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심연의 성전 - 대륙의 방벽 (3)
중군, 프랑지아 혁명군의 본대.
“우랴!”
니콜라 네가 머스켓의 개머리판으로 강타하자, 얻어맞은 드론의 머리가 부러져 아예 성대하게 하늘을 날아가 버린다.
“물러서지 마라, 혁명군! 목숨 걸고 대열을 지켜!”
“옛!”
그의 우렁찬 고함에 혁명군의 전열보병들도 기세를 높이며 드론들의 머리를 노리며 총검을 내지른다.
개중에는 전열보병들의 가운데에 파고들어 순식간에 혁명군 몇을 쓰러트리는 드론들도 있었지만,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이 날렵한 몸짓으로 공중제비 돌며 단도를 머리에 박아버리자 그대로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쓰러졌다.
“7번째 심복 샨드라가 명한다! 왕의 형제를 도와라!”
“왕을 위해!”
“Al-ardho Akbar!”
“Waaaggghhhh!”
이내 거구의 오크들이 질주하며 방진에 파고들거나 돌파하려는 드론들을 그대로 쳐날려 버리며 용맹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혁명군과 이베리카의 군대가 기세를 높이며 돌파하는 사이.
“저 근육뇌들 너무 돌출되어 있잖아! 용맹도 과하면 독이야! 네 장군에게 물러나서 참호선 아래로 내려오라고 해!”
후방의 데미앙 드 미르보는 그런 네의 선봉대를 보며 바쁘게 지시 내리고 있었다.
“전부 참호선으로 끌어들여서 싸워! 어차피 백병전이라면 로켓이라도 안 맞는 쪽이 나아!”
“알겠습니다!”
참모가 명령을 받고 달려나가는 것과 지젤 다비가 들이닥치는 건 거의 동시였다.
“미르보 사령관 각하!”
“뭐야, 다비 중령!”
“7연대 쪽이 밀리고 있습니다! 증원이 필요합니다!”
“으아아아, 환장하겠네! 9연대 투입!”
“알겠습니다, 사령관 각하!”
지젤 다비가 뛰어나가자, 데미앙은 핏발 선 눈으로 지도를 노려보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 지젤 다비니까 부대의 상황을 파악하는 것만은 정확할 터, 필요한 증원일 거다.
그러나 그가 쓸 수 있는 예비대는 이미 빠르게 소진되고 있다.
저 망할 보랏빛 하늘 때문에 도통 시간감각이 없지만, 그의 회중시계는 전투가 시작되고 대략 12시간가량이 지났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지치지 않고 끝도 없는 드론과, 결국 지쳐 체력이 소진되는 인간의 싸움.
싸우다가 결국 지친 쪽이 물러남으로써 끝나는 전투와는 완전히 궤가 다르다.
피에르 드 라파예트는 교대를 통해 체력을 온존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전 병력을 투입해서는 안 된다며, 엄격한 예비대 투입 제한을 걸어두었다.
데미앙도 머리로는 이유를 이해하고 있지만, 전 병력을 투입해도 버거울 것 같은 괴물들을 제한된 병력으로 빠듯하게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라니.
말로는 쉽지!
결국 데미앙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절규했다.
“망할, 역시 여기 오는 것이 아니었는데!”
어차피 선택권 따위 없었지만.
하여간 라파예트, 그 작자와 엮이면 되는 일이 없다!
* * *
좌익, 게르마니아 제국군 진지.
“핫!”
한때 질 드 리오넬이라 불렸던 남자.
질 폰 레온하르트는 단번의 검격으로 드론의 머리를 날려버리고 그대로 박차고 나가 연달아 드론들을 쓰러트렸다.
지극히 효율적이고 간결한, 우수한 기사의 움직임과 그에 대비되는 화려한 군복과 망토가 휘날리며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후우…….”
질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곤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그리곤 그의 뒤에서 방금까지 위기에 빠져 있다가 엉거주춤하고 있는 제국군을 돌아보았다.
“가, 감사합니다, 레온하르트 장군님.”
“무얼, 어서 수습들 하라고.”
