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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224화 (224/258)

224화. 심연의 성전 - 가장 기나긴 일주일 (6)

적의 신병기라는 기관총은 아군 포병대의 집중포화를 버티지 못하고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최초에 달려들었던 드론들이 쓸려나가자, 파이몬은 미련 없이 물러섰다.

그러나 기관총의 집중사격을 당한 성기사단의 실상은 참혹했다.

신의 뜻을 부르짖으며 선두와 함께 질주하던 알레한드로는 신성력의 보호가 깨져나가고 가장 먼저 기관총의 제물이 된 자 중 하나였다.

백은색으로 찬란하게 번쩍이던 갑주는 군데군데 깨지고 피로 물들어, 음울하기 짝이 없는 보랏빛 하늘에 물들어 그 빛을 잃었다.

“흑흑, 단장님.”

“단장님...”

간신히 살아남은 소수의 성기사 단원들이 슬퍼하는 가운데, 정작 알레한드로는 미소 지은 채 눕혀져 있었다.

뭐가 기뻤을까.

명예를 부르짖으며 부하들과 함께 사지로 뛰어들어, 무수한 부하들과 함께 죽음을 맞이한 최후가...

그에겐 만족스러웠나.

나는 벌써 오래전, 만족스럽게 웃으면서 최후를 맞이한 청기사를 떠올리곤 눈을 질끈 감았다.

개죽음이다.

어떤 신념을 가졌든, 그것이 어떤 명예였든, 그를 믿고 따른 부하들까지 전부 개죽음으로 내몬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이다.

그러나, 이것을 개죽음으로 전락시켜서도 안 된다.

청기사가 최후를 맞이했던 언덕에서 그러했듯.

“우리도 전사자를 수습해서 물러난다. 적의 끔찍한 신병기 앞에서 물러나지 않고 명예로운 최후를 맞이한 이들에게 최대의 예우를 하도록.”

독단적으로 전투 계획을 어기고 파이몬에게 달려든 끝에 개죽음을 당했다고 하여, 이미 죽어버린 자들에게 책임을 덮어씌워 봐야 내부 분열만 가속된다.

어차피 저 신병기의 존재를 모른 채로 누군가는 당해야만 했다. 그게 신성력의 보호조차 없는 혁명군이었다면 얼마나 끔찍한 파멸이었을지는 불 보듯 뻔하지.

그렇다면 설사 그렇지 않다고 한들, 이들의 죽음을 가치 있는 것으로 바꾸는 수밖에.

“살아남은 성기사 중 가장 선임이 누군가?”

얼마 남지 않은 성기사단에게 묻자, 피 묻은 갑옷을 입은 한 사람이 나에게 예를 갖추며 답했다.

“저입니다, 라파예트 후작 각하. 가르돌포 에라모 상급기사입니다.”

“좋아, 에라모 경. 살아남은 성기사단은 혁명군 기병대에게 편입시키겠다. 이견은 없겠지?”

에라모는 나를 잠시 바라보았으나, 이내 정중히 허리를 숙여 보였다.

“저 사악한 악마들의 신병기를 파괴하시던 후작 각하의 모습은 잘 보았습니다. 살아남은 성기사단의 동지들도 알레한드로 단장이 존경하던 후작 각하의 지휘를 거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 악마들에게 복수할 기회를 주십시오!”

“물론, 적절한 기회를 마련해 주지. 하지만 그대들은 존중하겠으나, 앞으로는 내 지휘에 따라줄 거라 기대하겠다.”

그걸 위해 멋대로 굴다가 이미 죽어버린 단장과 성기사들의 명예를 세워준 거니까.

에라모도 알아들었는지, 이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신과 교황 성하, 성녀왕 폐하께 맹세코.”

“그래, 그대들의 신앙과 명예를 믿지.”

파이몬과의 재회.

우리가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신무기를 끌고 나온 빌어먹을 악마는 무수한 피를 흐르게 했지만, 역으로 내 예상이 맞아떨어지고 전투에서 내가 나름대로 활약한 덕분에 내부의 균열은 많이 줄여냈다.

-당신들이 좇는 허무하고 미약한 희망을 위해 죽을힘을 다해보시죠, 피에르. 만약 해내지 못하면...

저들은 아직도 자신들이 절대적인 우위에 있다고 확신하고 있지.

-제가 당신의 자부심도, 선의도, 전의도, 사랑도, 노력도, 희망도, 끝내 절망마저도. 단 한 조각도 남김없이 먹어치워 줄 테니.

내가 지키는 이들을 전부 먹어치우시겠다?

그럴 일 따위는 결코 없다.

어떤 시련이 닥쳐와도, 기필코 전부 쳐부수고 저놈들을 끝장내 주지.

* * *

귀환하고 나서.

간단하게 성기사단의 영결식을 진행한 우리는 곧바로 작전 회의를 열었다.

“이 기관총이라는 물건은 끔찍하기 짝이 없군요. 저런 걸 상대로 어떻게 싸워야 할지...”

