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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혁명에 단두대는 필요없다-221화 (221/258)

221화. 심연의 성전 - 가장 기나긴 일주일 (3)

결정에서 실행까지의 시간 지연 같은 건 거의 없었다.

이미 군사들은 한계에 달했고,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결단과 상황 변화에 절박했으니까.

회의에서 내가 말한 그대로 의사결정이 이루어졌고, 마지막 보초를 선 병력들만 잠시 쉬게 해주는 정도의 조치만 취한 채 그대로 안개 속으로 나섰다.

지금까지의 전략을 교체하고 당일에 바로 행동에 나섰다.

나는 최소한 이렇게 신속한 조치로 로켓을 퍼붓던 적들과 한 번쯤은 조우하게 될 거라고 기대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의 실체를 파악하고 미약하나마 첫 전과를 올리고 나면 군사들도 조금은 울분을 풀고 희망을 가지게 될 테니까.

그러나 그 기대가 무색하게도, 우리는 긴 시간 동안 안개 속을 탐사하고도 무엇과도 조우하지 못했다.

기세 높던 혁명군의 베테랑들조차 그저 습하고 우중충한 보랏빛 하늘과 자욱한 안개 속을 헤매이듯 탐사하며 돌아와, 게르마니아 제국과 크라프테 왕국군이 교대하여 출정하는 것을 보곤 기진맥진한 몸을 눕힐 뿐.

나는 답답한 마음을 어떻게 하지 못한 채 지휘 막사로 혁명군에서 가장 유능한 지휘관들을 불러냈다.

“미르보 사령관, 어떻게 생각하지?”

“예, 예? 뭘 어떻게…….”

평소 같으면 원래 이런 놈이겠거니 했을 태도조차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저놈들은 계속해서 로켓 포격을 퍼붓고 있었어. 그런데 뭘 어떻게 해야 우리가 초계로 전환했는데 그놈들과 마주치지도 못할 수가 있는 거냐고.”

“그, 그건 저도 잘…….”

“하…….”

데미앙 놈에게 기대한 내가 멍청이지.

“……니콜라 네 장군. 장군의 생각은?”

“크흠, 송구하나 저놈들은 안개를 뚫어보는 것은 아닌지…….”

안개를 뚫어 본다.

악마의 마력이 보랏빛이지.

마침 이 안개도 보랏빛이고. 만약 사실이라면 이거만큼 답 안 나오는 상황도 없겠군.

어이가 없어서 한탄만 흘러나와, 나는 그의 뒤에 있던 지젤 다비를 지목했다.

“다비 중령.”

“옛, 후작 각하!”

대놓고 사령관 대신 그 휘하의 참모를 지목했는데, 도리어 자신의 차례가 끝났다고 안도하는 데미앙 놈의 표정이 내 짜증을 더한다.

“그대 생각은 어떻지?”

지젤은 조금 머뭇거리며 니콜라 네의 눈치를 살피더니, 내 표정을 보곤 이내 자세를 바로 하며 답했다.

“저는 악마들이 안개를 뚫어보는 것은 아닐 것이라 추정합니다!”

“이유는?”

“로켓 폭격의 정밀성과 시차, 그리고 행동입니다. 저들이 안개를 뚫어볼 수 있다면 로켓 폭격은 더 정밀해야 했으며, 우리가 경계태세를 해제하는 걸 관측할 수 있을 테니 더 빈번해야 했고, 아군의 포격이 개시되면 바로 빠지는 행동은 저들도 우리 포격의 정밀성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나는 그제야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걸 느꼈다.

나도 추측 정도는 하고 있던 사항이지만, 신뢰할 만한 부하의 입으로 듣는 건 약간이나마 확신을 더해준다.

“그래, 타당하군. 니콜라 네 장군, 다비의 의견에 동의하나?”

“그, 그렇, 군요…….”

니콜라 네는 떨떠름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고, 미르보는 시선을 받기가 무섭게 열심히 끄덕여 보였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어. 저들이 안개 너머를 뚫어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렇게 빠르게 우리 행동에 맞춰서 행동을 바꿀 수 있는 거지?”

“송구합니다, 후작 각하. 지금으로서는 판단할 재료가 부족하여 아직…….”

별로 기대한 건 아니지만 지젤 다비조차 만족할 만한 답을 내지 못하자 답답함만 밀려온다.

내 행동을 예상했다?

우리가 시간차를 두고 이어지는 폭격을 4번 맞은 뒤 바로 안개 속에서 초계활동을 벌일 걸 예상해서 빠졌다라…….

그런 것이 가능하다면 적 지휘관이 완전히 내 머리 위에서 춤을 추고 있다는 소린데.

그딴 게 말이 돼?

아니면 사실은 내가 악마 놈들에게 완전히 놀아날 정도로 무능한데, 나만 그걸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건가?

나는 한탄하며 미르보와 네, 그리고 다비의 눈가에 거무죽죽하게 내려앉은 피로를 보았다.

이들을 붙잡고 있는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지.

