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223화 (223/258)

223화. 심연의 성전 - 가장 기나긴 일주일 (5)

“저, 저자는 설마 파이몬인가?”

파이몬.

피처럼 붉은 머리칼을 길게 기르고 드레스 위에 하얀 가운을 입은, 과도한 개성으로 누구라도 보면 단번에 기억할 만한 외양.

“오오오, 성전에 기록된 악마의 추악한 모습 그 자체로다!”

동시에, 400년 전의 전쟁에서 이미 그 잔혹성을 드러낸 대악마.

그로 인해 신성 교국의 경전에 상세하게 기록되었을 뿐더러, 라파예트 후작의 주장에 따르면 드론의 개발자이자 사령탑이기까지 하다.

인류가 섬기는 신의 대리인들에겐 목숨을 내놓아서라도 노릴 가치가 차고 넘치는 적 그 자체.

“저자가 악마들의 수괴다! 성기사단, 저자를 쳐라!”

알레한드로의 외침에 모든 성기사단이 일제히 방향을 바꿔, 능형진을 짜며 돌격대형을 갖추었다.

“성기사단! 함부로 공격 목표를 바꾸지 말라!”

다급한 라파예트 후작의 외침 따위는 그들에게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

당장 성전에 기록된 대악마를 참살하는 것과 영혼 없는 악마의 꼭두각시들을 짓밟는 것 중 무엇이 중한가?

성기사단의 어느 누구도 그런 걸 착각하지 않았고, 단장의 명에 따라 바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리가 좁혀짐에 따라, 성기사단도 파이몬의 뒤에서 마족들이 발사 준비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저건, 대포인가?”

마치 대포처럼 수레 위에 실린 여러 개의 총신을 가진 무언가가 고정되고, 악마들이 손잡이를 잡아 천천히 돌리기 시작한다.

“사격에 대비하라!”

알레한드로도, 성기사단도 자신이 있었다.

평범한 기사의 마력 방벽조차 머스켓의 총탄 따위는 우습게 막아낸다.

하물며 신성력을 일으키는 것도 모자라 미스릴이 섞인 갑주로 무장하고 사제들의 축성까지 덕지덕지 바른 성기사단이 받는 보호는 감히 평기사 따위에 비할 바가 아니다.

기사들에게는 사형선고 그 자체인 산탄 포격조차 성기사단이라면 일부는 살아남아서 돌진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투두두두두-

여러 개의 총신이 회전하며 끔찍한 소음과 함께 총탄을 빗발치듯 쏟아내기 시작하자 그 두터운 신성력의 보호마저 허무할 정도로 위태롭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사격이 멈추지 않는다.

제아무리 가장 우수한 군마들을 탔다고는 해도, 풀 플레이트 갑주를 입은 성기사단의 느린 속도로 저들에게 닫기 전에 무수한 탄환의 비가 신성력의 보호를 깨는 것이 먼저라는 것을 누구나가 다 깨달았다.

“시, 신이시여.”

“다, 단장님! 어떻게 해야!”

라파예트 후작의 경고를 들었어야 했다.

알레한드로는 이를 뒤늦게 깨달았으나, 방법이 없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등을 돌릴 텐가?

저 빗발치는 총탄 속에서, 등을 돌려봐야 신성력의 가호도 없는 등에 총탄의 세례를 받으며 전부 처참하게 죽어나가는 미래밖에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성기사단이다.

신의 대리인이, 신성 교국의 자존심이, 신과 성녀왕의 이름으로 전장에 선 그들이 자기 살겠다고 겁쟁이처럼 악마들에게서 달아나다가 죽는 비참한 최후는.

그런 최후를 맞이한다면 자신들뿐 아니라, 성기사단 그 자체의 영원한 종말이 되고 말 것이다.

알레한드로는 이를 악물었다가, 랜스를 전방으로 높이 세우며 부르짖었다.

“영광보다 명예를!”