장군의 군복과 망토는 움직임에 조금 방해되긴 하지만, 그만큼 시선을 확실하게 사로잡는다. 감수할 가치가 있는 불편함이지.
질은 뒤에서 달려드는 드론을 마저 더 베어버리고 검을 털어냈다.
질은 그의 예리한 검을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내가 그대들과 함께 한다! 굳건히 싸워라!”
“와아아아아!”
“레, 레온하르트 장군님 만세!”
“제국군 만세!”
방금까지도 무너질 위기였던 제국군이 기세를 드높이며 함성을 울리고, 달려드는 드론들에게 총격을 가하고 총검을 내지른다.
질은 피식 웃었다.
그가 게르마니아 제국군의 군제개혁을 주도하고 원정대에서 제국군 총사령관의 자리를 받아냈긴 하지만, 어차피 그 군제개혁이라는 것은 소위 혁명군과 크라프테군의 군제를 모방하고 제국군에 들어맞게 조금 고친 것뿐이다.
제국군이 하도 엉망진창이라 그것만으로도 큰 효과를 봤을 뿐이지.
어차피 그 개혁된 군제로 길러낸 우수하고 젊은 장교들의 지휘력은 그와 별다를 바 없으니, 그는 최전선에 나와서 싸우고 있었다.
우려하는 이는 있어도, 뜯어말리는 이는 없다.
왜냐하면, 이 전장에 나와 있는 모두가 피에르 드 라파예트. 일견 무모해 보이는 혁명군 총사령관의 전설적인 활약을 직접 몸으로 겪거나 귀로 들었기 때문이다.
총사령관이 몸을 사리지 않고 최전선에서 군사들과 함께 하고, 그에 부족함이 없는 실력이 있을 때의 영향력은 전선을 지배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기사로서, 용병으로서 오랜 시간 살아온 그는 이쪽이 더 편하다.
질은 스윽 시선을 돌려, 중군을 맡고 있는 혁명군의 전선을 바라보았다.
빤히 공격이 가장 집중되고 있는데도, 위태로워 보이는 곳마다 적절하게 예비대가 투입되며 잘 버텨내고 있다.
질은 피식 웃었다.
과연 ‘방어의 명장’ ‘딜루스의 수호자’로 이름이 자자한 데미앙 드 미르보.
회의에선 한심했지만 역시 실전에 투입되니 어떻게든 다 해내고 있다.
이웃 영주 대리일 때는 그냥 리오넬의 영지를 털러 오다가 성녀왕에게 채찍질 당하던 소인배에 불과했는데 어느새 저렇게 대륙의 명장이 되어선.
“세월 참.”
소리 내어 말한 질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긴, 그도 이렇게 제국군의 총사령관이 되어서 옛 적들과 함께 싸우게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지.
질 드 리오넬은 그의 원수이자, 동시에 동경의 대상이기도 한 피에르 드 라파예트를 떠올렸다.
이웃 영지의 영주로서 그와 담소 나누던 모습, 용병이자 혁명군의 일원이던 그의 앞에서 등만을 보인 채 적진을 돌파하던 모습.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죽음에 직면하고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던 그 망집에 가까운 전의를 불태우던 모습까지.
질은 그의 검을 고쳐 잡고, 제국군이 사투를 벌이는 전장으로 다시 발을 내디뎠다.
그는 피에르 드 라파예트에게 그를 지켜보겠다고 했다.
그가 결국 타락하면 징벌하겠노라고 선언했다.
그렇다면 질 드 리오넬도, 질 폰 레온하르트도.
그에게 부끄럽지 않을 자격을 갖춰야만 하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기사, 용병, 그리고 외국의 장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남자는 그와 평생을 살아온 검으로 전장을 수놓고자 질주했다.
* * *
우익, 크라프테군의 진영.
머스켓 특유의 흑색 화약이 내뿜는 매캐한 초연이 전장을 가득 메울 정도로 자욱하지만, 그럼에도 총성은 끊이지 않는다.
“제13전열보병 연대 후퇴사격 실시! 제6경보병 연대가 엄호하라!”
“발사!”
타타탕-
머스켓이 일제히 불을 뿜자 질주해오던 드론들이 우수수 쓰러지고, 발사를 끝마친 보병들이 바로 뒤로 빠져 재장전을 시작한다.