“그래.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지만, 그래도 최소한 초계 활동이 이어지는 동안 대기하는 군사들은 잠시나마 쉴 수 있겠지. 이만 해산. 그대들도 쉬도록 하게.”

“옛!”

정말이지 막막하기 짝이 없는 전투야.

* * *

일단 잠자리에 들기는 했지만 눈을 붙여도 좀처럼 편히 쉴 수가 없었다.

……어쩌면 무모한 결정을 내린 것이 아닐까.

대륙에서 악마들에 맞서 싸우는 것조차 쉽지 않았는데, 적들의 근거지인 이 섬에서 악마들에 맞서 승리한다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가?

고전할 거라는 각오 정도야 했지만, 이 정도로 속수무책인 상태에서 시달리기만 하는 사태는 예상하지 못했는데.

대체 어떻게 해야, 이 난국을 타개할 수 있을까.

만약 크리스틴이 여기에 있었다면, 그녀는 내가 생각하지 못한 지혜를 빌려주었을까.

만약 에리스가 여기에 있었다면, 이런 상황에서조차 군사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었을까?

라파엘 발리앙이라면. 크라프테의 그 대왕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떤 식으로 대응할 수 있었을까.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무는 사이.

나는 문득 눈을 떴고, 익숙한 몽롱한 감각을 느꼈다.

불현듯 깨달음을 얻어, 자연스럽게 헛웃음이 흘러나온다.

“……제길, 그 생각을 못 했군. 그대들이 어떻게 우리를 농락하고 있는지 아주 잘 알겠어.”

자조적인 미소가 절로 흘러나온다.

악마들은 안개를 뚫어볼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 대비하기 위해 정찰 활동을 하거나 움직일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수면을 취하고, 생각을 하고, 욕구를 품으니까요.”

내 눈앞에 서 있는 수녀복의 서큐버스가 나직하게 말했다.

하…….

그래.

애초에 전제부터가 잘못되었다.

어비스 코퍼레이션에 있는 서큐버스가 몇이나 될까? 잘은 모르겠지만 최소한 그레모리 혼자는 아니겠지.

그 무수한 서큐버스들이 우리의 꿈속에 녹아들고, 우리 무의식을 읽어들이는데…….

전술이나 작전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지?

이건 자각조차 없이 군사기밀을 다 흘리고 다니는 상태와 다를 것이 없잖아.

나는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섬을…… 떠나지 않았군, 그레모리.”

그레모리는 금빛의 눈동자로 나를 보며 흐릿하게 미소 짓더니 답했다.

“나름대로 관대한 제안을 해주신 것은 감사하지만, 후작님께는 어비스 코퍼레이션을 절멸시킬 능력이 없으니까요.”

잘도 말하는군.

우리는 이미 이 섬에 상륙하여 교두보까지 마련했는데.

……그런 허세를 해볼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지만, 의미 없는 짓이겠지.

“그래, 과연 그대들이 만만하지는 않더군. 그래서?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지?”

그레모리는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

“후작님을 상대하고 있는 건 파이몬이에요.”

“아, 그래. 어째 그러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 망할 붉은 악마가 숙청당하지 않은 건 무척 아쉬워. 그대가 책임 전가한 탓에 죽어주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레모리는 쿡, 하고 작게 웃더니 이내 표정을 고치고 말했다.

“물러나세요, 후작님.”

“여기까지 와서? 이게 자살에 가까운 임무라는 걸 알고도 와 있는 자들이다. 우리도 물러날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을 텐데.”

그레모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문을 건설하는 건 오히려 중앙 대륙에 최악의 파멸을 가져올 거예요.”

……우리가 뭘 하고 있고, 뭘 목표로 하고 있는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거지.

어쩌면 로켓이 건설 중인 문에 적중한 것도 그저 운 없는 우연이 아니라, 애초부터 그게 목표였는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문을 건설하는 것이 오히려 최악의 파멸이다?

꺼림칙한 기분이 몰려온다. 문은 악마들이 건설한 동방 제국의 문에서 입수한 부품들을 분석해서 개발되었다.

엘시온 대공과 동방 제국의 군대가 분투해서 이룩해낸, 간신히 잡은 희망.

그러나 만약 그게 악마들의 의도라면?

우리가 지금 매달리고 있는 유일한 희망이, 사실은 희망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이 머리를 들고 일어선다.

그레모리를 어디까지 믿을 수 있지?

아니, 믿는다고 해도.

나는 자조적인 미소를 흘렸다.

“내가 그대의 말을 믿고 물러난다고 치고. 내가 이 원정 실패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쫓겨나는 걸로 남은 자들이라도 살린다고 치고. 동방 제국이 무너지고 무한한 드론을 확보한 그대들이 중앙 대륙을 가만히 둘까?”

그레모리는 잠깐 멈칫했지만, 이내 차분하게 답했다.

“노력은 해볼 거예요.”

“악마의 자비심을 기대하고 400년 만에 처음 맞이한 기회를 제 손으로 버리고 물러나라니. 적어도 내가 아는 악마들은 확실히 가능한 힘을 쥐고도 가만히 있을 만한 족속들이 아니야. 아닌가?”