속세의 영광을 쫓는 기사가 아니라 신을 따르는 수도자로서, 무엇보다도 명예를 중요시하는 자들의 구호.

단번에 그것을 알아들은 다른 성기사단이 노래하듯 부르짖었다.

“불명예보다 죽음을!”

빗발치는 총탄의 비 속에 마침내 신성력 장벽에 금이 가는 것을 보면서도, 알레한드로는 말을 더욱 박차며 소리쳤다.

“성기사단, 돌격하라! Deus Vult!(신께서 원하신다)”

“Deus Vult!”

* * *

총신이 회전하며 내는 끔찍한 소음과 함께 빗발치는 총탄.

저게 얼마나 끔찍한 재앙을 초래할 무기인지, 보자마자 알았다.

밀집대형을 이루고 싸우는 전열보병들에게 저런 총탄의 비가 쏟아져 내린다면 그건 파멸 그 자체다.

아니, 그 이전에 마력 방벽도 저런 총탄의 비를 견딜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전 포병대에 하달! 목표, 전방의 적 신병기!”

“예, 옛! 전 포병대에 명령 하달!”

그나마 총보다는 대포에 가까운 형태고, 사거리 또한 적어도 대포보다는 훨씬 짧다.

대포병 사격보다 훨씬 쉽게 처리 가능하겠지.

그러나 그걸로는 늦다.

포대를 돌리고, 조준해서 사격하는 것보다 돌진하는 성기사단이 전부 쓸리는 쪽이 훨씬 빠를 거다.

아니, 이미 성기사단이 쓸려나간 뒤에야 포격으로 처리하는 것을 상정하고 내린 명령이다.

나는 바로 말을 몰며 등 뒤에 매고 있던 활을 꺼내 시위를 걸었다.

마력을 불어넣어 쏘는 활은 기본적으로 머스켓 따위의 사정거리와 비할 바가 아니고-전신을 타고 흐르는 신성력은 오래 전 청기사 최후의 전장에서 날린, 에리스가 축성을 불어넣어 준 화살의 그것을 능가한다.

목표는 총이라기엔 크고 대포보다는 작은 수준의 무기.

그렇다면, 충분히 맞출 수 있다!

시위를 떠난 화살이 신성력과 마력이 뒤섞인 채 불타는 혜성처럼 날아올라, 포물선을 그리며 적의 신병기와 그것을 돌리며 쏘고 있던 마족에게 떨어져 내리고-그대로 폭발하며 병기와 마족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그러는 사이에도 빗발치는 총탄 앞에, 신성 장벽이 무너지고 수십의 성기사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낙마한다.

쓰러진 군마와 동료에게 발이 엉켜 넘어지는 군마와 그 밑에 깔리는 성기사들의 아비규환.

그러나, 그럼에도.

어느 누구도 멈춰 서지 않고 신의 뜻을 부르짖으며 돌진한다.

거리가 좁혀진다.

나는 연달아 시위에 화살을 걸고 쏘아날려, 정체불명의 신병기들을 계속 파괴했다.

성기사단이 조금이라도 많이 살아남은 쪽의 화망을 약화시키도록.

그렇게 일단 빈틈만 만들어 내면-

“아하하하, 저를 봐주시지 않으시다니, 섭하군요!”

“큭!”

어느새 맹렬하게 지면을 질주해온 파이몬이 손톱을 세우며 달려들어, 다급하게 검을 뽑아 가로막았다.

그러나, 그 덕분에 손에서 놓친 활은 저 멀리 내팽개쳐져 날아가 버렸다.

“저를 봐주시죠, 라파예트 후작님. 이제야, 이제야, 이제야 제 초대에 응해서 찾아와주셨는데 제가 아닌 하찮은 잡것들 따위에 시선이 가있으시다니, 어떻게 이렇게 너무하시나요.”

붉은 눈동자가 광기로 희번덕거린다.

