다만.”
저 망할 크라프테 놈들, 자기 돈 아니라고 아주 물처럼 써대지.
덕분에 손실이야 적고 가장 전력을 온존한 군대기도 하다만, 더는 그럴 여유가 없다.
다행히 샤른호르스트 장군은 의외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그보다도. 우리 참모진의 공통된 의견은 저들이 최종적인 총공세를 준비 중이라는 것이오.”
“……그러겠죠.”
며칠간 끊이지 않고 이어지던 교전은 사실상 멈췄다.
땅 밑에서 솟아 나온 드론들의 기습과 함께 총공세를 벌인 파이몬은 그 이후로는 산발적으로 소규모의 드론들을 보내오며 우리의 긴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으하하, 드디어 오는구만! 아주 영광스러운 전투가 되겠지!”
크록스가 송곳니를 손으로 매만지며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그에게 애써 웃어주었지만, 모두가 그처럼 지칠 줄 모르는 용맹과 신체를 가지지는 못했다.
나름대로 교대로 휴식하며 유지해오던 군사들의 컨디션이 단 한 번의 기습으로 무너졌다.
그러지 않아도 방어선을 뒤로 물려서 온갖 포화의 소리와 전투의 소음을 들으면서 잠을 청하는 것이 쉽지도 않은데, 심지어 땅 밑의 공포까지.
군사들을 최대한 안심시킨다고 해도 트라우마라는 것이 그리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니까 단기간에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막대한 손실을 입으면서 제때 교대 돌릴 예비병력도 부족하고, 예비대가 없으니 자연히 근무시간은 늘어날 수밖에 없는 악순환이 가속된다.
우리는 명백히 지쳤고, 사기는 떨어지고 있다. 그나마 이 정도 버틴 것이나마 우리가 인류의 최정예군이라 가능한 거겠지.
이틀.
마도사단은 삼일을 요구했으나, 우리가 버텨낼 수 있는 건 잘 쳐줘도 이틀.
그 이틀은 버틸 수 있을까.
그러나 내게는 고민할 시간조차 충분하지 않았다.
다급하게 뛰어온 지젤 다비가 소리쳤으니까.
“적군의 공격입니다! 규모로 보아 총공세입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싶은 것을 참으며 검을 들고 일어섰다.
“이게 마지막 공세겠죠. 끝이 머지않았습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왔고, 마지막까지 다할 겁니다. 각자 위치로.”
* * *
밖으로 나서자, 오늘은 어째서인지 그토록 짙게 깔려 있던 안개가 옅어져 있었다.
덕분에 시야가 평소보다 훨씬 넓었고...
우리는 그래서 절망했다.
“저건, 끝은…… 있는 건가?”
“대, 대체…….”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드론, 드론, 드론, 드론, 그리고 드론.
지금까지의 공세가 마치 장난이기라도 했다는 양.
무한에 가까운 파도가 밀려오고 있다.
나는 탄식하듯 내뱉었다.
“……교대하러 간 병력 전부 깨워서 집결시켜.”
“알겠습니다, 후작 각하!”
이게 결국 이틀이나 버텨야 하는 우리에게 극약과 같은 결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현재 병력을 모조리 끌어내서 여력을 바닥까지 쥐어짜내지 않고서는, 저 파도와 같은 공세를 막아낼 수 없으리라는 것이 너무도 명백하다.
아니, 쥐어짜낸다고 저걸 막는 것이 가능은 할까?
“포병 발사!”
“Feuer!”
“전 포문 발사!”
장교들의 지시에 포탄이 굉음을 내며 날아가 드론 떼를 강타한다.
폭발탄이 일으킨 폭발이 지면을 휘감으며 드론을 분쇄하고, 육중한 금속의 탄이 일렬로 드론들을 짓으깨며 지나간다.
그러나 그렇게 파괴된 드론은 이내 다른 드론들의 파도에 묻혀버렸다. 마치 우리의 미약한 저항도 그렇게 파묻혀버릴 거라는 듯이.
경보병대의 사격도, 전열보병들의 사격도.
물밀 듯이 밀려오는 드론들의 파도를 막아내지 못한다.
쓰러져도, 쓰러져도 끝이 없이 밀려든 드론들의 파도가 결국 우리의 진영을 덮쳐드는 것을 본 나는 이것이 끝이라고 직감했다.
“후, 후작 각하.”
그럼에도, 나는 검을 뽑았다.
“……후퇴할 곳은 없다. 전 병력 투입.”
설사 중과부적으로 패배할지라도, 숨이 붙어있는 순간까지 싸운다.