“최소한 후작님이 소중히 여기는 이들과 함께 한 세대의 평화를 누리고 가실 정도의 시간은 주어질지도 모르죠. ……제가 책임지는 이들을 데리고 섬을 떠나라고 한 후작님의 제안과 이 제안이 어디가 다른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레모리의 마지막 말은 꽤 통렬하게 와닿아서,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왜 이런 걸 이제까지 잊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언제나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싸워온 것이 아니다.

크리스틴을, 내 세계를 지키기 위해. 숨이 꺼지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한다. 오직 그것뿐이었는데.

“그래. 사과하지, 그레모리. 그리고 거절하겠다. 그대가 이 섬을 떠나지 않은 것과 같은 이유로.”

나는 그레모리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고-

그레모리는 부드럽게, 마치 사랑스러운 이를 보듯 미소 짓는 것으로 내 예상을 완전히 깨버렸다.

“라파예트 후작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후작님을 축복해 드려도 될까요?”

나는 허리춤에 검이 있는 걸 확인하고, 검에 손을 댄 채 물었다.

“만약 내가 꿈의 세계에서 그대를 베어버리면 어떻게 되지?”

그레모리는 다시 한번 웃으며 지극히 여상한 투로 답했다.

“정신이 죽으면 육체도 죽죠.”

“……이 상태로도 괜찮다면.”

그레모리는 웃으면서 언제라도 검을 뽑을 태세인 나에게 다가와서, 내 이마를 향해 가볍게 손을 뻗었다.

나와 내 군사들의 동향을 살피며 적에게 보고하고 있을 서큐버스에게서 악마 특유의 보랏빛 마력이 발해지는, 그런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어쩌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400년 전의 성녀인 반쪽짜리 서큐버스는 금빛의 신성력을 뿜어내기만 했고, 이내 나에게서 조금 떨어져서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는 불가능을 갈망하는 자를 사랑합니다, 라파예트 후작님.”

“애석하지만 내 사랑은 일인실이야.”

그레모리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쿡쿡 웃더니, 이내 차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저건 무슨 눈빛이지.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어디선가 이런 눈빛을 본 적이 있는데, 잘 떠오르지 않는다.

악마가 말했다.

“후작님께 신의 가호가 있기를.”

나는 어이가 없어서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뭐, 그대에게…… 젠장, 뭐라고 해야 돼?”

그레모리는 미소 짓더니, 그대로 흐릿하게 사라져 갔다.

그녀가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에야, 내가 덧붙였다.

“……그대에게도 신의 가호가 있으면 좋겠군.”

내 의식은 그대로 흩어져, 그레모리가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 * *

“라파예트 후작 각하.”

“음.”

나는 나를 부르는 부관의 부름에 눈을 떴다.

“깊이 주무시는데 송구합니다만, 출진할 시간입니다.”

피로에 찌들어 탁하고, 초조하던 머리가 맑아진 것이 느껴진다.

얼마 만에 푹 잤는지 모르겠는걸.

몸에 활력이 돌고 머리가 원활하게 돌아가기 시작하고서야, 나는 내 부관을 보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고맙네, 바셰 소령. 크라프테전에서 활약한 그대가 내 부관이라니 이거 꽤 호사인걸.”

조제 바셰.

이베리카에서 가족이었던 드론을 제 손으로 베어버리고, 크라프테군의 매복에 포로로 잡혔던 남자는 두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미소 지었다.

“기억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솔직히…… 처음 부관으로 배치될 때는 내심 기대했었는데요.”

내 입장에서야 수많은 부하들 중 하나지만, 그로서는 나를 잊을 수 없었을 텐데.

그가 내 부관으로 처음 붙을 때만 해도 머릿속에 생각과 중압감이 가득해서 알아봐 주질 못했다.

어쩌면 이 빌어먹을 섬의 영향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래, 실망했겠군. 미안하네. 이제야 좀 눈앞이 트이는 느낌이야.”

나는 바셰의 어깨를 툭툭 쳐주며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제국군과 크라프테군은 무슨 일 있었다고 하나?”

“아니요, 마지막 전령까지는 별반 조우는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 그러면 미르보 사령관에게 전달해 주게. 이번 정찰에서는 전투가 있을 테니, 최대의 대비를 하라고.”

“예?”

바셰가 얼떨떨한 얼굴이 되어서, 나는 픽 웃으며 덧붙였다.

“라파예트의 감이라고 해둬.”

“아, 알겠습니다.”

저들은 서큐버스들을 통해 우리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로켓 폭격을 견디다 못해 처음 출진할 때만 해도, 대충 우리가 행동을 바꿨다는 것만 알았을 테니 준비가 안 되었겠지.

하지만, 제국군과 크라프테군이 다녀올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 다시 내가 움직일 차례라는 걸 알고, 상대는 파이몬.

파이몬은 나를 알고, 나는 파이몬을 알지.

나는 몸을 타고 흐르는 신성력을 느끼며, 주먹을 쥐었다.

그놈은 나를 만나러 온다.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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