동시에 다음 열이 발사하고 재차 후퇴, 빠지는 사이 달려들던 드론들마저 산개해있던 경보병들이 조준사격으로 차근차근 처리해나간다.
혁명군과 게르마니아군이 이미 백병전에 돌입한 것과 달리, 크라프테군은 철저한 사격전을 유지하는 중.
샤른호르스트 장군은 언덕에서 말위에 오른 채 그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때 인류 최정예의 강군이라 불렸던 크라프테군은 패배했고, 무너졌다.
이베리카 형제국의 오크들은 백병전이나 돌파력에서 감히 그들이 따라갈 수 없다.
혁명군만큼 압도적인 기병대를 보유하지도 못했고, 라파예트 후작처럼 말도 안 되는 용맹을 자랑하는 기사도 없다.
게르마니아 제국군과 같은 물량도 그들에게는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들에겐 그 어느 나라보다 우수하다고 자부하는 교리가 있다.
군사들 하나하나가 최강은 아닐지언정, 육군 참모본부의 무수한 장군과 장교들이 머리를 맞대고 군대를 가장 효율적으로 운용하기 위해 재정립해낸 교리.
1열이 못하면 2열이, 2열이 못하면 3열이, 그마저도 안 되면 경보병들이.
마치 악기의 연주처럼 물 흐르듯 이어지며 서로 조화를 이루는 움직임은 오직 그들이기에, 크라프테군이기에 가능하다.
피이이잉-
피이이-
안개 속에서 재차 소음을 내며 날아든 로켓이 진지를 강타하고, 비명이 터져 나온다.
그러나 크라프테군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좌표 전달!”
그나이제나우 장군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각 포대 옆에 붙어 안개 속을 주시하던 자들이 바로 포병대에게 전달하고-
“포각 조절, 좌로 13, 추정거리 700!”
“포각 조절 완료!”
각 포대별로 담당 슛첸에게 전달받은 각도와 거리로 포각을 조절하고 그들의 장군을 바라보았다.
“대응 포격, 개시!”
“발사!”
“Feuer!”
고개를 끄덕인 그나이제나우 장군의 명령에 크라프테군의 화포가 일제히 불을 뿜어낸다.
대충 적의 화력을 억제하기 위해 어림짐작해서 가하는 대응 포격 따위와는 차원이 다르다.
초인적인 시력과 집중력을 가진 중앙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척후병이자 저격수, 슛첸들이 육안과 망원경을 총동원해 안개 속을 뚫어져라 들여다보며 그 안에서 번쩍이는 로켓의 작은 불빛을 잡아낸 결과.
중앙 대륙에서도 가장 숙련되고 체계적인 포병대를 운용하는 크라프테군이기에 가능한, 좌표를 추정해서 가하는 반격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 결과, 크라프테군의 좌익 쪽으로 쏟아지는 로켓의 수는 꾸준히 격감하고 있었다.
“헌데, 장군님. 이렇게 계속 쏴대다간 탄약 소모가…….”
참모장교의 진언에, 샤른호르스트 장군은 썩은 미소를 흘리며 답했다.
“아아, 그건 걱정하지 말게나. 우리 위대한 숙적 피에르 드 라파예트 후작께서는 물자가 충분히 비축되었으니 마음껏 쓰라고 했거든.”
어차피 그들 돈도 아닌데, 물자가 있다면 모조리 퍼부어서라도 승리를 일구면 그만 아닌가?
“옛, 알겠습니다!”
전투가 끝나고 크라프테군이 전체 탄약 소모량의 절반을 담당했다는 걸 알면 라파예트 후작이 뒷목을 잡기야 하겠지만…….
아무튼 이기면 된다, 이기면.
“크라프테 왕국군의 이름을 더럽히지 마라, 제군! 그대들의 모든 것을 끌어내, 하인리히 폐하께 승리를 바치도록!”
“Jawohl!”
* * *
보랏빛으로 물든 대지 위에서, 전투는 하루가 넘게 지속되었다.
해가 완전히 떨어져 보랏빛조차 사그라든 대지에서는 연합군이 피운 횃불 아래에서 전투가 이어지고.