그 여유만만해 보이던 게르마니아 제국군의 질 폰 레온하르트가 지난 전투의 보고서를 받아보곤 질린 기색으로 혀를 내둘렀다.

머스켓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연사력과 성기사단의 압도적인 보호마저 전부 뚫어내는 화력.

저런 끔찍하기 그지없는 물건이 전투 중 밀집대형을 이루고 싸우는 전열보병들을 덮치기라도 한다면 어떤 파멸이 닥칠지 불 보듯 뻔하지.

“용기와 기세로 굳건히 공격한다면 능히 뚫어낼-”

“아니. 전부 개죽음당할 걸세, 네 장군. 직접 눈으로 본 내가 보증하지.”

혈기 넘치게 소리치던 니콜라 네 장군은 나에게 말이 잘리자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지만, 그 상대가 나여서 반박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상상조차 해본 적 없던 신병기라는 건 이래서 문제다.

직접 처참하게 당하는 걸 눈으로 보지 않고서야, 기존 전술을 답습하려다가 무참한 결과를 맞이하게 되기 십상이지.

그러나 그나마 다행인 점은...

“흠, 하지만 사정거리는 그렇게까지 길지 않은 걸로 보입니다. 포병처럼 수레에 실어 눈에도 잘 띄는 편이니 라파예트 후작의 판단대로 포병의 집중사격으로 타격하면 꽤 취약할 테고, 아니라도 강선 라이플을 쓰는 척후병이 장거리에서 저격하는 것으로 대응은 가능해 보이는구려.”

“샤른호르스트 장군의 의견이 타당하군요.”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하나같이 수년에 걸친 전쟁을 처절하게 치르고, 그 긴 전쟁 과정에서 전술과 병기의 혁신을 눈으로 목도하며 산전수전 다 겪어온 젊은 베테랑들이다.

그동안 익숙하게 써온 옛 전술이나 병기에만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보고 그에 대응하는 사고를 할 수 있는 이들이라는 거지.

“으하하, 무시무시하구만. 아무래도 우리 형제들은 적진으로 돌진하는 대신 전열을 지키며 뛰어드는 드론들을 상대하는 것이 낫겠어!”

“협조에 감사합니다, 크록스 왕.”

공적인 자리여서 존댓말을 써줘야 하지만, 나는 씩 웃었다.

그래, 최소한 성기사단이 붕괴되고 내 지휘권 안에 들어온 이상.

우리 중에서 공을 탐내며 무모하게 굴 자도, 적을 살피지 않은 채 기준 전술만을 고수하려고 하는 머리 굳은 지휘관도 그리 많지 않다.

설사 있다고 한들 나나 다른 최고 지휘관들의 권위라면 충분히 제어할 수 있다.

“밀집대형을 구성하는 것보단 방어선에 걸쳐 참호를 파고 기관총의 포화를 피해 엄폐할 수 있게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어쩐 일로 데미앙 드 미르보가 회의 중에 자기 의견을 표하나 했더니, 또 그놈의 참호 사랑인가.

하지만...

나는 씩 웃으며 답했다.

“괜찮군. 미르보 사령관의 의견도 채용하도록 하지.”

이 상황엔 과연 나쁘지 않은 판단이야.

나는 데미앙의 얼굴이 확 밝아지는 모습에 보곤 픽 웃곤 다시 시선을 돌렸다.

“확실히 우리가 상정해 보지 못한 위력적인 신병기를 동원했지만, 저들의 신병기에도 분명히 눈에 띄는 약점이 있습니다. 구태의연하게 기존 전술대로 대응하려고 드는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역으로 약점을 통해 파훼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래, 상황은 그리 절망적이지 않다.

최초에는 안개 속에서 적들이 습격해오지 않으며 불안에만 떨었지만, 로켓 폭격에 시달리며 한계까지 피로가 쌓인 연합군은 도리어 초계활동이 이루어져 로켓 폭격에서 해방되자 그 잠깐의 휴식을 어떻게든 누려야만 한다는 걸 깨달았다.

기관총에 성기사단이 쓸려나간 건 뼈아픈 타격이지만, 적의 습격을 예측하고 기관총에 대한 대응을 빠르게 지시한 덕분에 나에 대한 신뢰도는 오히려 크게 올랐다.

로켓 폭격을 통한 방해도, 초계활동에 대한 기습도 실패한 이상 이제 파이몬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단 하나뿐.

“이대로 계속 시간을 끌면 결국 문이 완성되고, 그렇게 되면 중앙 대륙 본토와 이 악마들의 섬이 연결됩니다.”

크리스틴과 리 제독의 해군은 이 와중에도 선발대의 물자가 고갈되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해안을 통한 보급을 수행해 주고 있다.

프랑지아 본국에는 지금 이 순간에도 중앙 대륙 각지에서 몰려온 연합군이 속속들이 집결하여, 문이 열리는 순간 악마들의 섬에 발을 들일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겠지.

