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심연의 성전 - 대륙의 방벽 (1)
예상대로, 결전의 순간은 순식간에 다가왔다.
우리가 군사들을 푹 쉬게 한지 겨우 하루.
지젤 다비가 헐레벌떡 뛰어와서 나에게 보고했다.
“A 포인트로 향한 정찰조 전부와 연락이 끊겼습니다!”
“A 포인트에서 여기까지…… 넉넉잡아도 2시간이면 도착하겠군.”
“옛! B포인트의 정찰대라도 전부 물러나라고 할까요?”
지젤 다비는 바로 물어왔다.
“그래, 적의 공세가 명확해진 이상 안개 속에서 계속 돌출되어 있는 건 자살행위에 불과하니까.”
적들도 안개를 꿰뚫어 보는 건 아니지만, 안개 속에서 갑자기 조우했을 때 바로 주어진 명령을 수행하는 드론과 경무장한 채 그에 맞서야 하는 정찰병의 싸움 결과야 명백하지.
적의 정확한 공세 타이밍을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차피 적도 시간이 없고 겨우 그거 알자고 전부 개죽음시킬 수는 없다.
“알겠습니다!”
지젤 다비는 바로 경례하며 물러났다.
“빠, 빠르군요.”
데미앙 드 미르보가 얼떨떨해하며 중얼거렸다.
지난 초계활동에서의 전투 이후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파이몬은 바로 총공세를 시작해왔다.
저들이 바로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것도 아니었다고 생각하면, 저들이 출진한 건 그보다도 빠르겠지.
제아무리 드론이 주력군이라고는 해도, 로켓이나 기관총을 다루는 마족들도 있는 걸 생각하면 준비에 시간은 걸릴 텐데도 이렇게 바로 온 걸 보면…….
그 기습도 애초부터 나에게 인사할 겸 맛보기 정도였고, 진짜 공세 준비는 진작에 끝마쳐뒀었다는 거겠지.
“참호선의 준비는?”
“절반 정도밖에…….”
데미앙이 찔끔하며 답해서, 나는 그의 어깨를 툭 쳐주고 말했다.
“그 정도라도 없는 것보단 낫지. 니콜라 네 장군.”
“옛!”
“선봉 역할은 언제나처럼 그대다. 하지만 이건 공격전이 아니라 방어전이니, 미르보 사령관의 명령을 충실히 따르도록.”
“아, 알겠습니다.”
나는 시선을 돌려, 무거운 얼굴을 하고 있는 가스통을 바라보았다.
“가스통 장군, 편입된 성기사단은 어떻지?”
“저들도 전 단장의 독단이 파멸적인 결과를 냈음에도 후작 각하께서 기회를 주셨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제 흉갑기병대와 완전히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의 보조는 맞출 수 있을 겁니다.”
나는 슬며시 웃었다.
그래,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가스통이니까 믿을 수 있겠지.
“그래, 그대를 믿어. 언제나 그러했듯.”
가스통은 나에게 묵묵히 고개를 숙여 보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절로 손에 땀이 차는 걸 느낀 나는 그것을 털어내고 주먹 쥐었다.
이렇게 될 거라고 알고 이 섬에 발을 들였다.
아니, 오히려 막막하게 안개 속을 헤매고 있을 때에 비하면 차라리 이쪽이 낫지.
“전 부대에 소집 명령 하달, 전투 준비.”
“옛, 각군 전체에 전파하겠습니다!”
“……드디어, 결전의 때가 왔다.”
나는 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 * *
“후작 각하, 보급대가 도착했습니다.”
“이게 마지막일 텐데, 딱 맞춰주었군.”
그동안엔 대치하는 사이 해군이 본토를 왕복하며 계속 식량과 탄약 등의 보급 물자를 옮겨왔지만, 본격적인 전투가 개시되면 이것도 무리지.
그래도 그 며칠 사이에 대함대가 쉬지 않고 나른 덕분에 물자는 제법 풍족하게 비축할 수 있었다.
더 이상의 추가 보급이 없더라도, 최소 일주일은 버틸 수 있을만한 물자가 있다.
진지로 물자가 반입되는 걸 보고 있자, 보급대의 장교가 나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와서 서신을 건네주었다.
“후작 각하, 이건 제독님께서 전해달라고 하신 겁니다.”
“고맙군.”
나는 바로 편지를 뜯어서 그것을 열어보았다.
언제나처럼 간결한 필체로 써진 편지에는 내가 가장 우려하고 있던 부분이 쓰여 있었다.