자욱한 안개가 머금은 습기와 함께 으슬으슬 몸이 떨리는 아침에조차 전투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그러나.
그뿐이다.
저들은 끊임없이 드론을 몰아치고, 로켓 폭격을 가하고 있다.
그나마도 계속 이어진 로켓 폭격으로 저들의 사정거리와 착탄 범위를 어느 정도 예상가능해진 시점부터 크라프테군의 포병대를 중심으로 제대로 반격이 시작되자, 저들의 로켓 폭격마저 점점 더 뜸해지고 있다.
그저 무한의 드론들이 쉴 새 없이 달려들어 끊임없는 소모전을 벌이고, 가끔 기관총을 기습적으로 투입할 뿐.
그나마도 척후병들이 매의 눈으로 살피다가 발견하는 족족 포격으로 처리하거나 급하면 내가 직접 말을 타고 뛰어나가 활로 저격해서 처리해내, 우려했던 것에 비해서는 기관총으로 인한 희생은 적었다.
“교대입니다, 후작 각하.”
나는 모닥불을 쬐며 앉아 있다가 시선을 들어, 갑옷에 온통 피칠갑을 한 가스통을 보며 말했다.
“고생했네, 가스통. 잠시라도 편히 쉬게.”
“하하, 제 부인도 전열에서 싸우고 있는데 제가 고생이랄 것이 있겠습니까.”
그래, 샨드라는 전열에서 날뛰고 있었지.
나는 피식 웃었다.
“그래, 그럼 이제 슬슬 다시 나가볼까…….”
내가 옆에 세워둔 검을 들고 몸을 일으키자, 가스통이 나를 잠시 바라보며 물었다.
“피곤하십니까, 후작 각하?”
“뭐, 조금은. 그것보다도, 상황이 신경 쓰여서 말이야.”
전황은 그리 나쁘지 않다.
확실히 밤낮없이 꾸역꾸역 몰려드는 드론들은 기가 질릴 수준이지만, 애초부터 드론을 상대로 한 싸움이니 이렇게 될 걸 상정하고 부대를 나누어 교대하며 싸우고 있다.
이렇게 해도 빤히 앞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데 뒤에 있는 군사들이라고 편히 쉬기는 어렵겠지. 전선에 투입된 부대의 부담도 과중되고.
그래도 초장부터 전선에 전 부대를 다 투입했다가 며칠간 이어지는 전투에 기진맥진해서 하나둘 나가떨어지는 사태는 피할 수 있다.
어차피 문을 지키는 싸움, 그때까지만 버티면 되니까 이대로만 가면 문제없으니까.
위태로운 상황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그때마다 가스통과 내가 기병대와 성기사단을 이끌고 나가서 박살 내주고 아군이 재수습할 시간을 벌어주고 있다.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유지하고 있습니다만…….”
가스통의 말을 들은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겨우 이대로 끝날 리가 없어.”
상대는 그 파이몬이다. 간교하고 교활한, 나보다 몇 배는 오래 살아온 악마.
분명히 무언가, 나라도 생각하기 어려운 한 수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발밑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후작 각하!”
“나도 느꼈다!”
진동.
규칙적이고, 기계적인.
진동.
척- 척- 하고 드론들이 발맞추어 일제히 같은 움직임을 낼 때와 비슷한 느낌의...
진동이.
……발밑에서?
진동.
적은 드론. 영양 공급도 휴식도 필요하지 않고, 오직 파이몬의 명령에 의해 움직이는 꼭두각시.
이곳은 저들의 섬.
그렇다면 미리 준비해두는 것도 가능하다.
설마-
그렇게 생각한 순간, 어둠 속에서 지면의 이곳저곳이 불룩 튀어나온다.
다시 또 진동.
기계적이고 규칙적인 진동과, 다시 조금 튀어나오는 지면.
나는 바로 마력을 있는 대로 끌어모아 소리쳤다.
“전 병력, 기상! 적습이다! 적은 땅 밑이다!”
진동과 함께 수십, 수백, 아니 수천의 손이 일제히 흙바닥을 뚫고 솟구쳐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