저 이베리카에서 결국 단념했을 때의 좌절감과 죄책감을, 다시 반복할 수는 없다.
“우리가 바로 인류의 방벽이니, 패배는 용납되지 않는다! 연합군, 나를 따르라!”
“후, 후작 각하를 따르라!”
나는 그대로 말을 박차고, 최전선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압도적인 드론의 파도를 향해 질주하는데도 자연스럽게 흉갑기병대와 가스통이, 그리도 다른 연합군이 내 뒤를 따른다.
나의 이 선택은, 청기사의 최후와 다른가?
그에 대한 답을 내기도 전에 검이 드론의 목을 가르고, 베고, 쪼갠다.
무아지경으로 검을 휘두르는 사이 어느새 말을 잃었다.
얼마나 많은 드론들을 베었는지 세지도 못할 때쯤, 무수한 드론을 거느린 붉은 악마와 대면했다.
“아아, 아름답군요. 너무도 아름다워…… 피에르. 그 모습 그대로 박제해버리고 싶을 만큼.”
파이몬이 진하게 웃으면서, 마치 사랑을 속삭이듯 소름끼치게 말한다.
나는 흘긋 고개를 돌려, 고군분투하고 있으나 끝내 압도적인 적의 파도에 파묻혀버리고 말 연합군을 바라보았다.
“당신의 패배입니다, 피에르.”
헛웃음이 흐른다.
패배. 패배라…….
나는 그저 검을 고쳐 쥐었다.
적어도 내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지 못하면, 죽어서도 크리스틴을 볼 낯이 없으니까.
“너무 낙담하지는 마시죠. 애초부터 제가 너무나 압도적으로 유리한 싸움이었으니, 당신의 노력을 폄훼할 생각은…….”
파이몬의 말이 멈췄다.
그리고, 공기가 바뀌었다.
어째서인지 옅어졌다고 느꼈던 안개가, 천천히 밀려나고 있다.
뭐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 파이몬이 신음했다.
“이건, 무슨…….”
지면이 울린다.
드론들의 불쾌하리만치 기계적으로 규칙한 울림이 아니라.
무수한 생물이 내는 질서 없는 소음.
그리고 내가 숱하게 많이 들어온 울림.
이건, 기병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측면으로 기병대가 들이쳤다.
“돌격하라, 혁명군! 프랑지아를 위하여!”
마력을 실은 루이 드제의 외침이 전장 전체를 울리고, 프랑지아의 깃발을 내건 흉갑기병대가 드론들을 짓밟아 뭉개며 빠르게 질주해온다.
드제? 내가 본국을 맡기고 온 드제가, 어째서 여기에?
“전진, 전진하라! 크라프테를 위해, 대왕 폐하를 위해, 하인리히 폐하를 위해!”
크라프테군 기병대 특유의 칠흑의 군복을 입은 기병대가 왕홀을 쥔 독수리 깃발, 왕의 깃발을 내걸고 그 옆을 넓히며 달리고 있다.
무슨 일인지 미처 판단하기도 전에 기병대의 파도가 드론들을 찢어발기며 가르고-나는 그들과 함께 달리다가 말을 몰아, 이쪽으로 달려오는 사람을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이건, 말도 안 돼!”
파이몬이 악을 쓰며 나에게 달려들었지만, 나는 파이몬의 손톱을 검으로 쳐내 밀쳐내고 뛰어올라 말에 올라탔다.
앞에서 휘날리는 길고 검은 머리칼이 시야를 어지럽힌다.
“……크리스틴?”
내가 지금 헛것을 보나?
“말 걸지 마요, 피에르. 또 자살 돌격 중인 당신을 본 덕분에,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으니까.”
싸늘한 말투지만, 제독의 복장을 그대로 차려입은 크리스틴이 내 앞에서 말을 몰고 있다.
“어떻게 여기에?”
크리스틴은 답하는 대신, 시선을 뒤쪽으로 돌렸고-
내가 그녀를 따라 고개를 돌린 순간, 빛이 뿜어져 나왔다.
보랏빛의 안개를 모조리 쫓아내버릴 기세로 뿜어져 나오는 빛이 내 몸, 그리고 무너져가던 우리 모두의 몸에서 피로와 절망을 몰아내고 생기를 불어넣는다.
그토록 지독하게 우리를 괴롭히던 보랏빛의 안개가 빛의 폭풍에 휩쓸려 멀어져만 간다.
그리고, 신성력으로 가득 찬, 에리스의 목소리가 전장에 울렸다.
“포기하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