[우려한 부분에 대해서는 마탑주와 논의해 봤어요. 문에 악마들이 간섭하려고 들 가능성 자체는 배제할 수 없지만, 문에 직접 물리적으로 간섭하면 모를까 그렇지 않고서는 통제권이나 설정을 함부로 변경할 수는 없다고 해요. 마탑도 그리 허술하지는 않다고 도리어 역정을 내던데요.]
나는 가볍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레모리가 남긴 경고 때문에 혹시나 우리가 건설한 문을 저쪽이 제멋대로 조종한다거나 하는 사태가 벌어질 것을 우려했는데, 적어도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거겠지.
그리고 그렇다면, 결국 어떻게든 문을 지켜내기만 하면 된다. 문 너머의 프랑지아 본국에는 이미 연합군이 가득 모여 있으니까.
어비스 코퍼레이션의 악마들은 확실히 강하지만, 인간을 압도하고도 남을 대악마들이 그렇게 흔한 것이 아니다.
이 섬은 광활하지만 중앙 대륙 전체에 비하면 규모도 훨씬 작으니 병력의 숫자에서도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결국 중앙 대륙의 연합군이 이 섬에 발을 들일 수만 있다면, 그건 곧 연합군의 승리다.
나는 눈을 내려 편지에 적힌 마지막 부분을 보았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가장 필요한 말만 할게요.
보고 싶네요, 피에르. 언제나 그랬듯, 곧 다시 보게 될 거라고 믿겠어요.
당신의 크리스틴.]
나는 편지에 살짝 입 맞추고 그것을 갈무리해서 옷에 넣었다.
이번에도 그녀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동원해 나를 돕고, 믿으며 기다리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이번에도 어떻게든 살아남고, 해내서.
자랑스러운 얼굴로 재회하면 될 일.
나는 시선을 돌려 집결해있는 군사들을 바라보았다.
어비스 코퍼레이션, 그 악마들의 섬에 가장 먼저 발을 들인 선발대.
그들은 그동안 계속 긴장된 상태에서 쌓인 피로를 다 풀기에는 부족했을, 짧은 휴식을 제대로 즐기지도 못한 채 집결 명령을 받은 이들.
그럼에도 중앙 대륙 전체에서도 가장 정예만을 모아온 이들은 명령이 떨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전부 집결해 흔들림 없는 자세로 도열해 있다.
저 기나긴 내전부터 시작하여, 혁명과 숱한 전쟁을 거쳐 여기까지 나를 따라온 혁명군.
나와 시작을 함께 한 가스통과, 악운으로 얽혀서 여기까지 끌려온 데미앙 드 미르보, 용기가 과하지만 그래서 믿을만한 니콜라 네.
누이가 암살자로서 죽고 이런 식으로 엮이게 될지 몰랐으나 어느새 내가 신뢰할 수 있는 부하가 된 지젤 다비, 그리고.
이베리카에서 자신의 손으로 가족을 베어야 했지만, 지금은 내 부관으로서 복수를 하고자 와있는 조제 바셰까지.
나는 저 혁명군 중, 처음부터 나와 함께 했던 이들이 얼마나 남아있을지 생각해보다가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
그 긴 시간동안 내 명령에 따라 싸우며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었는지 내가 감히 헤아릴 수 있을까.
내가 걸어오는 길을 따라 흩뿌려진 숱한 피가.
그 모든 희생에 가치가 있었으리라 믿고 싶다.
파이몬이 처음 나에게 접촉해왔을 때만 해도 어쩔 수 없이 저들과의 거래로 자금을 마련해야 했던 내가, 지금은 연합군 전체를 이끌고 이곳에 와있으니까.
그저 차악으로서 선택했을 뿐인 혁명이, 그들의 공화국이 타협을 선택하여 에리스와 함께 단결과 희망을 꿈꾸고 있으니까.
악마들과 거래한 내 과거의 행적에도 불구하고 나를 신뢰하기로 결정해준 늙은 정치인이,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도록 해주었다.
나는 크리스틴과 내 사람들을 위해 싸워왔으나, 동시에 그것만을 위해 싸워오지 않았다.
나는 청기사의 피를 이었으나, 그와 같은 길을 걷지 않았다.
그 길고도 어려웠던 여정에 마침표를 찍을, 마지막 전장.
내가 걸어온 길과 삶에 가치가 있었는지를 증명할, 마지막 시험이다.
나는 그들의 앞에 서서, 마력을 모아 목소리를 높였다.