제길, 새삼 느끼는 건데 저 낭창낭창해 보이는 몸으로 잘도 이렇게 무식한 힘을 내네-!

“망할 놈이 나태 담당 주제에 또 신병기를 개발하다니, 월권에도 정도가 있지!”

내가 검으로 파이몬의 손을 쳐내며 소리치자, 파이몬은 튕겨나가는 와중에도 다른 손으로 내 말의 목을 그어버렸다.

“칫!”

말이 비명 지르며 쓰러져 내가 뛰어내리자, 파이몬은 우아하게 공중제비 돌며 천천히 착지해 연극배우처럼 두 팔을 벌리며 웃었다.

“아하하하, 저는 이제 더는 나태에 구속된 입장이 아니랍니다. 교만도, 질투도, 분노도, 색욕도, 탐식도, 갈망도, 태만도, 모두가 저의 것. 아하하하하……. 그보다, 알아주시니 기쁘군요. 기관총이라는 겁니다. 어떠십니까, 라파예트 후작님? 제 새로운 발명품에 대한 소감은?”

“끔찍하군.”

태만 하나만 담당할 때도 ‘진정한 태만의 실현’이라는 헛소리를 하며 드론을 만든 미친놈인데, 그나마 걸려있던 고삐마저 죄다 풀려버렸다니.

이렇게 한가하게 대화하는 사이에도 성기사들의 비명이 울려 퍼지고 있다.

나는 흘긋 시선을 돌려, 더는 내 사격 지원조차 받지 못하는 성기사단이 시체의 산을 쌓아올리는 것을 보았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돌진한 끝에 적진에 도달하여 기관총을 쏘던 악마들을 쳐부수기 시작했지만, 상당수는 드론들에게 가로막히고-투두두두두-악마들은 기관총을 난사해 성기사단과 싸우고 있는 드론들을 싸잡아 그대로 갈아버리기 시작했다.

“칫!”

파이몬이 바로 달려들어 격돌하기가 무섭게 내 팔이 찌르르 울린다.

이 망할 놈, 이베리카에선 그래도 처음엔 좀 놀아주더니 이젠 아예 사정 봐주지 않고 진심으로 나오나!

“또, 또, 한눈을! 저를 봐주십시오, 피에르. 저를, 저를 봐달라고요!”

“난 네놈에게 이름을 허락한 기억이 없는데. 그보다, 못 본 사이에 많이 망가졌군.”

나는 검을 고쳐 잡으며 보랏빛의 마력 회로가 거미줄처럼 새겨진 채 번쩍이는 파이몬의 뿔을 흘긋 보곤, 반대편의 잘려나가 버린 뿔을 보곤 웃으며 덧붙였다.

“뿔 하나 잘렸다고 이 꼴이 된 걸 보니, 나머지 하나도 자르면 어떻게 될지 기대가 좀 되긴 해.”

내 말을 들은 파이몬은 두 손으로 뺨을 덮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분노? 아니…….

“아, 아아아, 저도, 기대가 되는군요. 당신에게 굴욕을 당하던 때의 짜릿함은 정말이지…….”

……이거 진짜 제대로 미친놈이네?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가운데, 파이몬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도 기대가 된답니다. 당신의 가장 소중한 이들을 당신의 눈앞에서 범하고, 찢어버릴 때 당신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너무, 너무, 너무, 너무, 기대 돼-”

이번에 뛰어든 건 나였다.

“아하하하, 그래요, 바로 이거예요! 저를, 저만을 봐주시죠, 피에르! 이 음울한 섬에서 오직 저만을 증오하고, 저만을 저주하고, 저에게만 살의를 뿜어주세요! 다른 누구도 아닌 이 제가 당신의 대적자! 당신의 적!”

파이몬은 내 검을 쉴 새 없이 쳐내면서도 입을 나불거린다.

그리고 나는 확신을 얻었다.

이베리카에서, 분노에 차서 전력을 다한 파이몬은 상대하기 버거웠다.