“일단 문으로 연결되기만 한다면, 병력의 재보충과 물자는 물론이고 그동안 피해와 피로가 누적된 선발대가 본국으로 일시적으로 물러나 휴식을 취하는 것도 가능해지겠죠.”

적어도 상륙한 순간의 막막함 속에서도 우리는 흔들릴망정 무너지지는 않았다.

단 한 번뿐이지만, 신병기까지 동원한 적의 기습이 오히려 나에게 예측당해 역으로 격퇴 당했다.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고, 고생길이지만 그래도 명확한 끝이 보이는 길이다.

안개 속에서 언제 올지도 모를 습격에 대비하느라 긴장과 피로에 찌들었던 모습도, 제대로 된 교전 한번 치러보지 못한 채 무작정 안개 속을 해매고 다녀야 하는데서 오는 막막함도 사라졌다.

중앙 대륙에서 벌어진 수년의 전쟁을 이겨낸 베테랑 중의 베테랑, 명장 중의 명장들의 얼굴에 걸맞은 자신감과 전의가 돌아왔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적에게 남은 패는 총공세 하나뿐이고, 버텨내기만 한다면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으하하하, 해보자고, 형제!”

호탕하게 웃어제끼는 이베리카 형제국의 크록스.

“음, 크라프테 왕국의 이름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제대로 된 교전 한번은 치러봐야 국왕 폐하를 뵐 낯이 있겠지.”

전의를 불태우는 크라프테 왕국의 샤른호르스트 장군.

“휘유, 해내기만 한다면 우린 전부 전설로 남겠구만. 어찌어찌 줄 잘 잡다보니 이런 기회가.”

프랑지아 왕국에서 도망친 기사에서 용병을 거쳐 제국군 총사령관이 된 질 폰 레온하르트.

“후작 각하의 명을 따라, 기필코 성기사단의 핏값을 받아내겠습니다!”

명예와 복수에 목마른 가르돌포 에라모와 성기사단의 생존자들까지.

“아하하, 살 수 있겠죠? 있겠...죠. 이 데미앙 드 미르보, 라파예트 후작 각하만 믿습니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

...하필 마지막 반응이 네놈이냐. 기운 빠지게.

어쨌거나, 안개 속의 미로를 헤매는 듯한 막막한 고난은 이제 끝을 고했다.

“좋습니다. 초계활동과 지형 파악은 충분히 했고, 적의 전력도 어느 정도 파악되었습니다. 적의 예상 진군로에 정찰대를 늘리는 대신 경비 임무를 맡지 않은 부대는 충분히 휴식을 취하게 하죠.”

이제 남은 건.

“아키텐 제독의 꾸준한 노력 덕분에, 문이 열릴 때까지 버틸 보급품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최대한 많은 식량을 풀어 군사들의 체력과 사기를 북돋아도 좋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쏟아부어 전투에 대비하죠.”

문을 지켜내기 위한 결전뿐이다.

“알겠소.”

“알았네, 형제!”

“맡겨주십시오, 후작 각하!”

지휘관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경례하고 각자의 일을 하기 위해 물러가는 것을 본 나는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이게 최선이겠지.

결국, 문을 여는 것이 승부수다.

그리고 그것의 달성이 눈앞까지 왔다.

그러나.

-문을 건설하는 건 오히려 중앙 대륙에 최악의 파멸을 가져올 거예요.

그건 무슨 말이었지, 그레모리?

어비스 코퍼레이션, ‘러스트’ 사의 대표이사.

이 시점에 와서는 빼도 박도 못할 인류의, 나의 적.

그러나.

그런 그레모리가 400년 전의 성녀라는 건 이미 기정사실에 가깝다고 느끼고 있다.

나는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 펴며, 여전히 내 몸 안을 타고 흐르는 신성력을 느꼈다.

소속과 출신을 제외하고 나면, 적어도 그레모리는 그녀의 말대로 나에게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도움이 되면 되었지.

그렇다면 그레모리의 그 경고도, 단순히 나를 현혹하기 위한 거짓말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

나는 미약하게 차오르는 불안감을 애써 억눌렀다.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적어도 한 가지 확실한 건, 우리가 지금 이 순간 뭐라도 하지 않으면 침공 받고 있는 동방 제국이 끝내 무너져 내릴 거라는 확고한 사실.

그리고 그렇게 무한의 드론을 수급한 파이몬이, 그 광기 넘치는 악마가 중앙 대륙을 내버려 둔다고?

설사 저들의 지도자가 되었다는 바엘이 그러려고 한들, 그레모리가 아무리 뜯어말린들 파이몬은 제멋대로 하고도 남을 자라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모든 것은 크리스틴과 내 사람들, 에리스가 그토록 사랑하는 이 나라를 위해.

그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이 절망으로 넘치는 섬에 발을 들였다.

그렇다면-

나 또한, 숨이 꺼지는 순간까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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