“적들이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다. 이제 곧, 악마들에 맞선 최후의 전쟁이 시작된다.”
내 한마디에 전 병력에 긴장감이 퍼져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우리는 연합군. 조국도 다르고, 소속도 다르다. 한때 우리가 같은 전장에서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누고 피를 흘린 적이 있음을 모두가 기억하고 있겠지.”
혁명군, 이베리카 형제국, 게르마니아 제국군, 크라프테 왕국군, 신성 교국, 마도 왕국까지.
“그러나 나는 연합군 총사령관으로서 그대들에게 명하겠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적어도 이 전장에서만큼은 그대들의 소속 따위는 잊어라. 나 또한 혁명군의 총사령관이 아니라, 그대들 모두의 총사령관으로서 그대들을 이끌겠다.”
복장조차 제각각인 이들이 모두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만을 바라보고 있다.
“저 악마들이 우리가 이 섬에 발을 들인 첫 순간부터 우리의 결속을 뒤흔들려 했다. 그러나 저들은 실패했다. 앞으로도 실패할 것이며, 그대들 모두가 하나로서 단결해 저들의 위협에 맞서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최초의 상륙과 안개 속에서 습격받던 나날은 우리를 지치게 했을지 몰라도, 무너지게 만들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위협 속에서도 어떻게든 활로를 찾겠다고 분투하며 우리의 결속은 더 강해졌다.
“제군, 그대들은 지금부터 맞이할 적들이 여태껏 맞서온 어떤 적들보다 강력할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이 자리에 올 것을 자원한 이들이다. 그대들 하나하나가 경외 받아 마땅할 용사들이다!”
그 긴 대륙의 전쟁을, 악마들의 온갖 방해를 이겨내고 모인 이들이기에.
“그러니 제군, 그대들에게 동시에 그만한 책임이 있음을 자각하라. 중앙 대륙의 그 무수한 이들 중 오직 우리만이 이 섬에 가장 먼저 상륙할 것을 허락받았다. 세대와 세대를 거쳐 이어져온 공포에 맞서 승리할 최초의 기회가 그대들 모두의 어깨에 달려있다.”
400년의 고통 속에서야 간신히 얻어낸 기회를 위해, 모든 희망을 짊어진 이들이기에.
“맞서 싸우는 순간, 그대들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라. 그대들의 옆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중앙 대륙 역전의 용사들이며, 전 대륙에서 모여든 연합군의 희망이 바로 그대들이다!”
이 싸움은 어느 한 국가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내가 그대들을 지킬 것이니,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마라! 우리 연합군은 어떤 시련이 와도 우리는 이 시련을 이겨내고 승리를 거둘 것이다. 아니, 우리는 반드시 승리해야만 한다.”
물러날 곳 따위 없는, 단 한 번의 실패조차 파멸로 직결될 전투.
“이곳이 인류의 최전선이요, 우리가 대륙의 방벽이니, 우리는 견뎌내리라!”
내가 외치자, 군사들도 무기를 들어 올리며 따라 외친다.
“우리는 견뎌내리라!”
말발굽 소리가 들려와 시선을 돌리자, 전령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악마들의 군세가 접근 중인 것을 확인했습니다! 30분 이내로 도착합니다!”
그래, 이제 시작이군.
마도 왕국의 마도사들이 문을 완성시킬 때까지 앞으로 삼일.
“전 부대, 전투 배치!”
“혁명군, 위치로!”
“이베리카의 형제들은 중군 후열에 배치한다! 백병전 투입 타이밍은 맡기겠다, 형제!”
“크라프테 왕국은 경보병대와 척후병대를 담당, 포병대는 혁명군과 보조를 맞추도록!”
“게르마니아 제국군은 혁명군과 함께 전열을 구성한다!”
“기병대와 성기사단, 나를 따르라! 양익으로 이동한다!”
각자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가운데, 음울하기 짝이 없는 안개 너머에서 작고 느리게.
그러나 서서히 확실하게.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기계적이고 규칙적인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허리춤에 찬 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 긴 시간 동안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감촉이 마음을 차분하게 진정시켜주는 것 같다.
그 모든 것은 바로 이 순간을 위해.
나는 바로 검을 뽑아들며 소리쳤다.
“명심하라 제군! 우리는 반드시 승리해야만 한다! 그대들의 가족과 조국, 온 인류를 짊어지고 이 자리에 선 자로서 의무를 다하라!”
그리고 그 순간.
피이이잉-
안개 속에서 익숙한 굉음이 울리고-
안개를 뚫고 로켓들이 날아들며 전투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