그러나, 지금은.

내 검과 파이몬의 손톱이 다시 맞부딪히고, 서로의 거리가 조금 벌어진다.

파이몬이 날 듯 뛰어 물러나는 걸 보고, 나는 검을 고쳐 잡으며 말했다.

“너, 생각보다 약하군?”

바르바토스를 상대로 싸워보지 않았다면, 이번에도 고전했을지도 모르겠다.

“바르바토스와는 비교조차 안 돼.”

그러나 악마 중에서도 최강에 근접한 자와 싸웠다.

인간이 감히 따라갈 수 없는 압도적인 힘을, 나보다도 압도적인 전투 경험과 센스를 갖춘 자와의 사투.

그리고 이베리카에서 파이몬과 맞선 뒤 넘나든 무수한 사선과, 그에 비례하여 에리스와 그레모리에게 받은 축복과 치유로 몸속에서 증폭될 대로 증폭된 신성력.

전신을 타고 내달리는 마력까지.

“지금의 나라면, 네놈을 쓰러트리는 것도 가능해 보이는데.”

파이몬은 분노하기는커녕, 희열에 차서 광소했다.

“아아, 아아아. 일개 인간이, 일개 귀족이, 일개 기사가, 피에르, 당신이 여기까지 도달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요. 누가 감히 이걸 예상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야말로 이레귤러, 이레귤러 그 자체! 만에 하나 이 체제가, 어비스 코퍼레이션이 파멸한다면 그건 분명 당신 때문이겠지요! 가히 인간의 용사라고 불릴만합니다!”

나는 저 뒤에서 들려오는, 데미앙 드 미르보의 외침을 듣고 픽 웃었다.

“아니.”

이내 지축을 뒤흔드는 포성이 터지고-

굉음이 나와 파이몬의 머리 위를 지나가, 착탄하며 폭발을 일으켰다.

나는 흘긋 시선을 돌려, 드론들과 성기사단을 찢어발기던 기관총과 악마들이 금속과 고기 파편으로 산산조각 나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착각하는데. 난 용사가 아니라 지휘관이다, 파이몬. 내가 아니라, 우리가 너희를 파멸시킨다.”

파이몬은 히죽이죽 웃더니, 나에게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과연, 사과드립니다, 피에르. 저 또한 감히 당신을 인간이라 깔보지 않고, 아주 성심성의껏 최선을 다해 상대해 드리도록 하죠.”

“아니, 솔직히 예전처럼 오만하게 굴고 방심해 줘야 상대하기 편한데. -이렇게!”

나름 농담을 던지며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지만, 파이몬은 그것을 쓸데없이 우아한 동작으로 피하고 공중제비 돌며 다시 거리를 벌렸다.

나는 다시 달려들려고 했지만, 파이몬의 뿔에 새겨진 보랏빛의 회로들이 번쩍이고 안개 너머에서 드론들이 떼 지어 나타나서 멈춰서야만 했다.

“후후, 후후후. 공교롭게도 저 또한, 기술자이자 지휘관. 바르바토스처럼 압도적인 힘으로 당신을 즐겁게 해드릴 순 없지만, 두뇌와 기교로서 당신을 즐겁게 해드릴 순 있답니다.”

“그 허접하기 이를 데 없는 지연전이 나를 즐겁게 해주려는 노력이었다 이거지?”

천천히 물러나는 파이몬에게 일부러 이죽거리자, 악마는 지극히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당신들이 좇는 허무하고 미약한 희망을 위해 죽을힘을 다해보시죠, 피에르. 만약 해내지 못하면…….”

붉은 빛의 악마가, 감히 형언할 수 없는 광기와 집착으로 눈을 빛내며 선언했다.

“제가 당신의 자부심도, 선의도, 전의도, 사랑도, 노력도, 희망도, 끝내 절망마저도. 단 한 조각도 남김없이 먹어치워 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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